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문화원 용문분원장 홍인기 010-3267-7890
틀린부분이 너무 많아 글 올립니다.
성인 공자의 열 제자 중의 한 명인 민손(자는 자건)의 후손인 민칭도가 고려중엽 사신으로 왔다가 귀화하여 여흥민씨 시조가 되시다.
단본으로 경기도 여주(여흥(驪興))에 정착하여 살았고 상의봉어(정 6품)를 지내셨음.
4세 휘 영모 태자태사를 지내고 ,시호는 문경
5세 휘 식(상서공파) 26개 파, 휘 공규(정의공파) 20개파 중 휘 공규 손으로
6세 휘 강균, 휘 적균, 휘 인균, 휘 양균, 휘 광균 중 장손 휘 강균 손으로
12세 휘 세영(世榮) 전서공 파조이시고 관직은 고려말에 공조전서
13세 휘 경(卿) 감찰어사
14세 찬성공 휘 승서(承序)
?~1468년(세조 14) 1/2
할아버지는 전서공파조 세영(世榮)이고, 아버지는 감찰어사 경(卿)이며, 세종대왕의 사돈이다.
1427년(세종 9) 진위현감, 1444년(세종 26) 풍저창사, 1447년(세종 29) 호조정랑, 1455년(세조 1) 3등 원종공신, 좌찬성.
세종대왕 신도비에도 올라있고 밀성군 파조 밀성군 이침(李琛)의 장인이고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외고조부이시다.
15세 부사공 휘 함(諴)
1432년(세종 14)~1487년(성종 18)
전서공파조 세영(世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어사 경(卿)이고, 아버지는 찬성공 승서(承序)이며, 어머니는 강화황씨 서운관정 석(碩)의 딸이다.
1460년(세조 6) 3등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472년(성종 3) 임진문과에 급제, 1474년(성종 5) 청송도호부사, 1483년(성종 14) 선산부사.
부인 충주박씨 예흥의 따님 묘소만 1517년(중종 12) 부용리 화계산 삼태봉에 계셨는데 수원 광교산에 계시던 14세 찬성공과 15세 부사공의 묘소를 1982년 부용리로 이묘.
여흥민씨 전서공파 입향조 1470~80년경 년 입향해서 현재까 약 540 년 동안 부용리가 세거지이다.
16세 첨정공 휘 계증(季曾)
1477년(성종 8)~1553년(명종 8)
자(字)는 희참(希參). 감찰어사 경(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공 승서(承序)이고, 아버지는 부사공 함(諴)이며, 어머니는 충주박씨 예흥(禮興)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 평구찰방(平丘察訪)) . 돈녕첨정(僉正), 양구(楊口)와 영유(永柔)에서 모두 소문난 치적이 있다.
첫 째 사위는 좌의정 유관(柳灌), 둘째 사위는 좌참찬 김인손(金麟孫).
17세 전첨공 휘 총(叢)
찬성공 승서(承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공 함(諴)이고, 아버지는 첨정공 계증(季曾)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 목사 윤종(允宗)의 딸이다.
1553년(명종 8) 수원판관(水原判官), 1556년(명종 11) 옥천군수. 종친부 전첨을 지내심
18세 목사공 휘 시중(時中)
1519년(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정(仲正). 함(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증(季曾)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총(叢)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장령 사공(思恭)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8년 다시 사마시에서 진사가 되었다.
1549년 성균관에 등용되고, 그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65년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그해 교리가 되어 사대와 교린에 관한 문한(文翰)을 도맡아서 작성하였다. 이듬해인 1566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다시 교리가 되었다가, 여주목사. 1575년(선조 8) 수원부사를 지냈다.
증 이판 휘 세주(世舟)
자는 제경(濟卿). 함(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증(季曾)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총(叢)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장령 사공(思恭)의 딸이다.
증 예조참판 휘 치중(致中)
1536년(중종 31)~1574년(선조 7)
함(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증(季曾)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총(叢)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장령 사공(思恭)의 딸이다.
19세 승지공 휘 호(頀)
1536년(중종 31)~1574년(선조 7)
자는 극화(克和). 계증(季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총(叢)이고, 아버지는 증 예조참판 치중(致中)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창신교위 억년(億年)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삭호(削號) 문제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듬해인 1618년 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서궁분승지(西宮分承旨)가 되어 홀로 대비를 시종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20세 참찬공 휘 응형(應亨)
1578년(선조 11)~1662년(현종 3)
자는 가백(嘉伯). 총(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중(致中)이고, 아버지는 승지 호(頀)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예조좌랑 익세(翼世)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한때 양근(揚根)으로 퇴거했다가 1615년 승문원박사를 거쳐, 1621년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郎)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집의(執義)·교리·사간·동부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 등을 두루 거치면서, 시폐(時弊)나 언로(言路)가 막혀있는 문제점을 간하였다. 또한 인조가 경연(經筵)을 폐지하자, 신진 유신들이 국왕의 얼굴도 모른다며 유신들을 만나 대화할 것을 강력히 청하는 등 바른말을 서슴지 않아 이름이 있었다.
1643년(인조 21) 대사간이 되고, 곧 이어서 병조참의가 되어 최명길(崔鳴吉)·김류(金瑬)·심기원(沈器遠) 등 대신들을 탄핵했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한 때 추고(推考)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좌부승지·이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을 때, 김류를 공척(攻斥)하다가 순천부사로 출보(出補)되었다.
그러나 인조와 김류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1646년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고, 순천에서 상경하여 동작진(銅雀津)에 이르러 강빈(姜嬪)의 옥사(獄事)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길로 입궐하여 강빈을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이에 강빈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파직을 자청하고 벼슬을 떠났다.
1649년 인조의 노여움이 풀려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부제학으로 돌아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병조참판·대사성·대사헌·예조참판·이조참판·공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왕도(王道)를 설파하고 당쟁의 폐를 논하였다.
또한 궁가설장(宮家設莊)의 폐(弊)를 극간하고 김육(金堉)의 경제 정책에 도움을 주는 등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민응형의 논리가 공명정대했기 때문에 군왕을 비롯하여 이해가 엇갈린 당인(黨人)들도 감히 민응형을 해치지 못하였다. 1660년(현종 1) 공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우참찬이 되었다.
당시 윤선도(尹善道)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西人)에 의하여 삼수(三水)로 귀양갔을 때 누구도 무고함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민응형이 윤선도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서인의 노여움을 샀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62년 우참찬 재직 중에 8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일생을 광해군과 인조·효종·현종에 역사하면서 직언으로 이름이 났다.
묘소와 신도비는 김포 월곳면에 계시다.
부사공 휘 응경(應慶)
1582년(선조 15)~1657년(효종 8)
자는 선장(善長). 총(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중(致中)이고, 아버지는 승지 호(頀)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 예조좌랑 익세(翼世)의 딸이다. 응형(應亨)의 弟이다.
1606년(선조39) 병오 식년시에 진사가 되고, 1628년(인조 6) 감역관으로 임진왜란으로 불탔던 창경궁을 수리하였고, 1636년(인조 14) 예산현감, 1643년(인조 21) 호조정랑, 1644년(인조 22) 금부도사, 형조정랑을 역임하고, 1649년(인조 27) 회양부사 제수,1650년(효종 1) 양양부사를 지냄.
동지공 휘 응회(應恢)
1582년(선조 15)~1653년(효종 3)
자는 이정(而精), 호는 환성(喚醒). 총(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판 세주(世舟)이고, 아버지는 영(韺)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 습(習)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12년 승정원의 가주서·주서와 세자시강원의 설서·사서를 역임.
1626년(인조 4) 홍문관부수찬·사헌부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순안어사(巡按御史)로 황해도의 호패(號牌) 사용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파견되고, 1628년 공주목사로 부임, 선정관(善政官)으로 이름을 날렸다. 1635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이르렀다.
대사헌공 휘 응협(應協)
1597년(선조 30)~1663년(현종 4)
자는 인보(寅甫), 호는 명고(鳴皐)·창주(滄洲). 총(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이판 세주(世舟)이고, 아버지는 영(韺)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 습(習)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지평을 역임하고, 1635년 홍문록에 올랐다.
1638년 필선·사간·수찬·장령·교리를 거쳐, 1644년 광주목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아갔다. 다음 해 내직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이내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에 파견되어 왜신 접대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1646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며, 부사로서 형률 집행에 매우 근엄하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이때 왜관(倭館)의 담이 헐자 왜인들이 이를 이용, 왜관을 넓혀줄 것을 강청하였으나, 민응협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들의 세를 꺾었다. 1649년 동래부사에서 안변부사로 전임하였으며, 이듬해 경상감사가 되었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대사성·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653년(효종 4) 왕조실록을 춘추관과 사사고(四史庫)에 분장(分藏)할 때 어명으로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이를 보살폈다. 1655년 도승지가 되고, 다음 해 함경감사를 거쳐, 1657년(효종 8)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그 뒤 다시 대사성·대사헌·병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대사헌의 직을 사퇴하고, 그 해 죽었다.
묘소와 신도비는 하남 춘궁동에 계시다.
21세 목사공 휘 도(燾)
1607년(선조 40 )~1684년(숙종 10)
자는 태초(太初), 예조참판 치중(致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호(頀)이고, 아버지는 부사 응경(應慶)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 몽원(夢轅)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기묘 식년시 생원이 되고 1647년(인조 25) 상옹봉사, 1649년(인조 19) 금부도사, 좌랑 ,1652년(효종 3) 평시령 ,1653년(효종 4) 면천군수, 1660년(현종 1) 함흥판관, 1663년(현종 4) 공조정랑 ,군기첨정 ,1664년(현종 5) 평산부사 ,1666년(현종 7) 김제군수 ,1672년(현종 13 ) 백천군수, 해주목사
묘소와 묘갈은 김포 월곳면에 계시다.
첨정공 휘 후(煦 )
1610년(광해 2)~1663년(현종 4)
자는 욱초(旭初), 예조참판 치중(致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호(頀)이고, 아버지는 부사 응경(應慶)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 몽원(夢轅)의 딸이다.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의 양자로 가다.
1639년(인조 17) 기묘 식년시 생원이 되고 1648년(인조 26) 형조좌랑, 1649년(인조 27) 고령현감이 되셨다가 횡성현감이 되다. 1657년(효종 8) 형조정랑, 통진현감, 1659년(현종 원년) 호조정랑, 선공첨정.
묘소는 김포 월곳면에 계시다.
현감공 휘 임(㶵)
1619년(광해 11)~1682년(숙종 8) 10/10
자는 덕이(德而), 예조참판 치중(致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호(頀)이고, 아버지는 부사 응경(應慶)이며, 어머니는 남평문씨 몽원(夢轅)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兄인 도(燾), 후(煦 )와 동시에 기묘 식년시 생원이 되고 1652년(효종 3) 형조좌랑, 1653년(효종 4) 대흥현감.
좌의정 휘 희(熙 )
1614년(광해 6)~1687년(숙종 13)
자는 호여(皞如), 호는 설루(雪樓) 또는 석호(石湖). 증 이판 세주(世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韺)이고, 아버지는 참판 응협(應協)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 수현(壽賢)의 딸이다. 암(黯)의 兄이다.
1650년(효종 1)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과 장령을 거쳐 1657년 보덕(輔德)으로 승진했으며, 집의(執義)를 거쳐 1661년(현종 2)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2만 7000여 명에 달하는 기황민(饑荒民)과 여병(癘病)에 신음하는 3,600여 명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관찰사인 민희는 이러한 곤민을 급히 진여곡을 풀어서 구제해 도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62년 승지가 되었고, 1663년 양주목사가 되었으나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사액치제(賜額致祭) 때 전례(典禮)에 잘못이 있다고 해서 파직되었다. 그 뒤 곧 좌부승지로 복직되어 형조참의를 지내고, 16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668년 호조참판으로서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1669년 한성부판윤·관상감제조와 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70년 청사(淸使)를 보내는 반송사(伴送使)가 되었으며, 167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75년(숙종 1) 국장도감당상(國葬都監堂上)이 되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판의금부사·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1677년 우찬성,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1680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원래 남인이었던 민희는 숙종의 즉위 이후 남인의 득세로 정계에서의 활약이 컸다. 특히, 송시열(宋時烈)을 영수로 하는 서인에 대한 의견 차이로 남인이 갈라질 때,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하는 탁남(濁南)이 되어 더욱 조정에 중용되었다. 그러나 1680년의 경신환국 당시 남인이 실각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1686년에 풀려나서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좌찬성 휘 점(點)
1614년(광해 6)~1680년(숙종 6)
자는 성여(聖與), 호는 쌍오(雙梧). 증 이판 세주(世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韺)이고, 아버지는 참판 응협(應協)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 수현(壽賢)의 딸이다. 응회(応恢)에게 입양되었다. 兄 좌의정 희(熙)와 쌍생아이고 암(黯)의 兄이다.
1651년(효종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1656년 문과 중시(文科重試) 병과로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거쳐 1666년(현종 7)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670년 안태사(安胎使)로 태봉(胎峰)에 편입된 전토(田土)를 관둔전(官屯田)으로 보상하게 하였다. 1671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74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숙종 때는 형조판서·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1677년(숙종 3)의 증광시(增廣試) 때 아들 민주도(閔周道)의 과거부정사건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하여 공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우의정 휘 암(黯)
1636년(인조 14)~1694년(숙종 20)
자는 장유(長孺), 호는 차호(叉湖). 증 이판 세주(世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韺)이고, 아버지는 참판 응협(應協)이며, 어머니는 풍산김씨 수현(壽賢)의 딸이다. 兄은 좌의정 희(熙)이다.
1668년(현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승지·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고산찰방(高山察訪) 조지겸(趙持謙)이 당시의 함경도관찰사인 이원록(李元祿)이 분수에 넘치게 역마(驛馬)를 탄다 하여 탄핵하였다. 이때 민암은 자기가 함경도관찰사 때의 그 곳 실정과 경험을 자세히 들어서, 이원록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극구 변명하여 도리어 탄핵한 조지겸을 문초받게 한 사실은 유명하다.
1678년 동지사 겸 변무부사(冬至使兼辨誣副使: 변무부사는 당시 명나라에서 인조반정에 대하여 잘못 기록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파견된 사신임)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을 거쳐 1680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남인(南人)이 실각하자 파직되었다.
1682년 서인(西人) 김중하(金重夏)로부터 모반한다는 무고(誣告)를 받았으나 조사 뒤 무사하였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다시 대사헌에 기용되어서는 이조판서 심재(沈梓)와 함께 서인 김수항(金壽恒)·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여 그들의 처형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이어 대제학·병조판서를 역임했고, 1691년 우의정에 승진했으며,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김춘택(金春澤) 등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를 복위하는 음모가 있다는 고변(告變)이 있자, 남인의 영수이던 민암은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과 함께 옥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숙종은 갑자기 남인을 쫓아내고 서인을 등용하는 갑술옥사를 일으켰다. 이 옥사로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탄핵으로 곧 이의징과 더불어 사사되었다.
22세 참의공 휘 안도(安道)
1631년(인조 9)~1693년(숙종 19)
자는 여행(汝行),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점(點)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안동김씨 시양(時讓)의 딸이다. 병조판서 종도(種道), 함평현감 홍도(弘道)의 兄이다.
1675년 숙종1년 증광시 문과급제, 경기도사, 용강현령, 경신대출척으로 실각했다가 기사환국으로 돌아와 회양부사, 장령, 공조참의를 지냈다.
병조판서공 휘 종도(宗道)
1633년(인조 11)~1693년(숙종 19)
자는 여증(汝曾).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점(點)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안동김씨 시양(時讓)의 딸이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예문관대교가 되고, 1664년 봉교를 거쳐 1665년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다시 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할아버지가 이조참판, 큰아버지 민희(閔熙)는 좌의정, 아버지는 좌찬성, 동생 민홍도(閔弘道)는 이조정랑을 각각 지낸 명문이었다. 이러한 전통에 힘입어 헌납·필선·부승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고, 1668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었으며, 1674년 병조참지가 되었다. 숙종조에 이르러 대사성, 평안도 관찰사,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으로 계실때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과 실각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돌아와 이조참판, 공조, 예조판서, 1692년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35년(인조 13)~1674년(현종 15)
자는 여능(汝能),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점(點)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안동김씨 시양(時讓)의 딸이다.
1668년(현종 9) 무신별시에 장원급제, 예,병조좌랑, 경상도사와 함평현감을 지냈다.
1633년(인조 11)~1698년(숙종 24)
자는 정숙(正叔).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희(熙)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 관찰사 세구(世矩)의 딸이다. 창도(昌道), 흥도(興道) 의 兄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덕행을 갖추었다. 1675년(숙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7년 홍문록에 오르고, 수찬이 되었다. 같은 해 교리를 거쳐 다음 해 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동부승지가 되었다.
1680년 승지가 되고, 이어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93년 청차사행(淸差使行) 박창한(朴昌漢)을 수행하는 대청외교분야에까지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형조판서에 특승되었다.
휘 창도(昌道)
1654년(효종 5)~1725년(영조 1)
자는 사회(士會), 호는 화은(化隱).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희(熙)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 관찰사 세구(世矩)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0년 정언이 되었고, 1689년 부제학 유명현(柳命賢) 등이 홍문록(弘文錄)을 만들 때 1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 해에 헌납·부교리를 지냈고,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중 호당시(湖堂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숙종으로부터 상으로 표피(豹皮)를 받았다.
1690년 헌납으로 사서(司書)를 겸하였고, 이어 이조좌랑·승지를 거쳐 1691년 경상도관찰사, 이듬해 부제학을 거쳐, 1693년 이조참의, 1694년 대사성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장수(長水)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곽산의 개원사(開元寺) 불량비문(佛糧碑文)과 영변의 보현사(普賢寺) 월저대사비문(月渚大師碑文)을 찬하였다.
휘 흥도(興道)
1655년(효종 6)~1710년(숙종 36)
자는 계상(季祥), 호는 심은(心隱).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희(熙)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 관찰사 세구(世矩)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90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한림(翰林)으로 등용되어 그 뒤 교리·이조정랑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숙부 우의정 암(黯)이 당쟁에 휩쓸려 화를 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금산(金山)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휘 장도(章道)
1655년(효종 6)~1694년(숙종 20)
자는 여명(汝明). 영(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응협(應協)이고, 아버지는 남인의 거두였던 우의정 암(黯)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 참판 시진(始振)의 딸이다.
1679년(숙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91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3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1694년 사헌부지평·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 이때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실세한 서인들은 폐비민씨의 복위를 통한 재기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민암은 1694년 4월 아들 민장도를 시켜 그들의 조직과 계획을 탐지하게 하여 주동자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 수십인을 체포하여 국문(鞫問)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장희빈(張禧嬪)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은 갑자기 국문을 중지시키고, 도리어 민암을 비롯한 남인들을 화(禍)를 꾸민 죄로 처단하였다. 이리하여 남인들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이때 아버지 민암과 함께 국문 도중 장독으로 졸하였다.
23세 휘 언량(彦良)
1657년(효종 8)~1701년(숙종 27) 12/1
자는 뇌중(賚仲). 응회(應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점(點)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종도(宗道)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대사헌 완언군 만(曼)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 1689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90년 검열(檢閱), 1692년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거쳐, 순조롭게 홍문관과 한림(翰林)에서 활동하였고, 또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민언량은 1694년 갑술옥사로 아버지 민종도 등을 비롯한 다른 남인들과 함께 찬배(竄配)되었다.
그 뒤 1699년에 풀려나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친교하면서 남인의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1701년 민비(閔妃)가 죽고 희빈장씨를 비롯한 국모모해사건이 드러남에 따라 이 사건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장희재와 친교하였던 다른 남인들도 옥사를 당함에 함께 처형되었다.
23세 동지공 휘 유(裕)
1671년(현종 12)~1745년(영조 21)
호는 송암(松庵). 회양부사 응경(應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해주목사 도(燾)이고, 아버지는 화곡공 윤기(潤基)이다.
1717년(숙종 43) 광량첨사를 지내실때 평안도 어사 김운택 이 돌아와 복명하다. 광양첨사 민유(閔裕)는 진(군사적 요지)의 병졸들을 위로하며 구휼 하고 관청의 일은 열심히 수행 하였으며 진휼곡식은 요청하여 얻은것 이외에 자신이 직접 벼 30석을 마련하였습니다. 겨울부터 진 아래에 거주하는 의지할때없는 사람을 가려서 뽑아 구제양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해가 바뀐후에도 가난한 병졸 1백수십명을 추가로 뽑아 열흘간격을 규칙으로하여 소금, 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역시 넉넉하게 나누어 주어 모두가 칭찬하고 있습니다. 병선두척을 개소(수리)할 재료도 다시 장만하여 준비해 둔것이 또한 많습니다. 선소좌기청(배와 관련되어 사무를 보는 집무실) 기와집 여섯칸 역시 지을 계획임을 아뢰옵니다.(수의록 10) 창덕궁 가위장, 문수별창을 지내시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전행광양진수군첨절제사(前行廣梁鎭水軍僉節制使) 동지중추부사를 지내심.
1697년(숙종 23)~1768년(영조 44)
자는 행원(行源), 호는 죽헌(竹憲). 해주목사 도(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화곡공 윤기(潤基)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유(裕)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 주부 창장(昌長)의 딸이다.
1728년(영조 4) 무신별시 무과급제, 1731년(영조 7) 군기판관, 1733년(영조 9) 군기첨정, 1734년(영조 10) 양덕현감, 1743년(영조 19) 군산첨사, 1752년(영조 28) 광양현감을 지내셨다.
25세 휘 수현(修顯)
1759년(영조 35)~1825년(순조 25)
자는 사은(士殷),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총(叢)의 후손이며, 고조는
좌랑(佐郞) 임(㶵)이고, 증조부는 계기(季基)이며, 조부는 첨(䄡)이다. 부친 통덕랑(通德郞) 효창(孝昌)과 모친 부사(府使)
김준(金浚)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상동(李相東)의 딸이다.
1784년(정조 8) 정시에서 병과 38위로
급제하였다.
1812년(순조 12) 민란(民亂)이 발생하였는데, 농민군은 관군과 싸워 패전하게 되었다. 이후 잔당들이
정주성(定州城)으로 퇴각하여 항거를 계속하였는데, 민수현(閔修顯)은 윤민동(尹敏東)‧장낙현(張洛賢) 등과 함께 관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전하여,
정주성의 동북쪽을 협공하였다. 이후 정주성을 함락하는데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다.
26세 휘 중헌(重憲)
1797년(정조 21)~1855년(철종 6)
자는 대여(大汝) .진해현감을 지낸 수익(修益)의 친자로 칠곡부사 박천군수인 수현(修顯) 에게 입적하였다.
1825년(순조 25) 을유 알성시 무과 급제하고 헌종1년 1835년 선전관, 1844년( 헌종 10) 낙안군수를 지냈다.
27세 휘 경호(景鎬)
1816년(순조 16)~1883년(고종 20)
자는 원명(元明). 통덕랑(通德郞) 효창(孝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천군수인 수현(修顯)이고, 아버지는 낙안군수 중헌(重憲)이며, 어머니는 연안김씨 이다.
1849년(철종 원년)에 장수찰방을 지내시고 인의를 지냄.
휘 두진(斗鎭)
1807년(순조 7)~?
자는 성칠(聖七). 통덕랑(通德郞) 효창(孝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인 수익(修益)이고, 아버지는 중여(重汝)이고 어머니는 전의이씨이다. 통덕랑 중원(重源)에게 입적하였다.
1835년(헌종1) 을미 증광시 무과급제, 1852년(철종3) 종4품 (선략장군) 수문장을 지내셨다.
28세 휘 영한(泳翰)
1851년(철종 2)~?
자는 여장(汝章). 진해현감 수익(修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수찰방 경호(景鎬)이고, 아버지는 수문장 두진(斗鎭)이고 어머니는 홍주이씨이다.
1874년(고종11) 갑술증광시 무과 급제.
1890년 의금부 도사, 1900년 천릉도감 낭청을 지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