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7일 영주에 다녀오다.
이날은 영주시와 매일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1회 영주소백산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고교마라톤동호회가 창립기념대회를 영주에서 갖기로 했다.
지난해도 영주에서 하프를 뛰고 그만 둔지 꼭 1년만이다. 단양과 풍기를 지나면서 눈비가 내린다.
비를 맞고 뛰려면 각오를 단단히 가져야 하는데 다행히 영주에 도착하니 하늘이 맑아졌다.
지난해와 달리 바람이 불면서 날씨도 차다.
중간중간 진눈깨비도 날리지만 주로변에 봄꽃들도 보인다 .
아침9시30분. 영주시민운동장을 출발하는 풀코스 주자들에 이어 하프코스 마라톤대열에 서다.
오랜만에 주로에 서니 잘 달릴 수 있을까, 완주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게다가 연습도 제대로 못해 천천히 뛰었다. 2시간 30분만에 골인지점을 밟다.
이제는 오지로 느껴졌던 영주가 마라톤대회 참가로 사뭇 가깝게 느껴진다.
지난해 7월 유네스코문화유산잠정목록등재 9개 서원을 답사하는 길에 영주 소수서원을 둘러봤다.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숲이 장관이다.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소나무 수백 그루가 군락을 지어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은 「旣廢之學 紹而修之」
즉 ‘쇠퇴해진 학문과 도의(道義)를 다시 이어서 닦게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소수(紹修)의 의미가 소학(小學)이 전하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소수서원 위치는 행정구역상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영주에 와보면 순흥이란 이름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순흥부[順興府]는 경북 영주시 일원의 고려시대 행정구역이었다.
1458년(조선 세조 4) 관내에 모반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은 순흥이란 행정구역을 없애고
이 지역을 영주와 봉화로 각각 편입시켰다고 한다.
조선 세조(世祖) 2년(1456)에 세종(世宗)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성삼문(成三問)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연루되어 유배된 곳이 순흥(順興)이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향중(鄕中) 유림(儒林)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殉節)한 곳이라며 우리 일행을 안내한
문화유산해설사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리얼하게 설명해해주는데
550여년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끔찍하다 못해 참혹하다.
순흥안씨대종회는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했다.
또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원이자 사액서원이다.
470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인 셈이다.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을 흠모하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 ~1554) 선생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의 시초이다.
중종36년(1541) 5월, 주세붕은 풍기군수에 부임 후 안향선생이 소년시절 글을 읽었던
회헌의 고향 순흥(順興)의 숙수사를 찾았다. 그 때 순흥부(順興府)는 금성대군 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다. 절은 이미 없어졌지만 절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연화봉 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 에 못지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주세붕은 그곳에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였는데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綠洞書院)을 본받은 이름이다.
1543년(중종38년) 주세붕이 안향선생을 배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수서원은
이듬해 고려 충렬왕-충목왕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안축(安軸 1287~1348)과 안보(安輔1302~1357)를
추가 배향하고 봄가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1550년(명종5년) 2월 백운동서원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에 의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학문의 도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敎化)사업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서원은 이로부터 관학인 향교에 대응하는 공인된 사립고등 교육기관으로
도학(道學)의 상아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전한다.
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 죽계천의 건너편 언덕에 정자가 보이고 냇물가에는
‘경(敬)’ 자와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돌출된 바위가 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오, 회헌 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한다.
이곳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에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속에 묻혀진 전설이 서려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밤만 되면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연유를
물어본 즉, 예전에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희생된 넋들이라고 했다. 주세붕이 날을 택해 ‘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혼제(尉魂祭)를 지내고 난 후부터는 이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한훤당 김굉필 학문의 연구방법론적 모색 학술대회에서
‘한훤당의 강학활동과 도학’을 주제로 발표한 김훈식 교수는
‘敬’자가 소학의 핵심키워드라고 누차 강조했는데
소수서원 앞에 이 敬’자가 새겨져 있다.
이제 영주에는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선비문화수련원이 들어서며
명실상부한 유교문화유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벽6시 잠실종합운동장을 출발해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서울에 도착히니 밤9시다.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궂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음덕을 쌓은 후배마라톤동료들 때문이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