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문단 평설(40)
生滅法이 一片浮雲起, 一片浮雲滅이라
조남선
문학예술을 장르별로 펼치면 더욱 넓어지고, 모두를 합치면 종합예술이 된다. 편협한 사람들이 어느 한쪽만 보고 눈살을 찡그리며 비평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을, 전문성도 없이 비방을 하는 것은 곧 옹졸한 자신의 마음 상태와 불안감만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더구나, 남의 글을 평가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와 반대로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구두 설명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수필이나 콩트 그리고 소설과 같은 산문 형식의 모든 경우에도 공통적이긴 하지만, 달리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짧은 글에서 가슴 때리는 감동과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만 한다. 특히 독자로, 하여금 이해와 감동은 필수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와 독자는 공(共)이, 정서를 통한 깊고 깊은 사유(思惟)가 필수조건이다. 운율에 따라 연(聯)을 나누고, ‘노랫말’(가사)에 곡(曲)을 붙이면 바로 음악이 되어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듯이 말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나의 주변과 인생을 저울질하면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노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기쁨이 없으면 슬픔과 괴로움이요, 슬픔과 괴로움을 멀리하면, 기쁨이 다가온다.
전장수 시인의 작품을 감상해 보면 별리(別離)의 아쉬움과 슬픔에 대한 시어와 단원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괜스레 필자도 숙연해질 때가 많다.
나고 죽는 법이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한 조각, 구름이 멸하는 이치와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성현(聖賢)들은 남달리 그 이치를 먼저 깨닫고, 그 어느 쪽에도 매달려 집착하지 않으며 유유자적(悠悠自滴)하게 살다 가지 않던가?
우리가 살면서 마음 작용의 변화에 대해서 깊이깊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실체도 없는 기쁨과 괴로움, 불안과 공포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고리를 임의로 좌지우지할 능력자가 어디 있던가?
“인생이란” 시를 감상해 본다.
인생이란
창천 전장수
조각구름 하나가
하늘의 해를 가려도
땅에선
그 그림자 선명히 드리워지거늘
아무리 작은 사연일지라도
마음의 빛을 가린다면
그 삶 속에
어찌 그늘이 없겠는가?
하늘 같은 마음
땅 같은 삶
구름처럼 다양한 사연들
결국은 자연과 똑같은 인생인 것을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있으며, 시인이 언급한 마음의 빛을 밝히고 가리는 것, 역시 각자에게 있다. 마음의 빛이란 삶의 지혜이며 등댓불과 같은 것이다. 현대인들이 앞다투어 갈구하는 것이 지식이 아닌 지혜이다.
우주 만물이 무상(無常)하여 고정불변이란 예로부터 없었던 것을, 확실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바로 우리의 사대육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닫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문학이 병든 자를 치유한다. 그래서 (사)한국문인협회의 여러, 분과 중 “문학 치유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폐 일언 하여, 정신세계가 병들면 육신은 빈 껍데기와 마찬가지이다.
또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감상해 본다.
“오래된 흔적”
전장수
밤하늘에 달이 뜨면
그대 생각 난다
함께 했던 시간은 아름다웠고
헤어진 그때는 아팠었지
세월이 가도 난 그댈 잊지 못해
이렇게 시를 쓰고...
여전히 아련한 모습으로
내 가슴속에만 남겨진 그대여
그래도 난 좋으니
언제까지나 그대로 머물러 있길
너무나 아름다운 별리(別離)의 사랑 노래가 아닌가?
시를 감상하는 각자마다 그대에 상대를 대입하여 감상해 보라.
진한 사랑, 애절함, 그리움, 기다림, 매일 볼 수 있는 별처럼!
전장수 시인은 문학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문단에 함께함을 감히 영광으로 생각하며 건필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바이다.
전장수 프로필&사진: 가을호 23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