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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서부를 둘러보고
-놀라운 광활(廣闊)함
[2010. 6. 6〜6. 18]
여행은 남녀노소 없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우리는 미국 동서부를 부부 동반 11박 13일로 가는 여행길에 나섰다. 아내는 걱정을 했다. 내가 허리 수술을 한지는 몇 년이 지났어도 아직도 뻐근하게 아픔을 느끼는데 그 긴 여행 일정과 11시간이 넘는 비행기 탑승시간을 견디겠느냐고, 무슨 탈이라도 나면 어쩌느냐고 걱정이었다. 우리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OZ204호 편으로 6월 6일 20시 20분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 로스앤젤레스로 향하였다. 기내식을 두 차례나 먹으며 얼마를 자고 얼마를 뒤척였는데도 비행기 조그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바다인지 하늘인지 분간이 안 되는 망망한 허공뿐이었다. 현지 시간으로 15시 20분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미국 입국 심사를 2시간은 족히 받은 것 같다. 입국을 마친 우리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몸을 싣고 맨스 차이니스 극장과 스타의 거리 시내 관광에 나섰다. 맨스 차이니스 극장은 태국의 사원건축을 빼닮은 극장으로 최신 영화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장소로 한 달에 두 번, 연극이나 영화를 처음으로 개봉하는 극장인데 그런 날이면 할리우드 배우들이 리무진을 타고 와서 레드카펫을 밟고 극장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스타의 거리는 보도(步道)에 영화‧TV스타, 유명 음악가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들의 손이나 발자국이 찍힌 별 모양의 브론즈[bronze-청동 또는 청동 제품]가 깔려 있는 거리인데 거기 깔려 있는 2,500개가량의 브론즈에는 영화, TV세트는 TV, 레코드는 음악, 마이크는 라디오를 상징하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레드카펫도 밟아보고 유명인의 예술인의 손과 발자국 모양에 손발을 맞춰보기도 하며 얼마 전에 타계한 마이클 잭슨 추모 브론즈에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호텔에 투숙했다. 이튿날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라스베이거스는 호텔 로비로부터 카지노가 차려져 있어 오락기들 돌아가는 기계음 소리로 귀가 멍멍하고 요란한 불빛에 눈이 어지러웠다. 가히 이곳 밤 풍경은 도박과 환락의 도시다웠다.
다음날에 본 라스베이거스 아침은 스산했다. 어젯밤 휘황찬란했던 불빛 향연은 온데간데없고 잠에서 갓 깨어난 여인의 헝클어진 머리채 같이 을씨년스러웠다. 돈의 인공물 그림자는 그런가 보다. 아침 식사 후 그랜드캐니언을 보기 위하여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차창밖에는 끝없이 황량한 사막이 펼쳐졌다. 중국여행을 할 때 중국 땅이 광대(廣大)하다 했더니 여기는 더없이 광활(廣闊)했다. 한동안 사막을 달리고 또 달렸다. 노래 속에 등장하던 애리조나 카우보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가끔 원시마을이 보일 뿐 그칠 줄 모르고 펼쳐지는 것은 황토 모래벌판이었다.
가다 보니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모하비 사막이라고 했다. 은을 캐내던 은광(銀鑛) 촌이었는데 지금은 폐광이 되어 인디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아직은 한여름도 아닌 6월 초순인데 태양 볕은 강렬하여 살을 따갑게 하였다. 얼마쯤 갔을까 후버댐이 눈앞에 나타났다. 버스 차창 밖 저만치 펼쳐진 회색 시멘트 안에 갇힌 청옥(靑玉) 빛 물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댐은 후버 대통령(1929〜1933 재직)이 대공황 때 국책사업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많은 사람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그걸 왜 구태여 만드느냐고 강렬한 항의와 반대가 빗발쳐 할 수 없이 중국의 노무자를 데려다 건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그 일은 잘한 일이었다고 칭송하며 그의 이름을 따 후버댐이라 명명하였단다. 인디언들이 신성시하여 제사까지 지낸다는 독수리 형상의 이글 마운틴을 바라보며 얼마를 가니 그랜드캐니언이 우리를 맞이했다. 폭이 6.5km, 깊이가 1.6km, 길이가 29km나 된다는 다단계 단층이 까마득히 펼쳐져 우리들 눈을 현혹했다. 이 협곡은 유타 주로부터 애리조나 주에 걸쳐 있는데 그 사이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수억 년 동안 대지를 침식시켜 만들어낸 걸작이라고 한다. 내려다보이고 건너다보이는 시야가 아득했다. 여기서 떨어지면 낙하 도중에 배가 고파서 굶어죽는다고 허풍을 떠는 가이드 말이 참말인 것만 같았다. 산책로 (trail)를 따라 걸으며 바라보니 신물(神物)의 전시장이었다. 가슴 울리는 신이(神異)에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스쳐볼 뿐 가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 모습은 고뇌와 설움이 뒤엉켜 있는 듯도 하고, 천지창조 때의 수많은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는 듯도 하였다. 숱한 세월 자연의 크나큰 손놀림이 깊은 침묵 속에 만들어낸 보기드문 예술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캐니언에 이어진 협곡은 브라이스캐니언과 자이언캐니언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다 연결하면 서울에서 부산 갈 만한 길이가 된다 하니 상상만으로도 어마어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살 한 점도 으스러지고 앙상히 남은 뼈들
고뇌로 포개져 세월 앓는 저 협곡에
서러워 설움 못 이긴 피눈물이 흘러 있다.
억년 침묵 너무 깊어 전설이 된 그림자들
시지포스 어깨에 진 짐보다 무거워서
대낮도 벌건 대낮에 붉은 한숨 깔고 있다.
맨 처음 이 땅 열 제 속을 끓인 응어리들
화석으로 남아서 태초를 내보이고
함몰된 숱한 밀어는 벼랑 끝에 엉겨 있다.
-그랜드 캐니언(Grand Canyon)―
대충 이스트 림[East Rim]에서 중요 포인트만 보고, 인디언 첨성대[Desert View Point]에서 그랜드캐니언의 진면목을 훑어본 다음 하루해를 마감했다.
이튿날 천연의 조각물이 대지(大地)에 전시된 모뉴먼트 밸리로 갔다. 이곳은 사막 영화의 배경이 되어 유명한데 195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바호 인디언 보호지역으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다 한다. 사막 중간 중간에 붉은 사암석이 산처럼 우뚝 우뚝 솟은 모습은 장관 중 장관이었다. 끝없이 뜨거운 바람은 불어대고 사방으로 붉은 먼지가 자욱했다. 둘러봐도 물 한 방울 비치지 않는 절대 사막이다. 그러나 나바호 인디언이 한없이 사랑했던 그들의 소중한 성지라고 한다. 원주민이 모는 트럭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밸리 드라이브를 하였다. 강렬한 태양 볕이 내려쬐고 붉은 먼지가 진동하여 모두들 선글라스를 끼고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려야 했다. 주전자 모양, 장갑 모양의 바위산이 보였고, 계곡 안쪽으로 접어드니 굽이마다 이색적인 모습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우리를 맞았다. 코끼리 모양, 낙타 모양, 엄지 모양의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가 하면 가늘고 높은 세 바위가 나란히 서 있는 세 자매 바위도 있었다. 안내하며 가던 인디언 트럭이 한 모롱이를 돌더니 황토 석산이 속으로 움푹 파여 천연의 공연장을 이룬 곳에 차를 세웠다. 내려서 걸어가 보니 산 가운데 천장이 된 부문에 구멍이 뻥 뚫려 햇살이 노랗게 비쳐 들어오고, 사슴인 듯한 벽화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우리를 위해 인디언 전통 음악을 북과 피리로 연주해 주었다. 단순한 선율이지만 고요 속에 영혼을 울리는 애절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막 복판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그랜드캐니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막아놓은 인공 호수 레이크 파웰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와 하루의 피곤을 풀었다. 다음날 우리는 자이언캐니언과 브라이스캐니언을 보기 위해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신의 성지로 불리는 자이언캐니언은 바둑판처럼 생긴 화성암(火成巖)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웅혼한 절벽의 바위산이었다. 이산은 어쩌면 하늘나라 신공(神工)이 거대한 천상(天上) 정원에 깎아 세운 조각품인데 잠시 빌려다 여기에 전시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대자연의 신묘한 석공품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 우리 눈을 놀라운 즐거움에 빠뜨렸다.
태초에 땅을 열고
일어선 괴암들
까치발로 손을 들고 하늘 높이 꽃 피웠다.
누구냐.
저리 웅장한
신의 정원 꾸민 이는.
-자이언캐년(Zion Canyon)―
돌벼랑에는 나무들이 암반등반가처럼 뿌리를 로프 삼아 매달려 붙어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 펼쳐진 아슬아슬한 장관(壯觀)을 눈에 담고 다음 행선지인 브라이스캐니언으로 향하였다. 자이언캐니언이 남성미의 상징이라면 브라이스캐니언은 오밀조밀하고 섬세함이 탄성을 자아내는 여성미의 상징이었다.
들뜬 마음을 안고 브라이스캐니언에 도착했을 때 나는 탄성을 지를 수도 없었다. 발밑은 천인단애(千仞斷崖), 안계(眼界)는 툭 트여 황색(黃色), 갈색(褐色), 회색(灰色), 주색(朱色)으로 아롱진 기묘한 형상(形象)들이 흘립(屹立)하여 저마다 독특한 자세로 골짜기에서 산등에서 무도회(舞蹈會)를 열고 있는 듯했고, 고개를 드니 창천(蒼天)이 묵직하게 드리웠다. 세상에나 이 거대한 협곡(峽谷)에 빈틈없이 저리도 정교한 만물상(萬物相)을 그 누가 조각하여 미(美)의 향연을 베풀었을까. 그냥 입만 쩍 벌리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거기 기대어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어쩌면 조물주의 걸작에 흠결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다.
무량으로 피어난 붉은 혼령
저리 살아
피 비치게 빚어내는 영원한 몸짓들
고와서
차마 북받쳐 죄스러운
저 신이(神異)여.
벅찬 가슴 허공에 내맡기고
말 잃은 채
아스라이 바라보니 개안이 따로 없다.
바람도
천의무봉에 환성을 내지른다.
-브라이스캐년(Bryce Canyon)-
어느덧 여행 6일째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로스앤젤레스의 3대 비치라고 일컫는 산타모니카비치, 롱비치, 레돈도비치를 관광하는 날이다. 산타모니카비치(Santa Monica Beach)는 온화한 기후 덕에 야자수들이 모두 아름드리였다. 그 그늘 아래 친구인 듯, 연인인 듯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앉고 더러는 누워 담소를 나누는 어울림이 정겨웠다. 또한 햇살과 함께 태평양 푸른 파도가 밀려와 무늬를 놓는 바닷가 모래톱에 수영복 차림으로 발자국을 남기며 티 없이 즐거워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해변 풍경은 마치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보는 듯 했다. 휴양지답게 푸근한 여유가 넘실댔다. 해안 언덕에 핀 보라색 이름 모를 꽃이 신기해 사진기에 담고, 쓰러져 뒤틀고 있는 모양새가 허리 잘록한 여인의 X라인 같은 나무에 기대어 기념사진도 찍었다. 롱비치(Long Beach)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하얀 파도 포말과 함께 파도타기를 하는 이들이 펼치는 곡예가 볼만했고, 저만치 바닷가에 정박한 크고 작은 배들의 모습과 언덕바지에 정연히 늘어선 많은 별장들이 풍치를 더하고 있었다. 빼어난 해안 경관과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단다. 우리도 그 중에 한 축이 되었나 보다.
롱비치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샌 패드로[san pedro] 언덕 위에는 우리 건축물의 전통미를 보여주는 우아한 자태의 “우정의 종각”이란 한글 현판이 달린 단청(丹靑)종각(鐘閣)이 있었다. 입구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장승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종각 안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에 한국이 한국과 미국의 우정을 위해 선사했다는 17톤짜리 종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종은 국보 29호인 경주 에밀레종을 모델로 했다는데 종 표면에는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과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한국 선녀가 나란히 구름을 타고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엔 무궁화 꽃도 피어 있었고 잔디 광장엔 도복 차림으로 태권도를 하는 미국 젊은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 젊은이와 정을 나누며 사진 촬영을 한 다음 기약은 없지만 “댕큐”를 외치며 헤어졌다. 수만리 밖 지구의 반대편에 핀 이런 한국 문화의 꽃을 보며 가슴 뿌듯했다. 레돈도비치(Redondo Beach)는 우리 한국인이 주로 사는 트랜스 지역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라 하였다. 서핑을 즐기는 이들이 특히 많았다. 해산물이 풍부해서인지 횟집도 즐비했다. 짜릿한 바다 냄새가 충만하게 가슴을 적셨다. 이곳에서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술 취한 흑인 두어 명이 성기를 내놓고 관광 온 부녀자들을 희롱하는 추태를 부려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이다. 색다른 경치에 정신이 팔려 날짜 가는 줄을 잊었다.
미국 서부 여행을 마친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하여 미국 동부 여행길에 올랐다. 다섯 시간 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꼬박 앉아 있다가 뉴욕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곧바로 망망(茫茫) 들판을 서너 시간을 족히 달려 미국의 심장 워싱턴 DC로 갔다. 여기서는 보통 차를 탔다 하면 이 정도의 시간은 기본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이 시간이면 온 나라 못 가는 곳이 없는데, 여기선 겨우 나라의 한 귀퉁이를 오갈 뿐이다. 미국 땅덩어리가 참 넓기는 넓다. 오랜 시간 동안 비행기와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허리도 궁둥이도 뻐근하였다. 그러나 허리를 주무르며 설레는 마음으로 조지 워싱턴이 초석(礎石)을 놓았다는 돔형의 국회의사당을 먼발치로 보고, 링컨 기념관을 관람했다. 링컨 기념관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보여준 관용과 지조, 정직의 미덕을 기리려고 헨리 베이컨이 당시 미연방 36개주를 상징하는 36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받친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기념관을 설계하여 지었다 한다. 기념관 중앙엔 흰 대리석의 링컨 좌상이 자리하고, 안쪽 남부 벽에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하는 말로 끝맺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꼭 등장하는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새겨져 있었다. 저리하는 게 바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참모습인데 이 지구촌에서 저대로 실천하는 정치가는 얼마나 될까?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민주라는 허울을 쓰고, 스스로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만(欺瞞)과 술수(術數)로 국민을 볼모삼아 무소불위(無所不爲) 짓거리를 일삼는 독재자가 수두룩하지 않은가. 다음은 가까운 거리에 이웃하여 세워진 제퍼슨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탄신 200주년(1943년 4월 13일)에 세웠다고 한다. 이 기념관도 원형 기둥이 50개쯤 되는 신전 모양이었다. 한 가운데에는 제퍼슨의 입상으로 된 동상(銅像)이 서 있고, 벽에는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었다. 제퍼슨상은 백악관 쪽을 향해 있었다. 이는 늘 현역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나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우리나라도 퇴임 대통령 한 분쯤은 이런 대접을 받으며 국민의 존경 속에 그런 역할을 하는 동상으로 서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스미소니언박물관으로 갔다. 이 박물관은 1846년 상속자가 없는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스미손이 기부한 재산으로 지었다는데 16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동물원 등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박물관으로 전시품목만도 1억4천만 개나 된다고 한다. 참으로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가운데 국립 자연사 박물관을 보았다. 1911년 개장한 3층 규모의 박물관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와 동물, 광물, 자연의 발달상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볼 수 있도록 밀랍상, 화석, 동식물 박제품, 보석, 광석, 수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는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 모형이 버티고 있었으며, 그 오른쪽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와 익룡(翼龍), 백악기(白堊紀) 후기에 살았던 트리케라톱스 등의 공룡 뼈와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외에 유인원 전시실, 곤충전시실 등이 있어 진귀한 전시물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서 생멸(生滅)한 존재, 아니 존재하였던, 그리고 존재하는 만상을 참 알뜰히도 모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저런 엄청난 몸집을 가진 공룡 같은 파충류들이 요즘 영화에서 가끔 보이는 바와 같이 불을 뿜고 대포알 같은 쇠도 먹어치우며 이 지상을 누비고 다녔을까. 참말로 그랬다면 돌도끼도 있을까 말까 했던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두려움 속에 살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많은 관람객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들어 매미처럼 매달려 고개를 빼고 처다 보고 있는 2층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일행과 함께 호기심에 그리로 가 보았다. 큰 유리 상자엔 45.52 캐럿이나 나간다는 ‘호프 다이아몬드’가 발광(發光)을 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푸른색 이 다이아몬드는 이란의 알리하페트 농부의 농장에서 1640년 발견된 이래 주인이 차례로 비극을 당했다는 섬뜩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신물(神物)이란다. 그래 그런지 으스스한 빛을 내뿜고 있는 듯하였다.
그 옆 또 다른 유리 상자에는 3백30캐럿의 ‘스타 오브 아시아’라고 불리는 사파이어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크기에 놀랐다. 이런 것을 볼 수 있는 것을 안복(眼福)이라 했던가. 눈으로나마 잠시 억만 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현세기(現世紀) 세계 정치의 핵인 백악관 앞에 섰다. 주변 건물이 붉은 벽돌인데 반하여 이 건축물은 회백색 사암 건축물이기에 그 대조를 이룬 데서 1902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건물명을 white house로 명명한 이래 그리 불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건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건물 속에서 세계 인류를 쥐락펴락하는 브레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우러러 보이기도 하고 무슨 사자후(獅子吼)라도 터져 나올 듯 느껴졌다. 중세의 무슨 요새(要塞)처럼 말 한 마디 새지 않는 정적(靜寂)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백악관 정문 맞은편 인도(人道)엔 텐트를 치고 1인 시위(示威)를 하는 노파(老婆)가 있었다. 관광객들이 다투어 사진 촬영을 하는 그 할머니는 대체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스페인 태생으로 미국의 시민이 되어 스페인 영사관에서 비서로 일을 하였던 콘셉션 피시오토(Concepcion Picciotto)란 할머니인데 1981년부터 30여년을 하루 같이 그 자리에서 일본 히로시마 같은 참화(慘禍)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핵 평화를 외치고 있단다. 그런데 “한국은 곧 통일 됩니다.”라는 한글구호가 쓰인 팻말을 옆에 세워놓고 있었다. 한국과 무슨 인연이 있고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이기에 그런 배려를 한 것 같아 고맙고 마음 찡해 함께 사진을 찍고 몇 번을 “thank you” “thank you”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자리를 떴다. 워싱턴에서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 갔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홉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기 위해 워싱턴에서 펜실베이니아 주를 거쳐 끝없을 듯 펼쳐진 지평을 달려 다시 뉴욕 주 끄트머리 캐나다 접경 지역까지 갔다. 피곤함도 뒤로 둔 채 곧바로 비옷을 걸쳐 입고 고무 슬리퍼를 신은 다음 지하로 가는 승강기를 타고 ‘바람의 동굴’로 내려가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를 체험했다. 폭포 가까이 가기도 전에 물안개가 온몸을 후줄근히 적셨다. 나무판자로 이어놓은 난간을 돌아 나오는데 구름덩이 같은 물 뭉치가 폭탄처럼 쏟아져 내렸다. 튀기는 물 파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겨우 빠져나와 서로를 보니 영락없이 코미디 프로에 등장하던 우비소년, 우비소녀였다. 폭포는 너무나 장엄하고 너무나 웅장했다. 어쩌면 하느님의 사자(使者)인 크나큰 백룡(白龍)이 있어 지구의 물이란 물은 다 들이켰다 토해내는 듯 한도 끝도 없이 낭떠러지로 엄청난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세 자매 섬을 둘러보았다. 키가 훤칠한 수많은 잡목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시냇물이 힘줄처럼 꼼틀대며 흐르는 한적한 섬이었다. 아니, 곳곳에 벤치와 피크닉 테이블이 설치된 잔디로 잘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전원이었다. 그곳에는 마차를 타고 경치를 즐기는 이도 있고, 유유자적 걸으며 풍광을 즐기는 이도 있었다. 쉬엄쉬엄 구경을 하며 가노라니 황금측백나무를 두부 자르듯 반듯반듯 깎아 울타리한 곳이 나타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큰 저택이 버티어 서 있고 그 안뜰에는 희고 붉고 노란 장미꽃과 색색의 베고니아를 비롯한 야생난초 꽃들이 줄줄이 피어 있었다. 그 꽃들 속에서 함께 간 조 교장선생님 사모님과 아내는 사진을 찍으며 숲속의 공주나 된 듯 즐거워했다. 섬을 한 바퀴 돌고 나오려니 부스럼이 엉켜 붙은 환자 같은 한 아름은 족히 될 나무가 있었다. 축축 늘어진 줄기 모습은 능수버들을 닮았었다. 이색적인 나무라서 나무 이름표를 보니 Curly willow(곱슬버드나무)라 적혀 있었다. 이로 보아 버드나무는 버드나무인데 왜 보통의 버드나무 같이 표피가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 부스럼 난 것 같은지 참 희한하였다. 표피가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무슨 못된 피부병에 걸린 것 같았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이리 호에서 흘러나와 온타리오 호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폭포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에 편자 모양으로 된 이구아수 폭포, 아프리카 남부 잠비아공화국과 짐바브웨의 경계에 흐르는 빅토리아 폭포와 함께 세계 3대 폭포로 손꼽힌다 한다. 그런데 나이아가라 폭포의 진면목(眞面目)은 아무래도 캐나다 쪽으로 가서 보아야 한단다.
국경을 넘는 다리 위에는 캐나다로 들어가려고 입국 심사를 받는 버스와 승용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줄지은 버스 속에서 기다렸다. 다행이 현지가이드가 재빨리 안내하여 어렵지 않게 캐나다 쪽 폭포가 있는 토론토로 갔다. 가면서 바라보니 나이아가라 폭포는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 아래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로 물 폭탄을 짊어지고 내리뛰는 수상여단(水上旅團) 특공대(特攻隊) 같았다. 물보라에 피어난 안개가 거대한 구름덩이가 되어 몰려 있고 붉은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물방울이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 사는 선녀들이 날아다니며 수만 백합꽃송이 사이사이로 곱고 고운 유리가루를 우리가 볼 수 없는 손짓으로 연거푸 공중에 뿌려 황홀(怳惚)한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온 우주 안개꽃이
여기 모여 덩어리졌다.
어젯밤 빛나던 별들도 빠져들어
천애(天涯)에 가슴 찬 함성을
쩌릉쩌릉 내지른다.
물보라 몸을 섞어
백합으로 다시 핀다.
향기도 뿜어낼 듯 눈길 잡는 황홀경
어디로 말발굽소리
뽀얗게 흩어진다.
끝없이 떠나라.
멈춤 없는 나이야 가라.
싱싱한 젊음으로 늘 힘차게 내리뛰어
골백번 세상 변해도
신비감 잃지 마라.
-<나이아가라 폭포>-
인디언들은 이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를 닮았다 하여 천둥소리 내는 물이란 뜻으로 나이아가라라 이름을 지었다는데 그 소리는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리 들려 인디언들은 이 소리를 신의 노여움으로 여겨 매년 아름다운 처녀를 배에 태워 제물로 바쳤다 한다. 그래 그런지 가끔 물보라 속에 처녀귀신이 등장한다는 “안개 소녀의 전설”이 있었다. 이 전설이 참말이라면 그 처녀귀신은 무슨 애환(哀歡)을 뿌리며 숱한 세월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부모 형제를 뒤에 남겨두고 싱싱한 나이에 죄 없는 제물이 되어 죽음의 길에 들어설 때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두려움과 좌절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채웠을 것이다. 우리나라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연꽃을 타고 환생하여 황후까지 됐는데 그녀들은 왜 아직도 가끔 귀신의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맺힌 한이 너무 커 그러는가. 그렇다면 폭포소리는 그 처녀귀신들이 가슴 치며 내뱉는 통곡이 아닐는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들리는 물소리는 질풍노도(疾風怒濤)가 달려와 젊음의 함성을 내지르는 대자연의 힘찬 박동소리 같고, 피어나는 물안개는 누구도 함부로 범접 못할 요정(妖精)의 옷자락으로 느껴졌다. 이튿날 우리는 “안개 속의 숙녀호”라 명명된 유람선을 타고 캐나다 쪽 폭포 유람에 나섰다. 폭포 가까이 가자 비옷을 입었지만 휘몰아치는 물보라에 아랫도리와 얼굴은 다 젖어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폭포가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며 펼쳐주는 환상적 별세계는 우리를 한없이 들뜨게 하였다. 나는 무척이나 조심하며 유람선을 오르내렸는데 우리 일행 중 나이가 가장 많으신 사모님은 다리가 불편하다고 늘 걱정을 하며 다녔는데 이날 유람선을 타고 내리는 데는 날아다니듯 하였다. 아마 나이아가라에 와서 “나이아! 가라”는 힘찬 물의 기운을 받아 늙음의 나이, 아픔의 나이를 다 떠나보내서 그랬나 보다. 캐나다 토론토에 관광 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 꼭 둘러본다는 아이스 외인 농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강폭이 굽고 움푹 파여 술이 괴어오르는 듯 부글거리며 소용돌이치는 나이아가라 강 월풀(Whirlpool)를 바라보며 기념사진을 한 장씩 찍고 넓디넓은 평원에 펼쳐진 와인 농장에 들어섰다. 농장이라 하지만 잘 가꾸어진 별장 도시 같았다. 사방팔방 길마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숲속에는 저택이 정원과 함께 그윽하게 자리하고 주변으로는 나이아가라 강줄기가 감싸 흐르고 있는 넓디넓은 평원이었다. 그 평원에는 끝도 없이 적당한 간격으로 묘목과 과실수들이 줄을 맞춰 심어져 있어 마치 군부대들이 부대별로 열병식(閱兵式)을 치르고 있는 듯하였다. 푸른 양탄자 같은 초원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단풍이라도 든 듯 체리[cherry]나무들은 가지마다 붉은 열매를 휘어지게 매달고 저마다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안내하며 이곳에서 진짜 와인 맛을 시음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모든 농장이 쉬는 날이라 공장 문을 닫는 바람에 그 약속은 멋쩍은 허풍이 되고 우리는 와인의 냄새도 맡지 못했다. 농장을 돌아보노라니 아주 조그만 교회가 보였다.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한 명의 목사와 다섯 명의 신자가 겨우 들어가 예배를 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교회라고 한다. 한 눈에 보아도 시골 농가 사립문 옆 담장에 농기구를 넣어두기 위하여 따로 지어놓은 헛청 집만 같았다.
나이아가라 폭포 주변 관광을 아쉽게 마치고 다시 국경을 넘어 뉴욕 맨해튼으로 갔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유숙하고 이튿날 세계 최고의 유엔 도시 관광에 나섰다. 걸어서 돌아보기엔 벅차 버스에 탄 채로 한인 타운, 아이언빌딩, 뉴욕시청 등을 보고, 잠깐 버스에서 내려 네 명의 대통령과 백 명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컬럼비아 대학 본부와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우리나라 종합대학 건물에 비하면 그리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고 우리나라 대학마다 위용을 자랑하는 그런 거대한 교문도 없었다. 길가에 보통 건물처럼 붙어 있는 대학이지만 오랜 역사와 품격이 느껴지는 캠퍼스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수상택시(Water Taxi)를 탔다. 허드슨 강물이 흘러들어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주변의 크고 작은 건물의 경관과 주변 바닷가 풍경을 눈에 담느라 모두들 분주했다. 하지만 제일 붐비고 모두가 서둘러 북새통을 이룬 곳은 허드슨 강 어구 리버티 섬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입상 ‘자유의 여신상’ 주변을 항해할 즈음이었다. 수상 택시에 탄 사람들은 인종과 관계없이 뒤섞여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모습들을 사진기에 담느라 부산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거상(巨像)은 받침대를 포함하여 높이가 92m라고 하는데 오른손엔 횃불(세계의 자유를 밝힘), 왼손엔 서판을 높이 받쳐 든 채 대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서판에는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날짜를 표기한 JULY Ⅳ MDCCLXXⅥ(로마숫자로 M은 1000, D는 500, C는 100, L은 50, X은 10, V은 5, I은 1임)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여신상 받침대 입구 좌대에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 에머 래저러스(Emma Lazarus)가 지은 ‛정복자의 사지(四肢)를 대지에서 대지로 펼치는’으로 시작하여‘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 올릴 터이니’로 끝맺는 14행의 소네트‘새로운 거상’이 새겨져 있다는데 아쉽게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 누가
저 손에 횃불 붓을 들려놓았나.
앞바다 갤판 삼아
자유 듬뿍 풀어 묻힌
한 폭에
환히 살아날까
별빛도 잠 설친다.
아니다.
설치는 건
밤 밝힌 별이 아닌
어둠 걷는 빛이다.
가슴 쫙 편 사랑이다.
팽팽한
삶의 다툼을 보듬는 모성이다.
-자유의 여신상-
어쩌면 이‘자유의 여신상’은 세계평화와 자유를 높이 선양하기 위하여 왼손에 크나큰 갤판을 들어 자유와 평화를 개어놓고 이를 오른 손의 자유의 횃불 붓에 듬뿍 찍어 세계라는 넓은 도화지에 환한 세상을 그려내는 인류 화가가 아닐까. 아니 어쩜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어둠 속의 천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상택시 관광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유엔본부로 갔다. 그곳에서 본부 주변 분수대 가장자리에 게양된 세계의 깃발 속에 번뜩 눈길을 잡은 태극기를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고 여권을 다시 꺼내들고 유엔 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한국 국민의 자랑 반 기문(潘 基文) 유엔사무총장 초상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모습을 담아 촬영을 마치고, 고속 엘리베이터를 재빨리 두 번 갈아타고 전망대에 올라 뉴욕 시내 경관을 내려다보았다. 세계의 대표 도시답게 빌딩의 거대한 숲이었다. 아니, 빌딩의 밀림(密林)이었다. 전망대 안에 들어오니 고릴라 복장을 한 거인이 관광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 부부도 그의 팔짱에 기대어 한 장 찍고 다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땀을 씻으며 내려와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우리 가슴을 펴주었다. 그런데 깨진 지구본 모형이 보였다. 환경오염에 지구가 그리 됨을 보여줌으로써 세계인으로 하여금 환경의 중요성을 깨우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어느새 긴 미국 동‧서부 여행도 끝났다. 우리는 뉴욕 JFK국제공항을 떠나 아시아나 항공 OZ221편으로 인천공항을 향해 날아올랐다. 14시간을 꼬박 비행하여 한국 땅을 밟았다. 어느 노인네는 여행을 가서 가이드 깃대 끝만 실컷 구경하고 왔다는데 그래도 나이 먹어 보고자한 것은 어느 정도 본 것 같아 흐뭇했다. 이번 미국 여행을 통하여 부러웠던 것은 개발 가능한 그냥 묵혀둔 땅이 무궁무진하고 그에 따른 지하자원도 한없이 숨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좋았던 점은 무엇보다 하루 관광을 마치고 호텔에서 샤워할 때 수질이 너무 맑고 좋아 상쾌해 기분으로 하루의 피로를 날리며 잠 속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구를 뻥 뚫어 관통(貫通)하는 파이프를 박아 그곳 물을 펑펑 받아 여기선 쓸 순 없을까. 그 물에 마그마(Magma)가 섞여 나와 안 될라나. 이런 공상을 한 번 해 본다.
[기행문학 제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