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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절-5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본토는 기존적인 거. 말씀드린 일이 있지요? 친척은 돌아다니는 거. 취미성. 육적 취미. 아비 집은 등 기대고 있는 거. ‘이것이 아니면 나는 못 산다’ 하는 그 등 기대고 있는 거. 그게 아비 집이라. 우리는 말씀에 등을 기댈 것이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 이거 안 떠나고 기도하면 모두는 임시적입니다. 떠나지 않고 그것 달라고 기도하거나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달라고 그래도 그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리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갈대아 우르 그 자리에 안 떠나고 있으면 천국이라고 하는 그 천국성은 모두 다 절단 나버립니다. 죽음이 필연적이라면 영적인 죽음도 필연적으로 오는 겁니다. 죽음이 왜 있느냐?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영적인 것을 붙들었다면 그건 뭐 필연적이다. 그게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그 말이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있다’가 아니고.
영적인 것을 붙들고 정평 정가 하면서 살다가 보면 세상 것은 제대로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은 제대로 그냥 신경 안 써도 신앙생활에 염려 없이 이룰구원에 막힘이 없이 해 나간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 신경 써나가면 ‘물질적인 것을 주나 안 주나, 많이 준다 적게 준다’ 그거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당신이 원하시면 어디에 있는 것도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그 사람에게 가 동원되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역사가 그래요. 다 동원되게 만들어 버려요.
마귀가 제 아무리 달라붙어가지고 찢고 자르고 못살게 굴어도 그 모든 사건의 이치가 전부가 구원목적으로 동원되게 돼 있단 말이요. 그러니까 마귀 자기는 아무리 성도에게 원수노릇을 하고 해를 끼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마귀를 들어서 성도의 구원이 더 잘 이루어지도록 이렇게 아예 설계가 돼 있단 말이요. 마귀 자기는 그것도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인간이 잘못해서,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요. 예수 믿는 우리가 제 목적대로 세상위주로 사느라고 하다가, 물론 그것도 죄이지만 어떤 일이 잘못돼서 사업성공 이것이 그냥 퇴보가 돼버렸다. 이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편을 통해서 나의 구원에 대한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놔요. 참 그거 묘해요. 구원에 대한 그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대로의 막힘이 없어요. 전혀 그대로 돼 나가요. 문제는 인간 자기가 대립이 되니까 고통스럽고 괴롭고 한 거지.
히브리서 11장 8절 한 번 읽고 지나갑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자존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 외는 전부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계에도 신령계에 속하는 피조물과 물질계에 속하는 피조물이 있다. 마귀 천사 이거는 전부 다 신령계에 속하는 피조물이고 그 외는 다 물질계에 속하는 피조물이지요? 그리고 물질계 속에는 또 비물질성이 있고. 인간의 영은 신령계에 속하고 인간의 육은 물질에 속하고. 참 이게 피조물 중에 인간이 굉장히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영육결합체는 오직 인간 자기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물질계에 속하는 것 중에 불가식적인 것, 비물질인 것이 있는 것처럼 영에 속하는 비물질적인 무형적인 것이 또 육에도 있단 말이요. 우리 이성은 불가식적인 것이고, 무형적이고 비물질적인 것이 육에 속하고 있습니다. 마음 사상 이성 양심 하는 거 모두 육에 다 속하는 거예요.
일반학자들은 비물질적인 영과 비물질적인 것을 물질적인 영과 비물질적인 영으로 말을 하는데 이론상 맞는 것 같으나 실질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이성을 영으로 보니까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사선을 넘어갈 때에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다 천국 가느냐, 안 그러면 영혼과 이성만 천국 가느냐? 그게 아니고 이성은 있고 영만 가느냐? 그런 면에서 구별을 잘 못 하지요. 우리는 영과 이성과 육을 구별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가 삼분설은 아니나 이분설에서 육에서 비물질적인 이성을 나누니까 그렇게 나눌 때는 삼분설이 돼버리지요.
에베소 2장 1절에 보면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들이다.’ 이 말은 당시 에베소교인들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모두 다 우리에게 성도들 다 포함해서 말씀한 것이지요? ‘허물과 죄로 죽을 뻔’이 아니라 죽었다 그 말이지요. 죽었던 자라. 육은 독약을 마시거나 총칼에 맞으면 죽지요. 그러나 영은 그렇게는 안 죽지요. 총칼이 필요가 없는 거고. 그러나 영은 무엇으로 죽지요? 허물과 죄로 죽는다.
이성이 영이라면 현제 미중생자들이 이성이 작용해요, 안 해요? 현재 미중생자들도 이성 마음 생각 정신 사상이 작용을 하는데 작용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성경에는 ‘죽었던’ 했는데, 기독자들도 예수 믿는 자들도. 그런데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거든. 그러니까 이성은 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작용하는 것은 아직은 살아있는 거니까. 이성이 영이 아니다. 그리고 미중생자들을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거나 천국의 소망에 대해서는 있을 수가 없다. 왜? 죽었으니까. 그리고 영과 이성과 신체작용이 이는 다른 거니까.
보통 보면 이성의 지배를 다 받고 있지요? 이성은 육에 속한 것이고. 그리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어서 대립이 된다고 그랬단 말이요. 영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이성은 이제 육신이 있을 때 작용을 하고. 그러니까 이성은 독립성은 아니고. 이성이 있을 때 하는 거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영에 관한 말인데 이성과 몸은 영에게 구원을 입히는데 이건 필요한 것이다.
롬8:23에 영은 이미 양자 되었고, 양자 될 것 육은 아직 양자 될 것인데 우리의 몸이 되겠습니다. 롬8:15에 ‘성령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영은 양자가 됐고.’ 물론 영은 찰나적 단번에 주신 구원이고 영 중생은 단번에 받은 거고. 이게 이제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대형 대행을 입고 신인양성 일위의 결합적 중보로 된 것. 중보사역이지요?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된 것을 연결을 시켰습니다. 이걸 이제 중보사역이라. 대형은 죄를 말함이고 대행은 칭의를 말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이 살아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자로 살아난 거고.
우리가 자기를 심사해보면 죽을 자기가 있는데 핍박으로 이건 죽기도 하고 그래요. 또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가 있는데 그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죽일 수가 없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는 그런 자기가 있습니다. 서머나교회에 예수님이 나타날 때 죽었다가 살아난 주님으로 나타났지요? 어쨌든 죽었다가 살아나면 영원히 죽지를 않습니다. 안 죽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보통 특히 우리 성도들 교인들이 어떤 자기를 보호하고 있느냐? 양육시키고 있느냐? 그게 문제지요. 어떤 자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느냐? 보통 보면 죽어가고 있는 그 자기를 자기로 알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안 죽을 그 자기를 자기로 알고 살아야 하는 건데 죽을 자기를 자기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시간에 참 자기를 찾아야 되겠지요? 성경만이 그것을 가르쳐주고. 몸은 죽어도 영은 살고. 생명관을 바꿔놓고 살아야 되겠지요?
육은 범죄 해도 영은 죽지 않습니다. 육이 죄를 지을 때 영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영은 통분을 한다 그 말이요. 예수님의 그 통분하는 거와 같습니다. 성도들이 죄를 짓거나 거짓말할 때에 우리의 영은 양심을 두드리지요.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한다고 하는 그걸 느끼지요?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교인들이 잘못하면 기독교를 염세주의나 초절주의나 극기주의나 극복주의나 고행주의 지상성자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 전에 내가 평택에서 개척교회 하려고 그럴 때에 들리는 소리가 장로가 그랬다던가? 저녁마다 산에 올라가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다던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 연습을 한다고? 천주교에서는 고행주의로 나가는 게 있지요? 많아요.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게 많습니다. 고행주의. ‘자기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이 긍휼히 보시고 찾아와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어떤 그런 거. 왜 그 어린애들이 밥 안 먹고 있으면 부모가 와서 걱정을 해서 찾아와주는 것처럼 그런 생각으로. 금식기도 몇 번 했어요? 금식기도 안 해 봤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자기는 영원히 안 죽으니까 어쨌든 죽을 자기를 잘 보호를 하고 인용을 해야 합니다. 사망계에까지 내주지를 말아야 해요. 사망계에 내주면 안 돼요. 무슨 말인가 하니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게 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육체도 죽을 것에 내어주면 안 되고 썩을 것에 내어주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우리의 몸도 성령님이 계시는 전 아니요?
예수님의 육체가 어디서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었지요. 그 괜히 죽은 건가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그 인성이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이 있지요? 자연생명.
생각을 해봐요. 예수님도 생명에게 삼킨바 된 그게 아니면 안 되는 거요. 우리와 똑같아요. 완전히 죽지 않을 것에 100% 삼킨바 되게 했다. 우리 육체는 물론 죄에 감염된 거고 예수님은 한 번도 감염이 되지 않았고. 죄에. 그리고 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자원이었단 말이요. 예수님은 안 죽어요. 그런데 자원적으로 죽는단 말이요. 얼마나 좋겠어. 죽음도 내 마음대로. 안 죽으려면 안 죽고 죽으려면 죽고. 그 얼마나 참.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 오면 안 죽으려고 하면 안 죽어집니까? 어쨌든 인간이 신비롭다. 하나님을 알고 보면 인간창조의 목적을 보면 굉장히 신비롭다. 참 신비로운 존재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계에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인간은 사망계에 들어갈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죽고 살 권리도 있고 우린 그런 게 없어요.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육신의 생명은 완전히 영의 생명에게 전부 다 흡수가 돼버렸습니다. 100%.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를 함부로 사망계에 내어주고 다루지 말아라. 이성과 몸도 영의 운동에 하나님 말씀에 참예를 시켜라 그 말이지요. 전부 다 부활 때에 자기 것으로 다 나온다 그 말입니다. 부활 때는 영체로 단일체로 변화된 것만큼 부활의 능력성으로 더 좋은 부활로 나타나는 거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나라’ 할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떠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게 무슨 말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떠나는데 이게 험한 길이 될지 가시밭길이 될지, 시험의 언덕이 될는지 앞으로 어떤 다가올는지 그런 건 전혀 계산에 안중에도 없는 거요. 그거는. 그러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는 거기에는, 그 말씀 붙잡고 나가는 거기에는 아브라함은 부요던 가난이던 역경이던 상관없이 간다 그 말이요. 그거와 하등의 상관이 없이. 믿고 가면 부자 된다? 아브라함 신앙은 그거와 상관이 없단 말이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것. 그런 거와 상관이 없어. 상관없이 가는 거.
아브라함은 70여 년 동안을 갈대아 우르가 정든 곳이고 보금자리가 있는 곳인데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안 버리려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고. 떠날 것이 많고 버릴 것이 많다. 말씀을 붙잡으면. 붙잡고 나가면 떠날 것도 많고 버릴 것도 많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그 한 마디 말씀 속에 좋은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떠나지를 못하지요. 말씀이냐, 갈대아 우르냐? 한 쪽은 붙잡으면 한 쪽이 울고. 말씀이냐, 갈대아냐? 그 누구요? 심순애와 이수일? 그래, 돈을 붙잡자니 무엇이 울어? 사랑이 울고. 사랑을 붙잡자니 무엇이 울어? 우리가 그게 얘기니까 그렇지 참 그런 사건이 오면 그게 행복일까, 고통일까? 고통일까? 말씀을 붙잡으려면 세상이 울고 세상을 붙잡으려면 말씀이 울고. 참 어느 쪽으로 붙잡아야지?
아마 꾀 많은 성도는 세상을 먼저 딱 붙들어놓고. ‘말씀을 안 붙든다’가 아니고 그거는 좀 차차. 그렇지? 그거는 붙든 거요, 안 붙든 거요? 나중에 붙잡아도? 그래요. 그러면 벌써 한 물 갔지. 우리가 한 물 가게스리 예수 믿는 게 많지? ‘아, 요거다. 정말 내가 말씀을 만났다. 주님을 발견했다. 요거다’ 했을 때 즉각적인 그게 탁 있어야 그게 멋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차차. 나중. 뜸 좀 들이고.’ 이건 한 물 간 거지.
참 그게 이제 인간의 약은 꾀라 그럴까, 간사한 거라 그럴까? 인간이 그런 것처럼 우리 주님도 그 자기에게 마찬가지예요. 그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어. 알고 보면 자기의 행동이었는데 자기를 따라서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진하게 오고, 안 오고 하는 그게 있어요.
우리는 가치를 잘 잡아야 되겠는데 아브라함의 그 수권범위 내에 있는 그 재산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거는 언제 버려져도 버려질 거고, 모두 임시성이 되는 거지요. 말씀 붙잡으면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말씀 붙잡아 놓으면 점점 더 깊이 하나님을 발견하게 돼요. 하나님 자신이 붙들려지지요. 이제. 그렇게 되면. 그러니까 말씀과 하나님과는 연결이 돼 있는 거지요.
우리가 그런 것 많이 봅니다. 전파가 날아온다 그랬을 때에 기계를 딱 대지요. 대면 날아오는 그 방향을 알게 되지요. 국가의 어떤 이북에서 넘어온 스파이들이 통신할 때에 그 이제 남의 집 모퉁이에서 아니면 산에서 전파를 띠운단 말이요. 신호를 띠우면 한국에는 벌써 통신안테나가 있잖아요? 이랬을 때에 어느 쪽에서 쏘던 나오는 방향이 있어. 그러면 전파가 사방에 깔려있는데 날아오는 쪽으로 선을 그어. 그리고 이쪽으로도 선을 그어. 그러면 딱 맞아진단 말이다. 그러면 그 지점에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자꾸 딴 데 자리를 잡고 옮겨가지. 어쨌든 말씀 붙잡으면 하나님 자체를 붙잡게 된다. 말씀 버리면 하나님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이 성령은 반드시 구원을 건설해 나간다는 것. 구원건설 빠진 성령 받았다 하는 건 악령 받은 겁니다. 알겠어요? 악령 악신은 구원건설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거냐, 저거냐’ 하는 그 선택적인 면에서 갈대아 우르와 말씀을 바꾼 거지요. 갈대아 우르를 주고 말씀을 가진 것.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 믿으면서 ‘내 사업 잘 되게 해 달라. 내 어떤 집안 잘 되게 해 달라. 내 생활 풍족케 해 달라’ 하는 그것과 말씀과 바꿨다 그 말이요.
사실 진리대로 사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진리대로 사는 데에는 조건이 필요가 없다. 진리대로만 옳은 길이기 때문에 가면 되는 거예요. 가면 되는 거지. 조건이 필요가 없어요. 성공 실패는 불문에 붙이고. 나 알 바 아니다 그 말이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런 건 나 알 바가 아니다. 불문에 붙이고 다만 말씀만 붙들고 나간다. 역대 선진들이 말씀 붙잡고 나가다 감옥과 처형장에도 들어갔지요.
‘꼭 부요를 주시거니’ 하고 가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하는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다’ 하는 이거는 무슨 일이 올는지 모르나 그러나 각오하고 가는 것. 예수 믿으면서 ‘부자 되겠다. 뭐 잘 되겠다’ 그게 아니고 예수 믿으면서 내가 순교를 당하는 게 오더라도 그런 걸 다 각오하고.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각오 속에는 거지 돼가지고 죽을 각오, 순교당해서 죽을 각오. 그 이상 어떤 각오를 더 해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말씀 붙잡고 안 놓친다’ 하는 그 각오. 이게 아브라함이 앞으로 나가는 거란 말이요. 잘 될 걸 자기가 계산해놓고 ‘잘 믿으면 어떻게 해 주겠지’ 하는 그런 것 전부 다 불문에 다 붙여버렸다. 내가 뭐 그걸 달란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고 안 달란다고 해서 안 주고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옳기 때문에 가는 거지. 가다가 보니 상황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고. 그러나 거기서도 계속 앞으로 나가는 것. 옳은 것만 붙잡고 나가는 것. 참 어렵지? 어렵지 않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지 볼 때 그걸 각오하고 가는 것. ‘안 올 줄 믿습니다. 만사 나쁜 사건이 안 올 줄 믿습니다.’ 그 왜 성경 그런 구절 잘 갖다 붙이지. 원수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고? 그런 것 잘 붙이지? ‘그렇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걸 만사형통이라고 갖다 붙이지.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사실 우리가 실력적인 의미로서 능력적인 의미로서 볼 때에 자주 싸우고 많이 싸우는 사람이 싸움의 능력자가 되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싸움이 많을수록 좋지요. 싸움에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말씀을 붙들어 놓으면 그와 같은 정신으로 가게 됩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아브라함이 벌써 70대 노인이고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는데 그걸 이루어준다고 해서 그거 쳐다보고 가는 건 아니라 그 말이요. 말씀이 좋아서 간다. ‘앞으로 너 잘 되게 해 주겠다. 어떻게 잘 되게 해 주겠다’ 하는 게 있어도 그건 들을 필요가 없고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그것 붙잡고만 가는 것. 친척들 다 내버리고 나그네로 이제 떠나는 거지요?
참 우리 아브라함을 보면 대단한 겁니다. 이거. 불신자 입장에서 보면 미친 거고. 그렇지요? 생각을 해봐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자기 집이 있지. 농토 있지. 그렇지 않아요? 얼마든지 형제들이 있고 일가친척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떠나라’ 그럴 때에 그것 다 내어버리고 뭐 참 방 매각을 써 붙이고 토지매매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떠나라’ 그 말씀 딱 듣고 그 이튿날 떠났나? 며칠 있다가 떠났다는 거 없지요? 그래, 그 떠났단 말이요. 여러분들이 그거 이해가 가겠어요? 이해 가겠어요?
우리가 이런 걸 간혹 볼 수 있어요. 한 번을 들어도 말씀에 미친 사람이 있지요. 하나님 말씀에. 우리가 좋게 한 번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자기 집 다 팔고 교회 옆으로 오는 사람도 간혹 있지요? 아, 그거 참 얼마나 멋있어. 아이고, 목사님이야 좋지 그 사람은 얼마나 걱정일까? 그렇지? 참 그런 성도들이 간혹 있어요. 아주 참 멋있어. 그런 성도는 예수를 참 멋있게 믿을 성도야. 아주 그 맵고 짠 데가 있고 끊는 데가 있기 때문에 참 멋있어.
생각을 해봐요. 여러분들, 아브라함이 버리고 온 민족, 혈육 말이요. 버리고 온 민족이 많을까요, 신앙의 후손으로 얻은 민족이 많을까요? 어느 쪽이 많지요? 확실히 그렇습니까? 그래서 ‘부모형제를 버리는 자는 여러 배를 받고’ 하는 그 말씀이 있습니까? 그 성경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 이거 굉장한 거 아니야? 아브라함은 그 결과를 모르고 갔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것을 계시적으로 보는 겁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버리고 안 떠났다고 한다면 그 결과를 볼 수 있을까요? 확실히 그렇습니까? 그 결과는 못 봅니다. 고작 해봐야 자기 고향에서 살다가 죽을 때 일가친척들이 메고 가는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우리가 가치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보면 말씀 붙잡고 가는 그 결과성이 크다 그 말이요. 유익이 아주 큰 겁니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하는 이거는 크게 불리어지는 거예요. 가나안 땅 오기 전에는 갈대아 우르에서만, 그것도 아브라함 자기 동네에서만 ‘아브라함 할아버지’ 하고 불림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어디까지 퍼져있어요? 온 세계적으로 퍼져 있습니까? 그리고 온 세계뿐만 아니고 신령계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이 퍼져 있지요. 예수 믿고 하늘나라에 들어간 자 치고 아브라함을 모르고 천국 들어간 자가 있을까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지옥에까지도 아브라함의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까? 예, 그 얼마나 멋있느냐?
그 이름이 그렇게 유명한 것을 보니까 아브라함이 박사입니까? 가만 보면 지금도 아브라함의 이름이 자꾸 선전이 돼나가고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오고 오는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퍼져나가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빈 말이 아니란 말이요.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리라.’
이게 실지란 말이요. ‘아브라함 그 때 당시만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지금도 우리들의 입으로부터 온 성도의 입에서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리라.’ 참 그 멋있잖아요?
어때요? 하나님께서 우리 O전도사에게 찾아와서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리라. 갈대아 우르 같은 세상을 떠나라’ 그 말씀 들려왔어요, 안 들려왔어요? 보나마나 그 말씀 들려온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지금 떠났는지 안 떠났는지 몰라. 아닌 말로 온 성도들의 입에 아, 둔대리교회 유OO전도사, 이거 정말 아마 그 이름이 나간다면 모르긴 해도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아마 죄다 한 번씩 왔다 갈 걸? 안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림이 없어요. 하나님의 그 신실성이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만 한 게 아니고. 우리가 세상에서도 보면 정치적으로 이름난 자 많지요? 과학자로서 이름난 자 많고 예술가로서 이름난 자 많아. 그러나 그런 거는 세계적으로 많이 나더라도 그건 전부 다 가치 없는 이름들이고 현 세상이야. 천국에서는 알아주지를 않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 말씀 붙잡고 순종해 나가면 생명적으로 진리적으로 영원히 영원히 그 이름은 분량적으로나 가치적으로나 하나도 손해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손해될 것도 없고. 그 말씀 순종되어서 아브라함은 수복자가 시복자로 축복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너로 말미암아 복의 기관이 되겠다.’ 수복자로서의 시복자로 또 됐단 말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성도의 하나의 모델인데 세상에서 사람을 찾고 사람을 꼽는다면,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을 꼽는다면 누구겠지요? 아브라함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인 믿는 나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일반적인 축복이던 다 복이 나갈 수도 있는 거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라고 하는 거 하나님 앞에 엄청난 존재가 아니겠느냐?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하고 꼭 필요한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이 얼마나 참 엄청난 말씀이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몸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 뭐 나 같은 자, 불신자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그 창조의 목적을 생각할 때에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엄청난 존재다. 날 위해서 이 세상을 다 창조했고.
다 불신자들이고 이방인들이고 그 동네에 믿는 자기 딱 하나 있으면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이 동네에 은혜가 내려진다는 거. 얼마나 그 굉장한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자기인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를 신분을 위치를 잘 생각하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아브라함을 들어서 저희들에게 아브라함의 신앙의 발걸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후에 아브라함에게 내리어지고 주어진 모든 가치 있는 축복들을 우리는 보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원돼서 지나간 그 아브라함, 왜 저희들은 보고도 그것을 못 믿는지? 아버지 하나님, 믿음 없는 저희들 용서해주시고 큰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오늘날 저희들에게도 하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 말씀대로 따라 살다보면 확실히 저희들이 신앙의 눈으로 볼진대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 그 말씀 붙잡고 따라가는 그들에게도 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충만하심이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한 그 말씀에 순종하고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역시 그렇게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 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