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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학문과 이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변혁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해준다. 세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절차와 방법론이 필요하다. 이론적 정확성과 엄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형식적인 면에만 치우친다면 변혁을 위한 핵심적인 요소를 놓치기 쉽다. ‘공리공담’이란 말은 실천적 측면을 상실한 이론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과제를 ‘해석에서 실천’으로 전환시킨 것도 학문과 이론이 추구해야 할 과제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회과학’은 구체적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실천적 해결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이 ‘해석’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면, 19세기 이후 등장한 사회과학의 과제는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명증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사회과학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 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발간된 대표적인 사회과학 서적인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회과학의 기본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과학적 이론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목표로 한다. 이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정세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의미하며, 또한 특정한 구체적 시기와 구체적 정세하에서 어떠한 계급의 운동이 다가오는 진보의 주요한 원동력이 될 것인가를 이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70년대까지 사회과학의 역할은 이러한 과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해방 이후 사회과학은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한 학자들의 주도로 몰역사적이며 반민중적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60-70년대 사회과학의 핵심적 주제는 ‘근대화론’이었다. 한국 사회가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모형인 서구의 산업사회로의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근대화론을 중시한 주류적 사회과학은 권력과 체제를 옹호하는 인식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사회과학의 성격을 규정지었던 것은 맹목적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한 제약, 미국적 이론의 무비판적 수용, 과거의 실상을 은폐하려는 반역사적 세력의 존재라는 조건이었다. 사회과학은 권력자와 권력구조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역할에 충실했으며 권력의 구조적 현실에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은폐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은 사회과학의 성격을 변모시켰다. 정치적 좌절과 80년 <광주항쟁>의 비극적 현실은 체제옹호적인 사회과학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였고 시대의 반영이었다. 사회과학에서의 변화는 이론적 차원에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중화학 공업이 발전되고 계급적 갈등 구조가 명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세계교역체제의 확산 및 미국의 해외정책에서도 자유화와 민간정부로의 권력이전과 같은 유화적 조치가 중시되는 정세가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한국의 분단현실에 대한 자각이 급속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계급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사회과학의 비판적 기능이 강화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80년대 사회과학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대표적인 사회과학의 논쟁 주제였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학문과 이론이 현실과 어떻게 조우하고 형성되는가를 추적한다. 이 시대의 학문과 이론은 실천과 철저하게 통합된 변혁의 논리였다.
2. 80년대 사회과학의 성격과 특징
80년대 사회과학은 변모된 사회경제적 조건에 더해 80년 광주항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가져온 압도적인 파장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관점과 정치경제학적 사고 그리고 한국현대사에 대한 급속한 고양을 특징으로 한다. 과거 사회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은폐기능을 반성하고 변혁을 위한 이론적 방향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구성과 계급구조에 대한 분석이 확산되었다. 이론적 반성과 사회적 변화에서 전개된 80년대 사회과학의 성격의 특징을 박현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한 사회의 기본적 성격과 발전단계를 밝힌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그 사회내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를 기초로 기본적인 내적모순과 외적모순을 가려내고, 이것의 상호관련과 주요 모순과의 전화를 밝힘으로써 안으로는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보다 진보적인 것으로 만들고 밖으로는 민족간의 불평등 관계를 청산하려는 데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변혁적인 사회과학에서 제시하는 과학적 방법의 핵심적인 범주는 크게 네 가지(계급성, 객관성, 총체성, 특수성)이다. 먼저, 계급성은 철학이나 사상은 특정 계급의 세계관이며 그 자체가 계급적 존재의 반영이라는 전제이다. 본질은 파악한다는 것은 이러한 계급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객관성은 ‘존재와 의식’의 문제로 인식이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과정의 외부에 존재하는 즉 물질적인 것(자연과 사회)과의 관계이다. 객관성은 ‘개념과 실재의 통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관념만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와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하는 실용주의는 오류를 안고 있다. 셋째, ‘총체성(전체성)은 가장 핵심적인 범주이다.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되기 위해서는 전체의 한 계기로서 파악되어야 하며 다른 관련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상은 본질이 현상화 한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며, 법칙이란 이러한 현상의 법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넷째, ’특수성‘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으로서 본질적 관계 속에서 포착된 구체적이고 총체론적인 현상으로서의 현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사회과학의 연구 주제는 ‘계급구성에 의한 자본주의적 인식’, ‘민중의 개념 정립’, ‘계급구조(자본가, 중간층, 노동자) 연구’, ‘농촌-농민문제’, ‘도시빈민문제’, ‘국가기구의 성격’ 등과 같은 것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문제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견해도 폭발하였다. 하지만 특정한 이론이나 견해에 따른 이론 전개는 편협한 결과를 도출하기 쉽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된다. 한 사회학자의 권고는 그런 점에서 경청할 만하다. “사회과학자는 그가 채택하는 방법론에 구애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실판단에 유용하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론적 시각을 주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을 고양시켜야 할 것이며, 사실판단을 지배하는 모든 가치판단의 권위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할 것이다.”
80년대 사회과학의 또 다른 특징은 ‘민중 사회학’의 활성화였다.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과거의 사회이론이 엘리트 주도의 이론을 전개하였다면, 민중의 의식과 역량의 성장에 따른 변혁 주체로서 민중이 강조된 것이다. 변혁적 실천을 위한 민중사회학의 역할을 위해서 필요한 이론적 전략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①사회구성 내지 사회구조를 민중의 계급구성에 기초해서 파악하는 방법이 요청된다. ②각계급 내지 각계급내의 구성집단을 생산수단의 소유 및 생산과정에 노동을 투입하거나 통제하는 관계에 대한 직접 내지 간접적인 사회적 거리에 따라 구체적으로 객관적인 방법으로 규명한다. ③민중을 계급연대 및 계급동맹의 맥락에 따라 개념규정을 할 수 있다. ④각 계급에 대한 분석에는 그 계급의 주관적 측면도 객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⑤제국주의 세력과 그 매개 지배세력의 성격, 지배역량 및 기능작용도 모두 객관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⑥이론화 전략은 궁극적으로 민중에 기초하여 사회를 재구성하는 전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80년대의 사회과학은 80년대의 민중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운동권에서 이루어진 사상논쟁이 학계로 이전되어 심화 발전되었고, 학계의 이론적 논쟁이 운동권의 실천논리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80년대 사회과학의 이론 논쟁이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은 민주변혁과 관련된 논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변혁적 입장의 차이에서 두 개의 대표적인 사회구성체에 관한 논쟁적 이론이 제기된다.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은 ’C-N-P’논쟁 이후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관점에서 충돌했고, 본격적인 2차 논쟁은 NL그룹의 확산이후 NL입장에서 제기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후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으로 전환)과 CA 중에서 특히 ‘PDR’중시하는 그룹(PD로 진화)의 입장을 대변하는 <식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사이의 논쟁이었다.
'C-N-P' 논쟁에 이어 ‘반외세자주화’를 강조하는 NL(민족해방)진영이 등장하고, 이에 대응하는 ‘반제반독점’ CA(제헌의회)진영이 대립하면서 변혁의 논쟁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기초한 사회구성체 논쟁이 심화된 것이다. NL의 변혁적 입장을 정리하면 한국사회의 성격을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적 지배’로 규정하면서 ‘민족해방’을 역설하였고 변혁을 위해서는 남한을 넘어선 한반도 전체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토착권력은 총체적으로 외세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결과로 한국 사회의 반봉건적 성격이 유지되고 있다고 보았다. 민족모순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사회 문제 해결에 ‘주체사상’의 핵심원리를 수용하였고 ‘반미자주화와 반파쇼민주화’의 조국통일과 대중노선을 중시하였다.
반면 CA는 식민지적 규정에 대립하여 ‘신식민지’라는 규정으로 대체하였고 토착국가세력의 독자적인 물적토대를 인정하였다. 토착국가권력은 ‘외세에의 예속’에서 주어지기보다는 독점자본가 계급의 계급적 지배도구‘라는 점에서 주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NL은 CA가 혁명의 일반적 형태, 즉 ’혁명적 국가권력의 소비에트적인 형태‘ 및 성격에만 집착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적 변혁과정의 특수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렇듯 80년대 사회과학의 핵심 주제는 80년대 사회운동이 추구했던 한국적 상황에서 변혁의 목표, 주체, 대상의 정교화와 ‘사회구성체’ 이론을 적용한 한국 사회의 성격 분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3. 80년대 사회과학의 논쟁적 주제 : <사회구성체론>
사회구성체는 ‘지배적인 경제적 기초와 그 상부구조를 갖는 사회’라는 뜻으로, “사회구성체로서 한 사회를 인식한다는 것은 개개의 특정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그 사회의 제 변화를 합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핵심적인 경제적 형식인 생산양식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며 이것을 바탕으로 상부구조와의 조응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적 관계를 결정짓는 핵심은 경제적 관계이다. 경제적 관계는 생산양식으로 표현되며, 생산양식은 내용으로서의 생산력과 형식으로서의 생산관계의 통일체라 할 수 있다. 생산양식은 고정되고 완성된 정태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동태적 방식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산양식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직접 생산자인 노동자와 생산수단 간의 관계’와 ‘직접적 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봉건제적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전환되는 ‘본원적 축적’의 핵심은 노동자의 생산수단에서 분리와 비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전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본관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노동자를 그의 노동 제 조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한편으로는 사회적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적 생산자를 임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과정-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사회나 국가의 모순을 이해하는 정통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을 반박하며 각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종속이론’인데, 이것은 제3세계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반드시 서구국가에서 일어나는 자본주의적 발전단계와는 다른 형태의 ‘중심-종속’ 관계가 형성한다는 것이다. <주변부 자본주의론>도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며, 이를 반박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정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을 적용시킨 관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대근 교수에 의해 제기된 <주변부 자본주의론>은 “제3 세계의 자본주의화가 서구와는 달리 주변부적, 식민적 상황하에서 왜곡되게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며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간의 외적인 민족 모순이 일국 자본주의 내부 계급모순과 중첩되며 나타남으로써 제3세계 주변부 사회를 단순히 ‘자본-임노동’ 관계의 대립·투쟁을 중심으로 한 도식으로 해명할 수 없고 별도의 인식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변부 자본주의>은 ‘중심-주변’관계라는 외적모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내적인 계급 모순에 대한 인식을 모호하게 처리했으며, 노동계급 대신 도시빈민, 주변계급 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오류를 범했을 뿐 아니라,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을 환원시키는 ‘민족모순 순환론적’ 경향을 배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현채 교수가 주장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외세의 영향을 인정하지만 전반적 위기 속에서 팽창한 관료기구의 확산에 주목하였으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독점자본과 국가의 유착으로 국가의 통치가 강화된다고 본다. 특히 한국사회를 “미국원조의 삭감과 유상원조로의 전환에 따른 한국자본주의의 재생산과정 상의 위기와 외국자본의 광범한 진출, 독점화의 수준이나 국가와 독점자본의 구조적 결합상태”로 보며 변혁의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를 중시한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서구적 모형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는 지적과 함께 국제적 수탈구조에 대한 인식과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되는 민중 수탈에 대한 모순을 간과할 수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1차 사회구성체 논쟁은 <주변부 자본주의>에 대한 “한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한 사적유물론적 인식, 한 사회의 내부관계와 구조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인식으로부터 일탈한 이론이며, 또한 변혁적 세계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포퓰리즘의 아류이고 그 이론의 계급적 당파성이 모호하며 결국 소시민적 이론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함께 <주변부 자본주의론>이 약화되고 기각되면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구체적 현실 속에서 엄존하는 외세에 의한 종속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2차로 벌어진 <사회구성체 논쟁>은 ‘한국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외세’에 의한 착취와 수탈을 강조한 NL의 그룹의 영향으로 한국사회의 봉건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한국 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위해서는 외세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투쟁의 목표라고 강조된 반면 제국주의적 민족모순보다는 국가내의 파쇼정권과 이와 결탁한 독점자본를 철폐하지 않는 한 진정한 민족국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충돌한 것이다.
NL그룹과 관련된 <식민지반자본주의(봉건주의)론>은 “한국사회는 60년대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관계가 급성장함에 따라 반(半)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나, 외래 독점자본 및 매판자본의 지배하에서 재생산된다고 하는 본질적 성격이 불변하였다는 점에 식민지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한국사회는 ‘기본생산수단의 외국독점자본과 매판세력에 집중, 재생산과정의 대외의존성, 외국독점자본과 매판자본에 의한 민중의 가혹한 수탈’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성격’을 여전히 갖고 있으며, ‘농촌에 온존되어 있는 지주-소작 관계, 자본주의적 관계의 기형성과 근대성’의 측면에서 ‘반자본주의적 성격’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립되며 PD그룹과 친화적인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새로운 신식민지 종속하에서도 자본주의가 특수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현실을 창조적으로 해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종속의 외적요인보다는 내적인 계급적 지배요인이 중점이 된다는 것이다. “종속이 단지 외적요인이 아니라 자본축적, 재생산의 내적조건으로 전화되기 때문이며 또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에의 종속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재생산”하는 독점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보증해주고, 대내적으로 예속독점자본의 축적기반을 확보해주기 위한 국가 형태로서 신식민지 파시즘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파시즘적 국가독점사회로 본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NL의 통일운동을 강조한 ‘민족모순’의 해결에 관한 입장보다는 남한사회의 민주적 변혁을 우선하는 “선 남한변혁 후 통일‘에 방점을 두게 하였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신식국독자)은 80년대의 한국 경제에 대해 ‘독점강화/종속심화’라는 명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다양한 경제 지표를 들어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외형적으로는 ‘종속완화’의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종속은 심화되고 있고 그에 따른 결과로 독점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점의 강화는 ‘종속의 심화’ 속에서 발생한다. 당시 남한의 경제는 금융적 종속, 기술적 종속, 대외의존적 무역구조의 기본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경제는 과거 60-70년대 경제와는 분명 양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가 질적인 종속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외채규모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는데 이것은 자본의 개방이 ‘직접투자’의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며, 기술적 종속도가 완화되는 현상도 핵심적인 특정산업에서는 더욱 고도화된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다고 보았다. “종속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경제의 변화에 대한 국내 독점자본의 적응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독점의 강화에 따라 그것은 자신의 재생산과 축적을 위해 종속을 불가피한 것으로 요구한다는 것이고, ‘독점강화/종속심화’라는 명제는 신식민지 체제에서 독점자본의 특수한 축적구조(재생산 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신식국독자’은 우선 당시 운동의 주류였던 식민지반자본주의(식반자)의 견해를 비판한다. ‘식반자’은 봉건상태와 자본주의 발전은 병행할 수 없으며 ‘독점자본’이라는 것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되는 ‘매판자본’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우선 해결해야 하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의 척결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신식국독자’ 진영은 이러한 견해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적 원리를 무시하고 한국의 특수한 상황만을 중시한 ‘주체사상’에 대한 종속이라고 보았으며, 주체사상은 변혁의 핵심적 ‘변증법적’ 운동을 무시하고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조희연은 사회구성체 논쟁이 촉발한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이 유동적임을 예측했다. “한국사회의 지배구조가 독점자본의 축적구조의 (상대적) 안정화를 물적기초로 하여 ‘부르주아’적인 방향으로 안정화될 것이냐, 아니면 그 축적구조가 자아내는 모순 및 그에 대한 구체적 실천을 매개로 하여 변혁운동의 고양국면을 지속할 것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그의 두 가지 견해 중에서 결정된 것은 더욱 보수적인 개량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사회의 급진적 변혁의 기초가 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도 더 이상 중요한 사회과학의 주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 하지만 80년대 왜 우리가 ‘사회구성체’라는 논쟁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꿨는가를 파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80년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기본적인 물질적 토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상부구조는 언제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은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보았을 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4. ‘민중’에서 ‘시민’으로 : 새로운 변혁운동을 향하여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의 성격은 급변한다. ‘직선제 개헌’으로 6공화국이 시작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사회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꿈꿨던 민중운동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을 뒷받침했던 급진사상 또한 사회과학 영역에서 사라졌다. 사회적인 의식과 문화적인 변화도 사회의 성격을 변모시켰다. 소비영역이 고도화되면서 소비영역에서 각 계급계층에 대한 자본의 차별적인 포섭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계급적 동질성보다는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이나 생활조건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생활영역에서 상품의 유통을 통한 소비의 강조와 문화산업의 확장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계급의식의 단일성을 규정하는 의식을 감소시키고 개인의 욕구와 취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렇듯 교묘하게 작동하는 ‘부르주아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매수’는 사회운동을 계급적, 생산적 방식으로 진행시키는 데 한계를 가져왔으며 대중들의 탈정치화와 무관심을 초래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운동의 외연확장과 중산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계급중심적 사고를 비판하는 시민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시민운동은 생산영역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주체 설정보다는 소비영역의 확장이라는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생활양상(주택, 환경, 소비, 공해 등)에 대한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춰 ‘생활세계의 민주화’를 중시하는 입장을 보인다.
변화된 객관적 현실 속에서 ‘시민운동’의 확장을 수용하면서도 이들에 대한 한계를 비판하는 견해들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위선적인 국가권력과 독점자본의 전략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부드러운 억압과 착취’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운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며 현체제를 용인함으로써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자본주의의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 문제는 영원한 정의를 실현하거나 자본주의 아래에서 경제적 배분 정의를 수립하는 데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부정의의 구체적 형태를 둘러싸고 이해가 상반된 계급간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현실정치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는 일반 시민이 아니라 부정의한 사회현실의 피해자이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인 민중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는 민중이 주도하는 계급적 운동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며 민주적 권리를 향상시키는 시민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중요한 것은 민중운동이 추구했던 인간의 사회적 자유와 계급적 정의 그리고 존엄의 문제가 시민운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87체제 이후 형식적이었지만 민주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사회운동’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향해야 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비판과 대안은 변혁운동이 변화하는 생활조건에 대해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대중적 지지와 여론을 얻어 다른 운동의 노선과 실천을 압도할 때에야 가능하다.”라는 견해처럼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회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정립을 완성할 수 있는 변혁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인간과 개인의 존엄이 실질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사회운동이 좀 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국가는 민주적 절차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지도자가 획득한 권력에 따라 독재를 자행한 일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공화국’적 가치를 도입해야 한다. ‘공화국’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정부라는 의미로 고전적 정의에 따른 핵심적인 개념은 ‘법적 정의’와 ‘이익의 공유’이다. 법이 공정하고 형평하게 적용되며, 국가의 자원이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공적인 기준이 수립되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 권력이 국민에게 부여될 수 있는 공공성의 규범을 수립하는 것이 공화국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민적 변혁운동은 바로 실질적인 공화국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며 헌법에 규정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변혁의 과제는 80년대의 치열했던 이론과 실천의 탐색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야 할지 모른다. 칸트가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계몽’이라 정의했듯이, 여전히 새로운 변혁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와 열정의 시대, 80년대의 중요성이다.
5. 나가는 글
80년대를 ‘사회과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과학적 인식과 방법론이 그 시대에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이전까지 사회과학은 권력과 지배구조의 정당화와 필요성을 옹호하고 ‘근대화론’을 강조하면서 민중에 대한 착취를 은폐하였다. 80년대 사회과학은 과거의 잘못된 방향을 극복하기 위한 전면적인 시도였다. 그런 성격으로 인해 대단히 급진적이고 공격적이며 특정 이론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도 하였다. 80년대 사회과학은 어느 순간 현실의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이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사회구성이나 계급구조와 같은 거대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사회의 성격을 설명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80년대 사회과학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학문과 이론이 권력을 추종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한 냉정한 반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학문은 이론적 정교화가 아니다. 학문은 이론을 통해 실천을 끌어내기 위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곳이다. 80년대 사회과학을 단순히 내용에 대한 분석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등장한 배경 및 그것이 지향했던 방향 그리고 치열했던 논쟁과 실천을 위한 투쟁을 억압적인 정치적 배경 속에서 파악해야 하며, 비록 수많은 한계 속에서 많은 약점을 보여주었지만 그 속에서도 추구했던 진정한 학문적 실천의 용기를 다시금 도출해야 할 것이다.
80년대 사회과학은 시대의 요구에 냉정하면서도 치열하게 반응했고, 그것을 위해 서구와 제3세계에서 형성된 다양한 변혁이론을 수입하여 한국사회에 적용했다. 사회과학이 추구했던 목표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거대담론의 수립이었다. 한국 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사회구성체 논쟁’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진했던 ‘민주변혁론“도, 변화의 주체에 대한 ’민중론‘도, 궁극적으로 현실적인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회건설이라는 과제를 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거대한 사고적 실험이자 학문적 실천이었다. 그 결과 사회적 삶의 형태와 방향은 관념적 사고나 추상적 실천에 따라 변화될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현실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담론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거대담론‘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담론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기초와 이상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변화와 개혁은 자칫 왜곡된 방향으로 전도되거나 ’개혁‘이란 동일한 이름으로 자행되는 권력의 횡포에 시민적 자유를 억압받게 될 뿐이다. 80년대 사회과학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의 가치를 인식시켜준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권력으로 인식, 재편하여 더 이상 사회권력, 정치권력이라는 형태로 자신에게 떼어놓는 일이 없을 때 오직 그때에만 비로소 인간의 해방이 완수되는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유로운 인간은 외부의 힘에 종속되는 것을 넘어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각, 시민적 정의가 구현되는 공동체의 방향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학문적, 이론적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80년대의 꿈꿨던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방법론적, 실천론적 전환을 통한 새로운 방식이 요구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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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공동체의 이상을 위하여 땀흘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