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길 : 미음 나루길<수려한 한강 풍경과 어우러진 인문 지성의 길
미음 나루 길을 걷고자 왕숙천이 한강에 합류하는 합수머리인 세월교에 이르니 맑은 하늘이 구름에 가린 뿌옆게 흐린 날씨로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를 일이다. 한 주의 일기예보를 통해 이미 비가 내릴 줄을 알면서도 도보여행에 나선 것은 왜일까 ?
성인 공자께서는 “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또한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땅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비가 내린다고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을까?
구리시 인창동에서 남양주시로 넘어가는 왕숙천에 놓인 세월교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 사라져 가는 시간이 마치 강물과 같구나 ! 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라고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는 세월을 연상하였는데 씻을 세洗 넘을 월越자를 쓰고 있어 홍수 때 다리 위로 물어 넘어가는 다리를 의미하는 잠수교였다.
세월교를 건너니 마치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진입하는 반야의 용선을 탄 것 같은 착각 속에 한강 변으로 진입하였다. 우려했던 데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멀리 적갑산, 철문봉, 예봉산으로 뻗어간 힘찬 산줄기를 눈앞에 마주하면서 강변을 따라 걸어간다.
저만치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는 하얀 손을 내밀며 어서 오라 손짓하는 듯하고 한강에는 빗방울 떨어지어 잔물결이 일며 정적이 감돌고 있다. 복잡한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 땅의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광이지만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듯한 비경으로 와 닿는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멀리 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느낄 때 미음 나루에 이르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강이 민족의 성산 태백산 금대봉에서 발원하여 영월에 이르면 동강이 되고 단양 지방을 흐를 때는 적강으로 불리다가 수도 한양에 이르러 동호, 서호, 행호가 되었다가 조강이 되어 서해에 합류하는데 이곳이 미음 나루가 있었던 바로 미호渼湖였다.
한강의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던 예전의 나루터의 흔적은 콘크리트 둑으로 막아 느낄 수 없었지만, 나루터에 있었던 그 옛날의 주막집들을 대신함인지 매운탕, 해물탕, 장어구이 등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풍속 마을로 지정되어 30여 개의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잠시 한강 변을 벗어나 마을 길로 걸으면서 여기저기에 있는 음식점에서 풍속 마을을 느낄 수 있었고 조말생 묘를 향하여 걸어갈 때 T자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하면 수석리 토성임을 알려주고 있다.
아직 산성을 탐사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여 찾아가기를 포기하고 조말생 묘에 이르렀다. 본래 금곡 묘적산 아래에 있었는데 고종의 능인 홍릉이 생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여 풍수의 문외한인 내 눈으로도 좋은 터로 느껴졌다.
조말생은 태종 때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매관매직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지만, 그가 태종과 사돈지간이었기에 어찌할 수 없어 형식적인 처벌에 그쳤다. 그 후 조말생은 세종을 도와 변방을 안정시키고 신생 왕조의 기틀을 닦는 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탐관오리라는 조선 사관들의 필봉을 피할 수 없었다.
피는 천추에 머금고, 이름은 만고에 전할 것인데 어찌하여 그 이름을 충절의 대명사로 남기지 못하고 탐관이란 오점으로 청사에 남기어야 했을까? 불현듯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얼마나 수양이 되었는가 안회여 !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비좁은 골목에서 사는 것을 남들은 그 빈궁함에 대한 근심을 견디지 못할 것이나 안회는 그 자신이 가진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구나. 얼마나 수양이 되었는가 안회여 ! ”
조말생 묘를 내려서자 석실 사원지를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조말생의 화려한 묘지로 인해 석실 사원의 향기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표지비석이 세워 있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석실 사원 지에서 그래도 서원의 향기를 느껴보고자 한옥가옥이 있어 서원과 관련 있을까 하여 대문 앞에 이르니 영모제란 현판에 양주 조씨의 사당이라고 적어 놓았다.
석실서원은 김상용과 김상헌 두 형제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1663년) 선원 김상용 선생은 “병자호란 떼 종묘사직을 모시고 강화도에 왔다. 성이 함락되자 가족과 결별하고 남문 누에 올라가 호황을 쌓고는 그 위에 앉아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당시 손자 김수전은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그 옆에 있었다. 종에게 명하여 끌고 가게 하였으나 아이가 옷을 부여잡고 가지 않으며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라고 해서 종도 어찌하지 못하고 다 함께 죽었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그의 충혈과 의로운 기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捐身殉國金尙公 육신바쳐 순국하신 김상용 선생
百世風聲鎭華東 백세토록 그 명성이 동방에 전해오네
硝火南樓雷霆起 화약 쌓은 남문에서 우뢰소리 일어나니
穉孫微僕亦丹忠 어린 손자와 노비들까지 충성심을 보여 줬네
청음 김상헌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부로 항복 문서를 찢었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선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렇게 기렸다. “어지러움이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류가 전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이 선생 같은 분을 내어 한 번 다스려질 조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이 이미 선생 같은 분을 내었는데 사람이 도리어 선생 같은 분을 숨겨 두려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석실서원에 배향된 두 분께서는 이 땅에 대의와 의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 주었건만 아쉽게도 그의 후손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시행하며 국정을 파탄시켜 망국의 길로 가는 실마리를 열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상용, 김상헌 선생의 의리 정신이 깃들어 있고 전통 주자학 외에 서양 과학사에 관한 관심을 가졌던 북학의 선구자인 홍대용 선생을 배출한 석실서원이 훼철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강 변으로 되돌아 왔다.
쉼 없이 한강 물은 흐른다. 비록 여울물 소리는 들리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내 마음에 희열을 주며 감격으로 다가오는 “한강은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 가람에서 유래되었다. 한은 크다 넓다, 가득하다, 바르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이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이다.
한강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중국의 한, 위나라에서는 대수帶水라 하였고 광개토왕 비문에는 아리수阿利水로 표기하였고 백제에서 욱리하郁里河라 불렀고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北瀆이라 하였고 고려 때에는 열수洌水라 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서울 부근의 한강은 가리켜 경강京江이라 하였다.
한강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백제가 동진 등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면서 한자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후에 한수漢水, 한강漢江으로 표기하였고 점차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한강수 한강 등으로 불리었더ᅡ.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 위원회>
하지만 ‘한’ 이란 의미가 가득하다, 크다, 넓다, 바르다 뜻을 지키고 있다면 한이란 글자를 한자로 표기하여서는 아니 되고 부득이 한자를 써야 한다면 우리나라를 뜻하는 韓자를 써서 漢江이 아닌 韓江으로 표기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강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보면서 진행할 때 빗방울이 굵어졌다. 11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예봉산 산줄기와 13시 방향에 솟아오른 검단산은 부끄러운 듯 감추어 아쉬워하면 희미한 자취를 들어내었다.
빗방울이 숨을 죽이는 듯할 때 강변에는 정자가 놓여 있다. 예로부터 복사꽃 향기가 마을 내 가득하고 산이 좋고 물이 맑아 무릉도원에 견주어 도원동이라 부르는 원덕마을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배낭을 내렸다. 김 총무가 건네주는 커피 향기가 강가에 퍼진다.
이곳에서 팔당역까지 6.2km이다. 그치는 듯하던 빗줄기가 조금은 굵어질 때 어느덧 미사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미사리 ! 그 이름도 알지 못하고 한강 걷기를 하면서 신석기 시대 선사 유적지가 있었던 한강의 아름다움 곳의 하나로 알게 되었지만, 사실은 20대 초반 직장 생활을 할 때 제품을 납품하러 덕소역에 하차하였을 때 불빛에 비친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 강 건너의 하얀 모래 벌의 풍광에 도취하여 제품을 납품하러 온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한 곳이다.
그 아름다움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비로 인하여 그 아름다운 풍광을 맨눈으로 감상할 수 없지만, 마음속의 간직한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아름다움을 반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종착지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기뻤다. 어린 시절부터 빗소리가 좋아 우중 산행을 마다하지 않았고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들로 나가기도 하였지만, 마음의 벗 한강 변을 비 맞으며 걸어가니 더욱 흥에 겨워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도란도란 주절이며 빗방울이 떨어지어.
빗소리에 가락 맞춰 콧노래를 불러보니
절로 이는 흥겨움에 백팔번뇌 씻겨간다.
마음은 벌써 창공을 날고 있었다. 골재 채취 사업으로 사라졌다가 퇴적 작용이 일어나 복원된 당점섬을 지나 팔당대교에 이르니 걷기를 마치어야 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직 점심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일까 ? 조금 더 걷고 싶었다.
하지만 아쉬울 때 만족함을 느껴야 기다리고 있는 이 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는 투정에 화답하는 것일까! 가는 길에 표지기가 사라졌는데 김 총무가 팔당역에 이르는 길을 꿰뚫고 있어 이내 가는길(표지기)을 되찾아 팔당역에 이를 수 있었다.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간 미음 나루길 ! 수려한 한강의 경관과 조선 시대 지성인의 응축된 삶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미음 나루 길을 우산 셋이 나란히 걸었던 추억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벌써 제3길인 마재 옛길을 걸을날이 기다려진다.
● 일 시 : 2021념 4월3일 토요일 비
● 동 행 : 조용원 회장님. 김헌영 총무
● 행선지
- 09시32분 : 세월교
- 10시10분 : 조말생 묘.
- 10시20분 : 석실서원
- 11시00분 : 원덕마믈
- 11시30분 : 미사리
- 12시51분 : 팔당역
● 소요시간 및 거리
- 거리 : 12km
- 시간 : 3시간 19분
첫댓글 한강의 유래와 공자님의 말씀, 또 충절의 정신을 가진 선인의 이야기 등 길을 걸으며 느꼈던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해 주셨네요. 귀한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