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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들 ⑫ - 바락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삿 4: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삿 4: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삿 4: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삿 4: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건과 문장과 심지어는 단어 하나, 이름 하나도 의미 없이, 생각 없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믿음의 사람 ‘바락’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바락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그가 살던 시대에도 주인공이 아니라 늘 조연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살던 사람 중에는 그보다 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성경은 바락을 기드온, 삼손, 입다와 함께 그의 이름을 믿음의 반열에 소개합니다. 이것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락을 귀하게 보아야 하고, 그의 믿음을 찾아야 하며,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는 간접적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바락의 이야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가나안 왕이었던 야빈은 20년 가까이 이스라엘을 위협하며 압제하던 사람입니다. 야빈 왕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그에게는 ‘시스라’라는 장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900대의 철병거를 지휘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전차부대 지휘관입니다. 철병거는 당시 신무기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무적함대였습니다. 게다가 시스라는 전술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파악하고 전차로 밀고 들어가 순식간에 전쟁을 끝내버리는 전략에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서는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20년이 흘러가면서 이스라엘은 기가 죽어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선지자인 랍비돗의 아내인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셔서 시스라를 물리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녀의 이름 드보라는 "꿀벌" 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그 이름처럼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유태의 율법학자들에 의하면 그녀는 성전의 등의 심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 하였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아 그 백성들을 밝혀주는 조명의 여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사사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여자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남자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종용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여자의 위치가 있는데 이 질서를 순종하는 겸손의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여자였기 때문에 직접 군대를 소집하거나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음으로 당시 백성들로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던 바락을 지명하였습니다.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자신이 명한다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했습니다.
당시는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시절에 여성의 명령을 따른 다는 것은 대단한 겸손이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서 겸손한 사람의 순종이 나옵니다. 드보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자신을 낮추고 그 명령에 순종하니 바락이 여기에 동조를 하여 겸손한 믿음을 갖고 드보라의 명하심을 따릅니다. 믿음의 아름다움은 겸손이요 이 겸손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성경에서 모세와 그의 종 여호수아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청년 시절부터” 모세가 죽기까지 약 40년 동안 모세의 개인 수종, 즉 “봉사자”가 되는 겸손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모세는 여호수아보다 35살이나 손위였는데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종으로 있을 때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직접 계시를 받고 음성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도자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겸손의 믿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오랬동안 겸손의 자리를 지켰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입성합니다.
저에게 부목사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은 축복된 것이었습니다. 그 복된 자리에서 인내의 세월을 보냈어야 했습니다. 묵묵히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순종하는 겸손을 가졌더라면 목회를 하는데 이처럼 롤로코스터 (Roller Coaster)를 타지는 안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환경 속에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겸손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자기의 뜻과 야망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겸손의 때를 놓치면 그 겸손의 분량이 차기까지 연단은 계속됩니다.
직접계시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직접 응답받는다고 함부로 설치지지도 마십시오! 제일 안전한 길은 영적 지도자의 안내를 받는 것입니다. 제 큰 딸은친구 목사의 소개로 사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위를 만나고 온 날 일성(一聲)이 “슈랙 같이 못생겼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내도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한 후 너에게 맞는 배우자라고 하면서 시집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를 모셔야 된다며 펄쩍 뜁니다. 그래서 또 기도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속에 평안을 주시면서 그리로 시집가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출근하려고 가는 아이를 차에 태워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고 출근하면 태우러가고 하면서 설득해서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시집가서 잘 사나 했더니 몇 개월 지나면서 티격태격하며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결국 못 살겠다고 뛰쳐나와 이제는 5개월 째 접어들고 있네요. 그런데 이 아이가 아주 떳떳해요. 엄마 아빠 말 듣고 시집갔으니 책임지라는 식입니다. 저는 크게 깨달은 게 있어요. 자식 혼사문제에 이러쿵저러쿵 기도 응답받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껌딱지 처럼 달라붙어 책임지라는 식이니 저는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여야 되잖아요? 기도 응답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위험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깨어있고 순전한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드보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바락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더라도 드보라 선지자가 져야 할 책임이지 바락의 책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직접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였어도 영적 지도자의 음성에 귀를 기우리고 순종하는 믿음도 하나님께서는 귀히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영적 권위자를 인정하고 그 말을 내 삶에 적용합니까? 아니면 내가 직접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만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바락의 믿음은 2%부족한 믿음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완벽한 100%믿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믿음이기에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딛고 다음 단계의 믿음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락 역시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바락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남자 망신을 다 시킨다 싶을 정도로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은 인물이며, 당대의 여선지자였던 드보라를 절대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서 드보라의 명에 따라 움직였고, 드보라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사사기 4:8에 “바락이 드보라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가지 아니하겠노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지만 그에게는 혼자서 순종할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해주었던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혼자는 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의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담대함’이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동역자입니다. 바락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드보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드보라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바락을 고민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군사 만 명을 가지고 다볼산으로 가는 것은 승리에 대한 한 가닥 희망보다는 자살 특공대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야빈 왕에게는 철 병거만 900 대가 있었습니다. 야빈 왕에게는 ‘시스라’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었습니다. 당시로는 철 병거로 무장한 최신 철갑 기병들이었는데 일종의 전차 군단과 같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스라는 철 병거를 앞세워 2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괴롭혔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단 한 대도 없는 철 병거입니다.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내적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조용히 힘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은 있는 대로 다 약탈당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 전역에서 남자란 남자는 다 모아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자손’ 중에서 만 명을 차출해서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락의 군사적 지휘력이나 용맹함, 이스라엘 장졸들의 힘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와 그의 철병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친히 야빈의 군대 대장 시스라의 그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이끌어 내어 ‘바락’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대한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락이 드보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합니다. 그 순종이 흘러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자손에서 모아든 병졸들의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훈련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짧은 시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의 고비에 맞서야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전시상황에서 명령에 따르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점검해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내 아내가 내 말에 순종하지 않는가 자녀들이 부모가 말하면 튕겨나가는가 직장에서 아랫사람에 무시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권위에 대하여 무시하면 할수록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병규라는 남자 집사가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심한 주사, 혈기, 열등감 등으로 인해 눌려 지내다 중학생 때 자살시도를 할 만큼 힘들었음에도 성인이 돼서는 그런 점들을 오히려 물려받게 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2011년 11월말 돈, 직장, 신용 등 모든 걸 잃은 상태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경찰에게 주취폭력을 저질러 구치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지만 그 때 친누나가 넣어준 목사님 저서와 QT를 통해 말씀을 알게 됐고, 세상 바닥까지 내려간 지금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는 기막힌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출소하자마자 제가 살 길은 말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딱 붙어만 있다 보니 술 끊는 적용을 하게 되고 기적적인 복직, 또 이듬해 초 청년부에서 만난 자매와 가정도 이루게 됐습니다. 하지만 육적으로 풀릴수록 저만의 기념비를 쌓고자 하는 마음이 올라와 세상으로 향하는 시간과 노력이 점차 많아지고 있으며 부부목장 부목자로 섬기는 일에 대해 자꾸 생색만 늘어갑니다. 그나마 새롭게 옮긴 직장이 연공서열 중심의 보수적인 곳이라 나이 어린 선배를 인정해야 하는 관계 속에서, 그리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험관아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 누나들과 상처를 주고받으며 잘 합치지 못하는 등의 고난을 통해 한 가닥 말씀을 붙들게 하십니다. 여전히 작은 일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미숙한 믿음이고 공동체에 대한 사모함도 부족하나, 그럼에도 잘 순종하며 붙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간증에서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왔던 젊은 집사는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질서에 따르지 못한 사람들은 돈, 직장, 신용들을 잃어버릴 확률이 큽니다. 모든 세상의 이치는 다스리며 다스림을 받는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질서에 따르는 것이 약했습니다. 아버지를 무시하는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를 따르지 않았고 어려서 고모 댁에 보내져 생활 할 때도 고모부가 무뚝뚝한 모습이 싫었고 첩살이를 하면서 고모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반발감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얻은 성향이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은 좋게 말하면 독립심이 강한 것이고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교만하다는 거지요. 제 잘난 맛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 개척교회를 하면 무언가 뻥뻥 터질 불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것도 착각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락은 2%부족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 드보라 함께 전쟁터에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독립적이지 못한 믿음입니다. 만일 독립적이라고 하면 자기 혼자 군대장관이 되어 싸워서 이기면 자기의 공로로 돌아오고 자기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2%부족한 믿음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잠재되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갖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분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전진해 나가는 것 보다 2%부족한 믿음으로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에게도 오랫동안 모세를 통하여 훈련을 받았어도 여전히 그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부족한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장에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3번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고 하나는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또 한 번은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 그 만큼 여호수아는 마음이 강하지도 담대하지도 못하였음을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그런 부족한 믿음을 하나님이 격려하십니다. 그 격려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였더니 백성들이 그에게 순종할 것을 고백하며 강하고 담대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힘을 얻은 여호수아가 드디어 담대하게 백성들을 향하여 강하고 담대하라고 외칩니다. 부족한 믿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부족을 통하여 연합을 이룰 수 있고 부족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믿음이 부족함을 느끼고 언제나 협조자의 도움을 구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내 믿음에 의존해서 일을 벌이는 신앙입니까?
셋째는 바락의 믿음은 히브리서의 믿음 장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드보라를 믿음 장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락을 기록한 이유는 드보라보다 바락의 믿음이 출중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믿음이 드보라에 비하여 정련(精練)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좋은 금속을 만들기 위하여 불속에 넣어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처럼 드보라가 가진 믿음을 보고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다른 산에 있는 돌이라 해도 나의 옥을 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사소한 언행이나 실수라도 나에게는 커다란 교훈이나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할 때 쓰는 것입니다. 당대(當代)의 신앙보다 몇 대를 거쳐 이어온 신앙의 사람들이 때로는 믿음이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수는 확실히 덜 합니다.
저는 제 아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만났을 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름이 정성경이고 생김새가 착하고 선하게 생겨서 믿음 좋은 장로님의 자녀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더군요. 저와 교제를 나누면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갈등하였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어야 했기에 정이 들기 전에 헤어져야 되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자고 말하려니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정이 들어 있어 쉽사리 결정을 못하고 기도원에 올라 3일 금식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였습니다. 오산리 금식기도원의 기도굴에서 기도하다가 말씀을 통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롬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저가 세움을 받는 다는 말씀을 받고 확신을 지니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초에 농촌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새벽기도회에 몇 번을 나오다가 그 다음에 안나옵니다. 그래서 흔들어 깨웠더니 기도할 줄도 모르는데 멍청하게 나가 있으면 뭐하냐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제 아내가 이제는 저보다 현명한 생각을 하고 저에게 충고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난날에는 뭐를 기도할지 몰라 방황하였던 아내가 어느 날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께 말 해봐요. 기도를 꾸미려고 하지 말고요.” 그러는 겁니다. 그러다 지난 번 저녁기도회에서 제가 설교하기를 하늘의 언어를 가지고 땅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땅의 언어를 가지고 하늘의 것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맥도날드에 들려 장로님 내외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자리에서 제 아내가 저를 향하여 피식 웃으면서 그 사실을 몇 년 전에 일러 주었는데 이제 알았냐고 합니다.
제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알고 홈런을 치는 거요? 아니면 나도 모르게 마구 휘둘렀는데 홈런을 치는 거요?”라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깜작 놀랄 때가 많이 있어요. 저 보다 훨씬 믿음이 좋은 겁니다. 왜 그렇지요? 저의 실수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며 나를 돌아보고 나의 실수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됩니다.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은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침을 통하여 더욱 성숙된 믿음의 자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통하여 나를 돌아보는데 열심인 편입니까? 아니면 비난에 그치거나 무시하고 지나칩니까?
바락은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면이 없는 사람으로 믿음 장에 오를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귀히 보셨던 이유는 드보라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감추려하지 않고 조력자를 구하여 함께 동역하는 슬기로움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부족하였기에 다를 사람으리 믿음을 흠모하고 그 믿음을 통하여 자기를 끊임없이 정련하였기에 그 믿음은 빛이 나게 되고 믿음의 영웅들과 함께 그 이름이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