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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 조선, 한국이란 국호의 유래와 홍산 문명
개천절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조선이라 하여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로 10월 3일이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은 대종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 침략기에 나철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에서 개천절을 경축일로 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당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 뒤 상해 임시 정부에서도 개천절을 국경일로 삼아 경축하였으며, 광복 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이를 이어받아 개천절을 정식 국경일로 정하였다. 행사 때 부르던 대종교의 개천절 노래도 지금의 노래로 바꾸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에 지켜왔으나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면서 양력으로 바뀌었다. 제천 의식만은 음력을 따르고 있다.
단군왕검(檀君王儉) 채용신이 그린 단군상
개천 및 개국의 연대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은 실제 개천은 단군의 개국보다 124년 앞선 상원갑자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신화적 연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개천절이 경축일로 제정된 것은 1909년 중창된 나철의 대종교에 의해서이다.
이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음력으로 10월 3일을 민족의 기념일로 제정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단군 연호를 채택하여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제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로서 우리의 고유한 제천행사의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부여의 영고·예맥의 무천 등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서도 국난 때마다 단군신앙이 부활되고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지역의 민속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10월에 제천의 형식을 띤 동제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개천절을 10월로 정한 기본적 근거가 되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로 되어 있으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다.
개천절 노래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BC 2,333년 단군은 평양에 도읍을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다.
과연 <조선(朝鮮)>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면 만주 벌판의 중심도시인 심양 (瀋陽; shenyang)의 어원을 보자.
세소토어 senya는 상처를 주다 (to damage, waste)의 뜻이며, senyang은 해치는 것 (harmful, damaging)의 뜻이다. (-ng는 분사형)
중국 요녕성 성도이며 단군 조선의 중심지인 심양 (shenyang)은 세소토어 shenyang (damaging)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한자 뜻과는 달리 <사람을 해치는 사냥꾼의 수도>를 의미한다.
르완다어 zuba는 태양 (sun)의 뜻이며, 로지어 shenji는 사냥꾼 (hunter)의 뜻이니, <조선(朝鮮)>은 <zuba + shenji>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간 사냥꾼 즉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 조(朝)의 고어인 조(晁)의 상형은 <日 + 兆>로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이며, 선(鮮)의 상형은 <魚 + 羊>로서, <사냥한 물고기와 양>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朝鮮)>의 의미는 흔히 회자되는 아침의 땅이 아니라, <아침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간 사냥꾼 (군인)의 식민지 또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단군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했을까???
BC 2,334년 수메르 마지막 임금인 <루갈자게시>는 아카드족 젊은 왕인 사르곤에게 뜻하지 않게 멸망하였고, 그 이듬해인 BC 2,333년 군사 2천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환웅에게 양위받고 조선을 세웠다.
다시 말하자면, <단군왕검>은 수메르 마지막 임금인 <루갈자게시>이며, 이에 대한 설명은 필자가 여러 곳에서 누차 하였으므로 생략한다.
따라서, 국호 <조선(朝鮮)>은 바로 수메르 임금과 군사의 동천을 의미하는 것이니, <조(朝)>는 떠오르는 태양이 빛나는 동방을 의미하며, <선(鮮)>은 사냥꾼 즉, 군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朝鮮)>의 뜻은 <동방으로 군사를 돌렸다>는 의미인 것이고, <수메르가 멸망하자 군사 2천을 이끌고 동방의 환웅의 배달국으로 돌아와서 국가를 세웠다>는 아주 명백한 메시지인 것이다. (단군이 서역 대읍국(Uhma)에서 군사 2천을 이끌고 돌아왔다는 것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다)
먼 훗날, AD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동쪽으로 군사를 돌려 새로운 <조선>을 건국한 것도 군사를 동쪽으로 돌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조선(朝鮮)>의 의미는 루갈자게시인 <단군 왕검>이 <동방으로 군사를 돌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수메르 왕국의 동방 이주>를 의미한다.
또한, 단군 왕검이 도읍한 <평양(平壤)>의 뜻은 세소토어 <phema (to avoid, shun) + ng (~ing)>로서, <도피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수메르의 마지막 임금인 <루갈자게시>는 아카드 사르곤 왕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다시 탈옥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그의 추격을 피하여 <동방의 고국으로 다시 남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 17대 환웅은 단군을 서역 움마 섭정왕으로 보냈고 그는 수메르를 재통일하였다가 아카드족 사르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양>은 <임시 도피처>인 것이니 산중의 요새지역인 지금의 압록강 유역의 졸본 (卒本; 忽升骨)으로 추정된다. (홀승골은 위대한(홀) 수메르(승) 수도(골)의 뜻이다)
그리고 200년 후에 아카드가 망하고 그들이 패잔병으로 동방으로 왔으니, 정권이 바뀌어 북경 근처 백화산 아사달로 천도하였는데 그곳도 요새지역인 것이니, 조선은 서역 왕조들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아사달 (阿斯達)>은 르완다어 <asa (to chop firewood) + tare (large rock)>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산림이 우거진 산(阿斯)의 중턱(達)을 의미하므로, 북경 백화산(百花山) 중턱의 대평원과 일치한다.
그리고, 다시 수백년후에 서역에서 아카드를 멸망시킨 구티족들도 망하여 다시 동방으로 왔으니, 그것이 단군조선은 3한의 기원인 것이고, 삼한(三韓)은 단군 조선의 수메르족과 아카드족 그리고 구티족의 지방 분권형 연합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자 한(韓)은 르완다어 hande (side, camp,party)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지역 또는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니, 삼한은 단군조선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같은 지방을 의미하며, 한국(韓國)은 단군조선(朝)의 옛 지역(圍)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조선(朝鮮)>은 <수메르에서 동방으로 이주한 군사들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제 우리 학계에서도 단군 조선을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고 동굴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미개한 원시인의 나라라는 식민사관의 관념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수메르는 당대 최고의 문명으로 이미 BC 3,500~2,700년의 대홍수기에 대부분의 평지가 바다에 잠겼던 동양의 낙후된 문명에 수백년 앞선 첨단 청동기 문명 세계였으니, 단군의 최첨단 청동기로 무장된 2천 군사는 동방을 정복하고 대제국을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 소설가 김진명씨가 결론 내린 국호 한(韓)의 유래 -
우리나라가 왜 대한(韓)민국일까?
우리나라의 국호 '韓' 대한민국, 한국, 한반도, 한국인. 우리가 국호로 쓰는 '韓'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나라의 국명은 '한국’
정확하게는 '대한민국'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나라 이름이 왜 한국인지, 이 반도가 왜 한반도인지,
우리가 왜 한국인인지, 그리고 이 '한(韓)'이라는 글자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꼭 알고 싶었다.
그러나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자료를 찾아봐도 '한'의 근원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이라는 글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깝게는 <제헌국회 회의록>에서 우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채택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심원한 뿌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가장 처음 '한'이라는 글자를 국호에 쓴 건 대한제국이다.
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쓰게 되었는지는 <조선왕조실록> 중 <고종실록>에 잠깐 나와 있다.
확고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의의인즉 '삼한을 잇는다'는 뜻으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택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대한제국이 뿌리가 되어 대한민국, 한국, 한반도가 되고 우리가 한국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는 모순된 면이 있다
마한, 진한, 변한을 의미하는 삼한이란 무엇인가?
한반도 남부에 변변히 나라다운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짧은 시간 왜소하게 존재하다
백제, 신라, 가야에 병합되었다는 씨족 수준의 사회가 아닌가.
새로운 국명을 지을 때 예전에 있던 나라의 이름을 이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웅장하고 화려했던 과거를 계승하기 위함이다.
왕건의 고려는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어졌고,
이성계의 조선은 단군이 통치하던 고조선(실제 명칭은 조선)을 잇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삼한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한제국이라고 했다면, 삼한이 거대하고 큰 나라여야 논리에 맞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나라로 인정해 주지도 않는 작은 씨족 사회에 불과하다.
그 당시 조선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는데 한반도 남부의 조그마한 삼한을 잇겠다고
대한제국이라고 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삼한에 대해 우리가 뭔가 잘못 알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일부 과거의 역사서들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고조선의 큰 나라들로 나와 있지만
나는 가급적 이단으로 몰려 있는 책들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좀 더 크고 깊은 곳에서 삼한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형식논리적으로 한국이 있어서 남한, 북한이 있는 것처럼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나라도
원래 한이라는 원천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삼한이라는 국명을 찾아보았다.
삼한이라는 국명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나오는데
역사라든지 강역이라든지 하는 설명은 아무것도 없이
단지 그 풍습에 대해 짧게 나오는 게 하나 있고,
우리 <삼국사기>에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정도의 내용이 있다.
이토록이나 기록이 없자 '삼한'이 되었든 '한'이 되었든 '한'이라는 글자를
반드시 찾아야겠다는 신념이 나의 가슴속 깊숙이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는 문집이든 사서든 혹은 일개 서간이든 역사상 '한'이라는 글자의
맨 처음 기록을 찾아봐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너무나 뜻밖의 서적에서 이 세상 최초의 '한'을 찾아냈다.
시경이 기록한 우리의 고대 국가 '韓' 중국의 명저 사서삼경 중 한 권인 '시경 - 한혁편'에는
'한후(韓侯)'가 주나라 선왕(기원전 827-782)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韓'은 춘추전국시대 동명의 '韓'이 세워지기 400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 '한'이라는 글자는
중국의 사서삼경 속에 있었다
사서삼경 중에서도 공자가 으뜸으로 칭하던 <시경>에 이 의미심장한 글자 '한'이 있었다.
<시경> [한혁편]의 '한후(韓侯)'가 그것이다.
'후'는 우리 모두가 알듯이 제후,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후'라는 단어는 '한이라는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수많은 학자들 중 이 '한후'가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왜냐하면 <시경>은 워낙 오래된 중국 책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국가는 은나라지만 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나라는 주나라이다.
거기에 더해 <시경>은 주나라 초기에 나온 책으로 중국 역사의 태동기에 나온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책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라, 고구려, 백제부터를 역사시대로 가르치고 그 이전은 고조선으로 뭉뚱그리고 있다.
그 고조선은 곰에게서 태어난 단군 할아버지가 다스렸다는 식의 전설로 버무려 놓고 있기 때문에
이 까마득한 시절에 등장한 한후가 우리의 조상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하는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한후의 나라 '한'을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국 칠웅 중 하나인 '한(韓)'이라는 나라로 설명한다.
내가 답변을 들어본 수많은 교수들 역시 한결같이 이 한을 춘추전국시대의 한이라고 답변했다.
한 씨 성(姓)을 쓰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성을 대부분 '나라 한'이라고 대답하는데,
어느 나라 한이냐고 물으면 대개 잘 모르지만
그중 족보에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한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시경>에 나오는 한후는 중국 주나라 선왕 때 주나라를 방문한다.
이 주나라 선왕은 기원전 827-782년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한편 춘추전국시대의 '한'은 기원전 403년에 건국된 나라이다.
연대를 따져보면 모순은 즉각 드러난다. 모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학자와 교수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 한후라는 사람의 나라 한은 과연 어떤 나라인지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어떤 역사서를 보아도 이 '한'이라는 왕조는 춘추전국시대의 그 한밖에는 없다.
'한'이라는 나라는 있으되
중국의 왕조가 아니라면?
형식논리로 본다면, 그 '한'은 중국의 왕조가 아닌 어떤 다른 민족의 왕조인 것이다.
아무래도 이름이 같은 우리나라 '한'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기록도 없이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없어 나의 염원은 상상 속에서만 머물러야 할 듯싶었다.
그러나 천만뜻밖에도 나는 중국 동한 시대의 왕부라는 대학자가 쓴
<잠부론> '씨성편'에서 어마어마한 기록을 만날 수 있었다.
왕부라는 학자는 중국 한(漢)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이다.
그의 <잠부론>은 세계의 100대 명저에 꼽히곤 하는데, 그중 '씨성편'은 성씨의 기원을 기록한 책으로
그는 그제까지의 모든 기록을 섭렵해 성씨의 유래를 기록해 두었다.
'씨성편'에서 왕부는 한씨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한후가 언급되고 있다.
그대로 옮기자면 '<시경>에 나오는 한후의 후손은 위만에게 망해서 바다를 건너갔다'라고 쓰여 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듯이 위만에게 망한 사람은 고조선의 준왕이다.
그리고 한후의 후손이 건너간 바다는 바로 서해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고조선은 일본인들이 짜준 각본처럼
한반도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의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위만에게 망한 한후의 후예는 고조선의 준왕이었지만 그로부터 약 800년 전에 존재했던 조상이
조선후가 아니라 한후라는 명칭을 쓴 걸 보면 고조선의 과거 국호가 '한(韓)'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왜 대한(韓)민국일까?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그것은 우리 국호의 유래와 의미부터 아는 일이 아닐까?
신시, 고조선과 연계되는 홍산문명
중국은 뉴허량 훙산문화 유적지를 중국 상고시대의 사회발전사, 전통문화사, 사상사, 종교사, 건축사, 미술사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화하족의 조상 을 제사 지냈던 성지로 간주하면서 동방 문명의 빛이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훙산문화를 중국의 역사로 인정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훙산문화 유적의 발견으로 요령 지역이 먼저 발전되어 중국 문명의 뿌리가 되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즉 훙산문명이 황허문명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했으며 황화문명과 훙산문명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결국 요령 지역의 훙산문화 전승자는 중국의 양사오-룽산문화와 전혀 다른, 만주 대륙 · 한반도 · 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중국 문명이란 황허문명을 의미한다.
뉴허량에서 발견된 비파형 옥기
훙산문화가 중국이 견지했던 중국 문화와 전혀 다른 동이족의 문화이며 연대도 앞선 것이 분명해지자 중국의 태도는 돌변한다. 과거에 동이, 즉 북방 민족의 유산을 부정하던 인식에서 탈피하여 이들 문화를 중국 문화의 틀 안에 수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다.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랴오허 지역의 선대 문화가 고조선문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단군조선의 실체 여부를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줄기차게 한국 학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샤자뎬 하층문화의 연대와 거의 일치하고 출토 유물도 단군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다.
샤자뎬 하층 문화에서 발굴된 채색 토기
상명대 박선숙 교수는 뉴허량에서 찾은 신비의 왕국을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나오는 신시(神市)로 비정했다. 이와 같은 추정은 신비의 왕국에서 매우 놀라운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도장이다. 고대 시대에 도장은 지도자의 징표로 여겨졌는데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이라는 도장을 세 개 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이는 도장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시기는 단군보다 앞선 신석기시대로 추정한다.
근래 일부 한국 학자들은 그동안 발굴된 자료들을 토대로 후기 훙산문명은 『삼국유사』에 언급된 신시이고 샤자뎬 하층 문화를 고조선 시대로 비정하면 연대가 말끔하게 정리된다고 설명한다. 즉 단군 고조선이 하나라보다 먼저 건국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탄선언이 나오게 된 이유는 관련된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단군 고조선 자체를 멀리했지만 훙산문명, 샤오허옌문명, 샤자뎬 하층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계속 이어지면서 샤자뎬 하층 문화에서 하나라보다 800년 앞선 청동기들이 출토된 것이다.
하나라를 이은 은나라의 유적지인 허난 성 안양 현의 은허에서도 기원전 11세기에서 기원전 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도장 세 개가 발견됐다. 이것은 중원 문화에서 도장을 사용했다는 증거로 중국에서 매우 중요시하는데, 훙산 지역인 내몽골자치구 나이만치에서는 옥으로 만든 도장 두 개가 출토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옥인장의 연대가 무려 6,500년 전에서 5,000년 전 사이로 올라간다는 점이다.
이 옥인장은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어 끈을 넣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물 모양을 ‘동물형뉴(動物形紐)’ 옥인장, 머리가 두 개인 새처럼 보이는 것을 ‘쌍두조형뉴(雙頭鳥形紐)’ 옥인장으로 부른다. 중국인들은 이들 도장이 은나라에서 발견된 것보다 적어도 2,000년 이상을 상회하므로 ‘중화민족제일인(中華民族第一印)’으로 명명했다.
도장 면은 지금 도장과 똑같이 양각했는데 두 인장의 도장 면에 모두 붉은색 안료가 묻어 있었다. 이 안료는 주사가 아니라 자석분(石粉, 붉은 돌가루 성분)으로 판단됐다. 박선숙 교수는 이 당시에 종이가 없었으므로 천에다 찍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과거부터 사용해온 도장 문화 역시 훙산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설명으로 한민족의 도장 문화가 중국으로 흘러갔음을 뜻한다. 훙산문화와 황허문화는 서로 섞이지 않았다가 청동기시대에 들어간 후 교류했으므로 청동기시대 한민족의 도장 문화가 중국인들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랴오허 지역에서 도장 문화는 매우 오래된 문화로 인식되는데 신비의 왕국보다 먼저 일어난 샤오허옌의 채색 도기(채도)에도 글자와 비슷한 부호가 나타난다. 이러한 부호들이 발전해 도장 문화가 되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옥으로 만든 도장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곧 그가 귀인이며 지배자임을 상징했다. 참고적으로 한자 전서(篆書)는 도장에 새겨 넣던 글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샤오허옌에서 출토된 소도호(小陶壺)라는 홍도관
아쉬운 것은 중국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토대로 랴오허문명론을 개발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확장하는 일에 주력하는데도 우리나라는 한반도의 역사만을 수용하는 데 급급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랴오허문명이 발전하고 있을 때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단지 중국과 한국의 시원 문화로서 랴오허 강 일대에서 발달된 독자적인 문명권이 있었으며 단군조선보다 거의 1천 년 전에 이미 ‘신비의 왕국’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주도 세력은 예맥의 선조들이며, 그 주맥이 한반도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한민족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훙산문화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중국은 그동안 황허 강 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되었다는 황허 중심 문화를 기본 정설로 견지해왔다. 따라서 문명화된 세계로서 중국의 이상형은 통일된 ‘하나의 천하대국’이다. 황허 강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중원에 선진 문명을 이룩하면서 점차 주변의 야만국들을 흡수했기 때문에 중원(中原)이 중국의 중심지라는 견해다. 이는 중국 문명이 오늘날 산시 성 남부 및 후난 성 서부인 이른바 중원 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말로도 설명된다. 이런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그들은 국가의 시작을 대체로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으로 잡았다.
중국은 유물사관으로 무장한 공산국가다. 유물사관에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의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앞선다고 추정하면서도 가장 낮은 연대를 고수한 것은 증거 위주의 역사관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중국에서 근래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중화 오천 년’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역사의 기원을 기존보다 1,000~1,500년 상향 조정하고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알려진 세계 4대 문명(이집트 나일 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및 티그리스 강, 인도 인더스 강, 중국의 황허문명)보다 훨씬 빠른 ‘랴오허문명(遼河文明)’이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을 일구었다는 랴오허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 국가를 ‘신비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랴오허 강 유역
중국이 ‘중화 오천 년’으로 역사를 올려 잡은 이유는 하(夏, 기원전 1600~2000년으로 추정) 이전 시기의 전설 속 인물인 ‘삼황오제’가 실재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요하문명의 핵심인 훙산(紅山)의 뉴허량 유적(牛河梁遺蹟) 즉 요령 지역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3000~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이들 유적을 근거로 ‘신비의 왕국(여왕국으로 추정된다)’이라는 고대국가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뉴허량 훙산 지역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더욱 놀랍게도 중국은 그동안 황제(黃帝)만을 중국인의 시조로 모시다가 1980년대부터는 염제(炎帝)를 포함해 염 · 황(炎黃)이 중국인의 시조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허베이 성 줘루 현의 황제청(黃帝城)과 황제천(黃帝泉)이 인접한 평원에 귀근원(歸根苑)과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 황제 · 염제 · 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언했다. 이것은 5,000 년 전에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점을 근거로 기원전 2700년경에 황제와 치우 간에 벌였다는 탁록 전투를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중국 허난 성에 건설된 황제와 염제의 석상
높이가 106미터로 세계 최고(最高)를 자랑한다.
황제는 중국의 건국 신화와 관련해 등장하며 염제는 주로 불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뉴허량 지역 즉 요령 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되어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다. 발굴된 유물로 보아 한국인의 첫 국가인 단군조선의 무대(아사달이라는 주장도 있음)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이 실재했느냐 아니냐로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단군보다 적어도 1,000년 앞서 이미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설명을 하면서 자국 역사를 끌어올리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