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西安 중국 반만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곳. 로마, 카이로, 아테네와 더불어 세계 4대 古都 중 하나로 꼽히는 도시다. 이 중 西安은 유일하게 동양에 위치해 있을뿐더러, 중국 최고의 산으로 꼽히는 '화산'과 양귀비와 당현종 로맨스의 배경이 된 '華淸池' 및 '華淸宮'에서의 '長恨歌'가 이름나 있으며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병마용갱'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볼거리를 가진 곳으로서 유명하다.
◈ 셋째 날 <5월/21일(토)>
○ 일정(오전)
- 06:30~07:00 기상 및 운동
- 07:00~07:50 아침식사('도원가든'호텔 부페)
- 07:50~09:10 출발 준비('도원가든'호텔앞 결혼 축포)
- 09:10~09:50 숙소에서 출발 ~ 명성시IC.통과
- 09:50~10:10 명성시IC. ~ 화청궁앞 도착
- 10:20~11:55 華淸池, 華淸宮, 溫泉湯 등 구경
- 11:55~12:50 점심식사(복성만두집)
○ '화청지(華淸池)', '화청궁(華淸宮)'
西安에서 25km 가량 거리에는 '여산(驪山)' 산록에 온천이 있다. 역대 제왕이 행궁 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楊貴妃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온천수는 섭씨 43도로 쾌적할 뿐 아니라 석회 등 여러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특히 관절염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華淸池'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산시성) 서안(西安, 시안)의 여산(驪山, 리산) 산록에 있는 온천.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名神)들의 온천지가 되었다고 하며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여 년 간 온천 휴양지로서 유명하다.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名神)들의 온천지가 되었다고 하며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여 년 간 온천 휴양지로서 유명하다. 서주 말기에 주 유왕은 지금의 이곳에 이 궁을 세웠다. 당나라 때인 644년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탕취안궁을 지었고 현종이 이를 증축한 뒤 '華淸宮'이라 개칭하였다.
당현종과 楊貴妃의 연애시절에는 이곳이 매우 번성하였고, 당 천보원년(742년) 현종은 못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보수하였고, 못이 '華淸宮'안에 있기 때문에 '華淸池'라고 명명하였다. 황제의 욕탕인 九龍殿 연화탕과 楊貴妃에게 하사한 욕탕인 海棠湯 등이 있다. '華淸宮'의 전체 구조는 6門, 10殿, 4樓, 3閣, 5湯)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60만㎡ 이다. '華淸池' 뒤에 있는 山이 위에서 말한 '여산(驪山)'이다.
'華淸池'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이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으로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妃였다. 며느리인 셈이다. 자신의 아내가 죽자, 그녀를 後宮으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였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일단 楊貴妃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 시킨후에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이때 楊貴妃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 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 였으며, 머리 회전이 빨라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단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난을 일으켜 궁지에 빠진다. 현종은 서쪽 사천성으로 도주를 해야 했으며 호위병사들이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목을맬 비단천을 내어줄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중의 한사람이였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기준과는 좀 달랐던것 같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고 한다.
'華淸宮'은 '안녹산의 난'으로 페허가 되었다가 5대 10국때 도교사원으로 개축 되였다. 청나라때 강희제가 이곳을 지나면서 보수하도록 하여 당시 지어진 누대 등이 남아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華淸池'를 황폐화 시켰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크기에 1/7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대단하다고 볼 수가 있다.
'華淸宮' 정원을 돌아서면 목욕탕 유적 박물관이 있다. 그 중심에 백옥으로 조각한 높이 3 m의 반라 양귀비 옥상이 있었다. 여우 가죽을 걸치고 몸을 반쯤 노출한 양귀비가 머리를 숙인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양귀비는 키가 180Cm, 몸무게만도 80Kg 정도 나가는 육중한 몸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와는 궁합이 맞지를 않는구나'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다.
'해당탕'은 '귀비지'라고도 하는데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이다. 양귀비는 이곳에서 한약제와 꽃잎 등을 넣고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바닥의 옥돌에는 그 주인이 그녀임을 알려주는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종의 전용 욕탕인 구룡전(九龍殿) '연화탕', '해당탕'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화청지 온천수의 수온은 43℃ 이다. 풍부한 광물질과 미량의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고 하며, 지금도 온천욕을 하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華淸宮' 내에 오간청(五間廳)은 1936년에 '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잠깐 숙박하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체포당하면서 생긴 총탄의 흔적과 구멍 뚫린 유리창 등이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양귀비의 형상은 요염하고도 풍만한 백옥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 중 한명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중독 시키는 아편인 양귀비로 이름한 것으로 보아 미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가 보다. 백옥상이지만 미모와 자태가 잠시 정신을 몽롱하게 하였다.
중국의 4대 미인은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그리고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라고 한다.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또 기러기가 나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및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렸다는 '양귀비' 등 미인들의 미모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오고있다...
西安에서 25km 가량 거리에는 여산 산록에 온천이 있다. 역대 제왕이 행궁 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온천수는 섭씨 43도로 쾌적할 뿐 아니라 석회 등 여러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특히 관절염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년고도 西安에 가면 섬서 역사 박물관부터 아직도 발굴이 끝나지 않은 규모의 병마용, 진시황릉을 비롯해 화청지, 지하궁전, 회민거리 등 볼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가장 현대화된 역사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는 섬서 역사박물관은 아편 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청동기, 도용, 금, 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다.
1호갱 발굴에 이어 2호갱도 발굴 중인 병마용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로 가득 차 있다. 진시황의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든 지하군단이다. 진시황릉의 무덤 역시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무덤의 둘레가 무려 6km에 달한다. 능묘가 완성되는 데만도 377년이 걸렸다고 한다.
◈ "華淸池"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