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 영성 훈련에 주도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철학 교수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 박사와의 대담은 박사의 자택에서 미국 시간으로 2월 9일 오후 1시 30분에 있었다. 대담자로는 클레어몬트대학원 (Claremont Graduate Univeristy)에서 성령론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으며 월드미션대학(원) (World Mission University)의 조직신학교수인 김성원 목사가 수고하였다. 60년대부터 계속 월라드박사 가족이 살아온 아담한 자택은 미국 남가주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 북쪽의 샌퍼낸도계곡(San Fernando Valley)지역의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신앙과 삶에 대하여
안녕하십니까? 윌라드 박사님, 바쁘신 가운데서도 「소금과빛」 독자들을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박사님께 제일 먼저 여쭙고 싶은 것은 박사님의 신앙 생활과 영적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신앙 성장의 과정은 어떠셨습니까?
예, 저는 아홉 살 때 거듭남을 체험하였고, 매우 신앙적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교회 문이 열려 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 있었으니까요. 교회는 우리 가정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 저녁 예배 때 제단 앞으로 걸어나가서 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남침례교회 신자로 자라 이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른 많은 교단을 위해서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자 훈련을 강조하게 된 것은, 거듭난 후에 아무런 기억할 만한, 성장이나 훈련이 없었고, 또 제자 사역을 하면서 훈련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저술 활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제자 훈련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대학원에서 철학과 과학사 박사 과정 공부와 동시에 목회 활동을 하면서 제자 훈련을 시작했지요. 특히 IVF에서 활동하면서 위스콘신대학에서 학원 사역에 주력했습니다. 거기에서 영성 훈련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을 도왔지요.
어떤 학교들을 다니셨습니까?
캔사스시 교외에 있는 윌리엄 주얼대학에서 시작해서 테네시 템플대학에서 1956년 심리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베일러대학에서 1957년에 철학과 신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지요. 이들 학교들은 다 침례교 계통입니다. 같은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여 위스콘신대학에서 철학 전공, 과학사 부 전공으로 1964년에 철학박사 학위(Ph.D)를 받았습니다.
가족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숨은 계획」(Divine Conspiracy, 국내에 곧 출간 예정)에 제 가족 얘기가 나옵니다만, 주로 그것은 제 형수의 가족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들 가족은 서로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을 제게 보여 주었습니다. 제 가족들도 깊은 신앙으로 늘 하나님 안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조부께서는 감리교도셨고, 제 부모님은 침례교 신자였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은 현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늘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었고, 실천이 있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전기 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예화가 있는데요.
예(웃음). 어린 시절에 미조리주의 오레곤 카운티에 살았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어요(웃음). 냄새나고 그을음 나는 기름 램프를 켜고 살았어요. 책을 읽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조명이었습니다. 종종 우리는 벽난로에 불을 지펴서 조명 겸 난방을 했지만 그때는 불편함을 몰랐습니다.
생일을 밝혀 주실 수 있을런지요?
그러지요. 1934년 9월 4일 생입니다. 제 아내 제인은 1933년 10월 12일생이고요.
사모님이 한 살이 많으시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저보다 더 똑똑하고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책의 서론에 사모님의 내조가 중요했다고 밝히셨지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제 사역에 있어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사모님이 학교 다니실 때 전공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우리는 템플대학 시절에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는 공동의 관심 가운데 만났고, 이것이 대학 생활의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웃음).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신앙적 관심이 주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조지아주 출신이었습니다. 1-2년간 서로 보며 지낸 후에 서로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올바른 선택이셨던 것 같습니다. (웃음)
아내를 잘 얻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쓰여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랬지요.
신앙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영혼의 밤’이랄까 그런 시간들은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글쎄요, 제가 대학생이던 스무살 무렵에 뜨거운 체험을 한 후에는 ‘영혼의 밤’이라 할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십대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왜 그런지는 모르나 그 이후에는 제게 심각한 신앙의 회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젊어서 1942년식 포드차에 “예수는 실패하지 않는다”(Jesus Never Fails)는 스티커를 늘 붙이고 다녔는데 회의가 찾아올 때에도 그것을 뗄 생각은 전혀 없었지요. 분명한 것은 제가 종교적인 유전 인자를 가져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제 어머님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그래서 저의 어린 시절은 어려웠다고 기억됩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절 위해서 기도하셨고 조부모님도 절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힘으로 제가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애의 중심이었던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결신한 아홉 살 이전에도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실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신앙적인 체험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스무 살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집회에서 죄를 고백하고 안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제게 안수를 해 주었어요. 그 은혜로운 체험 이후에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늘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expecting God)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이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대학과 대학원 시절이었을 겁니다. 아기도 있는 상황에서 공부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또 제가 하는 공부에 대한 확신을 갖기까지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에 바로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목회를 했지요.
그러다가 하나님과 영혼에 대하여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철학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지요.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온 사람들이 철학자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한 사건을 든다면 아마도 독일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힘들어 했던 것일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웃음).
지금은 독일어 철학서들을 즐겨 읽고 영어로 번역도 하고 있는데 그 때 어렵게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역자 주: 윌라드 박사는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논문들을 번역 출간한 바 있다).
교수님의 철학 연구가 신앙적으로 짐이 되거나 어려움을 주지는 않았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사실이지요.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경우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체적으로 볼 때 서양철학사는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반기독교적인 철학자들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다수의 철학자들이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독교 이전의 서양철학자들, 예컨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신의 존재를 굳게 믿었던 유신론자들이었습니다.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도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신에 물든 철학자’로 부릅니다. 20세기 중반에 와서 그 역전 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많은 철학자들이 신앙인들입니다. 미국철학회의 가장 큰 소속 단체가 기독교철학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는 어떠한 기준으로도 우월하신 분인 것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저서에서 그리스도의 지성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이 점을 다루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우월성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흔히 지성의 영역에서 열세라고 인식하고 있지요.
예.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웃음).
이러한 관점에서 책을 한 권 써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얘기들을 해옵니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남가주대학의 학생들이 가끔씩 제게 와서 왜 그리스도를 따르냐고 물어보곤합니다. 그러면 저는 늘 똑같은 진지한 반문을 합니다. “다른 누구를 염두에 두느냐?”고 말입니다. 미국적인 상황에서는 주로 간디나 부처 등을 들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진지한 토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을 나눕니다.
자녀들인 존과 베키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존과 베키는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모두 신앙인이며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존은 남가주대학에서 컴퓨터과학으로 학위를 받았지요. 손녀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라리사입니다. 스페인어로 그 뜻은 웃음입니다. 이삭과 같은 의미지요.
그것 참 좋은 이름입니다.
집에 널린 장난감들은 그 아이의 것입니다.
자녀 양육의 원칙 같은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함께 교회 생활을 하고, 성경의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기독교 가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가정 예배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글쎄요, 식사 때마다 함께 기도했습니다만, 늘 사역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일과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지금은 안식년이기 때문에 좀 다릅니다만, 평상시에는 주로 강의 일정을 중심으로 시간 계획이 섭니다. 한 주에 두세 번 강의가 있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강사로 외부에 나갑니다.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행사에서 만나는 동료 목사들과 학생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잠깐 동안 헌신의 시간을 갖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하루를 하나님께 바치고, 또 하나님이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이러한 시간을 반드시 가집니다. 그리고는 일정에 따라서 좀더 긴 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거나, 혹은 집을 나섭니다. 한 주에 하루 정도는 오후 시간을 비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앉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개념입니다. 한두 달에 하루 정도는 더욱 긴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아버지께서 오늘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교정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율법주의적 접근을 배척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주의적 견해는 교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를 가지고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되어져야 할 일은 안식일에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인간은 안식을 필요로 한다고 봅니다.
율법주의는 참으로 해악이 큽니다. 그래서 제가 제자 훈련을 의로움이 아니라 지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지혜란 원칙을 적용함 가운데서 얻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가정 제단이랄지 매일 하나님께 많은 시간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도 (율법주의적이 아닌) 좀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끼시는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질크리스트 로슨(J. Gilchrist Lawson)이 쓴 「저명한 신앙인들의 깊은 체험들」(Deeper Experiences of Famous Christians)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 있는데,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적인 소개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18-19세 쯤 되었을 때 이 책을 친구로부터 선물받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신앙에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입니다. 책방에서 처음으로 발견했었지요. 아마 지금도 성경를 빼놓고는 가장 널리 읽히는 기독교 서적일 것입니다. 어거스틴 정도가 이에 필적한다고 할까요.
그외에 윌리엄 로, 요한 웨슬레, 찰스 피니의 책들이 있습니다. 이 책들이 신앙인으로서의 생애를 형성해 준 주된 책들입니다. 이 책들을 권합니다. 종종 이 책 내용들은 좀 강하긴 합니다만.
그렇지요. 완전주의적인 경향을 지닌 책들 같습니다.
예, 웨슬레가 윌리엄 로를 율법주의로 비판하였습니다만, 후에 웨슬레는 그것이 윌리엄 로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요(웃음). 이들 세 사람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성결해야 한다는 것과, 성결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신학을 보면 종교개혁적 루터의 칭의론과 청교도적 삶의 강조 사이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삶을 강조하시는 윌라드 박사님께서도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 구원, 즉 ‘용서’의 개념에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용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은혜와 노력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은혜와 공로가 상반된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불붙은 사람들보다 더욱 적극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없습니다. 성화도 은혜입니다. 영화도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계에서는 내가 뭘 하면 하나님이 불안해하신다는 식의 잘못된 사고 방식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실제적인 성화가 은혜 안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깨달음을 말씀을 읽는 가운데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박사님께 듣기를 기대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은혜 안에서 어떻게 성화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입니다.
중요한 열쇠는, 우리의 능력을 어디에서 기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스스로에게서 찾는다면 우리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과 또 성경의 다른 인물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행동하지만 나의 행동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저술 계획에 관해 알려 주시겠습니까?
「마음의 혁신」(The Renovation of the Heart)이라는 작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 전통 위에서 영성의 형성을 다룹니다. 이 책은 제가 이전에 쓴 「하나님의 숨은 계획」 (Divine Conspiracy)의 제9장에서 다룬 내용을 확대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간략하고 직설적으로 기독교 영성의 형성과 기독교적 자아관을 다루면서 지성, 감정, 의지 등 각각의 차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 좀 더 학문적인 책으로 「도덕적 지식의 상실」(The Disappe-arance of Moral Knowledge)을 열정을 가지고 쓰고 있는 중입니다. 이 상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도덕적 지식이라 할 만한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숨은 계획」의 첫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이 확대, 심화된 철학적 논의입니다. 저는 20세기의 도덕 사상가들이 어떻게 도덕적 기초를 놓았으며, 또 이들이 이러한 도덕적 지식의 상실에 어떤 책임이 있는가를 다룰 것입니다.
“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계획」의 앞부분에서 박사님은 ‘별 것 아닌 사상들’(mere ideas)이 얼마나 숨은 괴력을 가지고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하여 설파하셨지요. 박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것 중에 하나는 박사님께서 기독교 신앙의 균형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심원한 지성과 개념의 혁신을 깊이 강조하시는가 하면 저곳에서는 인격적 자유와 의지의 사용을 강조하시고, 또 신앙의 본질을 친교와 사랑에서 찾으시고 … 결국은 모든 것을 강조하신다고 할까요?
우리는 이 모든 조각들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실패는 이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강조하는데서 일어납니다.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느낌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고차 기증을 독려하는 한 광고의 메시지를 보면 기부를 함으로써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선행을 멈출 것입니까? 기분이 도덕적 생활의 기초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 지식이 느낌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책에서 말하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적절한 도덕적 기반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은 경험주의가 지배적입니다.
경험주의가 이 시대의 괴물입니다.
한국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지금까지 하와이 섬 서쪽으로는 가 본 적이 없습니다(웃음). 가 본적은 없습니다만, 중국과 한국의 선교사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의 책을 통해서 한국에 대해 알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바이올라대학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선교사가 되기로 지망하는 많은 한인 젊은이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의 일정과 계획이 아시아행을 허락하지 않은 측면이 많습니다.
유감입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과 나눔의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초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가주대학에도 많은 한인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성에 관한 박사님의 세 가지 주요 저서들에 관해 간략히 소개해 주십시오.
세 권의 신앙 서적은 모두가 가르침의 연장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첫 번째 책은 「하나님을 들음」(Hearing God)인데, 1984년에 출간된 초판의 제목은 「인도함을 찾아서」(In search of guidance)였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대화하는 인격적 관계에 대해서 이해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책 「영성 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s)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대한 구체적인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다룹니다.
세 번째 책은 「하나님의 숨은 계획」(The Divine Con-spiracy)인데 이 책의 요지는 복음 (Gos-pel)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소위 ‘용서의 복음’에 그치고 맙니다. 이 주제는 제가 대학시절부터 생각해온 오래된 것입니다.
내용적 순서로 보면 이 책이 첫째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의 아내는 복음의 참된 모습을 안 이후로 우리에게 해방을 주는 이 주제에 대해 책을 쓰라고 여러 해 동안 절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앙에 대하여
그러면 각 책의 내용을 좀 다루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들음」(Hearing God)에 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듣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강조하지만, 의사소통이 없는 인격적 관계란 전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이 없이는 어떠한 확신도, 구체적인 인도함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책에서도 다루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관계란 결국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들음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지도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으면서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모델이 아닙니다. 모세의 시대에 보면 다른 두 사람들이 예언을 할 때 모세의 반응은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예언하였으면 좋겠다고 소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물론 제가 책에서도 주의한 것처럼 하나님이 매 순간 모든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정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침묵은 우리의 성장을 유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서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릴까요?”라고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때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으십니다.
이번에는 책에서 말씀하신 ‘들음’의 의미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의사소통 이전에 먼저 ‘친교’(communion before comm-unication)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연합(union)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 해결자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문제의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향성이 그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성숙한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앞에 있다는 것,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입니다만,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익히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도 좋고 또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우리의 사랑이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는 것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조언들을 책에서 제시하고 계신데요?
예, 여러 가지 점들을 얘기했습니다. 가장 중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별한 성격을 지닌 생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이 책에서 꼭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그 부분이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기술하셨는데, 종종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이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많은 영성 운동들이 우리 생각을 버릴 것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저는 잭 디어(Jack Deere)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생각과 주로 상반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들음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 자신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은 그 생각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듣기 위해 우리 자신이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는 기계가 되는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것은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생각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어야 하고, 우리의 생각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면서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과 다른 것은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짐 존스(Jim Jones)라든지 여러 사교 집단에 속한 한 사람 만이라도 성경의 말씀을 상고했더라면 수천 명의 인명이 희생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방금 언급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지니는 그 독특한 특징은 어떤 것들입니까?
저는 책에서 음색(tone), 특성(quality), 그리고 내용(content)을 말했습니다. 내용의 면에서 우리는 그 음성이 성경과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부합하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크게 유용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 설교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데 이 원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과의 일치성 이외에 다른 원리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긴 시간에 걸친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음성은 불안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음색이 있고, 그리고 무게(weight)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우리 마음 깊이에로 내려옵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아지는 것입니다. 저도 수년이 걸려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천둥 소리와 같이 들려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시지만 주로 내면의 이와 같은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워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영역에 대해 사람들이 물어올 때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조언을 받기보다는 분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실패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하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말이지요. 또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기계와 같이 대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우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성경의 역할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책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교제를 성립시키며 그분과의 연합으로 개방하는 의사소통”이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박사님의 책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은 동일한 의미가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좌정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에 우리는 말씀이 성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 즉 자연의 피조물들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시편 19편, 119편 등 말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이시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객관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 속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객관적인 증언으로 섭니다. 그 목적에 있어서 불가변적입니다. 우리가 부인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에 대하여
이제 두 번째 책, 「영성 훈련」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이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영성 훈련이란 무엇입니까?
책의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책의 제목에 나온 영(spirit)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제자 훈련의 일부분이면서 그것과 구별되는 영성 훈련의 이해를 목적하고 있습니다. 영성 훈련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 안에 살도록 하는 그 분의 능력으로 접근하도록 해주는 활동이라 하겠습니다.
감리교의 옛날 정의대로 하면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입니다. 은혜는 단지 용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은혜란 상호작용적인 관계입니다. 영성 훈련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상호작용적인 관계로서 우리로 번영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며, 의로운 행위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입니다.
이러한 훈련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순간적인 변화를 설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만일 그 설교가 순간에 이뤄지는 완전한 변화를 주장한다면 잘못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설교가 사람들에게 극적이고 순간적인 ‘계기’를 통해서 변화가 시작되며, 거듭나고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면 옳은 설교일 것입니다. 물론 그 순간적인 계기란 늘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중생에 대해서 좀 말씀드린다면, 그것의 중요성은 어떤 체험 자체보다는 그 새로운 생명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목사 로버트 머리 맥쉐인 같은 이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중생의 체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새 생명이) 있습니다. 중생에 대해 제가 강조하고 싶은 또 하나는 오늘날의 우리가 참된 중생의 개념을 어느 정도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만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요한 웨슬레가 주로 지적한 문제였지요.
그렇습니다. 이들 신앙의 조상들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미국적인 풍토에서 근대 사상(mode-rnism)과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충돌 가운데서 강조점이 진리를 ‘믿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 천착한 것이 믿음으로 죄용서 받는다는 칭의의 사상이었습니다. ‘옳은 것을 믿어라.’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중생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성령 세례나 성령 충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우선 이 두 가지를 구별합니다. 세례란 문자적으로 둘러싸이는 것이며, 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우리 안으로 내면화하여 성령으로 지배받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충만함이 없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현대 은사주의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우리의 성품을 바꾼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세례는 주로 섬김을 위해, 은사를 위해 의도된 것이며, 성령충만은 내면적인 변화와 성령의 열매들을 위해 더욱 의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세례와 은사가 없다면 우리는 연약한 기독교가 될 것입니다. 또 은사가 있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종종 열매가 없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한 번이요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할수록 내면의 것들이 비워지고, 채워야 할 공간이 커지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영성 훈련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흔히 비신앙인을 구도자(seeker)라고 부릅니다만, 우리는 신앙인이 된 이후에도 늘 구도자로 남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언어의 사용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선교사 스탠리 존스(E. Stanly Jones)의 사역이 위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를 구도자적인 모습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몸(body)에 대해서 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몸이 영성 훈련에서 지니는 위치나 의미는 무엇입니까? 또 어떤 몸의 훈련이 필요합니까?
몸은 영적 생활의 자원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몸과 영은 서로 대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영성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몸을 훈련하도록 하여 몸과 영혼이 같은 편에 서도록 합니다.
몸은 그 자체로서는 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시편에서 나의 영혼과 몸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에 물든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난 영적인 몸을 지녀야 합니다. 몸은 우리의 육체에 깃든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말입니다.
영혼은 원함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영혼이 원하는 것에 반대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베드로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베드로는 한 번도 아니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육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기능적인 것이고, 존재론적으로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예. 기능적으로(functionally),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ontolo-gically) 아닙니다. 존재론적으로 죽이고자 할 때 우리에게 많은 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몸에 의지하고 살 때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에도 모든 것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변화 과정에 개입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기독교 영성 훈련과 다른 종교나 전통의 영성 훈련과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아주 직설적이고 단순한 대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 훈련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 영성 훈련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독교 영성 훈련은 어떤 점에서도 공로를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하시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권리가 없습니다.
이 점이 타종교와 다른 점이며, 특히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공작해(engineer) 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 그 분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도시 생활이 영성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도시 생활은 매우 다른 도전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옳고 그름을 말하기는 어려우나, 도시의 소음, 사람들, 분주함 등등은 우리에게 다른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도시 생활에서 어떤 이들은 하루에 18시간까지도 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제자 훈련의 사상과 개념을 이해하고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자 훈련은 할 일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큐티와 가정 예배 등의 예를 보십시다. 이것들을 제가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밤 9시에 잠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새벽 5시에 일어나 두 시간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든다면 새벽 5시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훈련의 개념을 이해하고 도시 생활에 적절하게 적용하도록 지혜와 조언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도시 생활의 비정상적으로 분주한 흐름에 거슬러서 우리 생활의 일부를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비록 그 결과가 사회적인 실패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늘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의 자아(ego)를 마사지하는 일인가? 바쁘다는 것은 자아의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바쁜 사람들을 중요한 사람들로 봅니다. 여러분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의당 바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주에 하루를 쉬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그분보다 더 중요한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루를 쉬셨습니다. 이 안식일의 개념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박사님의 영적 성장을 도와준 분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주위의 사람들, 형제, 목사님, 신앙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된 도움을 저는 책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성 안토니,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또 성 어거스틴이 매우 중요했고, 성 토마스 아 켐피스, 현대에 와서는 잘 알려지진 않았습니다만, 존 우드 오맨의 저서 「은혜와 인격」(Grace and Personality)이 제가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사님의 관점을 잘 실천하고 있는 제자 훈련의 모델들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제자 훈련을 하려고 시작한 몇몇 교회들을 알고 있습니다. 윌로우크릭교회의 소그룹 담당 목사인 존 올트버그 목사님이 이 개념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텍사스주의 알링턴에 있는 펜티고 성경교회도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참된 훈련의 개념이 실천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았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천의 참된 성도들을 보여주신 것처럼 저도 그렇기를 기도하고 또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 훈련이 잘 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할 때 제자로 인도하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틀렸단 말이군요.
시작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바꾸어 보려고 하면 모든 성도들의 반응은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합의한 게 아니에요”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소비자 종교(consumer religion)입니다. 신앙인들은 일정한 대가를 주고 예배를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계약은 지속적으로 배우고 훈련받는 것이 아닙니다.
김 목사님도 아시겠지만 웨슬레 운동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초기 퀘이커교도들, 베네딕트 수도단 등은 지속적인 배움과 훈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참된 제자 훈련이 잘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새로 교회를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의 소망은 「하나님의 숨은 계획」에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이 이것들을 교정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사에는 이것이 이뤄졌던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비자 신앙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구조나 크기에 있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설교의 변화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어떤 일이나 그분의 말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하라”(Trust Jesus Christ the person, not something he did for us alone, not something he said)는 복음을 설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설교한다면 제자도의 기초는 놓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 성장의 최고 원리는 모든 사람으로 제자를 삼아서,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될 것입니다. 교회의 크기는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제자 훈련의 핵심이 되는 사랑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훈련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둘 다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수동적인 우리에게 부과되거나, 주입되는 것은 아닙니다.
박사님의 저서는 개인 훈련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저의 책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두 가지 차원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고백과 복종 등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침묵과 독거(solitude) 등의 개념만을 보고 제가 개인적 훈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평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교회 사역에 있어서 영적 지도(spiritual direction) 혹은 멘토링(mentoring)은 얼마나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 보십니까?
감리교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신앙적 협의’(Christian con-ference)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것은 주된 훈련의 수단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의 필요성은 동의하면서도 그 용어와 실제에 있어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영적 지도를 하지만 그들의 지도자(director)는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보편적으로 보아서 영적 지도는 잘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영적 지도를 하는 사람들은 흔히 지도를 받는 사람 위에서 어떤 힘을 행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영적 지도란 서로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내가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그 결과로서 제안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경험을 올바로 해석하고 길을 찾도록 돕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경험이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슬픈 현상은 학교에서 영적 지도에 관한 강의 몇 개를 이수한 후에 영적 지도자가 되는 일입니다. 저는 그런 현상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박사님은 멘토링과 같은 객관적인 방법보다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을 선호하신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저는 결코 하나님이 제게 하시는 말씀을 단지 다른 사람을 통해 듣기를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전도단(YWAM)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의 강조점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또한 아내 제인과 제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만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영적 지도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이뤄진다면 많은 해악이 있을 것입니다. 영적 지도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는 일방통행식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서 함께 듣고 서로 듣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혁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숨은 계획
이제 「하나님의 숨은 계획」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제목에 관해서 여쭈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음모’(Conspiracy)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물병좌의 음모」(Aquarian Conspiracy) 라든지 하는 뉴에이지 책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단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말 같습니다.
그것은 숨겨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숨겨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의 여지를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모’라는 단어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좋은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단어의 의미는 함께 숨을 쉰다는 뜻입니다.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지요.
어원적인 의미가 이해에 도움이 되는군요.
실제로 이 제목은 제가 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바로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제가 정한 원래 제목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among us)이었습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이 제목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국이라는 것이 성차별적인 표현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거듭했습니다. 책을 출판하는 분들은 제목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것을 이해하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방에서 전화를 끊고 이쪽 서재로 와서 앉았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계획’(The Divine Conspiracy)이라고 말입니다. 혼돈 가운데 있는 제게 나직하고 무게 있는 바로 이런 음성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화를 걸어서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분들도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토론은 없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분명 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받은 후에 생각해보니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왕국의 위상은 숨겨진 계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말입니다. 또한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이것은 음모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란 인간 정부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2장에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숨은 계획은 무엇입니까? 박사님의 표현으로 한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최종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저서에서는 이것과 연관해서 ‘영원한 공동체’(eternal community)를 언급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이기는 과정의 결과는 사랑의 공동체, 영원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계획을 통해서 이 공동체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왜 중요한지요? 하나님의 숨은 계획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함께 있을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이 숨은 계획 안에 있는 관계성과 교제를 힘입지 않고서는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은 또한 진정으로 교회 일치 운동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이들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힘입지 않고서는 순종할 수 없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표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과 삼위 하나님과의 상호적 관계, 이것이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순종은 풍성함이라고 하셨지요?
동일한 얘기의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풍성함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풍성함에 도달하게도 됩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이 있는가 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구절도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밀접한 상호관계 속에 하나님의 왕국과 우리의 순종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먼저는 왕국입니다. 그러나 순종함이 없이는 온전히 왕국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데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이 없는 복음’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박사님의 표현을 빌자면 순종과 복음 사이의 분리는 어떤 신학적, 조직체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을까요?
휴, 이것은 큰 문제인데요. 그러나 저는 간결하게 대답하겠습니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예를 든다면 부활이 없이도 괜찮다는 등의 부분적인 선포가 오류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만, 이와 유사하게 보면 기독교의 (특별히 보수적이고) 대표적인 복음주의 대변자들이 가르치는 복음은 ‘대속의 도리’(theory of atone-ment)입니다.
그들은 대속의 이론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혹한 실수입니다. 대속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하신 어떤 일을 신뢰하거나, 그 분의 말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전인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거기에서는 “윌라드의 죄값이 치러졌는지 컴퓨터를 체크해 봐” 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박사님에게도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책에서도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율법의 성취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쓰셨고, “믿음과 순종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가 21세기로 접어드는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라고도 쓰신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어떻게 이 둘을 연결하시는지요? 박사님께서 이해하시는 ‘복음을 정의해 주십시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삶을 얻는다는 메시지입니다(Gospel is the word that life of Kingdom of God is available to us through trust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는 순종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혹 율법주의나 공로주의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데 다수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의 염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 강조하시는 순종은 개신교가 그 출생 때부터 싸워온 이러한 율법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 (semi-Pelagianism)와 어떻게 다른지요?
복음의 일부로서의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이며, 인격적 관계 안에 있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버는 공로(merit)와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순종을 전통적인 복음주의에서는 이중적으로 가르쳐 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영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현세에서의 구원과 풍성한 삶은 순종에 달린 것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복음은 말도 안되는(crazy)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충분한 타락(enough depravity)을 믿습니다(역자 주: 윌라드 박사의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죄성과 무능력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웨슬레안-알미니안주의에서 말하는 자연적 무능력(natural inability)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제 신학에 있어서 일관된 강조점(fixed point)은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 정당한 강조를 두어야 한다(Justice to the living as a disciple)는 것입니다.
박사님이 책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관대하심이란 지상이나 어디에서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라는 표현을 읽으면서 박사님께서 전통적 복음주의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교리에 대해 공감하시는 것으로 저는 해석을 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관해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뢰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신뢰라고 한다면 우리는 돌아서서 죄를 즐긴다든지 제자로서 그 분을 따라가는 삶에 무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이 참된 신뢰인가 하는데 있어서는 개개인에 대해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판단하시고 답을 주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불이 지옥의 불보다 더 뜨거울 수도 있다고 제가 쓰지 않았습니까? 지옥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이 아닙니까?
박사님의 이같은 ‘제자 복음’(disci-ple evangelism)에는 순종이 절실한데, 그러한 온전한 순종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다면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지요?
그 능력은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동안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에 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앞에 신실하게 서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신다고 박사님이 쓰셨는데, 우리가 그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의지로 구하고, 또 언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의 뜻만을 구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로 우리를 눌러 버리시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여러분이 그 때에 관하여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욥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박사님의 이 점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가집니다. 저 역시도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 앞에 마주 서는 장면, 모세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일어서는 장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주권을 주시는 장면 등마다 밑줄을 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존재에게 이러한 힘을 주신 것이 감사해서입니다.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것은 그들 인간에게 있었던 충만한 사랑이 그것을 정당화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인격적 관계를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 기도의 실패는 믿음의 부족이기보다는 ‘사랑의 부족’이 원인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의 태도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제자도의 맥락 속에서, 또 하나님을 들음 속에서 이러한 것을 행한다면 훨씬 더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지속적인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직면한 공통의 큰 문제는 영적인 무지라고 생각합니다. 영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깊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영을 범주적으로(categorically) 반대합니다. 김 목사님의 표현대로 한다면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계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과제는 영이라고 하는 개념을 재활시켜서 그것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인식의 요소로 삼는 일입니다. 이것은 길고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우리는 이원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전통적으로 영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원론적인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심지어 신학계에서도 이런 입장보다는 물질의 우위성이 인정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영, 특히 하나님의 영이란 비물질적인 실체(subst-ance)로서 궁극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구별될 수 있는 생각과, 가치의 판단과 무엇보다 자기 의지 혹은 마음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왜 의지가 영의 중심입니까?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중요합니다. ‘야훼’란 말은 “나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특질입니다. 의지 안에는 자기 결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 반론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영은 자기 결정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영역이 다른 여타 영역에 대해서 우위를 지닌다는 말이 될까요?
의지나 마음은 느낌이나 판단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상호적입니다. 서로를 규정해 줍니다. 의지의 중심성은 몸이나 판단이나 다른 영역의 격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의 경우에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뇌를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습니다만.
지금까지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만, 성령님에 대한 박사님의 이해는 어떤 것입니까?
성령님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독특한 위격(person)으로써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이 세 위격(person)들은 한 분 하나님의 본체(substance) 안에 좋은 사회(sweet society)를 이루고 계시면서 서로 복종 (mutual subordin-ation) 하시는 사랑의 관계를 이루십니다.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분과 동행할 것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박사님께서 이해하시는 위격(person)의 개념은 교부 터툴리안 이래로 전통적인 신학에서 허용한 것보다 더 온전히 우리가 쓰는 말인 ‘인격’의 뜻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과거의 삼위일체론이 지녔던 오류는 인간의 타락의 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길게 다루신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박사님의 전문적 성경 주석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웃음) 무엇보다도, 저는 그것이 예수님의 실제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이 설교는 뛰어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뛰어난 설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설교의 위대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태의 편집 쯤으로 말하게 되지요.
박사님의 주석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상설교를 율법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어떤 성격 묘사로 보았던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처럼 보이는 것은 예화이며 율법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이제 인터뷰의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미래의 하나님 왕국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미래의 왕국에 대한 비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동기부여를 주는 것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미래의 왕국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지금까지의 표준적인 견해는 이 세상과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에 아무런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것인 이 우주를 던져 버리지 않으시고 고치셔서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 쓰실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주는 소멸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주적 존재로서 이 우주를 책임지시는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분과의 교제 속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견해라고 봅니다. ‘다스림’을 주제로 성경을 쭉 연구해 보면 그것이 더욱 명확히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한국의 성도들을 위해서 추천하시고 싶은 책이나 기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리차드 포스터의 책들이 있고요.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을 줄 압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생수의 강」(Streams of Living Wa-ter)이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편집자 주: 윌라드 박사는 60년대 후반에 리차드 포스터와 함께 우드레이크 에비뉴 친우교회라는 복음주의적 퀘이커 교회에서 4-5년간 함께 목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윌라드 박사는 가르치는 장로였다. 계속적으로 이 두 사람은 친밀한 영적 교제의 관계를 지켜왔다. 리차드 포스터는 윌라드 박사를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종종 표현하나 윌라드 박사는 함께 나누었다고 표현한다).
저의 생각은 고전이 최상의 도움이 될거라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요한 웨슬레, 윌리엄 로 등의 책들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분들의 책에는 행위와 공로의 문제 등의 쟁점들이 있지만, 우리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정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의 일관된 강조점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받으나 제자의 삶은 싫다는 분들에게 저는 행운을 빌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지 많은 행운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삶이 매우 달콤하고 강건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십시오(Follow Jesus). 지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가는 동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가 되게 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말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는 조언일 것입니다.
박사님은 현상학을 전공하시고 특히 에드문트 후설의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철학과 신학이 잘 조화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있는 것들을 정확히 기술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저의 신학에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또 묘사하려고 합니다. 저의 철학은 신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설 자신도 학창 시절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장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신 말씀들이 많은 성도님들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저의 기쁨입니다.
대담과 정리/ 김성원 목사
사진/ 동양선교교회 이인검 전도사
……→ 대담을 마치면서
두 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그 분의 긴 생의 여정과 사상, 삶의 모습을 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담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는 없지만, 그러나 이 대화를 통해 무엇인가 밝아지는 느낌을 가지고 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조그만 집에 사시는 노인 목사님의 무엇이 멀리에 있는 우리의 시선을 끌었으며, 또 이 대화가 우리에게 새로이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일까?
내 머리에 남은 하나는 기독교의 진리, 복음에 대한 그 분의 양보하지 않는 입장인 것 같다. 복음이란 주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의 삶에 지금부터 영원히 동참하는 것이라는 그 분의 관점은 용서의 복음, 즉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에 이른다는 종교 개혁의 핵심을 포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복음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순종에의 부름이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순종을 주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신뢰의 자연스러운 발로로서 이해한다. 그는 그래서 제자로의 부름이 복음으로서 선포되어야 할 것을 사진에서 본 강직한 첫 인상만큼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한국 교회에게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일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가 그간 윤리와 삶의 문제에 A를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게을렀기 때문이었던가? 아니다. 어떻게 게으른 신앙인들이 세계 기독교사에 유래 없이 새벽제단을 쌓아왔으며, 어떻게 목사님들의 활동량이 미국 목사님들의 두 배쯤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다른 민족들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다. 한국 교회의 제자도를 지체하게 했던 진정한 문제는 신학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개신교 복음주의는 율법주의적인 행위 중심의 신앙에 대한 힘든 싸움 속에서 탄생했고, 그 메시지는 인간의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이었기에 제자도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약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월라드 박사는 그 자신이 율법주의적 행위관을 이겨낸 사람으로서, 이제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제자의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 신앙적 결론은 행위의 문제에 걸린 채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한국 기독교에 가장 핵심적인 조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나눈 대화들이 독자 여러분께 새삼 의미가 있기를 비는 마음이다.
또 한 가지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신앙의 균형이었다. 그의 넓고 깊은 지성과 강한 의지와 그러면서도 사람을 대하는 온유함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면서 뺨이 붉어지기도 하고, 아내와 가벼운 말씨름도 하는 그는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아니,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들어온 시골에서 살았고,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온 그의 성장 환경은 보통사람보다 어려운 것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직접 만난 그 분은 마음씨 좋은 소박한 분이었다. 그의 인격이 지닌 조화로움을 지켜보면서 인생의 선배에 대한 존경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균형은 그의 영성신학에도 반영되고 있다. 그가 보는 신앙의 본질은 전인격적 사랑의 교제이다. 그것의 중심은 자기 결정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도하는 빛은 지성이 발견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성은 몸을 통하여 실천되는 것이다.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지성적인 영성이었다. 많은 영성 운동들이 흔히 반지성주의를 택하는데 반하여 그는 지성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복음의 지성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스스로 지성으로 하나님과 대화한다. 영성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또 동서양의 인간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영성의 차이도 인정되어야 하겠으나, 그가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영성 안에 있다는 평안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남은 것은 하나님이 늘 함께하심에 대한 그의 확신, 또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에 관한 그의 확신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현실이며 생활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산에서 양들이 뜯어먹는 풀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는 시편 65편의 다윗의 생활의 영성과 같은 것이리라. 또 그는 그리스도의 친구요, 하나님의 자녀요, 대화자요, 동역자로서 스스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
을 볼 수 있었다. 그가 확신하는 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높은 위상, 이것이 과거의 신앙의 선배들이 감히 취하려 하지 못했던, 그러나 신앙인에게 주어진 참된 모습이라는 데에, 또 21세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험하고 성취하여야할 영적 목표라는 데에 깊은 동의를 보낸다.
윌라드 박사를 알고 또 존경하는 많은 독자들의 물음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점들이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 또 다른 기회들을 통해서 그가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벌써 멀리 북쪽 몬타나(Montana) 주의 시골에서 영혼의 힘으로 세계의 많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나누고 있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박사와의 다음 대담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