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수업55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힘들까요 #두가지마음 #조악의기능 #선과악이란
(나) 개별적으로 말한다
ㄱ. 염락(染樂)을 사유한다
7:41 모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괴로움
온갖 유형의 두려움
원하는 것과 멀어지는 고통은
모두 악행 때문에 일어난다네.
#두가지마음
설이 다가옵니다. 어릴 적 이 때에는 TV 앞에 앉아서 머털도사 이야기를 참 기다렸습니다. 매년 똑같은 내용을 보면서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기다렸을까요? 지금처럼 넷플릭스 등으로 무제한의 컨텐츠를 넘치게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 결핍이 더 큰 재미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머털도사 이야기에는 108번뇌가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에는 번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선도 있으니 마음의 작용이란 그 종류를 나눈다면 무한대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화 하면 단 두 가지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흔들린 마음인 불안과 안정된 마음인 안심입니다. 일단 묻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불안이 토대인가요? 안심이 토대인가요?
당연히 불안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마세요.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보죠. 모든 만중생의 마음은 안심이 토대입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방의 주인은 안심이요, 찾아온 객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객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서 마치 불안이 기본 모드인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방의 주인 권리를 되찾으세요. 안심하세요. 왜 그래야 할까요?
단순합니다! 불안은 그 자체로 고통이요, 또한 각종 고통의 씨앗입니다. 안심은 그 자체로 행복이요, 모든 행복의 근간입니다. 이고득락을 추구하는 붓다의 다양한 방편들이 있지만, 이를 단순화시키면 이 마음 하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안심이 불안에 잡아 먹히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내는 것, 이것 하나가 행복을 위한 유일한 과제입니다.
내가 불안하고 이로인해 고통스러운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시대 상황 때문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 그리고 사람과 세상 때문이 아니라 불안에게 마음의 주도권을 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통에서도 깨치는 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야생이 지배했던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 중에도 분명히 안심하고 행복했던 존재들이 있습니다. 외부조건이 불안을 일으키는 트리거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트리거를 당긴 것은 다름 아니라 내 선택입니다. 권총에 방아쇠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요? 아니면 그것을 당긴 선택이 죄인가요?
7:42 선한 행동을 하면
언제 어디를 가든지
공덕의 과보로
존경과 명예가 따른다네.
7:43 그러나 악행을 하면 안락을 원해도
언제 어디를 가든
악행을 과보로 고통의 칼이
우리를 잘라 쓰러뜨리리라.
#조악의기능
연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연말모임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정신을 흐트리는 술을 마실 수도 있겠죠? 술을 안마셔도 소화하지 못한 감정에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불킥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절되지 않는 실수를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안심과 불안, 마음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불안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모든 고통의 원인인 말과 몸으로 짓은 악업을 돕는 무대입니다. 이 조악의 기능, 이것이 진정으로 무서운 점입니다. 가지각색의 고통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지옥의 안내자가 바로 불안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금만' 불안하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머리카락에 불이 조금만 붙었다고 방심하나요? 그대로 두나요? 불안은 산불과 같아서 금방 마음 이곳저곳으로 옮겨 붙습니다. 선행을 태우고, 갖가지 연계된 말과 몸으로 짓는 악행을 유도합니다. 어쩌면 실수를 넘어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을 믿으시나요? 오만입니다. 번뇌에 사로잡힌 존재는 몰상식해지기 마련입니다. 불안에 사로잡힌 존재는 자기통제를 잃기 마련입니다. 불안에 더해 각종 번뇌가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 이미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 방울의 불안이라도 마음 속에서 발견되면 이를 잠재우기 위해 다급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머리에 붙은 불은 끄듯이.
#선과악이란
붓다는 과학자입니다. 선과 악을 관찰하고 정의하는 방식이 이전의 어떤 방식과도 다릅니다. 형이상학적인 방식도 아니고, 도덕적인 주장도 아닙니다. 붓다는 45년간 사람들이 질문했던 이고득락에 대해 답변했을 뿐입니다. 고통을 낳는 씨앗을 불선 즉, 악업으로 행복을 낳는 씨앗을 선으로 구분했을 뿐입니다. <금강경> 속에서 붓다가 8만 4천경의 분량을 설법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단 하나의 설법도 한 적이 없다!"
황당합니다. 그런데 진실입니다. 붓다는 주장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설법은 답변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커스터마이징 된 답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붓다의 답변은 같은 카테고리의 질문이라도 항상 다릅니다. 모르는 사람은 이런 답변을 보면 '일관성이 없다!, 말 바꾸기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항상 적용되는 단 하나의 답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고, 이런 고집이 없기에 지혜의 눈으로 개인화된 적절함의 답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게 바로 경전의 양이 방대한 이유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서 답변하셨기에 방대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붓다가 이렇게 하면 행복하다는 일관된 주장을 하는 분이었다면 과연 8만명을 만났다고 해서 책이 8만권일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 10가지 정도의 답변을 모든 이들에게 돌려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붓다는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보다 넓고 깊은 지혜로 관찰하셨을 뿐입니다. 무엇이 행복의 원인인지, 그리고 무엇이 고통의 원인인지를. 그리고 이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중생 개개인에게 맞춰서 답변해주셨습니다. 그 행동을 하시면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이 행동을 하시면 행복에 도움이 되실 것이라고. 이것이 이고득락을 위한 지악수선이라는 8만 4천경의 요약입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하시면 됩니다. 무대와 씨앗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싶으신 것이 분명하시죠? 그럼 잘 들으세요. 일단 불안은 고통이 생기기 딱 좋은 무대이고 안심은 행복의 터전입니다. 악행은 고통의 씨앗이요, 선행은 행복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과 마음의 터전이 상응할 때! 예를 들어 선행이 안심의 밭에 심어질 때 행복은 빠르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자라납니다. 반대로 악행이 불안과 만날 때 순식간에 삶은 지옥과도 같은 경험으로 가득해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행복은 이렇게 마음의 성질과 선행 그리고 악행이 조합되어 드러나는 결과물입니다. 이를 이해한다면 경험을 개선하는 수행자로써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절에 오시는 할매가 걱정스럽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스님, 일 할 때는 몸을 애끼고 먹을 때는 애끼지 마세요."
저도 세상 사람들이 걱정스럽습니다. 부디 악행에는 몸을 애끼고 선행에는 적극적이 되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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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경험하는 고통 또는 행복은 나의 마음상태인 안심 또는 불안과 내마음의 실천인 선행 또는 악행의 조합이다. 안심한 상태에서 선행을 실천하자. 감사합니다.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