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중국어 간체자: 郑律成, 정체자: 鄭律成, 병음: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1976년 12월 7일)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해 활동한 공산주의 음악인, 작곡가이다.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조선인민군행진곡'과 '팔로군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한 후 중국에 건너가 항일 운동에 참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항일 운동 성격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역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중국을 위해서 한 것인지
성격이 불분명하며, 객관적인 증거자료로 입증되지 않았다.
1914년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과
지방 명문가의 딸인 최영온(崔英溫)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율성의 호적 이름은 '부은'이었으나 '구모(龜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정율성은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3월 신흥학교에 입학하였고, 합창단에 들어가
'내고향', '쪼각달', '고기잡이', '까투리타령' 등의 노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정율성의 셋째 형 정의은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누나 정봉은과 함께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을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5월 13일 상하이 푸동 항에 도착하였다.
정율성은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이 1992년에 펴낸 《작곡가 정율성》이라는 책에 의하면
정율성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南京)의 고루(鼓樓) 전화국에 침투하여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정율성 항일 운동 공적의 대부분이 측근의 일방적인 증언 및 구체적 내용없이
비밀공작 수행 이런식의 기럭으로 증거자료로 입증되지가 않았다.
그리고 신분 은폐를 겸하여 상하이를 오가며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여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율성이 정식으로 음악을 배운 시기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며,
이 시기에 어릴적 이름인 '부은(富恩)' 대신에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에서 '율성(律成)'으로 개명했다.
1936년 5월에 중국의 좌파 청년들이 참여하던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 창립 대회에서
정율성은 추취도(鄒趣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그의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을
만돌린을 연주하며 직접 발표하였다.
1937년 10월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중국 공산당의 루쉰 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등에서 학습을 나갔다.
정율성은 1939년 1월에 중국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혁명 문예 공작에 참여하였으며,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하여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八路軍大合唱)'을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당시 팔로군에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었다.
정율성은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앞서
1937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정설송(중국어 정체자: 丁雪松 딩쉐송[*])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하였다.
정설송은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 중공 외사판공실 비서장 등을 거쳐
덩샤오핑 정권에서는 1979년과 1982년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맡기도 했다.
정율성은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 '처녀 두었녀성', '조선의용군행진곡',
'연안송' 등 공산주의 혁명 색깔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정율성은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팔일오 광복으로 해방을 이룩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쪽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북조선로동당 당원으로 입당하였으며,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하였다.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한국 전쟁이 벌어진 뒤에는
침략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부탁으로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중공의 중국인민지원군 일원으로 그를 당해 12월 한국 전쟁의 전장으로
직접 파견하여 전쟁 관련 활동을 하게 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북녘의 국토를 끝내 수복하지 못한 뒤로
정율성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남아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정권의
공산주의 혁명 음악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76년 12월 7일에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고혈압 등으로 사망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이 안배한 바바오산의 혁명투사 공동 묘지에 시신이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