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싶은이야기들(4)
☆초등시절의 욕표와 몽땅 연필의 추억☆
백세시대라고 흔히들 이야기 합니다만 인생의 6부능선을 지나고 아직 체력과 지력이 살아있을 때 “남기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들을 생각나는 대로 수필형식으로 정리하여 시리즈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이 그 4번째 입니다. 졸필이더라도 동기 여러분들의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전회에도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는 태어나자 마자 지독한 가난과 함께 했다. 삼국시대부터 군마를 키우는곳으로 유명하였으며 말이 도망가지 못하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부분 밭이었던 우리고향 호미곶의 지형상 우리는 어려서 부터 보리밥을 먹으면서 자랐다.
추석과 설날 제삿날 이외엔 보리밥에 고구마 등을 같이 넣어 범벅처럼 치댄 밥이었다. 허약한 데다 소화 기능이 약했던 나는 그런 밥이 미치도록 싫었으며 부드럽게 넘어가는 국수나 칼국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쩌다 친척집에 잔칫집이라도 생기면 국수를 한꺼번에 몇 그릇씩 먹어 체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유년기 우리집은 조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제주출신 어머니의 해녀 인솔사업과 큰게에 조그마한 미역 바위를 가지고 있었던 덕에 초등학교때 까지는 그렇게 빈곤하지는 않았다. 초여름 큰게 미역밭에는 엿장수나 떡장수들이 와서 미역으로 바꿔 사 먹었을 정도로 당시 미역은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가기전에 양식미역이 출현함으로서 자연산 미역의 시장가격이 급락하는 바람에 현금 부족으로 어린 시절부터 삶은 늘 아슬아슬함 그 자체였다. 지금도 나는 습관적으로 마트에 가면 양식미역과 자연산 미역의 판매가격을 비교해 보는 습관이 남아 있다. 내가 지금까지 경제적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유소년기 어깨너머로 봤던 어머님의 절약과 우리들의 진학과 학비의 지출에 따라 굴곡을 반복했던 집안 형편이었다.
일곱살에 학교에 든 나는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이웃에 포진해 있었다. 이웃에는 김동록 이태순 서귀옥이 담벼락을 맞대고 살았으며 조금 더 골목으로 내려가면 강용도 김창규 정영철 서한균 이연숙 등이 아래로 더 내려가면 권태완 윤태수 정명학 이해정 서미애 김동철 등 우리는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아침에 나가면 해가 질때까지 자연과 더불어 온갖 놀이를 하며 함께 놀았다. 초등 3학년때 까지는 김동근 이영자 선생님이 한글과 구구단을 가르쳐 주었으며 학교와 동네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학교와 바다 산과 들로 뛰어 다니며 재미있게 지냈다.
4학년이 되자 강사분교에서 사십여명의 새로운 친구들이 합류하며 3개 학급으로 늘어났다. 나의 옆자리는 과격하기로 소문난 대보3동의 김원근 뒤에는 구만2동의 이상아 옆엔 우리동네 큰게의 박돌선이었다. 김원근을 짝궁으로 한 것은 얌전했던 나에게는 외향적인 기질을 심어주고 김원근에게는 범생인 나에게서 공부를 배우라는 윤병수 선생님의 훈육 의도였었다. 김원근은 지역사회에서 유명했던 배통쟁이라는 아버지의 별명을 들으면 항상 불같이 화를 내곤 하였다.
이상아는 그때도 눈이 동그란게 차만 얼굴에다 파란색 세라를 즐겨 입었으며 성격도 참 좋았다. 그 옆자리엔 분홍색 자켓을 즐겨 입었던 박돌선도 갸름하고 뽀얀 얼굴이 참 예뻤었다. 그 뒤에는 대구에서 전근해 온 변선생님의 딸인 키가 컸던 변경애와 이향숙이 있었다.
그땐 신학기만 되면 학급별로 경쟁적으로 교실과 복도의 바닥에 광을 내고 미끄럽게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양초나 돌초를 바닥에 칠한 후 마른걸레로 수십차례 문질러 엉덩방아를 찍을 정도로 미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교실바닥 밑은 환기구로 소나무 판재로 마감을 하였으나 판재사이에는 듬성 듬성 유격이 있어서 연필을 바닥으로 떨어 뜨리면 환기구로 빠뜨리기 일쑤였다.
항상 과제물을 나에게 신세 졌던 김원근은 미안했던지 어느날 수업을 파한 후 교실 바닦밑의 환기구를 낮은 포복 하듯 들어가더니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기어 나오며 몽땅 연필 한주먹을 나에게 쥐어 주었다. 너무짧아 뒤에 볼펜대를 끼워 한참동안을 썼던 기억이 난다. 연필심은 왜 그리도 잘 부러졌던지 공부하는 시간 보다 칼로 연필 깍다 시간을 다 보낼 정도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곤 한다. 어느 시골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때는 참 욕을 많이 했다. 좋아도 욕, 싫어도 욕, 욕도 그냥 욕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온갖 상스러운 소리가 총동원된 그런 욕이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에 선생님은 때로는 꾸중을 하셨고 때로는 벌을 주셨지만 우리들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조례 때, 선생님은 조그만 종이를 가져와서 우리에게 10장씩 나누어 주셨다. 그 종이에는 선생님의 도장이 꾹꾹 찍혀 있었다. ‘욕표’ 였다. 만약 친구가 욕을 하면 즉시 빼앗아서 보관하라는 것이다. 월말에 검사를 해서 다 빼앗긴 사람은 운동장을 돌게 하고 욕표를 많이 모은 사람은 공책 한 권을 상으로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무심코 변경애에게 가시나라고 내뱉은 말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때는 가시나라는 표현은 입에 달고 다녔는데 욕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욕이 아니라고 우겼다. 변경애는 곧바로 선생님에게 일러바쳐 욕이라고 판정하여 욕표를 빼았겼다. 그러나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가시나라는 어원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옛날 고려시대에 외침을 받았는데 남자 장정들이 부족하여 여자들을 전장에 보내게 되었는데 적에게 남자처럼 위장하기 위해 갓을 씌웠는데 그때의 갓쓴아이 라는 표현이 어의변천을 거쳐 가시나로 정착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므로 욕이라고 정의해 주었다. 결국 나는 공책을 받지 못하였다. 어떤 친구들은 일부러 약을 올리거나 욕을 하게 유도하여 욕표를 탈취하는 웃지못할 상황도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그 시절 학교는 늘 만원이었다. 선배들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2부제 수업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세대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로 만든 급식빵을 먹고 자랐다. 당시에는 허기를 채워주던 그 빵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훗날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미국 원조가 우리나라를 일으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성장한 다음 우리 역사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유소년기의 체험 때문이라 생각한다. 밀가루, 쌀, 석유 등의 자원이나 학용품 학비 등 베이비 붐 세대의 우리들에게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훗날 공학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를 때가 가끔씩 있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온갖 수난을 몸소 경험하셨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고생과 나의 유소년기 시절 가난했던 기억과 역사적 자료가 오버랩 되면서 울컥했기 때문이었다.(계속)
김재진(28회) //
첫댓글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저의글 중 등장인물인 변경애는 9살에 학교에 들어 58년생으로 대구에서 살고 있다고 풍문으로 들었고 김원근은 57년생으로 석유화학 단지 플랜트 배관전문기술자로 충남 서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출국전에 최근까지 가끔씩 통화하며 친밀하게 지냈습니다만 그 역시 아직도 고향을 못잊고 있더군요. 여우도 죽을때 제가 태어난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이 그래서 생긴 사자성어 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