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에 대한 관점
세 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에 대한 관점’에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삼위일체설에 입각해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라고 믿는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단지 하느님이 보낸 선지자(예언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유대교의 일파를 이끌다 순교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예수에 대해 유대교는 《탈무드》 〈산헤드린〉에서 “예수는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했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지체로 보지 않는다.
예수를 ‘이샤’라고 부르는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과 기적을 행한 사실은 믿는다. 무슬림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해 신이 보낸 중요한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실제로 예수는 이슬람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허락으로 여러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는 “예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람에서 말을 했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흙으로 새를 빚어 숨결을 불어넣는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하느님 이외에는 숭배를 받을 존재가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코란》에 보면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사실이 없다고 되어 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으나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수라〉 4:147~158). 이렇게 《코란》은 단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고 있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하느님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으며 가롯 유다가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가까워오면 예수는 다시 지구로 재림한다는 것이 예수에 관한 이슬람교의 믿음이다.
이슬람교의 말세는 알라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말세는 대말세와 소말세가 있는데 대말세의 징조는 연기가 온 세상을 덮을 것이며 짐승들과 사기꾼들이 출현하고 예수가 재림하며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등 징조가 있다. 소말세는 사회의 부정부패, 고리대금, 간음, 대로에서의 범죄 같은 것으로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알라가 《코란》과 예언자 언행록인 《하디스》를 통해 그들에게 알려준 사실들이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참 선지자는 바로 무함마드라고 믿고 있다. 이슬람은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아니라, 하갈이 낳은 맏아들 이스마엘이 적자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 종교를 계승했으며 이스마엘의 자손인 무함마드가 참 선지자라 믿는다.
구원에 대한 견해
다음으로 ‘구원에 대한 견해’ 차이다. 기독교는 우리 대신 십자가의 피로 속죄하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대교는 하느님이 준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종교적 의무 5행을 철저히 지킨다. 곧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는 신조를 암송하고, 매일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며, 가난한 자를 위한 자선, 라마단 기간 중의 금식, 평생 동안 최소한 한번 이상의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이교도들과의 싸움에서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율법적으로 철저하게 종교적 의식과 의무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유대교는 ‘율법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렇게 된 근저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유대교가 창시되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는 지극히 현세적인 다신교의 우상숭배 사회로 삶의 방향이나 지침이 없는 무질서한 사회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유대인을 선택해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위한 크고 작은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곧 613개의 성문 율법과 구전 율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교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 너무 율법에 얽매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유대인들은 본질적인 율법 정신보다는 그 형식을 좇게 되었다. 이를 바로 잡은 분이 예수라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에 국한되어 있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방인에게도 넓혀 보편적인 종교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을 믿음으로 교체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반면 기독교보다 6백 년 뒤에 탄생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성경》을 자기들 입맛대로 왜곡하고 타락시켜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하늘에 있는 《성경》 원본을 다시 내려주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는 종교가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이슬람 교리는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6신 5행, 즉 이맘(여섯 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한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이 다섯 가지 실천 사항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행위에 대한 구원’을 강조하는 이유다.
메시아에 대한 견해
세 종교는 메시아에 대한 견해도 다르다. 정통파 유대교에서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2천5백여 년 전부터 두 가지를 희망하고 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 하바’ 세상이다. ‘올람 하바’란 ‘메시아의 시대’ 혹은 ‘다가올 세계’를 뜻한다. ‘지금 시대’는 히브리어로 ‘올람 하제(Olam Ha-Zeh: this world)’이며 ‘장차 다가올 세상’은 ‘올람 하바(Olam Ha-Ba: the world to come)’다.
그런데 이 ‘올람’ 이라는 말은 시공을 초월한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선상에 같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중히 여기는 이유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이 모두 모세와 같이 있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올람’은 어떤 일이 내일로 계속 이어질 경우 ‘지금’을 말하면서 또한 수백, 수천 년 앞의 미래 곧 영원을 말하기도 한다.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은 메시아가 올 그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과거가 살아 숨쉬는 ‘올람 하제’를 살면서 동시에 ‘올람 하바’의 시간을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구원이 이뤄졌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본다.
반면 개혁파 유대교에서는 ‘티쿤 올람’ 사상에 따라 ‘집단 메시아사상’을 믿고 있다. 이는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유대민족 전체가 하느님의 일을 거들어 이 세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사상이다. 유대민족 전체가 메시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재림 구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한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는 재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는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날이 오면 그때가 바로 예수가 재림하는 날이라 한다. 그날 세상의 종말과 천국의 도래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는 ‘메시아사상’에 있다. 기독교는 구세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므로 구세주를 믿음으로써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구세주’란 중재자가 없다. 누구나 알라를 믿고 선행을 쌓으며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루벤스, 〈십자가 위의 예수〉(1627)
원죄 사상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 금한 금단의 과일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이 죄가 자손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는 사상이 ‘원죄 사상’이다. 선악과란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를 주는 과일이다. 이에 하느님은 “이제 사람들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중요한 점은 아담과 하와가 이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먹게 되면서, 인간에게 ‘원죄’가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 보혈의 피로 대속했기 때문에 원죄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미켈란젤로,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1512)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이러한 원죄 사상 자체가 없다. 우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가 ‘대속’ 개념이다. 이슬람교에서는 대속이라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의 사건을 통해 대속에 관한 이슬람교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아담은 하느님이 금지한 나무 열매를 먹어 하느님이 그를 꾸짖었다. 이에 아담은 용서를 빌었고 하느님이 아담을 용서했다. 이처럼 아담의 죄를 용서함에 있어 제삼자가 필요치 않았다. 하느님이 직접 그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용서를 받은 아담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
반면 유대교에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죄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 사상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과거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다. 유대교에선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죄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이 죄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하느님이 준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죄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지 않고 하느님이 준 재능을 찾아내 이를 갈고 닦는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신앙이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이다.
반면 이슬람교는 원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용서했기 때문에 원죄는 성립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인류의 원죄를 씻어내는 예수의 대속이라는 개념 또한 없다.
이슬람교 인간관 특징은 인간은 그의 주인인 알라의 종이라는 것이다. 알라신이 세상의 모든 것의 운명을 정하고 인간은 신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신이 정한 길이 있기 때문에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할 선택권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천사와 악마의 존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뿐 아니라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천사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유대교에서 천사는 여호와가 불로 창조했다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천사는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 천사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심부름꾼’을 뜻한다. 그들은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祈願)을 신에게 전하는 존재다. 《구약성경》에서 천사는 천상의 군대로, ‘하느님의 아들들’, ‘거룩한 종들’로 불린다. 〈창세기〉에서 천사는 여러 번에 걸쳐 신의 명령을 전달한다. 신을 대신해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아브라함과 야곱을 지켜주기도 하며, 〈출애굽기〉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유대인을 보호하기도 한다.
악마도 있다. 히브리어 단어 ‘사단’은 《구약》에서 27회 쓰였다.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 역 《성경》에서는 그리스어 단어 ‘디아볼로스’와 ‘사탄’의 두 가지 번역이 있다. 디아볼로스는 신에 대해 쓰이고, ‘사탄’은 인간에 대해 쓰인다. 《신약》에서는 이 구별이 사라졌다.
천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안겔로스’다. 이 말은 신에게서 파견된 사제 · 예언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 용어에서는 인간보다 지혜롭고 능력이 뛰어난 영(靈)으로 정의되어 있다. 최초의 천사는 모두 거룩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었는데, 어떤 천사들은 감히 자신을 만든 창조주처럼 위대하고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그들은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켜 루시퍼를 비롯한 많은 천사가 신을 배반해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나뉘게 되었다. 악한 천사가 바로 악마(사탄)다.
천사는 항상 신에게 봉사하며 인간을 수호한다. 인간에게는 사람마다 수호천사가 있다. 천사는 그 사람이 인생의 최고 목표인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선행을 권하고 악을 피하게 해준다. 이슬람교의 천사는 인간을 섬기도록 만들어졌다. 알라가 인간을 창조하고 천사들에게 말하기를 “머리를 조아리고 인간을 경배하라. 내가 인간에게 나의 생기를 불어넣었음이라”고 했다. 곧 인간에게는 신성이 있다는 뜻이다.
라파엘로, 〈식스투스의 성모〉(1513) 중 아기 천사들 부분
세 종교의 안식일 차이
세 종교의 안식일도 차이가 있다. 즉 금요일은 이슬람, 토요일은 유대교 그리고 일요일은 기독교의 안식일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란 개념을 만들고 난 이후 원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의미했다. 유대인은 하루의 시작을 일몰로부터 계산한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이렇게 첫날의 밤, 낮 하루가 지났다”라고 쓰인 걸 보고 하루를 일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원래 세 종교의 안식일은 유대교의 안식일과 같았다.
기독교에서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뀐 이유가 있다. 예수 이후 유대인들과 기독교도들은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며 공존했다. 그러다 서기 132년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로마제국이 안식일 금지 칙령을 선포한다.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기독교도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로마제국은 안식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다.
그러다 32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안식일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태양신 아폴로를 숭배하는 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묶어 단일 종교화하려는 종교정책을 시도했다. 그는 유대력에 기초한 기독교의 주 7일 제도와 로마의 신들 이름을 혼합해 요일 이름을 정했다. 그중 일요일을 ‘Sunday’라는 ‘태양신의 날’로 이름 짓고, 휴일로 선포한다. 그는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로써 태양신 숭배자들의 휴일인 일요일이 기독교의 주 1회 안식일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셈이다. 유대인들과 달리 박해를 피하고자 한 기독교도들에게도 좋은 합의점이 제시된 것이다.
그 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하도록 결의했다. 태양신을 믿은 로마인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교회도 일요일에 예배를 보도록 명했다. 365년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기독교 예배일을 정식으로 유대교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로 바꾸게 되면서 기독교의 안식일은 일요일로 정착된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단단히 자리 잡아 중세 이후 그 세력을 넓혀 현재까지 그 위상을 누릴 수 있게 된다.
6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슬람교도 처음에는 유대교를 존중하며 그들과 합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며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무함마드가 주창하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무함마드도 유대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예루살렘을 향한 기도도 메카로 바꾸고 예배일도 금요일로 옮겼다. 무함마드가 예배일로 금요일을 선정한 이유는 아마도 이슬람교 이전 아랍 사회에서 금요일이 장날로서,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중심지역에 모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라는 데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일요일을 쉬는 파키스탄, 터키 등의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슬람교 국가들이 금요일을 법정 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사제의 유무
또 다른 차이는 사제의 존재 유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사제가 없다. 하느님과 평신도가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유대교에 ‘랍비’가 있고 이슬람교에 ‘이맘’이 있으나 이들은 사제 곧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다. 다만 유대교 랍비의 경우, 공부를 많이 한 공동체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예배의 모범을 보일 뿐이다.
이슬람교 역시 사제가 없다. 이슬람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 영적인 어떠한 중간매체도 두지 않으며, 인간과 신의 직선적 관계를 중시한다. 때문에 무슬림들은 예배, 선교, 교육 등 종교생활의 운영방식에서 타 종교와 다른 면을 보인다. 종교교육자나 선교사를 따로 두지 않고 스스로가 선교사이고, 스스로가 훌륭한 교육자임을 자처한다.
예를 들어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맘이 될 자격은 사막의 베두인이나 여행자이거나 젊은이, 무식자, 걸인 등 누구에게나 부여되어 있다. 이맘의 지위를 취득하기 위해 특별교육 과정이나 안수식 같은 어떤 절차나 의식을 거치치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 이맘은 누구나 될 수 있다. 이슬람교에는 기독교의 성직자 계급같이 평신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들 또는 사제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신 앞에 평등하다. 신 앞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동등한 지위인 것이다. 이같이 이슬람교는 평등주의를 내세운다. 신 앞에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무슬림은 누구나 똑같다.
유대교에 원래 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세의 형 아론에서 시작된 제사장 혈통이 있었는데 중간에 없어졌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고 40년 뒤 로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사두개파를 멸족시켜 사제직 혈통이 없어져 버렸다. 그 뒤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평신도들이 유대교를 지켜왔다. 이슬람교도 이러한 유대교를 본 따 만들어 사제가 없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하느님과 평신도 사이에 사제가 있다. 사제는 ‘신과 인간의 중개인’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사제는 천상의 예수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마태복음〉 16:19)고 말했다. 그런 연유로 베드로가 기독교의 초석이자 가톨릭에서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현재 가톨릭에서 고해성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가톨릭에서는 신부를 사제라 부른다.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설’은 신자는 누구나 하느님께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는 개신교의 교리다. 만인사제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성직자라는 특정한 호칭이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설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 나누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차별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은 설교는 신학교육을 받은 전문인인 목사가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평신도들에게 설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목사가 세례를 주며 예배를 인도한다. 이런 면에서 목사한테 제사장적 기능 곧 사제로서의 기능이 살아 있고, 목사가 신과 인간의 중개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직자 역할을 하면 이를 사제로 분류해야 옳지 않을까?
종교마다 약간씩 다른 십계명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하나다.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는 십계명을 약간씩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은 분류하기에 따라 열 개도 되고, 열한 개도 되며, 심지어는 열두 개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십계명은 개신교 십계명과 1번이 다르다. 유대교의 십계명은 “나는 너의 하느님 여호와다”로 시작한다. 신이 그들과 직접 계약을 맺으면서 그들에게 말한 첫 대목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이자 그들의 유일신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개신교 십계명 1계명은 “너는 나 이외의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마라”로 시작된다. 나머지 다른 계명들은 양쪽이 같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도 약간 다르다. 가톨릭의 1계명이 개신교에서는 1계명과 2계명으로 나뉘어 있다. 반면에 가톨릭의 9계명과 10계명이 개신교에서는 10계명에 합쳐져 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 차이
종교에 따라 《구약성경》의 권수가 다른 이유
《구약성경》은 《토라》를 비롯해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들을 모은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 개입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때로는 역사서의 형태로, 때로는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또는 교훈적 가르침을 통해서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구약성경》이 기원전 1200년경에 시작되어 8백 년 이상에 걸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경전을 ‘구약성경(Old Testament)’이라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경전이 오래된(old) 것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를 《타나크(TANAKH)》라 부른다.
《타나크》는 율법서(Torah), 예언서(Neviim), 성문서(Ketubim) 로 구성되어 총 24권이다. ‘타나크’는 이 세 분류명의 첫 글자를 떼어 합성한 이름이다. 서기 90년에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성경》 목록을 정해 신앙의 규범, 즉 정경(正經)으로 삼았다. 이 회의에서는 히브리어로 쓰인 24권의 《성경》만을 정경으로 확정했다. 이렇듯 유대교는 히브리 원문이 남아 있지 않으면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기독교의 《구약성경》(가톨릭 46권, 개신교 39권)보다 권수가 적다.
《구약성경》의 권수가 이렇게 서로 다른 이유는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72인이 모여 히브리어 《성경》을 당시 공용어였던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할 때 히브리어 《성경》 24권이 39권으로 나뉘어 그리스어 《성경》으로 번역됐다. 권수가 늘어난 것은 〈열왕기〉, 〈역대기〉, 〈사무엘기〉 등 일부 《성경》을 각각 상 · 하 권으로 나눴기 때문이다. 이후 기독교가 출범하면서 신자들은 히브리어 《성경》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사용했다.
그 뒤 가톨릭교회는 382년에 열린 로마 주교회의에서 제2경전 7권을 더 포함해 총 46권의 《구약성경》과 27권의 《신약성경》 목록을 확정했다. 이 7권은 ‘〈토빗기〉, 〈유딧기〉,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기 상권〉, 〈마카베오기 하권〉’인데 모두가 그리스어로만 된 것들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신교는 제2경전을 외경(外經)으로 여기며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존의 39권만을 《구약성경》으로 인정했다.
세 종교의 선교활동
유대교에는 선교활동이 없다. 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유대교를 믿게 하려고 이방인에게 선교활동은 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민족종교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자기 종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한다.
이슬람교는 두 가지 신앙 증언만 하면 입교가 허락된다. 무슬림들의 종교적 의무인 ‘실천 5주’에서 첫째는 신앙증언이다. 그 내용은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한다”라는 증언사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다. 이 증언사는 사실상 이슬람교 근본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증언의 두 번째 내용은 무함마드만이 알라가 인간 앞으로 보낸 사람(라슬라) 곧 성사(聖使)라는 것을 고백하고 증언함으로써 예언자로서의 그를 통해 인간에게 내린 알라의 계시를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이맘 앞에서 이 증언사만 외면 다른 절차 없이 곧바로 이슬람교 입교자가 된다.
지난 50여 년간 기독교가 47퍼센트, 불교가 63퍼센트, 힌두교가 117퍼센트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슬람교는 500퍼센트의 성장을 했다. 2013년 현재 인구는 세계 인구의 23퍼센트인 16억 4천만 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5년에는 전 세계 인구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슬람교는 한국인에 대한 선교도 열심이다. 한국에 이슬람교가 들어온 것은 1955년으로 2014년 현재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국내 무슬림은 약 15만 명이다. 그 가운데 한국인 무슬림은 약 4만 명 정도다. 모스크의 수는 아홉 개로 앞으로 3~4년 후 스무 개는 돌파할 것이라 한다.
서울 한남동 이슬람교 중앙성원
하지만 여전히 이슬람교는 우리나라에서 낯설게 느껴지는 종교다. 서양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이슬람교를 전파했다고 선전해 왔다. 오랫동안 이슬람교를 호전적인 종교인양 묘사하면서 이슬람교의 폭력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1천4백 년의 이슬람교 역사에서 이슬람교 공동체는 대부분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 왔다. 십자군 원정에서처럼 서방과의 충돌에서 침략자는 거의 서양이었다.
1187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 살라딘의 예에서 보듯, 이슬람교는 관용의 종교이자 생명의 존엄성을 교리에 담고 있는 평화의 종교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저질렀던 대량학살과 포악스러운 약탈 행위와는 반대로, 살라딘은 투항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와 화합의 선정을 베풀었다.
이슬람교의 의미 자체가 평화를 뜻하는 순종이다. 무슬림들의 일상의 인사말 “앗 쌀람 알라이쿰(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도 평화를 나타낸다. 평화는 이슬람교의 본질이요, 목적이다.
무슬림들이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초목까지도 얼마나 귀하게 다루는지는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632년 제1대 칼리프로 등극하자 무함마드가 계획했던 시리아 원정을 시행했다. 이때 그는 젊은 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맡기면서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살상하지 말 것, 수목을 해하거나 불사르지 말 것, 과실을 자르지 말 것, 소나 낙타 등 짐승을 도살하지 말 것,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신앙에 충실할 것” 등 전장에서 지켜야 할 규율을 시달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 역시 같은 선례를 남겼다. 634년 이슬람 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우마르는 모든 종교 공동체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안전하게 보호되고 예배장소도 그들로부터 결코 빼앗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며 그대로 실행했다. 이슬람교 영역에 있는 모든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은 그 사람이 무슬림이든 아니든 고귀한 것으로 보호받는 것이 이슬람교 정신이요, 관행이었다. 이슬람교는 전시에서의 전투상황, 정당방어 행위와 같은 합법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생명에 대한 위해 행위는 금지하고 있다.
반면 유대교는 태생이 민족 종교라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다. 일본 막부시대에 선교사를 앞세워 기독교 선교에 열을 올렸던 나라들은 모두 교역이 중단되고 쫓겨났지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유일하게 선교활동을 하지 않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는 교역이 허용된 역사도 있다.
하지만 유대교에도 선교 개념은 있다. 1980년대 미국 개혁파 유대교는 유다이즘에 선교를 위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 그 첫 번째가 유대인이 비유대인들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개혁파 유대인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정통파 유대교는 선교 개념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구든지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고 스스로 개종하는 것이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선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이방인들과 대화하려는 개혁파와 정통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그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22XX3910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