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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 마 28:1-15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워와서는 집에서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하도 기특해서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얘, 2 곱하기 3은 뭐지?” “예, 그것은요, 6요.” “오 그래 잘 맞추는데, 그러면 7곱하기 8은?” “56요.” “그러면 10 곱하기 12는 뭐지?” “에이 할아버지,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어요. 할아버지는 바보 같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는 지식에 대한 거부는 이 어린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우리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거부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이 그렇습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한 시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시골길을 가다가 행복한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중년 부인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좋은 소식이 있나 보죠?” 테니슨이 묻자 부인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한 가지 소식밖에 모른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테니슨도 말했습니다. “부인, 그것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맞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래된 소식이자 새로운 소식이며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당신도 나도 부활합니다.”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는가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기에 즐겁게 산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3일의 비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3일째에 부활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그러니 3일의 비밀이요 신비입니다. 3일의 비밀의 핵심은 3일을 버티는 것입니다. 기도로 3일을 버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3일 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신도 3일의 비밀을 아시죠?”
3일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3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심삼일은 굉장할 수 있습니다. 작심삼일을 연결하기만 하면 됩니다. 작심삼일이 끝나자말자 다시 작심삼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가 작심삼일 했기 때문에 안 변한 것이 아니라, 작심삼일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변했고, 작심삼일을 계속 이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안 변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삽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의 인생입니다.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오고, 현재를 잘 살아야 미래를 잘 살 수 있어서입니다. 인도 수상 네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늪지를 메우고, 댐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세계 도처에서 인간의 짐을 덜어 주려고 노력해 왔다. 교회가 인간을 자극하고 이끌었던 힘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오늘을 사는 능력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곤 합니다. 또한 교회가 광야 한 가운데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살아갈 힘이, 교회가 버텨낼 힘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옵니다.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본래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지는 못했었습니다. 아마 자기 신분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 19: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유대인이 두려워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당시 공회의원은 오늘날의 국회의원보다 권한이 막강했습니다. 그것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누가 알았다면 “예수 믿으려면 좀 제대로 믿지” 라고 지적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요셉은 드러나게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가부를 결정하는데 영향이 미미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공회에서 사형이 결정했고, 빌라도에게 넘겨져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유대식이 달랐고, 로마식이 달랐습니다. 유대식으로는 안식일 이전에 시신을 거둬서 장례를 치러야 했고, 로마식으로는 시신을 십자가에 그대로 둬서 새의 먹이가 되게 했습니다.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내렸으니, 시신 처리에 대해서도, 빌라도가 주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유족이나 제자들 중에 빌라도를 찾아갈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응답으로 아리마대 요셉이 왔습니다. 사실은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자신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해보겠다며, 대신에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공회의원 요셉의 부탁을 들어줬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장례를 치를 무덤이 없었습니다. 그 무덤도 요셉 자신의 것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이 존재할 수 없지만, 만약에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 생전에 제자 노릇을 못했지만, 죽으신 후에 확실하게 했습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그였기에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진짜 예수님의 제자라면 언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긴 했지만, 장례 시간이 급박했습니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도 바르지 못하고, 세마포에 싸서 급히 돌무덤에 안치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 곁을 쉬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실 때 아무런 도움이 돼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바라만 봐야 했고, 애꿎은 가슴만 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으셨고 차가운 바위 무덤에 둬야 했습니다. 그러니 발길이 떨어지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기 위해 오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아는 한참을 흐느끼다가 무덤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을 보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생각에 안식일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습니다.
1절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드디어 안식일이 다 지나갔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날이 새기만 기다렸습니다. 날이 환히 밝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두 마리아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무덤은 지금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녀들이 그렇게 한 것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에 매여,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고형원은 복음성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사랑에 매여야 주께 내 삶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 주의 사랑에 매일 때 끝까지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오늘날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지킵니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인 셈입니다. 그래서 주일예배는 환희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산적한 문제가 있고, 당면한 과제가 있고, 둘러싼 난제가 있다고 해도, 주일예배는 축제여야 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주일에 예수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주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일이 날로서 의미가 있다면, 새벽은 시간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간이 새벽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무덤은 생명의 주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새벽은 잠자다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부활의 시간인 것입니다. 새벽은 하나님이 돕는 시간입니다. 시 46:5절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은 부활의 시간인 것입니다.
두 명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으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무덤으로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앞에 있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 있습니다. 갈만한 상황이어서 간 것이 아니고, 가야했기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경비병들에게 붙들렸다가는 시체 도둑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새벽은 정적의 시간입니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시간대입니다. 그러니 무덤 가까이 이르러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걸었을 것입니다.
2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런데 자기들 눈앞에서 엄청난 광경이 일어났습니다. 큰 지진이 난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지진은 이제 친숙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끔 미세한 지진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전에는 성경을 볼 때 ‘야, 지진이 일어났으면 대단했겠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기절초풍 했겠다’ 하며 남의 일로 여겼던 게 사실입니다. 튀르키예의 지진을 보면서 지진 공포가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상당한 규모의 지진의 위력을 본 지금은, 지진 소리만 들어도 실감이 납니다. 지진이 예수님이 부활 때만 난 것이 아닙니다. 마 27: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도 지진이 났었습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무덤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걸 볼 때 자연적 지진과는 다른 지진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지진 현상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리 없이 이슬처럼 임재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임재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얼마든지 지진 같은 강력한 힘으로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와 부활하실 때는 지진이 동반되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덤문을 큰 돌로 막아놓았지만 천사의 손이 닿자 자동문처럼 돌문이 열렸습니다. 천사는 굴려진 돌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그 천사의 모습은 광채가 났습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흰 옷을 입은 청년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요한복음에서는 흰옷 입은 두 천사로 묘사했습니다. 천사가 천상의 존재이기에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차이가 남을 알 수 있고 그건 별 다른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천사가 주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절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하지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그 천사가 그 빛나는 형상을 한 채 굴려진 돌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너무나 무서우면 몸의 신경이 마비가 됩니다. 얼마나 떨리겠습니까? 신경이 마비가 되어 꼼짝도 못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의식은 살아 있지만 몸은 말을 안 듣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꼭 가위눌린 것 같은 상황에 처해진 것입니다. 천사가 자기들을 노려보니 자기들은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 하는데 몸이 꿈쩍도 안 합니다. 천사가 공격이라도 하면 죽은 목숨입니다. 무덤을 지키다가 이게 지금 무슨 꼴인가 싶었습니다.
5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런데 여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여자들 역시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 천사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는 것을 봤습니다. 경비병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 같이 된 것을 봤습니다. 당연히 이 여자들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를 생각으로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압도적 광경을 보게 되었고, 무서움이 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여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여인들만은 아닙니다. 경비병들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경비병들은 패스하고, 여인들만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관심이, 아니 하나님의 관심이, 무덤을 지키는 경비들이 아닌,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만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관심을 보이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바라고 따르는 자들과, 예수를 부인하고 배척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똑같이 대우하실 수 없습니다. 그걸 통해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셨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왜 무덤을 찾아왔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여인들이 찾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오는지, 그 여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심시킨 후 바로 얘기를 해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죽은 예수, 장사된 예수라고 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고 했습니다. 훨씬 실감난 표현입니다. 여인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향해 말하는 천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 천사가 자기들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인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천사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천사를 통해 예고되었습니다. 마 1:20-21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천사의 알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천사가 여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천사가 최초로 전해준 목자나 여인들이 당시의 주류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도 쓰시고 왕도 쓰시지만, 낮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도 쓰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증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봤느냐는 것입니다.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봤습니다. 급하게 장사하느라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뉘어두었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럼 진짜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입니까?’
7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때 천사가 그 여인들을 재촉했습니다. “또 빨리 가서”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데 잠시도 지체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면 좀 있다가 전해도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알다가 뜸 잔뜩 들인 후에 전해도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자칫 혼날 수 있는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적인 삶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시신이 없는 무덤에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여인들을 빨리 가라고 재촉한 것입니다. 천사가 여인들 더러 누구에게 가라고 했습니까?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그 어떤 이들보다 제자들에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누구보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할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좌절하고 절망했던 이들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전 인생을 걸었었습니다. 자신의 생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랬으니 그들은 맨붕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좌절한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절망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시라도 빨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쭉 늘어뜨리며 맥없이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은, 여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먼저 접한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빨리 가서, 죄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엄숙한 명령에 답해야 합니다.
8절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 여자들은 천사의 재촉에 응답했습니다. 무서워 심장이 펄떡거렸습니다. 기뻐서 심장이 콩닥거렸습니다. 그들은 빨리 무덤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빈무덤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어서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한 달음에 내달렸습니다.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을 때 발걸음과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때는 너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큰 기쁨으로”였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그 광경을 봤다면 딱 미친 여자들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이 갑작스런 예수의 죽음 앞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어떻게 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가요? 그런 말을 들으면 또 어떤가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고 달리는 이 여자들을 누구도 막아설 자가 없습니다.
9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그런데 여인들은 달음질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감격스런 만남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첫 마디는 평안하냐는 안부였습니다. 여인들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글썽이며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여인들은 천사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빈 무덤을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이제 확실하게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제자들에게 가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천사는 “그의 제자들”이라고 했고, 예수님은 “내 형제들”이라고 호칭을 달리 하셨습니다. 자기 살겠다고 스승을 버리고 도망친 의리도 믿음도 없는 제자들을 향해서 “내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제자들을 움직였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복음 전하는데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과 똑같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받았던 사랑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불살랐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어떻습니까? 주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대합니까?
11-15절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기사를 실어 놓았습니다. 경비병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경비병들은 무서워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정신은 있되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신들이 본 충격적인 사실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성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돈으로 경비병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가짜 뉴스를 가공하여 전하게 했습니다. 그 가짜 뉴스는 지금도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 가짜 뉴스를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이 여인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이 여인들이 모습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고,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확실한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소망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전하며,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죽음앞에서 절망하며 슬퍼하는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인 부활의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끝까지 침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같이 느낄 때,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죽어갈때 침묵하셨지만, 결국 부활의 선물을 주신 그 하나님을, 우리도 끝까지 믿고 신뢰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크게 기뻐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처럼, 기쁨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하게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일은? / 마 28:16-20
오늘이 마태복음 마지막 설교입니다. 2021년 6월 첫주부터 시작했으니까, 거의 2년이 걸렸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마태복음의 가장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오늘의 이 말씀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장면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오늘의 말씀은 절실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일은?”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을 다른 말로 ‘사명’이라고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키에르케고르는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생 시절, 그가 22세 되던 때에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철학자 칼 히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는 순간이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린 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내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은, 아직 내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가, 사명이 끝나면 죽는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햄크스라는 사람은, 젊은 시절 광산에서 일하다가 크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두 눈이 멀게 되고, 두 손이 떨어져나가 심한 장애를 갖게 된 그는, 매우 절망하여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예일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설교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교수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 모임이 끝나고 햄크스는 그 교수를 만났고,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나 같이 눈도 없고 손도 없는 인간에게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한 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직 입과 귀와 발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눈과 손이 없더라도 나머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온 햄크스는 이 한 마디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고는, 자신에게 눈과 손만 거둬가고 입과 귀와 발을 남겨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그후 그는 스텐포드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의 유명한 강연자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사명(使命)은 한 자로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사명이란 ‘심부름하는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심부름을 합니까? 하나님의 심부름입니다. 사람은 사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되는대로 막 살아도 되는 그런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석공 세 사람이 성당을 짓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심히 돌을 쪼고 있었습니다. 하는 일은 같았지만, 세 사람의 얼굴 표정이 제각각이었습니다. 첫 번째 석공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두 번째 석공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석공의 얼굴에는 활력과 생기가 넘쳤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들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첫 번째 석공이 투덜대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죽지 못해 이 일을 합니다.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나에게 돌아오는 몫은 형편없거든요. 그저 목구멍이 원수입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두 번째 석공이 말했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나요? 저는 그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냥 시키는 일만 탈 없이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 석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일이 참 좋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해 돌을 쪼면 언젠가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질 겁니다.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까?” 세 번째 석공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사명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일을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일을 통해 행복과 축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사명자에게는 은퇴도 없습니다. 직분은 은퇴가 있어도, 사명엔 은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죽는 날이 사명 은퇴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이 지나자말자,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었습니다. 급하게 장례를 치르느라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지 못하고, 세마포에 싸서 돌무덤에 안치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도 겁도 없습니다. 무덤을 찾은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더구나 경비병들이 무덤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거기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무덤을 미리 봐두었기에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게 아닙니까? 막혀 있어야 할 무덤문이, 활짝 열려있는 게 아닙니까?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너무나 놀라서 죽은 자 같았습니다. 여인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무덤을 막는데 썼던 돌 위에 앉아있던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들을 데리고 무덤에 들어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인들은 지금 두 눈을 뜨고 역사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꿈이 아닌 분명히 생시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안 섰습니다.
7절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는 어정쩡한 모습을 한 여인들을 향해 재촉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기쁨 반 무서움 반,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한참을 달려가다 발걸음을 멈춰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첫 인사를 건넸습니다. “평안하냐?”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10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런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역시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말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증언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내 형제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한 데 모여 있었습니다. 막 16:10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기운에 겹겹이 둘러싸여, 간간히 흐느끼는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럼 환호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기쁨의 탄성을 질러대며 흥분해야 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 16: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당연히 믿어지지 않아서였습니다. 아니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믿으라고 하면 믿어지겠습니까? 이게 부활의 증인 앞에서 제자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3년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배웠던 그들입니다. 그럼에도 부활의 신비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데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할 때, 쉽게 믿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사랑의 수고를 하며 복음을 전하는 거고,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때는 내가 생각하는 때보다 길어질 수 있습니다. 눈물병이 꽉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은 힘내기 바랍니다. 가족 구원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건 우리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 사명입니다.
16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처음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믿지 않았지만, 여인들이 워낙 확신 있게 말하자 제자들이 움직였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갔습니다.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다 갈릴리로 간 것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을 때, 제자들이 불신의 반응을 보인 것을 보고, 실망하여 포기했다면, 어떻게 될 뻔 했겠습니까? 당신들은 제자될 자격도 없다며 돌아서 나와 버렸다면, 과연 어떻게 될 뻔 했겠습니까? 부활의 증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증인은 상대가 한 번 듣고 믿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말합니다. 몇 번이고 전합니다. 그게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 동네에 들어가 예수 증인이 되었습니다. 요 4: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신기한 것은, 동네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첫마디에 믿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귀가 얇은 사람은 “어, 진짜?” “오, 대단한데!” 하며 호기심을 보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 그럴리가 있나?” “하하, 어쩌다 맞췄겠지” 하며 시큰둥했습니다. 그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부활의 증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할 줄 모릅니다. 포기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기 전에는 내가 진 것이 아닙니다. 사명에 포기란 없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다해서라도 완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너무나 확신하는 여인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은 갈릴리로 갔습니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얼핏 하신 게 기억났습니다. 마 26:31-32절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100% 믿기지 않았지만, 여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부활의 주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인생의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여자 말 들어서 손해 보는 경우가 드물다는 또 하나의 예입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르던 그들에게, 주님의 죽음은 모든 게 끝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주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께는 당연한 부활입니다.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기에 뜻밖의 부활입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경배가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다는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다라고 해도 몇 명이나 됩니까? 고작 11명 아닙니까? 그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뻔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심지어 그 앞에 경배하면서도, 100%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게 사람입니다. 성육신이 믿어지고, 십자가가 믿어지고, 부활이 믿어지고, 재림이 믿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마음으로 믿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따르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 중에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믿었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지막 호흡하는 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 당하였습니다. 세배데의 아들 야고보는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습니다. 빌립은 몹시 채찍에 맞은 후에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인 마태는 에디오피아에 선교하다가 창에 찔려 죽임 당하였습니다. 또 다른 야고보는 구타 당하고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습니다. 가롯 유다의 빈 자리에 제비 뽑혀 제자가 된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매질 당하고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였습니다. 도마는 인도 선교 현장에서 창이 몸을 관통하는 처형을 받고 죽임 당하였습니다. 바돌로매는 십자가 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거대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날에 몸이 찢기는 처형으로 순교 당하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의사 누가는 그리스의 우상숭배하는 이방 제사장들에게 붙잡혀 감람나무에 목 매달아 죽이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아래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화형 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자기 밭을 팔아 베드로와 사도들 앞에 갖다 바쳤던 바나바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 전파의 현장을 누비다가 붙잡혀 주후 73년 경에 순교 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요한을 제외한 열 제자와 초대교회 일꾼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잠시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땅의 유한한 가치를 위해 살지 않고, 저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였음을 증명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모험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꾸며주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 전부입니다. 믿음은 내 삶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땅에서 잠시 받는 고난을, 하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며 오히려 기뻐합니다. 복음 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곧 사명을 위해 살아갑니다.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약 40일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시기 전, 유훈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지만, 본래부터 그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사역하셨습니다. 그 권세로,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에게 말씀 사역을 하셨고, 각색 병든 자들을 위한 치유 사역을 하셨고,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을 위한 축사 사역을 하셨고,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 권세로 기도하셨고, 그 권세로 제자들을 양육 훈련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 보니 그 권세들은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에게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 권세로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가서”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기 전에 먼저 머물라고 했습니다. 행 1:4절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일단 한 번 가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권세를 받은 그 후에 가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떠나는 것이 먼저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받는 게 먼저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 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구원의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구원의 믿음에 성령 충만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폭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하되, 자신이 제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여, 내가 먼저 신실한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나에게 충성된 제자를 붙여 주옵소서.” 우리는 자신을 제자 삼는 제자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제자 삼는 제자입니다.”
제자로 삼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먼저 세례 주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믿기로 결단하면, 첫 번째로 하는 일이 세례를 주는 일입니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는 죽고 오늘부터 예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한 출발은 세례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가 신앙의 마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양육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쳐”의 원어 ‘디다스콘테스’가 현재 분사형입니다. 가르침에 있어 지속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언제까지 가르쳐야 합니까? 지킬 때까지입니다.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지식의 위험성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고전 8:1절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1절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믿음이 약한 자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보면 겸손해집니다. 말씀 앞에 직면하고도 교만하다면 뭐가 잘못 됐습니다. 실제로는 말씀을 대면한 게 아니었습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은,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몇 번 배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수료증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키도록 가르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제자 삼는 것입니다.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 할 일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곧 모든 날 동안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의 마지막 말은 단순하게 ‘임마누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의 시작에서,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제 예수님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예수가 직접 ‘임마누엘’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마태의 신앙 고백입니다. 마태가 이 복음서를 쓰고 있을 때, 세상은 정말 어둡고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고, 매를 맞았고, 쫒겨다녔고, 숨어 살았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태는 이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고난을 견디고 있던 성도들에게 너무나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여전히 위로가 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내 곁에 안보이는 것 같고, 혼자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나만 힘든것 같을 때에도, 세상이 끝날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그냥 우리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고,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우리는 부활의 복음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며, 죄 사함과 구원과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그 부활 복음의 영광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자들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모든 민족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서 소멸되지 않고, 끊임없이 선교적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확신을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그 확신 속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이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