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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연회 재건, 국외선교연회 조직과 제19대 곽전태 감독회장
우리나라 현대사는 격동의 시대였다. 1979년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은 서울의 봄을 알리는 서막이었지만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민주주의 시대는 한동안 미루어지고 말았다. 1981년 제5 공화국의 개막은 다시 이 땅에 군사독재의 어두운 그늘을 짙게 했고 민주화로 나가고자 하는 국민적 열망은 어느 때보다 더욱더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끊임없이 발생하는 대규모 민주화 집회로 나라는 평안할 날이 없었던 1980년대는 한 마디로 격동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1990년대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새로운 분위기에서 21세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기였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에 민주화가 가시적인 결과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는 북한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해 북한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북핵 문제가 생기면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제재가 고조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첨예화되었고 1970년 이후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 된 지역 갈등문제, 경제성장 이면의 편중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층의 욕구 분출은 또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갈등 속에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 사회 선교정책과 방향에 대한 신앙, 신학적 진보 보수 갈등과 마찰이 1990년대에도 남아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진보적 운동노선에 대응하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조직한 1989년부터는 두 목소리가 이념의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일들은 한국교회의 1980년대의 꾸준한 성장세를 정지시키고 1990년대 정체현상을 낳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감리교회도 1990년대 화해와 일치를 모색하며 미래 지향적인 선교과제를 찾아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1989년 10월 31일에 개최된 제18회 특별총회는 서울연회와 중부연회 분할 건의안을 결의하여 서울남연회와 경기연회를 태동시켰다. 이는 2000년대를 향한 감리교회 선교 운동으로서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을 전개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1990년은 한국 감리교회가 자치 6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 있는 해였다.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는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해 온 한국감리교회의 신앙과 신학 전통을 재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갈등과 양극화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웨슬리의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를 추진해 나가겠다는 선교의지를 재확인했다.
1990년 10월 29일 자치 60주년 기념대회를 마친 감리교회는 그날 저녁에 제19회 총회를 광림교회에서 개최하였다. 10월 30일에는 7개로 늘어난 연회별로 모여 연회를 책임질 감독들을 선출하였다. 서울연회는 나원용 목사, 서울남연회는 곽전태 목사, 중부연회는 김수연 목사, 경기연회는 조명호 목사, 동부연회는 박성로 목사, 남부연회는 김규태 목사, 삼남연회는 김종수 목사가 각각 당선되었으며 감독회장에는 곽전태 목사가 맡아 새로운 2천 년대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곽전태(郭典泰) 감독회장은 1932년 10월 16일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났다. 목회자로 부름 받고 감리교대전신학교를 다니면서 1955년 4월부터 군남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7년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여흥, 춘천우두, 화천, 구로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964년 1월 12일 구로중앙교회(현재 베다니교회)를 개척하여 성장시켰다. 1969년 1월부터 부흥회를 시작으로 860여 회를 인도했다. 감리교 부흥단장, 연세대학교 재단이사(1992~1996) 등을 역임했다. 1990년 10월 29일~30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제1대 서울남연회 감독에 당선되고 제19대 감독회장에 선임되었다. 서울신학대학 목회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센터너리 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곽전태 감독회장은 당선 소감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다. “감리교단이 뜨겁게 되도록”노력하고 인간 구원이라는 “선교정책과 교육방향”을 설정하되 개인에 그치지 않고 “사회구원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화합하여 힘을 모아 주님을 위하여 교단을 위하여 인화 단결할 것을 다짐했다.
곽전태 감독회장은 감독에 당선된 그다음 달 11월 30일 구로중앙교회에서 서울남연회 감독 및 감독회장 이․취임예배를 드렸다. 이날 설교를 맡은 박대선 감독은 ‘일천 번의 기도’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취임하는 감독을 위해서 기도로 도와야 할 것을 권면했다. 이에 곽 감독회장은 “뜨거운 교단, 행정이 잘된 감리교회, 융화 단결하는 감리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화답했다.
1991년 3월 18일에 임마누엘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서울남연회에서 곽전태 감독은 서울남연회를 “복음 전파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연회”로 규정했다. 교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을 계속 추진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개체교회의 부흥을 강조했다. 또한 개포, 수서, 분당과 같은 신개발지역 개척교회 지원, 미자립교회 농어촌 지원, 해외선교강화, 학원, 군교도소, 상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선교 가속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사안을 제시했다. 제2회 연회에서 지방이 분할되어 연회 발전을 이루었다. 구로지방은 구로동지방을, 관악지방은 간악서지방을, 송파지방은 잠실지방을 분할했다. 제3회 연회에서도 강남지방이 강남동지방으로 분할되어 서울남연회의 꾸준한 성장을 나타내 주었다. 교인 숫자도 1990년 196,425명에서 1992년 201,614명으로 증가하였다.
곽전태 감독회장은 교단 내 많은 일을 추진하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스스로 정리한 사업을 보면 미주지역에 산재한 감리교회들을 위하여 국외선교연회를 조직했으며 통일 이후 북한선교를 위하여 서부연회를 부활시켰다. 역사자료실을 개설하여 감리교회 역사를 정리하였고 본부 출판물과 회계 단일화를 통하여 본부 행정의 일관성을 꾀했다. 10년의 기한 내에 100억 원을 목표로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1991년 8월 21일에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격려하였고 본부 행정을 위한 임직원들의 내규 규정, 망실재산 회수와 재산관리, 감리회관 봉헌과 신조교리 사수했다.
곽전태 감독은 임기를 마치고 구로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돌아 간 후 남은 목회를 이어갔으며 1996년에 기독교 카자흐스탄 복음주의 총회장 및 신학교 이사장을 맡아서 열심히 봉사했다. 2000년 3월 23일부터 임마누엘교회에서 개최된 제11회 서울남연회(안행래 감독)에서 은퇴하였고 베다니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부지런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열심히 달려온 곽전태 감독은 《은혜의 강》, 《아침에 살자》, 《주안에 있는 나에게》,《한 우물만 오래 팠더니 물이 나오더라》등 다수의 설교집과 2011년에 팔순기념으로 설교집 《네 나이가 얼마나》를 출판했다.
가족으로는 이상화 사모와의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장남 곽철환 목사는 이정숙 사모와 3남매(미선, 지선, 중훈)를 두었다. 베다니교회 담임자인 2남 곽주환 목사는 장기은 사모와 함께 슬하에 남매(혜선, 중현)를 두었다. 3남 곽인환은 이현정과 함께 슬하에 3남매(중혁, 중인, 은선)를 두었다.
감독 재임 시 곽전태 감독은 제2회 서울남연회(1991년 3월 18일~20일, 임마누엘교회 개최), 제3회 서울남연회(1992년 3월 17일~19일, 광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제19회 총회 특별총회(1991년 10월 29일~31일, 광림교회 개최), 제20회 총회(1992년 10월 28일~30일, 금란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나원용(羅元容, 호 凡松) 감독은 1932년 6월 30일에 충남 논산군 은진면 성덕리에서 아버지 나국찬 권사와 모친 이정숙 권사의 3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예산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겠다고 다짐했다. 1951년 예산농업고등학교 졸업하고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신학교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1951년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수소문 끝에 피난지 부산으로 임시로 이사한 것을 알게 된 나원용은 공주사범대학 1년을 수료하고 1952년 부산으로 가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했다. 1956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군목으로 군대 복무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군종간부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 육군 군목 10기로 임관하였다. 1957년 4월 1일 제8회 동부연회에서 류형기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나원용 목사는 7년간 군목의 사명을 감당하며 군 복음화에 힘쓰며 1963년에 전역했다. 군 전역 후 1964년에 원주제일교회 부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70년 3월까지 재임하는 동안 1966년에는 원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칼 주디 선교사의 소개로 십자군 장학금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미국 듀크대학교(Duck University)에 유학하여 기독교교육학으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3월 24일~25일까지 서울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동부연회에서 원주제일교회 김흠광 목사가 은퇴하여 부담임이던 나원용 목사가 원주제일교회 제18대 담임자를 승계하였다. 1972년에 원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고 1975년~1985년까지 5천 교회 백만 신도 운동 본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76년 11월에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80년에 에모리대학교(Emory University)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2001년까지 서울인덕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 감신대 등에서 설교학, 전도학, 교리와 장정 등의 강의를 했다. 1984년~1986년까지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및 동문회장으로 일했다. 1986년부터 한국외항선선교회 이사로 꾸준하게 활동했다.
나원용 목사는 웨슬리의 신앙과 전통을 목회의 중심으로 삼았다. 목회와 행정에서 극단적인 대결이나 선택을 취하기보다는 중용과 화합을 추구함으로 성서와 체험, 이성과 전통의 조화를 추구하는 웨슬리의 중도신학 전통에 충실했다. 이러한 신앙으로 열심히 목회하며 교회 부흥을 이룬 나원용 목사는 교단적으로도 5천 교회 1백만 신도 운동의 좋은 결과를 얻었으며 연회원들은 1990년 10월 29일~30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그를 제6대 서울연회 감독으로 선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감리교 본부 선교국위원장을 겸임하여 새롭게 시작된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 본부장을 맡아서 교단 차원의 전도운동을 지휘하며 이 운동의 중심에 서울연회가 주축이 되기를 다짐했다.
당시 선교국 총무인 강병훈 목사와 함께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을 펼치면서 “1교회 1일 5분기도, 5분 전도, 100원 개척헌금 기금”을 내용으로 하는 ‘1.5.5.1 운동’을 전개했다. 이 전도운동의 박차를 가하며 힘차게 나가야 할 때 하나의 장애물이 발생하였다. 감신대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의 신학 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이 정치 문제화되면서 서울연회 안에 재판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두 교수의 출교라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일은 교회 안에서 보수와 진보 간 갈등으로 비화되어 서울연회뿐만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전체 분위기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의 주축이 된 서울연회는 소속지방과 교회들의 국내외 개척교회 설립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서울연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1992년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종교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잘 감당하였으며 1991년 학교법인 감리교신학원 이사장, 1998년 기독교청소년선도회 이사장, 가나안농군학교 이사, 감리회복지법인 이사를 맡았다. 그 후 2003년 4월 21~25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3회 서울연회(김진호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노년선교연구센터를 설립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던 나원용 감독은 2014년 12월 24일 향년 8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나원용 감독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하자. 믿음 소망 사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달려온 목자다. 천병숙 사모와의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또한 다음과 같이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요한 웨슬리의 가슴》,《요한 웨슬리의 목회》,《나도 이제는 전도할 수 있다》,《예수의 나사렛 선언》,《광야의 소리》, 《전도는 이렇게》,《범송 나원용 감독 회갑기념 논문집》,《노년이 되어 참 좋은데 왜 그런가(노년의 자기 이해)》,《노년이 되어도 꼭 만나 믿고 따라야 할 그분은(노년의 새로운 삶을 위해)》,《노년이 되어도 계속 힘써야 할 일들은(노년의 자기관리)》이며 역서로는 《요한 웨슬리의 일기 상하》가 있다.
나원용 감독은 제11회 서울연회(1991년 4월 1일~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와 제12회 서울연회(1992년 3월 24일~26일, 창천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김수연(金壽淵, 호 靑岩) 감독은 1927년 2월 2일 황해도 벽성군 추야면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1963년 감리교 대전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5년에는 필리핀 크리스천 대학교에서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3년에 춘천지방 후평교회, 1954년 강화지방 천전교회, 1956년 교동교회, 1959년 인천서지방 서포교회, 1961년 아산지방 월랑교회, 1963년 선장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964년 준회원에 허입하고 1966년 3월 16일~20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고 천안지방 천안중앙교회로 파송받았다. 1968년 남부연회 정회원에 허입하고 대전지방 목동교회, 1972년 서울동지방 반석교회, 1980년 종로지방 평동교회를 담임했다. 1984년 제물포지방 학익교회로 부임하여 1997년 중부연회에서 정년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1974년에 서울북부경찰서 경목위원장, 1975년 한국복음농촌선교회 이사장, 1977년~1980년 갱신총회 총무, 1977년~1984년 서울감리교회 총회신학교 이사를 역임했다. 1978년~1981년 한국성서신학교 상임이사로 활동했으며 197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지도자협의회 참석했다. 1983년~1987년 목원대학교 총동문회장, 1984년 필리핀 카비테 아시아 선교센터 설립, 1987년~1989년 북한선교회 회장, 1980년 범아시아목회신학연구원 원장, 필리핀 크리스천유니온 신학대학원 한국박사원장, 1988년 필리핀 선교회 창설하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1988년 목원대학재단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수연 목사는 1990년 10월 29일~30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제20대 중부연회 감독으로 당선되어 중부연회를 섬겼다. 1990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 이사,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본재산 관리위원장, 1990년 국외선교연회 관리감독 1992년 제20회 총회 장정개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동안 중부연회는 숙원 사업인 아펜젤러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각 교회에 건축헌금 배정하고 미국 모 교회에 헌금을 요청하며 아펜젤러 선교기념대회를 개최하여 성대하게 치렀다.
김수연 감독은 1997년 3월 11일~13일까지 숭의교회에서 개최된 제56회 중부연회(이호문 감독)에서 은퇴하고 2012년 향년 85년 일기로 별세하였다. 우유섭 사모와 슬하에서 1남 3녀(김재신, 김선미, 김선덕, 김선영)를 두었다. 김수연 감독은 다수의 설교집 《요나를 발견하자》, 강의교재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기독 종말사상》, 《사도행전과 초대교회 선교》, 《회고록 실망은 없다 희망이 있을 뿐이다》, 은퇴논문집으로 《한국교회와 민족통일》, 강의교재 《나의 설교의 소고》, 《성서지지》가 있다.
김수연 감독은 제50회 중부연회(1991년 3월 6일~8일, 율목교회 개최)와 제51회 중부연회(1992년 3월 11일~13일, 숭의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김수연 감독은 1993년 4월 1일부터 2일까지 창전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국외선교연회를 주재하였다.
조명호(趙明浩, 호 一志) 감독은 1936년 11월 29일에 황해도 옹진군 서면 동오리에서 아버지 조종숙(趙鍾淑)과 어머니 강도길(姜道吉) 집사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모태신앙으로 영천감리교회를 다니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 1951년 1․4 후퇴 시 월남하여 1955년 전남 고흥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진해에 있는 신덕산감리교회 웨슬리 구락부 중등부교사로 활동했다. 1959년 감리교 대전신학교 전수과를, 1962년 부산 동아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 3년을 수료하고 1963년에 대전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1963년부터 대전지방 갈마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64년 대전 산성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준회원에 허입하고 1966년 3월 16일~20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조명호 목사는 현장 목회를 내려놓고 1971년 대전 호수돈중․고등학교 교목실장으로 부임하여 1980년까지 학원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때 1974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80년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온 조명호 목사는 경기연회 평안지방 평택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이 교회를 담임했다. 1980년 중부연회 평택안성지방 초대감리사를 시작으로 평안지방 감리사를 3회 역임하였고 1983년 평택읍기독교연합회 회장, 1985년 평택․송탄연합기독교교역자협의회 회장, 1986년 감리회 본부 감사를 맡았다. 1987년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명호 목사는 1980년~1990년 중부연회 장정규칙해석 위원, 1982년~1989년 총회 장정 규칙해석 위원, 1986년~1990년 감리교 본부 감사를 역임했다. 이러한 교단 활동의 경험을 살려서 그는 1990년 10월 29일~31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경기연회 초대감독으로 당선되었다. 경기연회는 1989년 2월 16일에 개최된 제18회 총회 임시총회에서 중부연회(한경수 감독)로부터 분리되어 처음으로 감독을 선임한 것이다. 이때 1990년~1992년 감리회 본부 총회 실행부위원을 시작으로 3연 연속(1992년, 1996년, 2000년) 담당했다. 본부 교육국 위원장으로 감리회 교육 전반의 행정적인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했다.
감독의 임기를 마친 후에도 조명호 감독은 1994년 감리회유지재단 이사, 1992년~1994년 제20회 총회 장정개정위원회위원, 1994년~1996년 감리회 유지재단 이사를 연속으로 2회 담당했다. 2002년 제25회 총회 입법의회 장정개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91년에 감리교대전신학원 재단이사를 필두로 하여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 1992년 학교법인 배재학당 이사, 1992년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서회 이사, 1998년에 학교법인 호수돈여고 재단이사로 활동하였다.
조명호 감독은 2005년 3월 29일~30일에 수원목양교회에서 개최된 제16회 경기연회(최호순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2007년 11월 26일 제1회 도익서축제가 목원대학 신학대학 구 채플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목원대학 설립자인 도익서 박사를 기념하여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 국가와 사회,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건학이념을 새기며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이날 도익서 박사의 양아들인 조명호 감독은 이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思. 言. 行의 一致를 이루는 삶”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삶의 경기장을 달려온 조명호 감독은 은퇴 이후에도 열심히 활동하였다가 2024년 11월 9일 향년 90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천안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아내 권성열 사모와 슬하에 2남 1녀(계성, 계훈, 은희)와 7명의 손주들을 두었다.
조명호 감독은 재임 시 제2회 경기연회(1991년 3월 11일∼13일, 평택제일교회 개최)와 제3회 경기연회(1992년 3월 10일∼12일, 평택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박성로(朴成魯, 호 蘇江) 감독은 1926년 5월 23일 황해도 송회군 장양면 효촌리 2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웅진소강소학교, 동양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중앙신학교 예과 2년을 수료하고 1950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웅진 상봉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1951년 인천 연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53년 3월 18일~22일까지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중부연회에서 류형기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고 육군군목 7기로 입대했다. 10년 동안 군목으로 있으면서 육군본부 군종감실 군종과장, 육군본부 중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고 1974년 5월에 육군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곧바로 1974년 6월에 성동지방 성은교회를 개척, 담임하였다. 1977년 강릉지방 주문진교회에서 목회했다.
박성로 목사는 1990년 10월 29일~31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제20대 동부연회 감독에 피선되었다. 감독에 당선되자마자 그는 동부연회를 성령의 충만한 연회,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에 앞장 서는 연회, 평신도 운동을 활성화하고 화합과 일치로 전진하는 연회, 농어촌, 광산지대 선교와 미자립교회에 적극적으로 관심하는 연회를 만들겠다고 명시했다.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감독 당선 당시 부임한 원주무실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마무리하였고 1997년 동부연회에서 은퇴하여 원주 태장교회 원로목사가 되었다.
‘주님의 은혜로’(고전 15:10)를 좌우명으로 삼은 박성로 감독은 은퇴 후 원주에 거처하였으며 2014년 3월 10일에 별세했다. 아내 박은덕 사모와 1남(박신일 목사) 3녀(진숙, 선숙, 미숙)을 두었으며 둘째와 셋째 딸도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다. 1971년 10월 1일에 대통령 부국훈장(삼일장)을 수상했다.
박성로 감독은 제42회 동부연회(1991년 4월 2일∼4일, 속초교회 개최)와 제43회 동부연회(1992년 3월 31일∼4월 2일, 청주에덴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서부연회 초대관리 감독직도 수행했다.
김규태(金奎泰, 호 素井) 감독은 1933년 1월 5일 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미당리 290번지에서 태어났다. 청양농업고등학교를, 1959년 감리교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1968년 상지대학교 행정학과를, 1976년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9년 대전 보문감리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71년까지 12년 동안 시무했다. 1965년 3월 16일~22일까지 배화학당에서 개최된 제11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1971년~1976년 서울 중앙대학교 사대부고 교목실장, 1976년~1979년 목원대학 교목실장을 역임하면서 학원 선교에 힘을 썼다. 1979년 대전제일교회에 부임하여 2002년까지 23년 동안 담임했다. 1981년 대전기독교연합회 회장, 1982년~2002년 한국기독교시청각선교회 운영위원장, 1981년~1984년 감리교 남부신학교장, 1983년 한국 장애인재활협의회 이사, 1984년~2005년 감리교 남부신학원장을 맡았다. 1985년 한국기독교사회교육원 원장, 1989년 목원대학교학장 직무대리, 1990년 목원대학교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새누리신문 실행이사(1985년), 목양선교신문 발행인(1995년)으로 활동하였다.
무엇보다 김규태 목사에게 중요했던 사명은 남부연회 감독이었다. 그는 1990년 10월 29일~31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제8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어 연회 전반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였으며 사회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감독의 직무를 수행했다. 제19회 총회 감독들은 자치 60주년 기념의 시대를 맞이하였기에 이와 걸맞는 행사를 준비하고 감독의 직무를 수행했다. 김규태 감독은 당선된 이후 올해가 정치, 사회, 경제 등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시대여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각성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할 것을 다짐하는 선언문에 맞게 선교에 관심을 가지겠다고 했다. 서산농아교회를 설립하였고 무의탁노인의 안식처인 사랑의 마을을 연회 소속기관으로 승인하였으며 사회선교교육원을 설립하여 대 사회적인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감독의 임기를 마친 후에 대전제일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감당하면서 1982년부터 활동하던 한국기독교시청각선교회 운영위원장직과 1983년부터 맡았던 기독교연합봉사회 이사직을 은퇴할 때까지 감당하였다. 2002년 4월 23일~24일까지 충남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48회 남부연회(신동일 감독)에서 자원 은퇴하였다.
김규태 감독은 “똑똑한 바보가 되자”는 좌우명을 가지고 열심히 목회했다. 오세흥 사모와 슬하에 3형제(영범, 영진, 영권)을 두었으며 장남 김영범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하고 있다. 그는 1982년에 대전기독교연합회 중흥 공로패, 배재대학 진흥공로패를, 1997년 목원을 빛낸 동문패, 2001년 대전제일교회 신축봉헌공로패를 수상했다.
김규태 감독은 제37회 남부연회(1991년 3월 20일∼22일, 대전선화교회 개최), 제38회 남부연회(1992년 3월 25일~27일, 대전선화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김종수(金鍾洙, 호 光治) 감독은 1935년 1월 14일에 경상북도 금릉에서 태어났다. 1962년 대전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목원대학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후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흥해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여 노은교회, 장항교회, 부일교회, 후포교회에서 목회했다. 울진지방 백암온천교회를 담임하면서 울진에서 감리사를 4회 역임했다. 삼남연회 부흥단장, 총회 재판위원장, 감리교 유지재단 이사 및 총회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의 사회봉사 활동으로는 경찰 선교가 두드러진다. 1977년 부산동부경찰서 경목, 1978년 부산동구청 자문위원 및 선거관리위원장, 1979년 새진회 부산지회장, 부산시 기독교연합회장을 역임했다. 1980년 울진경찰서 경목실장, 1985년 울진기독교연합회장, 1991년 전국 교회와 경찰중앙협의회장을 역임했다. 1991년 목원대학교 이사, 태화사회복지관 운영이사로 활동했으며 1992년 기독교봉사회 이사로 봉사했다.
김종수 목사는 1990년 10월 29일~31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총회에서 제6대 삼남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지역이 광범위한 삼남연회 화합을 위하여 노력했다. 자치 60주년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더욱더 총력 전도에 힘써 삼남연회 부흥을 꾀했다. 1991년 여름 부산과 경북지역에 폭우로 인한 인명 및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이때 지역의 교회가 입은 피해도 매우 컸다. 감독으로서 피해교회 복구를 위하여 남다르게 수고가 많았다. 많은 교회들이 복구에 협력해 주었고 감리회본부 선교국에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도와준 기관과 교회들에게 감독의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종수 감독은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지난 1년 동안 27개 교회가 개척 설립되었고 4개 교회가 폐지되는 등의 결과를 얻었다. 이에 삼남연회는 423개 교회, 7만 8천 명의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김종수 감독은 개척교회에 공이 큰 지방과 교회를 표창하여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했다. 제12회 연회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진리를 실천하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앞장설 것을 요청하고 진주지방을 진주동지방과 진주서지방으로 분지방 결의하였다. 또한 삼남연회 회관 건축 사업위원회 규약을 심의하고 가결하여 회관 건축이 본격화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감독의 직무를 감당하고 난 김종수 감독은 실로암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감당했다. 또한 1999년 호남신학원장으로 일했다. 그 후 2005년 4월 12일~14일까지 익산영생교회에서 개최된 제25회 삼남연회(장동주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포항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사랑이 제일’이라는 좌우명을 가진 김종수 감독은 아내 김식남 사모와 슬하에 2남 1녀(김인숙, 김원식, 김근식 목사)와 5남매 손주를 두었다.
또한 김종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1980년 《후포교회 50년사》, 1990년 《성서요약강해(구약)》, 1992년 《성서요약강해(신약)》, 1994년 《광치 김종수 감독 회갑 기념 문집》, 2005년 《광치 김종수 감독 고희 기념 문집》등이 있다.
김종수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11회 삼남연회(1991년 3월 20일~22일, 대구제일교회 개최), 제12회 삼남연회(1992년 3월 17일~19일, 마산합성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제19회 총회에서 선임된 감독들이 이끄는 감리교회는 두 개의 연회를 조직하여 감리교회의 발전되는 모습을 만들었다.
첫째로 서부연회의 재건이다. 서부연회는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여 한국 감리교 자치시대를 열 때 중부, 동부와 함께 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회이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당이 북한에 들어와서 서부연회는 고난과 박해의 시대를 맞았다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만주선교연회다. 이 연회는 일제의 학정을 피하여 만주지역으로 한국 사람들이 잠시 피하여 새로운 거주지를 형성하였는데 이때 남감리회에서 발 빠르게 사할린 지역을 중심으로 동만지방을 조직했다. 남감리회의 만주선교에 영향을 받아 미감리회도 만주선교에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여 북만지방을 조직하게 이르렀다. 그 후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면서 국내에는 서부, 중부, 동부연회로 나누어 조직되었고 국외연회로 만주지역에 형성된 두 지방을 합하여 만주선교연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 또한 해방과 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대역사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이렇게 두 개의 연회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소련과 동구권 공산 국가의 붕괴로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해 접근하게 될 때 한국감리회는 북한지역에 대한 선교가 지상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에 총회 실행위원회는 1991년 12월 20일에 서부연회 재건을 결의하고 1992년 1월 23일에 감독회에서는 박성로 감독에게 초대 관리자의 직임을 맡겼다. 그해 3월 30일에는 서부연회 조직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잠정적으로 북한의 행정기관을 감안하여 서부연회 경계를 정하여 각 지방 감리사들을 임명하여 서부연회 조직을 마무리했다.
둘째로 국외선교연회 조직이다. 국외선교연회는 1989년 중부연회 한경수(韓景洙) 감독이 조직했다. 재미 한인교회 가운데는 미감리회(UMC)나 한국감리회(KMC)에 소속하지 못하고 독립된 교회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언어의 문제, 부담금의 납부의 부담이 벅찼다. 이로 인해 교회 발전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고아처럼 버려진 아이가 된 것이다. 이들은 소속 지방이나 연회를 구성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재미 독립교회들의 이런 상태에 이르자 한경수 감독은 우선 중부연회 소속으로 캐나다를 포함한 뉴욕지방을 조직하였고 그다음 해에 캐나다 독립지방을 조직한 후 중부연회에 소속시켰다. 이 일을 위하여 한경수 감독은 미감리회 뉴욕연회 화이트(C. Dale White) 감독과 4시간의 장거리 회의 끝에 뉴욕선교지방을 만들었다.이렇게 조직된 해외선교지방을 하나로 모아 체계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느껴지게 되어 총회 실행부회의에서 국외선교연회 조직을 결의하였고 그 관리 책임을 중부연회에서 시작된 일이라 김수연 감독에게 맡겼다. 이에 1992년 10월 22일~23일까지 숭의교회에서 국외선교연회 준비대회를 열고 국외선교연회 건의안을 작성하여 제20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7개 연회의 7명의 감독이 이끄는 감리교회는 1990년 한국감리교회를 이끄는 지도 이념을 발표하였다. ① 감리교단이 성령으로 뜨겁게 되도록 노력한다. ② 선교정책과 교육 방안의 일치를 도모한다. ③ 사회 구원을 위해 노력한다. ④ 인화단결을 힘쓴다. 이외에도 감리교 본부에 역사자료실을 설치하고 선교 100주년 기념 감리회관을 건축을 완공하여 봉헌예배를 드리고 삼남연회를 중심으로 7천 교회 2백만 신도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결과 삼남연회를 중심으로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어 7천 교회 운동에 이바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