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사브레
콩스탕스
아빠는 마흔여덟 살에 간 질환으로 눈을 감았다. 오빠는 아홉 살, 나는 여섯 살이었다. 워낙 어릴 때라 함께한 추억은 한 손에 꼽혔고, 사는 동안 아빠의 흔적을 마주할 기회는 적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아빠 얘기를 잘 하지 않았는데 우리 역시 묻지 않았다. 기일 제사상 앞에 앉은 엄마를 볼 때마다 또 울면 어떡하지, 나와 오빠는 전전긍긍했다.
아빠에게는 원망 섞인 애증이 자리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서둘러 갈 거면 나를 낳지나 말지. 엄마는 아빠가 떠난 뒤 19년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희한하다. 사십 평생 꿈에도 나오지 않던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이 나이가 들수록 는다. 그 순간은 불시에 찾아오곤 하는데 반갑고 그립고 미안하다.
한동안 내 기억 속에 아빠와 있는 장면은 서너 개였다. 가장 큰 기억은 우리가족 외식 메뉴 선택권을 내게 주던 순간이다. 가족이 다 같이 외출했던 것 같고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고 한 것 같다.
“롯데리아 갈래? 해태리아 갈래?”
아빠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세를 낮추고 물었다. ‘해태리아’라는 게 있을 리 없지만 내 기억 속 아빠는 그리 물었다. 외가 식구들에겐 볼 수 없는 내 ‘장난끼DNA’의 근원을 유추해 보건데 그렇게 말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살면서 제일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이 찰나를 떠올리곤 한다.
‘새끼 고양이 인형 사건’도 기억난다.
“새끼 고양이라고 했어? 고양이 새끼라고 했어?”
아빠는 다그쳤다. 새끼 고양이는 괜찮지만 고양이 새끼는 나쁜 말이라는 걸 직감했던 기억. 지금도 나는 심하게 욕할 때 ‘새끼’를 뒤에 붙이곤 하는데 이 일과 관계가 있을까 싶다.
방에 누워있는 아빠와 병원놀이를 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아빠에게 장난감 주사를 놓으려고 하면 뒹굴뒹굴 구르며 싫다고 피했다.
“아야, 아야! 아파요, 선생님. 주사 안 맞을래요.”
처음에는 그게 재밌었는데 나중에는 슬슬 약이 올랐다. 아빠는 내 주사를 완강히 거부했다. 6살 이전의 기억 속에서도 ‘장난인데 좀 맞아주지 너무하다’고 여겼던 게 생생하다. 이제 와 돌아보면 아빠가 병원을 다닐 때였나 싶어 가엽다. 얼마나 주사에 질렸으면 놀이 중에도 필사적이었을까.
대학생 무렵이었나. 봉지 과자보다 비싸지만 맛있어서 ‘사브레’ 과자를 종종 사 먹곤 했다.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어릴 때 아빠가 잘 사주던 거라 말해 주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이 과자를 먹었다고? 그래서 내 입맛이 알아본 건가. 어쩐지 내 입에 딱 맞는다 싶었다.
요즘도 ‘사브레’는 봉지 과자보다는 비싼데 예전에도 그랬겠지. 아빠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나보구나. 맛을 기억하는 내 미각이 신기했고, 멋대로 해석한 아빠의 마음 씀씀이에 뭉클했다.
‘사브레’ 생각만 하면 긴 장마 뒤 햇살 아래 서 있는 듯 기분이 바삭바삭했다. 이름이 왜 ‘사브레’인지, 첫 출시가 언제인지 알아보며 먹었다. ‘사브레’를 먹으면 아빠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우리 남매를 아꼈다는 말을 친척들에게 듣긴 했지만 ‘사브레’ 만큼 와 닿지는 않은 터였다.
남자 나이 마흔여덟에 민감해진 건 후의 일이다. 교수님이, 좋아하는 남자 소설가가 마흔여덟 살이라고 하면 다시 보곤 했다. 마흔여덟의 젊음과 늙음의 정도는 저렇구나. 죽기에 마땅한 나이가 있을까 싶지만 마흔여덟은 너무 일렀다. 열 살도 안 된 핏줄과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할 부인을 두고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빠도 죽고 싶어 죽은 건 아니었겠구나.
아빠는 지금도 꾸준히 찾아온다. 가령 오빠와 조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내 어린 시절이 소환되는데 ‘나도 아빠랑 저랬는데…’ 싶은 것이다.
4년 전 이사하다가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다. 녹음테이프 겉면에는 ‘1983. 11. 8 가족. PM 16時’라고 쓰여 있었다. 디지털 파일로 복원해주는 곳에 테이프를 보냈더니 하루만에 mp3파일이 메일로 도착했다. 우리 남매 어릴 때 목소리가 있겠지 싶었는데 나일 여자 아이가 이제 막 옹알이를 했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라니. 피식 웃었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는 사이 등장한 목소리.
“오늘이, 며칠이냐면은, 천구백~팔십삼년, 십일월~ 칠일~”
31년 만에 듣는 아빠의 육성. 살아있는 아빠를 만나자 눈물이 쏟아졌다. 까맣게 잊고 있던 유일한 목소리 하나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가끔 “토깽아~”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 아빠 목소리가 이랬지, 나도 아빠가 있었지, 이렇게 사랑 받았었지.
아빠와의 추억이 n개로 늘수록 애증 대신 애잔함이 커진다. ‘토깽이’와 건강하게 천년만년 살고 싶었을 한 남자를 떠올리니 처연해진다.
메타포라 7기 3차시 <기억에 남는 음식>
첫댓글 저도 아버지가 8살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더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아빠의 목소리를 복원한 mp3를 통해 듣는 부분에서 감동너머 부러움이 커지네요. 모습은 사진으로 찾아볼 수 있지만 목소리는 도대체 기억나질 않거든요. 콩스탕스님처럼 녹음된 테이프를 발견하지도 못했고요. 제게는 아빠의 목소리가 너무 그립고 궁금해지는 글이었습니다.
녹음한 것도, 발견한 것도, 테이프를 맡겨본 것도 우연과 찰나의 선택이었을테고 이었는데 그 우연들이 만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와 관련해서는 늘 부러워하는 입장이었는데... 기분이 묘하네요...
샤브레를 보면 이제 콩스탕스님이 생각날 것 같아요. 저는 "마흔여덟의 젊음과 늙음의 정도는 저렇구나"이 문장에서 한참을 머물렀어요. 쉽게 이해하려한 건 아니지만 그 마음이 순간 느껴져서요. 콩스탕스님의 유쾌한 문장 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잘 전달 된 것 같아요. 순간 녹음기 이야기 앞에서 아빠 목소리를 상상해봤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 잘 읽었습니다 :)
제 글을 읽고 두 번이나 멈추고 헤아려주려고 해주셨다니... 정말... 감동적입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렇게 글 속에 등장한다는 것 만으로도 우린 이미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이 늘고 애증 대신 애잔함이 커지고'... 공감되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윤팔님과의 공통분모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아요. 신기한 인연이네요.
마음이 바삭바삭해지는 과자 사브레! 해테리아라는 단어에 저희아빠도 장난끼가 많았던게 떠오르기도 하고요^^ 추억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아직 12번이나 나눌 기회가 있는 거네요. 수업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원망 섞인 애증을 가졌던 아빠를 '아빠도 죽고 싶어 죽은건 아니었겠구나'라고 품게 된 글 속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번 수업 시간에서 느꼈던 것은, 경험 자체를 내어 놓는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며, 결국 글쓴이가 독자와 함께 같은 보폭을 맞춰 걸어가서 그 경험의 의미와 가치에 도달하게 해야 좋은 글이겠구나라는 생각을 내심했는데... 콩스탕스님의 글이 딱 그런 글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읽는 사람을 위해 너무 느리게도, 너무 빠르게도 걷지 않고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며 함께 글로서 걸어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태리아, 고양이, 주사, 샤브레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로 글 속 주인공만이 가지고 있던 시간의 우주로 갔다온 것 같아요. 감사해요.
의도대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했었는데....
사브레를 먹으면 아빠와 연결된 것 같다는 그 말이 자꾸 맴돌아요. 저는 엄마가 제가 낮잠 자고 일어나면 “ 일어나면 이쁘고~ 일어나면 이쁘고~ “ 라는 말을 해주면서 안아줬거든요. 그걸 제가 제 딸에게 그대로 하더라구요, “일어나면 이쁘고. 아고아고” 이 문장 속 고유한 억양까지 모방해가며. 그럴 때 전 연결된 걸 느꼈던 것 같아요. 마지막, 토꺵이와 건강하게 천년만년 살고 싶었을 그 한 남자에 대한 처연함이 여운이 깁니다.
'토깽이와 건강하게 천년만년 살고 싶었을 한 남자' 의 모습, 목소리, 성격, 분위기, 취향을 상상해보게 됩니다. 뿌옇다가 조금 선명해지면 자꾸 콩스탕스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콩스탕스 글에서 느껴지는 '소중한 순간이 모여 만들어내는 따뜻함'이 저는 참 좋아요. '샤브레'같은 글 ㅎㅎ
지난 월요일에 글 제목 보고 깜짝 놀랐었어요. 주말에 신랑이랑 장보러 가서 저는 빠다코코넛 신랑은 뽀빠이를 사들고 왔거든요. 생전 처음으로요. 아빠가 술 드시면 늘 사오시던 과자가 빠다코코넛이었거든요.
해태리아랑 고양이새끼에서 웃다가 '오늘이 며칠이냐면은'에서 울고, 웃고 울게 만드는 글이라니... 저도 이런 글 쓸 수 있음 좋겠어요^^
어쩌면 이 글을 쓰면서 콩스탕스님은 울다가 웃다가 그리고 결국 미소지었을까 ... 생각했어요.
그런 표정들이 자꾸 스쳐지나갔거든요.
콩스탕스님이 오랫동안 아빠를 생각한 덕분에 아마도 <아빠와 함께 했던 기억이 는>것은 아니었는지.
저는 저 문장이 제일 좋았어요. 열심히 살아가면서 애증을 가진 사람을 계속계속 그리워한 사람만이 갖는 마법같은 현재같아서요. 과자 하나로 아빠의 자식에 대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