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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신아 선생은 1926년 10월 26일 제주도 서북부에 위치한 한경면 두모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때 학창생활을 마치고 일본해군지원병(사실 강제징집)으로 입대하여 지금의 해병대인 육전대에 복무하였다.
조국광복으로 무사히 귀향하여 정착 중에 1948년 4.3사건을 만났다.
□ 4.3사건발발과 청년방위대 발족
1948년 4.3사건 발생으로 당시 제주지구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통행증제(通行證制)실시,
양민증(良民證)발급, 민보단(民保團)창설, 중산간 부락 소개령(疏開令), 도 전역 부락마다 축성화(築城化), 보병 제9연대 및 제11연대가 무장대토벌작전을 수행, 진압차군원부대 내도 등 제주도사에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때 좌우익의 대립 속에 사건진압과정에서 많은 도민들이 희생되었으며 무장대의 습격을 막아내기 위하여 마을에 축성을 하고 주민들이 경비를 하였다.
좌신아 청년은 1950년 3월 1일 충남 온양소재 ∗육군방위훈련학교(교장 대령 朴勝薰) 제4기 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하였다.
∗육군방위학교
미군정시에는 퀸셋(Quonset)을 30여동이나 신축하여 경비대 장병의 치료를 위하여
제109 육군병원을 개설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곳에서 보병 제5연대, 제13연대, 제18연대를 창설하였고
1949년 12월1일에는 육군방위훈련학교가 청년방위대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청년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20만 명의 민병을 조직하여야 한다고 천명하였다.
이에 따라 1949년 11월 초에 병역에 편입 될 때 까지 청년들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병역 법 제77조에 규정하였다.
이를 근거로 1950년 3월에는 청년방위대 조직을 위한 세부계획을 발표하였고
이미 1948년 신성모(申性模)가 주동이 되어 결성한 우익 청년단체인 대동 청년단을 주축으로 하여 1950년 3월 15일 청년방위대는 창설되었다.
그 성격은 군사조직이나 민병은 아니면서도 반공과 치안유지에 협력하는 활동을 그 임무로 하였다.
부대 편성을 보면 도 단위에는 사단급인 도 방위도단을 두고 단장에는 방위중령을,
군단위에는 연대급인 방위지대를 두고 지대장에는 방위소령을
읍면단위에는 대대급인 방위편대를 두고 편대장에는 방위대위를
그 밑에 중대급인 구대를 두고 구 대장에는 방위중위를,
그 밑에 소대를 두고 소대장에는 방위소위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도· 군· 읍면· 리 까지 조직을 확대, 청년들을 흡수하고 여자청년방위대도 조직하였다.
1950년 3월 15일 현재 육군본부직할로 17개단과 3개 독립 단 등 20개 청년 방위 단이 편성되면서 청년방위대에 근간이 될
간부요원확보를 위하여
◦제1.2기 간부요원 720명을 경기도 시흥소재 육군보병학교 배속장교교육대에 파견해 40일간 교육훈련을 시켰다.
◦제 3기 간부후보생은 온양의 방위훈련학교에서 1개월간의 교육을 시켰고
◦제 4기 간부후보생들은 신체검사와 전형을 거쳐 선발된 207명의 제주도 출신으로
1950년 3월 1일 입교하여 3월 31일 졸업과 동시에 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들은 19세부터의 젊은 청년들로 교사, 공무원, 경찰관, 회사원, 청년단간부, 학생 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1개월간 간부로서 갖추어야할 군사부문의 교육훈련을 이수하고 3월 31일 졸업과 동시에 신성모 국방부장관명의로 된 예비역소위 임관장을 받았다.
* 이 온양 소재 방위훈련학교는 제 4기생을 배출한 후 경기도 수원으로 이전하여 옛 육군 보충대 건물에서 제 5기 간부후보생을 졸업시키고는 1950년 6월 10일 폐교하였다.
따라서 청년방위대는 1.4후퇴 후 국민방위군을 조직하는 모체가 되었다.
좌신아 소위는 동료들과 함께 귀향하여 청년방위대 조직훈련에 착수하였다.
1950년 4월 1일 청년방위대 제주도방위단이 편성되고 단장에는 방위중령 강성건이 임명되었으며 제주읍 일도리(전 한일은행지점자리)에 단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 산하 제1방위지대는
북제주군 청년방위대를 관장하였고 지대장에는 방위소령 김재봉이었다.
그 밑에 제1방위편대를 제주 읍에
제2방위편대를 한림읍에 두었고 편대장은 방위대위 좌신아였다
제3방위대는 구좌 면에 두었다.
제2방위지대는 남제주군 청년방위대를 관장하였고 지대장에는 방위소령 부윤경이었다.
그 밑에 제1방위편대를 서귀 면에
제2방위편대를 대정 면에
제3방위편대를 성산면에 두었다.
그 당시 20세에서 30세 미만 공직자를 제외한 젊은 청년들이 모두 청년방위대에 가입하였으며 예비역 소위들은 군사훈련지휘와 함께 향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군경합동으로 청년방위대를 지휘하여 재산무장대를 사살 또는 생포하여 도내치안을 소강상태로 확보하였다.
□ 한국전쟁발발과 참전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무력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개전 초 북한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낙동강남쪽 한 귀퉁이를 제외한 전 국토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자 제주도는 경상도 일부와 함께 병력자원을 공급해주는 전략기지가 되었다.
제주도는 7월16일 건입 리에 위치한
제주주정공장에 육군 제5훈련소(소장 대령 金炳徽)가 설치되었고
그 산하에 제1교육대를 상모 리에
제2교육대를 한림에
제3교육대를 주정공장에
제5교육대를 제주농업중학교에
독립대대를 서귀 국민학교와
김녕 중학교에 각 각 두었다.
참전 지망한 1만 여명의 장정들의 신병훈련을 담당할 소대장급 간부들이 절대 부족하여 육군본부에서는 육군방위훈련학교 제4기 간부후보생 출신들로 충원키로 하였다.
훈련소에서는 전형을 통하여 좌신아 소위를 포함 187명을 선발하였다.
단기간의 군사훈련과정을 마치고 출정한 030군번 장정들은 낙동강 교두보의 숨통을 뚫고 반격작전의 주요한 일익을 맡은 주역들이었으며 전투영웅들이었다.
이 방위학교 출신 187명과 9월1일부터 육군 제5훈련소에 입영하여 030군번을 부여 받은 약 10,000여명의 병사들은 9월 하순부터 용약전선으로 출정하였다.
그들은 보병 제11사단(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을 창설하였고 보병 제5사단, 제6사단, 제9사단, 제3사단증편요원이 되어 제일선의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조인 시까지 지리산 공비토벌, 동부전선, 중동부전선, 중부전선에서 적과 맞서 싸웠다.
그 때 참전했던 50동지회 참전장교는 187명(소위 19명, 중위 36명, 대위 55명 소령47명 중령24명 대령6명)으로 39위가 전사하고 전상으로 34명 사망 제대 후에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81명이 타계하였고 이 중 현재 33명이 사회에 나와 조용히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분들도 많지만 사회에 나온 후 전투시의 후환으로 일찍 요절한 분들도 있었다.
고태문 대위는 전쟁기념사업회가 1994년 4월에 선정한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분으로 선정되었다.
지난 날 50동지들이 한라산 무장대진압작전, 제5훈련소 강병양성, 6.25전쟁의 주역으로 정신했던 업적들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60년 10월 서울 용산 삼각지 한일회관에서 참전동지회창립회를 개최 1966년 6월 제주시내 대한상이군경회사무실에서 50동지회의 이름으로 창립하여 평생 동지임을 다짐했다.
50동지회원들은 전장에서 산화했거나 타계한 전우들의 명복을 빌면서 상호간의 친목도모와 경조사문방적극참여와 불우회원지원사업과 지역사회개발에 모든 역량을 경주하고 있다.
□ 부산에서 재편성 하고 전장으로
제주를 떠나 1950년 9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제주의 장정들은 부산의 여러 학교에 분산수용, 여기서 재편성되어 보병 제5사단, 보병 제6사단, 보병 제9사단, 보병 제3사단 및 보병 제11사단으로 각각 배치되었다.
그 중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신편사단으로 사병의 절반은 제주출신으로 이사단은 화랑사단이라고도 하는데 1950년 8월 27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4호로 경북영천에서 창설 되었다.
제11사단 밑에는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 등 전투제대와 이 보병연대를 지원할 제 20포병대대와 공병대대등으로 편성되었다.
* 제9연대는 1946년 11월 5일 제주도 남제주군 모슬포에서 장창국 중위가 창설한 부대다.
그 후 1948년 말 4.3사건시는 송요찬 중령이 연대장이었는데 과잉진압으로 수많은 양민을 희생시키고 동년 12월 29일 제주를 떠나 군산에 상륙하였다.
그 즉시 대전으로 이동하여 6개월 정도 체재한 후에 이 부대는 다시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주둔했다.
그 후 1952년 초 제9연대는 보병 제7사단 산하고 편성되어 포천에 위치한 가양리~양문리 간을 전술구역으로 맡아 38선 경비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교전이 벌어졌고 북한군의 T34형 전차의 위력에 부대는 후퇴를 거듭하여 병력이 거의 손실되었다.
그래서 그해 7월 충주에서 편성된 수도사단이 제1연대 제3대대로 흡수되면서 제 9연대는 육군편제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대반격작전으로 육군을 증강하여야 해서
1950년 9월 25일 대구방직공장에서 김희준(육사2기) 대령을 연대장으로 재창설하였다.
제 13연대는 제주도 모슬포에서 제9연대장을 역임했던 이치업 소령을 연대장으로 1948년 5월 21일 충남온양에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개전 초 병력이 거의 소모되어버려 1950녀 9월 25일 경남 진해여자중학교에서 유흥수 대령에 의해 재창설하였다.
제 20연대는 1950년 9월 25일 경남 삼랑진국민하교에서 박기병 대령을 연대장으로 새로 창설한 부대였다. 이 사단의 소대 장급 장교는 50동지들로 구성된 제주 인이었다.
제주출신 030군변을 부여받은 사병들은 만 16세부터 어린학생층이 많았고 상황판단과 적응력이 높았다.
당시 전황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과 더불어 낙동강방어선에서 총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이에 따라 아군의 전광석화와 같은 진격으로 말미암아 퇴로가 차단된 적 패잔병
1만2천명이 서남부지구(전북. 전남. 경남의 소백산맥지역)일대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지방적색분자와 합류하여 전남도당 유격대를 조직하고 총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지리 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속리산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도처에 인민공화국 상태를 이루고 산간지역 각 처에서 아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약탈, 지서 및 부락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 패잔병부대를 시급히 토벌하여 후방 치안을 확보하여야 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보병 제11사단을 서남부지구에 투입하였다.
제 11사단요원은 경상남도 일원에서 1주일 보충교육을 받고 제9연대요원은 상주로 갔다가 경남 지리산 인근지역으로, 제13연대는 전라북도 전주지방으로, 제 20연대는 전라남도 광주지방으로 도보행군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좌신아 소위는 제 9연대 제1대대 제4중대의 선임장교 및 제1소대장이었다. 제 1소대에는 부역옥(평대)소위, 제3소대장에는 오재선소위(토평) 동기생들이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 서남부지구(전북. 전남. 경남의 소백산맥지역)패잔병 토벌 작전(1950.10.4.~1951.3.30.)
1950년 11월 4일 제 9연대 제1대대는 상주를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 후 적 1개 대대와 접전하여 사살 532명, 포로 98명, 직사포1문, 기관총2정 각종소총 99정을 노획하였으며 남원지구 작전을 마치고 11월 24일 함양으로 이동하여 괴관산(함양 △1,251), 덕유산(△1,614)일대에
준동 중인 잔비소탕에 임하였다.
공비토벌작전은 적 근거지를 공격 교란하는 대대 단위 작전이었으며, 남원지구에서 첫 전과로 사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제11사단 사령부(화랑사단)를 남원으로 이동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월 6일 제9연대 제11대대는 제1중대를 남원군 인월면 인월리에 배치시켜 주로 남원~전주간의 도로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12월 10일 2·3·4중대는 계족산에 준동중인 잔비 약 300명을 공격케 함으로 12월 12일까지의 전과는 사살 44명, 포로 22명, 아지트 파괴 5개소, 소화기 10정을 노획하고 적의 주력을 천왕봉(지리산의 주봉 △1,915)으로 격퇴하고 이를 계속 추격하였다.
12월 16일 대대 전방지휘소를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에 설치하고 상촌리에 제1중대, 산청군 삼장면에 있는 대원사에 제2·3중대를 배치하여 출몰궁인 적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제4중대는 거창군 신원면 와룡리 부근에 배치하여 출몰중인 공비 40여명을 공격하여 공비 20여명을 사살하고 직사포 1문 소총 5정을 노획하고 가을 산 방면으로 압축하였다.
12월 23일 제1·4중대는 함양군 함양면 백천리에 진출하여 적정을 수색하는 도중에 적 300여명을 포착 교전 끝에 이를 백운산(△1,279)으로 격퇴하였다.
12월 25일에는 적을 구례군 토지면 내서리와 외서리에 이르기까지 추격하여 철마산으로 격퇴하고, 철마 산의 적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여 전과 82밀리 박격포 2문, 기관총 1정을 노획하였다.
12월 29일 제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이동한 후 1951년 1월 4일 시천면 내공리와 외공리지구로 전진하였다. 그 지방에 출몰하는 적 200여명을 포착하여 그 주력을 섬멸하고 잔여공비는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전과로는 적 사살 35명, 포로 5명, 부상포로 41명, 소총 5정을 노획하였다.
2월 6일 제1대대는 함양에서 마천면 가흥리로 이동하여 소탕전을 계속하였고 2월 7일에는 휴천면 남호리 일대를 거쳐 2월 18일에는 산물리에 진출하여 교전을 한바 적 사살 21명, 생포 1명, 소총4정을 노획하였다.
1951년 2월 19일 제1대대 제4중대는 덕유산지구 816고지를 수색하고 산청군 단성면 당신리에 도착하여 적을 수색하였다. 2월 21일 938고지를 경유하여 함양군 병곡면 월암리 경에 도착한 후 잠복하였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월 22일에는 신대리를 수색하여 흥덕산 1,080고지에 진출한 후 공비 50여명을 발견하고 이를 섬멸한 후 삼곡리 도착하였다
연대는 토벌기간 중 단계별로
① 각 지구 행정기관의 복구와 치안을 확보
② 적의 근거지를 교란하여 적의 보급로 차단 및 통신망을 두절시킴으로서 적의 월동대책을 방해하고 산간벽지의 주민을 평지로 소개시켜 농작물을 공동 수확케 하였다.
③ 아군은 아군의 전략상 후퇴와 중공군의 남침에 따라 점차 활발하여지는 공비의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는데 전 병력을 집중시켰다.
④ 1951년 2월 1일~3월 31일을 최종 공비토벌기로 정하고 관내 험준한 산악지대에 은거하여 준동하고 있는 잔비를 급속히 포위하여 협동작전으로 소탕함과 동시에 적 근거지를 완전히 탈취하였다. 그리고 화학 산과 우주리간 공비 소탕전에서는 박달(朴達) 남해 여단장, 부여 단장, 참모장 부관, 중앙 감찰부장, 전남 검찰청장(6.25적치하시), 중앙당 지부장 등 일당 86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1951년 4월 6일까지 각 단계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서 187일간의 서남부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종로하고 잔여 소탕 임무를 보병 제8사단에게 인계하였고 보병 제11사단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경남 함양을 출발하였다.
이에 따라 제 9연대 제1대대는 4월 12일~4월 15일까지 주변을 수색하면서 포항-구룡포 –주문진-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있는 낙산사에 집결하였다.
□ 884 고지전투(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1951.8.18~8.27)
이 때 보병 제11사단은 수도사단(사단장 준장 송요찬)과 함께 국군 제1군단(군단장 소장 백선엽)에 편성되어 동해안의 최전방에서 적 정예부대와 밀고 밀리는 대격전에 돌입하였다.
최전방인 동부전선에서 제 9연대가 치룬 가장 치열한 전투는 884고지 점령 전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에는 건봉령을 넘어서면 동서로 흐르는 남강이 있다.
남강의 수위는 무릎높이 정도이고 강폭은 10미터이내의 개울이었지만.
하천 양쪽의 다갈색모래사장을 합치면 30여 미터가 넘는다.
이 물길은 향로봉(△1,293)에서 발원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오며 하천을 이루고 고성을 거쳐 동해 바다로 흘러든다.
이 강의 북쪽에는 884고지가 있는데 동부지구에서 가장 요충인 감제고지였다.
이 고지는 아군이 진격할 남쪽으로는 거의 수직이었고 북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한 여러 능선이 접해있어 그쪽은 북한군이 지키고 있었다. 산악지대라 산자락에는 자욱한 안개가 덮여 있을 때가 많았다.
적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방어하고 있었고 아군은 그 산을 공격하려면 가파른 산을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니 가는 족족 전멸할 우려가 십중팔구였다.
그러나 이 고지가 차지하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철원평야의 백마고지처럼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 반복되었다.
이 고지 서쪽으로는 펀치볼(만리대분지)과 이어져 있고 아군방어선인 켄사스 선을 이 고지에서 깊숙하게 관측할 수 있었다. 또한 북한군의 보급로는 고성에서 이 고지 북부를 통하여 인
+제군 북면의 원통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이 고지를 잃어버리면 병참선이 차단되고 전선을 지탱하기가 어려우므로 이를 사수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북한군 제45사단 소속 6,500여명이 천험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철옹성 같은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군은 수색정찰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적정 판단을 할 수가 없어 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항공정찰과 각종 정보 등을 종합하여 제1군단(군단장 소장 백선엽)에서 작전명령을 하달하자 제11사단(사단장은 4.25부터 준장 오덕준)은 제9연대에 이 고지 탈환명령을 내렸다.
당시 좌신아 소위는 제9연대 제1대대 제4중대 제1소대장이었고 위력이 센 중기관총소대를 지휘하여 제1대대 제1중대에 배속되었다.
아군은 5월 16일 적의 제2창 춘계공세(5.15~5.22)로 말미암아 일단 전선을 강릉~대관령 선으로 전선을 남하 조정하였다.
그런 후 제 11사단은 5월 22일부터 동부전선의 우견부위로 진격하여 도주하는 적을 격파하고 북진한 끝에 6월 초순까지는 동해안의거진리~건봉령 선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중동부와의 전선균형을 맞추라는 군단의 계획에 따라 일단 진격 전을 멈추었다.
더불어 제13연대(연대장 대령 박률선)로서 건봉산(△911)일대를,
제9연대(연대장 대령 김안일)로서 건봉령 일대를,
제20연대(연대장 대령 박원근)로서 향로봉 북쪽의 1079고지를 점령하게 하여 상호 연결하는 주저항선을 형성케 하였다.
다음 좌 인접인 수도사단과 토기점을 제한점으로 유지하면서 위력 수색을 감행하는 한편 유개 호를 구축하고 진지를 보강하였다.
이렇게 전선을 정비한 후 8월 18일 여명에 884공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사천리 계곡에서 포성이 산야를 덮고 884고지~591고지~602고지를 연하는 능선에는 105밀리 야포와 미 극동함대에서 발사하는 8인치 함포가 작렬하였다.
그 직후 제9연대 제1대대 정용철 중령은 목표인 884고지를 향하여 양진한 끝에 07:00에는 고지 중복에 진입하여 삼면에서 포위망을 압축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 제45사단 예하 제2연대는 884고지~591고지~602고지에 유리한 지세를 이용하여 거의 필사적으로 완강히 버티어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병사들의 수류탄 돌격과 백병전으로 일시에 급습을 하여 적진을 붕괴시키고 일제히 적진내로 돌입하여 적을 모조리 사살하고 12:00에 884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날의 쾌승에 만족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 적은 일시 이곳에서 물러선듯하였으나 지근거리인 591고지~601고지~701고지에서는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강 건너편에는 그들의 주력이 건재하며
둘째 : 연대에서는 중원부대를 급파하여 작전상 방어진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하였으나 방어 전면이 방대하여 병력 증파가 어려웠고
셋째 : 이날 하오부터 일기가 급변하여 폭우를 동반한 강풍이 휘몰아쳐 한치 앞도 분별하기 어려운 불리한 여건 속에서 방어에 임하게 된 점 등이었다.
제1대대 제1중대는 일몰과 함께 사주방어 태세를 갖추었는데 18:00에 이르러 적의 포격이 시작되더니 수 미상의 적3개 부대가 폭우와 농무를 이용하여 역습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대는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한 채 300m쯤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그 즉시 대대장은 이 무명능선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저지선을 형성한 다음 반격 준비에 총력을 경주 하였다.
8월 19일 연대는 제2·3대대로 하여금 건봉산 서쪽으로부터 703고지에 이르는 전진진지를 고수케 한 채로 제1대대로서 884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재개토록 하였다.
이날 여명에 제1대대장은 대대를 간곡(884고지 동남쪽 2Km)부근으로 철수시킨 다음 05:00부터 제20포병대대와 미 극동함대의 전함과 순양함에 의한 함포사격으로 884고지와 그 일원의 적진을 강타한 연후에 06:00를 기하여 재공격을 감행하였다.
제 2·3중대를 좌 우 제일선으로 전개하고 제1중대를 예비중대로 보유하면서 진공하였는데 각 중대는 특공대를 편성하여 기필코 목표를 탈취키로 다짐하고 계속 진공하다가 08:30전날 격전을 치룬 이 고지의 8부 능선에서 다시 대규모의 적과 격돌하게 되었다.
1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2중대는 09:30에 선봉으로 적진에 돌입하였으며
특공조는 고지의 정상으로 올라 백병전을 감행하였다.
제1대대 제1중대의 주력은 후속 돌격으로 적진을 강타하였으며
제3중대가 곧이어 정상 좌측 배후로 돌입하고
제1중대의 협공으로 적은퇴각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884목표를 탈환한 대대는 강풍과 폭우가 계속되는 가운데 방위태세를 갖추었고
제1중대는 동고지 동사면에 있는 진지를 점령 고수하였다.
8월 20일 대대장은 중화기중대의 81밀리 박격포진지를 동고지의 동쪽으로 선정한 다음
중대장을 대동하고 지형정찰에 나섰다. 화력배치를 조정하고 진지내외의 지형을 감안하여 방비책을 수립하는 등 적의 예상 침공에 대처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 연일 계속되는 강풍과 폭우로 급조유개진지가 어려울 뿐 만 아니라 각종 화기가 본래 의 기능을 다하기 어려웠으며
둘째 : 원래 진흙으로 형성된 지형은 기동에 많은 제한을 주었으며
셋째 : 시계가 불량하여 적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데다가 협소한 기성진지를 이용함으로 상대 적으로 방어자가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며
넷째 : 향로봉 산맥이 동서로 가로막힌 산악지형으로 보급로가 매우 나빠 인력으로 10~13Km 의 산악을 넘어 보급을 추진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기가 불순하여 이것마저 여의치 못 한 까닭에 탄약과 식량의 부족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인 점 등이었다.
8월 21일 제1대대는 이날 전선을 더욱 보강하기 위하여 제2중대, 제3중대로 진지를 강화하게 하고 제1중대로 602고지의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제1중대는 07:00에 공격을 개시하여 동고지의 서사면까지 진공하였으나 09:00부터 다시 강풍을 동반폭우로 대대장은 공격을 일단 중지하고 원진지로 복귀시켰다.
그 후 제1대대가 884고지를 중심으로 사후 경계태세를 강화하는 중 13:00에 북한군은 폭우와 농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역습을 감행하여 왔다.
9시간 동안격전이 벌어지면서 대대장과 제2중대장, 제3중대장이 부상하는 등 전투 병력의 3분의 1이나 손상을 입었다.
계속적으로 폭우와 농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대대는 좌단진지가 무너지기에 이르러 대대 OP(전방관측소)는 703고지로 이동하고 주력은 간곡부근으로 철수하였다.
8월 22일 제9연대는 제1대대로 하여금 현진지에서 적세를 견제하는 동시에 제2대대에 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제3대대로 600~703 고지 선에서 전진 진지를 고수케 하였으며 부상으로 후송된 제1대대장(정용철 중령)의 후임으로 김용림 소령에게 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8월 23일 제1대대는 병력을 규합하여 진지를 강화하고
제2대대의 지원을 고대하면서 884고지를 목표로 기동하였다.
남강이 범람하여 강을 넘을 수가 없자 공병대의 지원으로 가교를 완성하고 도강을 하였다.
8월 24일 제2대대는 09:30에 제1대대와 합세하여 우측 제1선을 제1대대가 맡고 좌측 제1선을 제2대대가 담당하여 884고지를 목표로 제1대대는 일시에 적진에 돌격하여 적 8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세 번째로 884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는 이 전투의 전공으로 영예의 금성화랑훈장을 수상하였다.
□금성남방 삼현지구 전투(1953.7.13.~7.26)
금성은 김화군에 있는 지역으로 북위 38도선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강원도 평강의 동쪽 화천 북방에 있다.
금성지구는 그 주변지역보다 아군의 더 북쪽으로 진격한 돌출부였으며,
적은 북으로 뻗은 중앙 돌출부의 지형 능선을 제거하여 휴전분계선을 획정하려고 하였다.
7월 13일 밤 제9사단이 지키고 있는 진지로 대규모의 중공군이 밀려들어오면서 아군은 초기단계에 주저항선을 돌파당하고 말았다.
이 때 금성 남방에 있는 삼현지구에는 보병 제6사단 제7연대가 교전 중에 있었고 많은 병력손실이 발생하여 불가피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가 제7연대와 교대키 위해 급거 출동하였다.
당시 좌신아 소위는 1951년 9월 1일로 중위로 승진하여 제9연대 제3대대 보병 제10중대장으로 보임, 중대장으로 활약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사단으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은 제9연대는 용약 삼현지구로 이동을 하는데 연일 계속되는 강우와 농무로 보포(步砲) 협동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또 혹서와 지형이 피아간의 포화로 초토화되어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특히 602고지는 아군의 LD선에서 단일 능선 상에 있음으로 적 729고지로부터 감제(敢制)당하여 공격을 확보하기 곤란한 지형이었다.
당시 전면의 적은 강력한 포병지원을 받은 중공군 제54군. 제60군 제67군 제68군 산하 9개 사단으로 아군 제2군단전선에 배치되어 주저항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휴전회담 종결을 앞두고 접촉선의 일부지역에서 압도적인 공격을 취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탈취한다는 작전대로 제11사단은 주파령에서 엄호진지를 점령하고
7월 15일 제9연대장은 제3대대로 하여금 적근산(△488)을 확보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 10중대는 7월 15일 06:00에 105밀리 야포와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진격,
LD선을 통과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고 적근산을 탈환하였다.
한편 금성에서는 7월 13일 밤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북쪽으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중 휴전이 체결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기습남침으로 3년 1개월 2일 18시간에 걸친 전투는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끝이 났다.
난세에 태어난 좌신아 용사는 1960년 12월 31일 육군소령으로 9년 4개월의 군복무를 종료하고 예편하여 지역사회발전에도 많이 헌신하였다.
1988년 2월 20일~2005년 3월 31까지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제주도지부장으로써 7년간 재직하면서 도내 시·군 충혼묘지에 회원배우자가 안장될 수 있도록 시·군 충혼묘지설치 조례 개정에 앞장섰으며 2000년 12월 6일 참전 전우들에게 훈장 찾아주기 일환으로 회원 47명에 대한 훈장을 50여년 만에 되찾아 훈장 전수 식을 갖고 위로연 및 기념품을 전달하였다.
2001년 4월부터 연례행사로 식목일을 전후하여 시·군 충혼묘지 및 호국영웅의 흉상건립지에 무공수훈자회원들을 참여시켜 무궁화식재와 주변정화 활동을 전개토록 하였다.
현재는 대한민국6.25참전국가유공자회제주특별자치도지부고문,
베트남참전전우기념사업회제주특별자치도지부고문,
무공수훈자회제주특별자치도지부 명예지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발췌> 정수현지음.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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