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하면 ‘허무주의’, ‘비관주의’, ‘무의미함’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새디어스 메츠(Theddeus Metz,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대학교 철학과 석좌교수)가 말했듯이, “전도서는 무의미함이라는 주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의미의 부재를 상정한 서구 유일신 전통 최초의 문헌 중 하나로 남는다.”(메츠, “˹전도서˼와 삶의 의미”, 『삶의 의미와 위대한 철학자들』 스티븐 리치/제임스 타타글리아 편저, 필로소픽, 2023, 148) 서양에서 ‘허무주의자’ 하면 쇼펜하우어와 카뮈가 떠오르는데, 전도서는 바로 이 서양 허무주의 전통의 기원이 된 책이다.
알다시피,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1:2)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도서의 구절들을 보면, 이 책은 상당히 비관적인 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혜도 헛되고(1:12~18), 슬기와 어리석음도 헛되고(2:13:~17), 수고도 헛되고(2:11,18~23; 4:4,8),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도 헛되고(4:13~16), 부자가 되는 것도 헛되고(5:10~17), 심지어 즐거움도 헛되다고(2:1~12) 한다. 즐거움의 헛됨을 말할 때는 “알고 보니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것’이다”(2:2)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쓴다.
도대체 전도서 저자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 가면서 인생의 헛됨(무의미함)을 말한 것일까? 그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첫째는 죽음이다. 누구도 덧없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2:16~17)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헛되다. 둘 다 같은 곳으로 간다. 모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3:19~20)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한다. 또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5:15~16)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7:2)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나이에 죽고 말 것이다.”(8:13)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된 일 가운데 하나다. 더욱이,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보상이 없다.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어들 자리가 없다.”(9:3~6)
둘째는 불공평이다. 즉, 악인에 비해 선인이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수고는 슬기롭고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하는데, 그가 받아야 할 몫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차지하다니, 이 수고 또한 헛되고,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2:21)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 숨 쉬는 사람보다는, 이미 숨이 넘어가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둘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못된 일을 못 본 사람이 더 낫다고 하였다.”(4:1~3)
“나는 세상에서 또 한 가지, 잘못되고, 억울한 일을 본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부와 재산과 명예를 원하는 대로 다 주시면서도, 그것들을 그 사람이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엉뚱한 사람이 즐기게 하시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요, 통탄할 일이다.”(6:1~2)
“헛된 세월을 사는 동안에,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사는 악인도 있더라.”(7:15)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8:9~10)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8:14)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삶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9:2)
셋째는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다. 사람은 아무도 제 앞일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7:13~14)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람을 다스려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가 죽을 날을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8:7~8)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8:17)
“... 사람은 아무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9:1) “...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9:11~12)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하고 또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10:14)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11:5)
이런 이유로 전도서 저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여기까지 보면, 전도서 저자는 아주 극단적인허무주의자 또는 비관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곳에서 그는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의 말을 한다. 이 세상이 헛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에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전도서 저자는 생을 즐기라고 권고한다(8:15). 그 이유는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8:15)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 8:15)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좋은 일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5:18).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전도서 저자가 이 ‘즐기는 것’을 부부애와 연관시킨다는 점이다.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9:9)
여기서 전도서 저자는 특히 부부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권한다. 이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당연한 몫이며, 다른 사람과 즐기는 것보다 더 마땅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2:1~12에서는 즐거움도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해놓고, 여기서는 정반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고 마땅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고,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5:18,20).
둘째,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만족하는 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2:24) “사람이 ...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3:13)
앞에서 보았듯이, 2:11,18~23; 4:4,8에서는 수고도 헛되다고 해놓고, 여기서는 정반대로 수고에서 보람을 느끼는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렇게 ‘즐거움’과 ‘수고’와 관련해 서로 상반되는 것이 공존하는 것을 ‘이율배반적인 역설성’(ambivalenc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종교학자 정진홍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은 이상한 것도, 혼란스러운 것도, 인식의 한계가 직면한 모순도 아닙니다. 서로 어긋난 것이 하나가 되어 있는 현상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이른바 ‘논리적 일관성을 잣대로 한 경우’뿐입니다. 합리적 지성의 논리 안에서만 가능한 현실입니다. 삶의 실재 안에서는 오히려 상반하는 것들이 서로 함께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역을 이루는 그 둘이 더불어 하나의 실재를 이룹니다. 그것이 우리가 겪는 직접적인 삶의 현실입니다.”(정진홍, 『M.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 살림, 2013, 28~29)
셋째, 전도서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결론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12:13~14)
전도서 저자는 11장 젊은이에게 주는 충고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젊은이여,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라. 다만,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11:9)
이 세 구절은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요즘같이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에 위 두 권고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내용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호칭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 ‘우주의 궁극적원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 함부로 살지 않기 위해, 자기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이 우주의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실재를 믿고, 이 실재와 자기를 연결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무한대까지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삶이 뭐가 그렇게 나쁜 것인가? 오히려 이런 삶에는 궁극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전도서 저자 식으로 표현한 것이 위에서 인용한 12:13~14이다. 전도서 저자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을 촉구한다. 이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다.
마무리하자면, 전도서 저자는 유대교 신앙을 지녔던 사람이지만, 자신의 인생관을 기술할 때는 종교적 도그마에 매이지 않고 상당히 인문학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매우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내세관과 관련해 종교적 도그마를 사용해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아래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에게 일어날 일들을 누가 그를 데리고 다니며 보여주겠는가?”
그러나 그는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극단을 싫어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7:18)
그러기에 그는 ‘이율배반적인 역설성’(ambivalence)의 수사법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균형 있게 잘 기술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에는 무의미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측면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