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한시감상
절명시 / 조광조
絶命詩 趙光祖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白日臨下土(백일림하토) 밝은 해가 아래 땅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소소종단충) 충심(忠心)을 환히 비춰 주겠지
〈감상〉
이 시는 사약을 받고 절명(絶命)할 때 지은 시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3년(1544) 3월조에,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송세형(宋世珩)이 아뢰기를, ‘기묘년의 인사가 과격하여 일을 그르쳤으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조광조 또한 당시의 무리들이 과격한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 억제하였다가 도리어 좋지 않게 여겨졌으니, 이를 보면 조광조가 가장 훌륭합니다.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지은 시에, ······라고 하였으니, 평생 지켜 온 바를 이것으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모두 복관(復官)된 마당에 조광조만은 아직도 복관되지 않고 있으니, 그 때문에 사림이 통탄하고 애석해합니다.
지금 만약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신다면 선비들의 습속이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오랫동안 머리를 끄덕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석담일기』에는, “임금께서는 또 정광필도 정승직에서 해임시키니, 조정 신하 중 다시는 광조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어서, 광조는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니,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上亦免光弼相(상역면광필상) 朝臣更無言者(조신갱무언자) 光祖竟不免死(광조경불면사) 臨死仰天吟詩曰(임사앙천음시왈)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天日照丹衷(천일조단충) 國人悲之(국인비지)).”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홍만종은 이 시에 대해 『소화시평』에서, “(유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사당할 때 ······는 시구를 읊조리고, 마침내 짐독을 마시고 운명하였다. 사림이 이 시를 전하여 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尋賜死(심사사) 吟句曰(음구왈)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遂飮鴆卒(수음짐졸) 士林傳誦(사림전송) 莫不流涕(막불류체)).”라 말하고 있다.
차의지동지운 / 김정
次義之冬至韻 金淨
玄機無外亦無停(현기무외역무정) 하늘의 이치는 무궁하고 또 멈춤도 없으니
誰識虧盈造化形(수식휴영조화형) 누가 이지러지고 차는 조화의 모습을 알겠는가
萬物未生凝涸處(만물미생응학처) 만물이 자라지 못하는 얼거나 마른 곳에도
一陽萌動暗回靑(일양맹동암회청) 하나의 양이 싹터 움직이면 몰래 푸른빛으로 돌아오네
〈감상〉
이 시는 의지(義之)의 「동지(冬至)」 시(詩)에 차운한 것으로, 성리학에 기반을 둔 우주론적 사고를 읽을 수 있는 시이다.
하늘의 이치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생생불식(生生不息)하여 멈춤도 없다. 그러므로 가득 찼다가 이지러지는 조화의 형상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만물이 자라지 못하는 차가운 곳이나 물이 없는 마른 곳에서도 양(陽)이 한번 동하여 양(陽)의 기운을 뿜으면 아무도 모르게 푸른 생명의 빛이 다시 살아난다.
김정(金淨)은 20대 초반에 「우구잠(憂懼箴)」을 지었는데, 그 글에
“하늘에는 음양이 있으니 도를 아는 자가 그것을 헤아리고, 사람에게는 화복이 있으니 도를 아는 자가 그것을 편안히 여긴다. 근심을 당해 근심한다고 해서 근심이 반드시 제거되는 것만은 아니고, 두려움을 당해 두려워한다고 해서 두려움이 반드시 멈추는 것만은 아니다. 오직 천천히 그것을 살펴서 저절로 풀리게 하고, 조화롭게 받아들여서 저절로 사라지게 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이치에 통달한 행동이며 도에 이른 지극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하늘을 즐기고 명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天有陰陽(천유음양) 知道者測之(지도자측지) 人有禍福(인유화복) 知道者安之(지도자안지) 見憂而憂(견우이우) 憂未必去(우미필거) 見懼而懼(견구이구) 懼未必止(구미필지) 惟其徐而察之(유기서이찰지) 使自解之(사자해지) 和而受之(화이수지) 使自消之(사자소지) 斯乃達理之行(사내달리지행) 造道之至(조도지지) 是以君子樂天知命(시이군자락천지명) 故不憂不懼(고불우불구)).”
라고 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을 피력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음양(陰陽)의 이치를 통해 자연의 변화를 터득하는 그의 성리학적(性理學的) 사고(思考)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주석〉
〖玄〗 어떤 본(本)에는 천(天)으로 되어 있음. 〖玄機(현기)〗 =천기(天機), 〖無外(무외)〗 =무궁(無窮),
〖虧〗 이지러지다 휴, 〖凝〗 얼다 응, 〖涸〗 마르다 학, 〖暗〗 몰래 암
도상유기암 암상유화 유향가애 시이기지 / 김정
途上有奇巖 巖上有花 幽香可愛 詩以記之 金淨
利路名途各馳走(이로명도각치주) 이익(利益)의 길과 명예(名譽)의 길로 각각 내달리느라
阿誰寓目賞幽芳(아수우목상유방) 누가 눈을 두어 그윽한 꽃을 감상했겠는가?
朝朝暮暮空巖上(조조모모공암상) 아침마다 저녁마다 부질없이 바위 위에서
浥露臨風獨自香(읍로림풍독자향) 이슬에 젖고 바람 맞으며 홀로 향기 내네
〈감상〉
이 시는 길을 가던 도중 기이한 바위 위에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윽한 향기가 사랑할 만하여 시로 기록을 남긴 것으로, 꽃에 가탁하여 당시(當時)의 세태(世態)를 비판(批判)하고 있다.
기이한 바위 위에 그윽한 향기를 뿜는 꽃이 피어 있지만, 아무도 눈을 두어 그 꽃을 감상하려 하지 않는다. 이익과 명예를 향해 내달리기 때문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아침마다 저녁마다 부질없이 바위 위에서 찬 이슬에 젖고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홀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김정(金淨)은 이 꽃처럼 누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자신의 길을 가고 있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해 이익(利益)과 명예(名譽), 두 길만을 위해 치닫고 있다. 자신은 그러한 세태(世態)와는 다른 길을 가고 싶어 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金淨)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기묘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충(元冲)이요, 호는 충암(冲庵)이다. 중종 2년에 장원으로 뽑히어 청관(淸官)과 요직을 역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청원하여 순창(淳昌) 군수로 보직되어서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신씨(愼氏,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복위를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사론(邪論)이라 가리켜 마침내 죄를 입었다. 정축년에 뽑아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하였고, 기묘년 여름에 형조 판서에 올렸다. 사화가 일어났을 때 곤장을 쳐 제주(濟州)로 유배시키고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였다. 공은 천성이 충효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였으며, 죽음에 임하여서도 낯빛이 변하지 아니하고 형제에게 글을 보내어 늙은 어머니를 잘 봉양할 것을 당부하였다.
공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형님의 아들 철보(哲葆)로 뒤를 잇게 하였다. 철보의 아들 성발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의 조카인 응교(應敎) 천우(天宇)가 공의 유고(遺稿) 몇 편을 모아 『충암집(冲庵集)』을 만들어 세상에 간행하였다
(慶州人(경주인) 字元冲(자원충) 號冲庵(호충암) 我中廟二年擢壯元(아중묘이년탁장원) 歷敭淸要(역양청요) 爲親乞補淳昌(위친걸보순창) 與潭陽府使朴祥聯名上疏(여담양부사박상련명상소) 請復愼氏(청부신씨) 朝議指以爲邪論(조의지이위사론) 竟被罪(경피죄) 丁丑擢授副提學(정축탁수부제학) 己卯夏陞刑曹判書(기묘하승형조판서) 及禍作(급화작) 杖配濟州(장배제주) 賜自盡(사자진) 公天性忠孝(공천성충효) 學問精深(학문정심) 臨死顏色不變(임사안색불변) 貽書兄弟(이서형제) 以善養老母勉之(이선양로모면지) 公無後(공무후) 以兄子哲葆爲後(이형자철보위후) 哲葆之孫聲發登文科(철보지손성발등문과) 公之堂姪應敎天宇(공지당질응교천우) 取遺稿若干編(취유고약간편) 爲冲庵集(위충암집) 刊行于世(간행우세)).”
〈주석〉
〖馳〗 달리다 치, 〖阿誰(아수)〗 누가. 〖浥〗 젖다 읍
농중압 / 김정
籠中鴨 金淨
主人恩愛終非淺(주인은애종비천) 주인의 사랑이 끝내 얕지 않은데
野性由來不自除(야성유래부자제) 유래된 야성은 스스로 없애지 못했네
霜月數聲雲外侶(상월수성운외려) 서리 내린 달밤 구름 밖에서 우는 짝을
籠中不覺意飄如(농중불각의표여) 새장 속에서 깨닫지 못하고 떠돌기를 생각하네
〈감상〉
이 시는 새장 속의 오리를 읊은 것으로, 오리에 자신을 가탁하여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닐기를 희망하고 있다.
새장 속의 오리에게 주인은 많은 사랑을 주었는데, 오리는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새장을 벗어나려고 한다. 서리 내린 가을밤, 오리는 새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구름 밖에서 우는 기러기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새장을 벗어나 땅 위에서 떠돌기만을 생각하고 있다.
날지 못하는 기러기를 김정(金淨)에, 주인을 임금에, 새장을 조정에 비유하여 생각해 본다면,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김정은 타고난 처사(處士)의 본능을 없애지 못했고, 높은 벼슬에 있는 벼슬아치들의 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조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싶다는 것이다.
김정(金淨)의 이러한 심사에 대해 『기묘록(己卯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며 겉으로는 순후하고 안으로는 민첩하다. 서사(書史)를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외웠다. 문장을 지은 것이 정하고 깊으며 넓고 멀어서 멀리 서한(西漢)의 풍을 따랐으며, 시는 성당(盛唐)을 배웠다.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경전(經傳)에 침잠하여 거경(居敬)·주정(主靜)의 학문을 하였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거워함이 천성에서 나왔다.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였으며, 봉급은 친척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가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평생 동안 먹은 마음이 한적하여 홀로 있는 데에 부끄럽지 아니하였는데, 이제 괴상한 화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나 때문에 스스로 게으른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 가는 길이 순창(淳昌)을 지나는데 순창 백성들이 다투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가지고 나와 길을 막고 울면서, ‘우리들 전날의 원님이라.’ 하였다. 인조 말년에 명을 내려 공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선조 때에 문간공(文簡公)이란 시호를 내리었다
(公天性純粹(공천성순수) 外醇內敏(외순내민) 於書史讀數遍輒誦(어서사독수편첩송) 爲文章精深灝噩(위문장정심호악) 遠追西漢(원추서한) 詩學盛唐(시학성당) 嘗入俗離山(상입속리산) 沈潛經傳(침잠경전) 爲居敬主靜之學(위거경주정지학) 好賢樂善(호현락선) 出於天性(출어천성) 不顧生產(불고생산) 不通關節(불통관절) 俸祿均頒於族親(봉록균반어족친) 其在謫中(기재적중) 語子弟曰(어자제왈) 余平生處心(여평생처심) 不愧幽獨(불괴유독) 而今得奇禍(이금득기화) 汝等無以我自怠也(여등무이아자태야) 公之落南也(공지락남야) 道過淳昌(도과순창) 淳昌之民(순창지민) 爭持酒饌(쟁지주찬) 攔道涕泣曰(난도체읍왈) 吾舊使君也(오구사군야) 仁廟末(인묘말) 命復公爵(명부공작) 宣廟朝(선묘조) 贈謚文簡(증익문간)).”
〈주석〉
〖籠〗 새장 롱(농), 〖鴨〗 오리 압, 〖侶〗 짝 려(여일작안(侶一作雁)), 〖飄〗 방랑하다 표
제탑산룡암 / 김정
題塔山龍巖 金淨
千尺巖崖傍碧流(천척암애방벽류) 천 척 바위 벼랑 곁으로 푸른 물 흐르고
如今佳會飮芳醇(여금가회음방순) 오늘 같은 좋은 만남에 향기로운 술 마시네
若將此樂爲圖畵(약장차락위도화) 만약 이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作我千年長醉人(작아천년장취인) 나는 천 년 동안 술 취한 사람 되겠지
〈감상〉
이 시는 탑산의 용암에 쓴 것으로, 시중유화(詩中有畵)가 잘 표출된 시이다.
탑산의 용암에 올라 보니, 높은 바위 벼랑 옆으로 푸른 물이 흐르는 빼어난 경치가 펼쳐져 있다. 그 좋은 경치를 바라보니 너무 기뻐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다. 만약 이러한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천 년 동안 그림 속에 술 취한 사람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당풍(唐風)의 애호는 후에 삼당시인(三唐詩人)의 본격적인 당풍(唐風)의 부흥에 일종의 선구(先驅)가 되었다고 하겠다.
〈주석〉
〖崖〗 벼랑 애, 〖醇〗 진한 술 순
제로방송 / 김정
題路傍松 金淨
其二(기이)
海風吹去悲聲遠(해풍취거비성원) 바닷바람 불어 가니 슬픈 소리 멀리 퍼지고
山月高來瘦影疏(산월고래수영소) 산 달 높이 뜨자 파리한 그림자 성기네
賴有直根泉下到(뇌유직근천하도) 곧은 뿌리 샘 아래까지 있음에 힘입어
雪霜標格未全除(설상표격미전제) 눈서리 모르는 품격 전부 없어지지 않았네
〈주석〉
〖去〗 일본작과(一本作過). 〖瘦〗 파리하다 수, 〖賴〗 힘입다 뢰(뇌), 〖標格(표격)〗 규범, 풍도(風度).
其三(기삼)
枝條摧折葉鬖髿(지조최절엽삼사) 가지는 꺾이고 잎은 헝클어져 내려와
斤斧餘身欲臥沙(근부여신욕와사) 도끼에 찍히고 남은 몸은 모래 위에 쓰러질 듯하네
望絶棟樑嗟己矣(망절동량차기의) 기둥이 되기 바람은 사라져 자신을 한탄하나
楂牙堪作海仙槎(사아감작해선사) 비쭉이 나온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 될 만하구나
〈주석〉
〖摧〗 꺾다 최, 〖鬖〗 헝클어지다 삼, 〖髿〗 머리 풀어 헤치다 사, 〖斧〗 베다 부, 〖楂〗 뗏목 사, 〖楂牙(사아)〗 나뭇가지가 고르지 못한 모양. 〖槎〗 뗏목 사
〈감상〉
이 시는 기묘사화를 겪은 뒤 귀양 가서 길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읊은 것으로, 소나무는 김정(金淨)을 형상화(形象化)하고 있다.
바닷바람이 불어 가니 슬픈 자신의 소리를 멀리 전하고 있고, 산 위에 높이 달이 솟아오르자 소나무의 앙상한 그림자가 드러난다(기구(起句)의 청각적(聽覺的) 이미지가 승구(承句)에서는 시각적(視覺的) 이미지로 변환되었다). 곧게 뻗은 뿌리는 샘 아래까지 박힌 데 힘입어 눈과 서리에도 변함없는 높은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정치적 시련에도 곧은 자신의 기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 가지는 꺾이고 솔잎은 헝클어져 내려와, 도끼에 찍히고 남은 소나무는 모래 위에 쓰러질 듯하다. 동량이 되기를 바랐으나 그 꿈은 사라져 자신을 한탄하나, 비쭉이 나온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 될 만하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기고 있다.
“충암 김정은 문장이 정심하고 호악하여 선배들이 ‘글은 서한을 추구하였고, 시는 성당을 배웠다.’고 칭송하였다. 그는 당화에 연좌되어 장형을 당하고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사되었는데, 해남 바닷가에 이르러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를 시로 읊었다. ······이 두 시는 격운이 맑고 원대하며 용의가 매우 절실하다. 이 시를 가지고 자신의 정황을 묘사했는데, 그는 결국 자기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다. 동량으로 쓰이려던 꿈도 이미 사라졌고, 신선의 뗏목감이나 되려던 바람도 끊어졌으니, 슬픈 일이다
(金冲庵淨文章精深灝噩(김충암정문장정심호악) 先輩稱爲文追西漢(선배칭위문추서한) 詩學盛唐(시학성당) 坐黨禍(좌당화) 杖流濟州(장류제주) 尋賜死(심사사) 其至南海也(기지남해야) 詠路傍松曰(영로방송왈) ······格韻淸遠(격운청원) 用意甚切(용의심절) 盖以自況(개이자황) 而竟不保命(이경불보명) 棟樑之用旣已矣(동량지용기이의) 仙槎之願亦絶焉(선사지원역절언) 悲夫(비부)).”
김정(金淨)의 시에는 당대 훈구파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 이 외에도 여러 작품이 있다.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김정(金淨)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에 뉘엿 비치고, 갈까마귀 저문 마을 내리는구나. 빈 숲 연기가 싸늘히 식고, 초가집도 사립문 걸어 닫았네.’는 장경(長卿) 유정(劉楨)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牛島歌)」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그윽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가진 재치를 다 부렸다. 그래서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은 그를 추존(推尊)하여 장길(長吉) 이하(李賀)에게 견주었다
(金冲庵詩(김충암시) 落日臨荒野(낙일림황야) 寒鴉下晩村(한아하만촌) 空林煙火冷(공림연화랭) 白屋掩柴門(백옥엄시문) 酷似劉長卿(혹사유장경) 其牛島歌(기우도가) 眇冥惝怳(묘명창황) 或幽或顯(혹유혹현) 極才人之致(극재인지치) 申企齋推以爲長吉之比也(신기재추이위장길지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