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 6.25전쟁참전용사 이야기(보완)
장홍윤(87세), 2사 17연대 52년말 입대
제주도 훈련소에서 교육받고 철원으로 감
2사17연대에 배치되어 백마고지 우측 284고지에 올라 감
배가 너무 고파서 새벽이면 취사반 옆에 다 모인다, 떨어진 한톨의 밥알이라도 먹으려~
★중공군이 어깨에 차고 있던 식량은 피가 조금 묻었어도 먹었다
전우가 한명 전사하면 내 몫이 늘어난다는~
ㅜㅜㅜ
전쟁은 정말 비참하고 슬프다고 하신다
53년 2~3월 전투 때는 아예 밖으로 나오지 않고 토치카 속에서 머무른다
무려 한달 여 동안 양말을 한번도 바꿔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어느날에는 중공군 기습으로 모두 죽었다
유해처리는 모른다, 누가 다 처리했는지~~
친형님이 장홍수(89)용사님으로 9사 30연대 , 얼마전 운명하셔 대전 현충원 사병묘역에 안장 되었다고 한다
박종철(86), 12사 51연대로 52년말 입대
인제 북방 노전평 지나 854고지에서 전투함
미군이 주로 함께 했는데 우리 군인이 조금 이라도 못 떠나가게 하더라
★이유는 지형을 잘 모르니까~~
이때 미군은 수시로 부대 위치를 바꾸었다
전투중 총알이 탄띠를 맞고 좌측 대퇴부로 총알이 들어와 부상당함
지금도 날씨가 궂으면 쑤시고~~~
★하지만 상이용사로 대우는 없단다, 근거가 남지 않아서~~~
얼마나 많이 전사했는지는 잘모른다
한신석(?) , 8사단 10연대 참전용사
횡성지구 전투(51.2.11~13)에서 포로가 됨
전투도 못해보고 붙잡혀 금화지구 임시 수용소에 3개월정도 있다 여러 곳을 전전함
50년 11월에 화천읍내 지역을 지날때 잠시 머물렀다
미군 비행기가 따라다녀 밤에 주로 산악지역 이용 북으로 간다
무려 3000여명이 있는데 미군도 1000여명 되었다
배가 고파서 미군들이 민간인들이 남겨논 밭에 있는 콩대를 가져와 불을 피워 구워 먹으려 하다 불빛보고 폭격기가 날아와 그만 300여명 즉사했다
★"이건 우리 전사에도 안 나온다 하더라"
★포로로 끌려가는데 미군 소위는 소위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에 절대 비굴하지않고 당당하게 맞서다 죽어가더라
포로중에 밀양 아리랑을 잘 부르는 인원이 있어 배워는데 가끔 부르곤했단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정든 님이~~"
포로들이 3000여명이 있는데 실제 횡성지구에서 전우들이 집단으로 전사한 모습은 보지못했다고 한다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배워야할 장교의 도리라 본다"
000님, 6사 7연대 50년 12월 1일 입대
의정부거쳐 동두천에서 중공군을 만났다
소총병이 뭐 아나, 어리둥절거리다 후퇴하여
1.4휴퇴시 용인거쳐 진천 이월면에서 정비
그러다 다시 잔출하여 51.2월에 문막거쳐 양평 우측방으로 진출
좌측에 영국군이 있는데 합동작전도 했다
그러다 그들 시레이션을 누가 훔쳐먹어 단체 기합도 받았다
우측에 8사단이 망가졌다는 소문이 무성함
3월에 횡성지나 홍천을 거쳐 진격함
그런 어느날 공용휴가로 대구로 내려가는데 일본 도요다 타고 갔다
음성를 지나는데 7연대 영현처리반이 167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1박2일간 화장,
자가봉송으로 보내어짐
★50년 7월초 음성-동락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인원인지 아니면 어쨋든 국군을 발굴해서~~
★그런데 사실 공용휴가가 당시 연대별로 10여명씩 여성들이 있었는데 상부지시로 모두 돌려보내라 해서 인솔차 경비소대장 기창모 소위와 청주로, ~~
보낼 때는 당시 쌀 10가마씩 배급~~ㅜㅜ
얼마나 배고픈지 밥이 최고였다
51년2월경에 최초로 통조림이 배급되는데 비빔밥이다
통조림에 구멍을 뚫어 철모로 데운다음 철모속에 까놓고 먹는데 꿀맛이다~~?
사창리로 들어와 중공군에 포로가 됨
신의주에서 백두산 방향으로 천마산인지 탄광일대에서 마지막 포로생활
이질 장티푸스등으로 많이도 죽어나가는데 수용소 근처 어딘가에 묻힌다
못 먹어서 너무 왜소해 비참했다
동료들이 갔다묻는데 너무 힘들고 힘들어~
★하루에 2~3명씩 죽어 나갔다
하지만 수용소 인근이라는 것만 알지 더 이상은 모른다고 한다
휴전이 되어 걸어나오는데 길 옆에 북한군이 울고 있다
★이유는 그도 국군인데 북한군으로 전향한 것이고 휴전으로 돌아가는 국군을 보니 안타까운 나머지 흘리는 눈물이었단다
☞부모형제를 볼수없으니~~~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