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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희년법과 생활경제로 성경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예수님의 일곱(혹은 여덟) 저주의 대상인 바리새인들과 희년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생활에서 복을 받고 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퍼나르기는 쉬운 것이므로 부탁을 드립니다.
왕의 마지막 성전강론, 바리새인에 대한 7화(또는 8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마 23:13,15,16,23,25,27,29)
고난주간 화요일에 왕이 성전에서 행한 마지막 강론은 바리새인에 대한 강한 질책입니다. 이 질책이 마태복음 23장 기준으로 7가지이므로 “7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23장은 14절이 없어 7화이고, 14절 관련 내용을 누가복음 20:47에서 보충하면 “8화”가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개역개정 성경에서 빠진 마태복음 23:14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내용으로 대체(복원?)했습니다.
누가복음 20:47은 과부의 집(가산)을 삼킨 행위를 다른 것(외식)보다 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으므로 이를 포함하면 “8화”가 됩니다. 마태복음 8화와 비슷한 내용으로 누가복음은 11:42~54까지 6가지 화, 20:47을 포함하면 7가지 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8화는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말한 6화의 내용과 비교 이해를 위해 그 요지만 추려서 함께 소개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꾸짖은 6화(사 5:8~25)
1화 – 땅과 집을 강탈한 자에게 내리는 화(5:8~10, 왕상 21:3,16)
2화 - 술 취한 자에게 내릴 화(11~17,22, 19:14, 24:20, 28:1,7)
3화 - 불경한 자들에게 내릴 화(18~19)
4화 - 도덕적 기준을 곡해하는 자에게 내릴 화(20)
5화 – 자만(교만)한 자에게 내릴 화(21)
6화 - 술 취한 재판관에게 내릴 화(20~25)
예수 그리스도가 꾸짖은 바리새인의 8화(마 23장 중심)
1화 -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마 23:13).
2화 -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15).
3화 -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지만 성전의 금이나 예물로 맹세하면 지키라고 가르치는 자(16~22).
4화 -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는 자(23,24).
5화 -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자(25).
6화 - 회칠한 무덤 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듯이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자(27).
7화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자(29).
8화(누가복음 추가) : 과부의 집을 삼키고,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눅 20:47)
이사야의 6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7화(8화)
이사야서의 6화와 마태복음의 7화(또는 8화)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1)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는 6화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와 백성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8화는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2) 이사야의 6화는 불경건, 도덕적 타락, 술 취한 자에 대한 화가 있으나 바리새인들에 대한 8화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3) 이사야서의 6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8화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경제적 탐욕과 그들의 자만한 태도입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보면 종교지도자나 백성들이 가진 죄악 된 행위와 바리새인(서기관, 율법학자 포함)이 가진 행위에는 차이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을 하거나 술에 취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는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여 회칠한 무덤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는 6화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8화에서 공통으로 가지는 것이 경제적 탐욕입니다. 이사야는 집에 집을,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부동산 탐욕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고, 힘이 없는 과부의 집을 탐하여 그 재산을 삼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행동은 위선적이고, 자만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주간 마지막 성전강론에서 왜 이처럼 강도 높은 저주를 소나기처럼 퍼부었을까요? 그것도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을 겨냥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바리새인들이 사실상 유대교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시대마다 공동체의 최고 책임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묻습니다. 왕정시대에는 왕과 제사장이 그 책임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왕이 없었으므로 유대교의 최고 지도층은 제사장 계층인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미 로마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대제사장이 될 수 있어서 순수성을 잃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제사장 임명권을 가진 로마 정부와 깊이 결탁되어 있었고, 종교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팔고 성전세(세겔화) 환전을 위해 환전상을 성전으로 끌어들여 이권을 챙기는 비리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부활도, 영생도 몰랐고, 성경 해석은 자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과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 장점은 지금 우리도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였고, 로마 정부와 협력하지 않았으며, 외세와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패망하였다고 보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유대교의 정통성과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음식 하나도 가려서 먹고 신체를 깨끗하게 하면서 정결법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바리새인의 행위를 신앙생활의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의 정통성은 이 바리새인들의 종교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여 강한 질책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사실상 유대교를 주도하는 지도자들이고, 책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로 백성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고, 백성들도 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보이는 위선과 자만, 그리고 경제적 탐욕은 용서의 한도를 넘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인 사두개인들은 백성들이 그 잘못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백성들의 반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바리새인들이 가진 종교적 위선과 생활상의 오류(불법, 부당)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위선을 잘 모르는 백성들은 그 위선적 행위에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그 잘못을 일깨워 주려고 소나기 같은 질책을 퍼붓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이 가진 위선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유대교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적 오류와 행동 특성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의 저주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오류와 특성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리새인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합니다(마 23:25). 이 탐욕은 구제를 하면 그 속에 있는 것이 깨끗하여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눅 11:41), 그들의 탐욕은 주로 경제적,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옷술을 크게 하고 경문을 넓게 합니다(23:5).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지도자로 칭함 받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위를 외식이라고 강하게 꾸짖습니다.
(2) 바리새인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킵니다.
율법은 구약시대에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신약시대에 필요한 법입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면 구약은 율법이며, 신약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는 율법을 지켜야 하고, 신약시대는 복음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정신은 좋은 것입니다. 이런 계명을 준수하려는 정신은 복음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도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강한 질책을 할까요?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형식에 치우쳐서 지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사를 드린다면, 그 제물이 희생될 때 나의 마음도 함께 회개해야 그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 되고,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다. 금식하며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써도 마음부터 찢으며 회개해야 합니다(욜 2:13).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음의 회개보다 제사라는 행위, 옷을 찢는 의식 그 자체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형식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형식주의는 안식일 준수, 십일조, 할례, 정결의식, 식사 예법 등에서 모두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런 행위나 의식을 자기 의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고, 스스로 의롭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은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3) 바리새인은 율법을 쪼개어 지키고, 조상들의 유전을 추가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형식으로 지키면서도 그 율법을 더 잘게 쪼개어 지킵니다. 여기에 조상들이 지켜오던 관습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지적을 합니다(마 15:3).
그들은 안식일 준수를 위하여 여러 가지 시행 세칙을 만들어 지킵니다. 안식일에 가는 거리,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을 작게, 세밀하게 쪼개어서 지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면 그 행위는 안식일 위반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구원 사역이 노동을 했으므로 안식일을 위반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의사라는 직업도 안식일이면 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도 사람이 병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사가 이런 환자를 보면 안식일과 관련 없이 고쳐주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는 노동을 금지하므로 이런 치료 행위를 하지 않으며, 구급차도 운영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불도 피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면 전기 스윗치를 켜도 안식일 위반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자동 조작이 아니면 사용을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런 점을 들어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합니다(마 23:24).
바리새인이 강조하는 율법의 준수는 이렇게 너무 세밀하고 형식에 치우쳐서 백성들의 삶에 불편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이 율법을 어기게 되면 불경스럽다고 정죄를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람을 살리려고 제정한 하나님의 율법이 오히려 사람의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4) 바리새인들은 희년법과 경제법은 거의 지키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머리털을 세듯이 세어가며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레위기 희년법은 지키지를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키지만, 같은 안식의 연장인 희년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말한 (1)~(3)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대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4)에서 말하는 바리새인들이 희년법이나 경제법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잘 모릅니다. 성경 연구가들이 희년법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율법을 잘 지키면서 희년법은 왜 지키지 않았을까요? 또한, 우리도 이런 사실은 잘 모르고 있을까요?
바리새인과 성경 희년법(경제법)의 준수 여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 20:47)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에게 내린 8가지 저주들 가운데 위의 본문을 더 중하게 봅니다. 본문은 십일조보다 ‘더’ 중한 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마 23:23). “과부의 집(가산)을 삼키는 것”이 ‘더욱 엄중한’ 심판을 받을 죄목이라고 합니다(눅 20:47).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과 가난한 자의 생활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여유 자금은 신정정치에서 성직(공직)을 수행하는 공적 경비로 써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의 표현입니다. 신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세 번 나옵니다(마 23:23, 눅 11;42, 18:12). 세 번 언급은 모두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인의 잘못된 신앙과 행위를 꾸짖기 위한 것이므로 사실상 한번만 언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말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일조 대신 연보라는 말을 8회 정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십일조에 대해서는 43번 글, 말라기의 사역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십일조를 내면서 박하와 뿌리채소는 수를 세어가며 냅니다. 심지어 채소는 줄기나 잎에도 수를 셉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더 중요한 것, 곧 생활에서의 정의와 긍휼, 그리고 믿음은 소홀했습니다.
여기서 ‘정의(judgment)’는 ‘의(righteousness)’와 뜻이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의는 주로 정신적으로 올바른 것을 말하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계를 의(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의는 주로 법률적 재판이나 생활에서 필요한 인간 대 인간의 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정의는 경제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기업을 제비뽑아 나눈 상태의 공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정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의 경제상태를 회복시켜야 달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긍휼(mercy)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피시는 인애나 자비라는 의미이며, 사람들 간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선을 뜻합니다. 경제적으로 긍휼은 분배 받은 기업이 팔려있어서 생업이 어려울 때, 구제가 필요하거나 팔린 기업을 무르기로 되찾아야 하는 경우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faith)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지켜야 하는 인간적인 신뢰(신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의 본문은 미가서 6:8의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희년법을 어기고 바알법을 따라서 신앙은 부패하고, 경제가 혼란에 빠졌을 때, 선지자 미가가 외친 말입니다. 권력자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밭들을 탐하고 집들을 탐하여 산업을 강탈했습니다(미 2:2,3). 그들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행위로 꾀를 좇았습니다(미 6:16)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라새인들에게 채소의 잎과 뿌리를 세어가며 드리는 형식적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십일조로 살아야 하는 기업이 없는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십일조보다 더 중한 것은,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희년법의 준수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당면 해법은 구제이고, 근본 해법은 희년법의 준수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해야 할 정의와 긍휼(자비, 仁慈)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은 제사법보다 더 소중한 경제법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예배)를 먼저 드리라고 하지만, 제사보다 이웃 사랑을 더 큰 것이라고 하며 기뻐하십니다(막 12:33, 호 6:6, 요일 3:17).
바리새인들의 이런 행위는 누가복음 20:47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재산에 대해 탐욕적이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 십일조를 바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신앙적 모범을 보이려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눅 11:42, 18:12). 금식은 원래 속죄일 한번 하게 되어있는데 포로기에는 1년에 4회로 늘어났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레에 두번으로 늘어났습니다. 같은 속죄일 행사라도 제사아 금식은 지키지만, 속죄일에 해야하는 희년과 토지 무르기는 지키지 않았습니다(레 25:8,28).
이스라엘 사회에서 과부는 기업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기업은 아들이 물려받습니다. 만약 아들이 없으면, 과부는 노동 능력도 없고, 희년이 되면 기업의 상속권도 잃습니다. 이런 경우 민수기 27:1~11과 36:4의 상속법을 유추 적용하면, 과부의 기업은 살아있는 시형제나 친족에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시형제나 친족은 기업 무르기 의무, 계대결혼 등으로 과부에게도 상속권을 이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두개인들은 일곱 번이나 되풀이하는 계대결혼의 예를 들어가며 (마 22:28) 이 제도에 대해서 비호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아도 시형제나 친족이 과부에게 해야 하는 고엘의 의무는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창 38:1~11, 룻 4:4~6)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과부들에게 과도한 의무를 지우고, 집과 재산을 부당하게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장황하고 위선적인 기도로 자기들의 불의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을 더 강하게 꾸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을 돌려 성전 연보궤에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리는 과부를 보고서 그 믿음을 칭찬했습니다(막 12:41~44, 눅 21:1~4).
바리새인과 희년법 준수, 다시 한번
바리새인들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율법을 잘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고, 성별 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과 행위는 “거룩”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을 본받거나 답습하는 유대교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유대교)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음식 규례, 안식일, 그리고 할례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중심 주제도 "거룩" 또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이 거룩한 생활을 위해 레위기는 앞부분에 제사법을 두었고, 뒷부분은 희년법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뒷부분에 있는 희년법만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중간에 있는 음식 규례, 청결 규례, 안식일, 십일조(후반부) 등은 잘 지키기 위하여 율법을 쪼개고 또 쪼개어 지킵니다. 그런데 율법 중에서도 사람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 더 소중한 레위기 경제 규례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 종교적으로는 모범을 보이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희년법만은 지키지를 않았고, 이에 대하여 입을 열지도 않았을까요?
우리가 영성과 이성을 가졌다면, 이 주제는 묻고 또 물어서라도 반드시 풀어내어야 할 수수께끼(의문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바리새인과 레위기 생활 규례(경제 율법)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 18:25)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쪼개어 지키고, 형식에 치우친 율법 준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큰 계명을 어긴 행위는 낙타를 삼키는 것에 비교했습니다. 하루살이(원어는 모기)와 낙타는 불결함을 상징한는데,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지키고), 낙타는 삼킨다고(어긴다고) 했습니다. 채소의 뿌리를 세는 십일조의 준수보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지키는 계명의 준수가 더 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여(눅 11:39)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행위를 더 중하게 꾸짖습니다(눅 20:47, 킹제임스 성경, 마 23:14). 예수님이 가르치신 율법 준수에서 작고 큰 것을 서로 대비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십일조 <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경시(마 23:23)
② 하루살이처럼 작은 율법은 준수 < 약대처럼 큰 계명은 어김(마 23:24)
③ 외식과 기도, 겉보기 거룩함 < 속내는 탐욕, 과부의 가산을 삼킴(눅 20:47)
유대인 율법 613개 조항과 희년법
유대인이 만든 율법은 총 613개의 조항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모세오경을 잘 지키기 위한 시행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유대 전승에 따르면, 구약성경 중에서도 모세오경에는 613개의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긴다. 이를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시대에 유대의 랍비이자, 사상가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이다. 유대인 율법은 "하라"는 계명은 248개이며, "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 계명은 365개로 총 613개 조항이다. 이 중 248개 조항은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신체 조직의 총합이며, 나머지 365개 조항은 1년 365일에 맞춘 것이다.
그중 레위기 준수를 위한 유대인 율법은 115번에서 361번까지 총 247개 조항이 있습니다. 모세오경에서 레위기는 구원받은 백성들이 지켜야 할 거룩한 생활 규례를 다룬 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과 성결을 생활의 철칙으로 여깁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이 ‘분리’ 또는 ‘거룩’입니다. 그런데 모세오경에서 레위기가 바로 그 거룩한 생활을 다룹니다. 레위기는 “거룩”이라는 말이 50회 정도 나옵니다.
레위기는 먼저 제사법이 있습니다. 그다음 중간에는 음식법, 청결법, 음식법, 안식법, 절기법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거룩한 경제생활을 다룬 희년법이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에 관련된 유대인 율법에서 토지 규례는 326번에서 341번까지 16개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레위기 경제 규례에 관한 유대인 율법은 대부분 추수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이를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규례 216. 농작물이나 과수를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두어야 하며(레위기 19:9-10),
경제규례 217. 그것들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레위기 19:9-10).
경제규례 218.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위기 19:9),
경제규례 219.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레위기 19:9).
경제규례 220. 포도원의 포도를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위기 19:10),
경제규례 221.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레위기 19:10).
경제규례 222.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며(레위기 19:10),
경제규례 223. 그것을 다 주워서는 안 된다(레위기 19:10).
토지규례 326. 안식년에는 땅을 놀려야 한다(레위기 25:4).
토지규례 327. 안식년에는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4).
토지규례 328. 안식년에 저절로 열린 곡식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 된다(레위기 25:5).
토지규례 329. 안식년에는 저절로 열린 과실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 된다(레위기 25:5).
토지규례 333. 희년에는 심거나 거두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5:11).
토지규례 334. 희년에는 저절로 열린 포도를 거두어들여서도 안 된다(레위기 25:11).
토지규례 335. 희년에는 저절로 맺힌 열매를 필요 이상으로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레위기 25:12-13).
토지규례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 된다(레위기 25:14).
토지규례337. 속이지 말라(레위기 25:14).
토지규례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레위기 25:17).
토지규례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레위기 25:23).
토지규례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레위기 25:24).
위에 소개한 내용은 레위기 19:9,10의 추수 규례와 25:1~28까지의 희년법 토지 규례에 대한 유대인 율법입니다. 이 유대인 율법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성경 희년법을 어떻게 알고 있고, 대해 왔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경제 규례 216번에서 223번까지가 모두 레위기 19:9~12가 말하는 추수할 때의 규례입니다. 그리고 희년법에 속하는 토지 규례 326번에서 335번도 경작 또는 추수에 관한 내용입니다.
레위기 추수 규례는 추수할 때 가난한 자를 위해 다 거두지 말고, 조금 남겨두라는 말입니다. 성경 본문은 19장 9절과 10절로 2개 조항이며,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든 유대인 율법은 무려 8개 조항입니다. 유대인 율법을 보면 216번과 217번은 추수할 때 ‘조금 남겨 두어라’는 말과 ‘다 거두지 말라’는 표현만 다르고 내용은 같습니다. 218번과 219번, 220번과 221번, 222번과 223번도 같은 내용입니다. 더 크게 보면 216에서 223까지 곡식과 포도라는 종류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을 세세하게 나누거나 조항을 불필요하게 늘렸습니다. 안식년 경작과 수확에 대한 것도 중복과 반복의 연속입니다. 이런 규정은 전체 조항을 613개로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끼워넣기를 한 것 같아서 반복되는 내용은 우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희년법의 백미가 기업을 팔고 사는 토지거래에 대한 규례인데 토지거래에 관한 내용은 2개 조항뿐입니다(아주 팔지는 말아야 하는 것과 희년에 본주에게 귀속시키는 것). 그 대신 레위기 25:14에서 거래에서 서로 속이지 말고, 신의를 지키라는 내용은 3개 조항(336~338번)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율법에는 기업을 거래하는 규례가 통째로 빠져있습니다. 토지거래에서 본주와 경작자, 매입자와 매각자, 그리고 금융거래인 토지 담보에 대한 필수적 필요 조항이 없습니다. 먼저, 기업을 팔고 사려면 희년까지 연수를 정하여 팔고 사야 하는데(레 25:15,16) 이에 대한 조항이 없습니다. 희년까지 연수를 세는 기한의 기산 방법, 생산물의 다소를 따라 기업의 가격을 평가는 방법 등이 없습니다.
그리고 팔린 기업은 무르기를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규례도 없습니다(레 25:24). 기업을 무르려면 이것 역시 남은 연수의 기간 산정과 그에 따른 잔존가격을 정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규례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 무르기를 할 때 그 의무자로 나서야 할 형제나 친족의 순위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업의 상속권 순위와 관련하여 필수적인데 그런 규례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유대인 율법은 민수기 27:8에 근거하여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상속한다는 단 하나의 조항만 두었습니다(유대인 율법 400번). 그래서 하나님이 과부나 여성들의 경제적 권리 보장을 위해 마련한 민수기 기업 상속권과 신명기 계대결혼에 대해서도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는 남성 중심의 편향된 관습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대인의 율법도 그런 성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모세오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여성의 권리도 인정하고 보장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유대인 율법에는 레위기 25:23의 규정을 따라 “땅은 아주 팔지는 못한다(유대인 율법 339번)”와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유대인 율법 340번)”는 내용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을 시행하려면 희년의 시작기와 종결기, 기한 산정에 필요한 실무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농업에서 토지에 대한 거래와 경작권의 변동 시기는 농사철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계절적인 요인이나 조건들도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 율법에 없는 희년법 관련 내용들(추가해야 할 조항)
유대인 율법 613개 조항은 희년법을 지키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빠진 것을 필자가 나름대로 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년 관련>
① 종교력은 1월 1일(출 12:1, 레 23:4), 생활력은 7월 1일에 시작한다(레 23:24).
② 안식년은 7년마다 지켜야 한다(레 25:4).
③ 안식년 기산(시작) 연도는 주전 1446년 7월 10일부터 매년 7년 주기를 가진다(레 25:9).
④ 경작년에 다스린 것은 다스린 자가 거두어야 한다(레 25:3).
⑤ 안식년은 땅이 쉬는 해가 되어야 한다(레 25:4).
⑥ 안식년에도 땅은 스스로 산물(소출)을 낸다(레 25:5).
⑦ 안식년 산물은 경작자가 거두지 말아야 한다(레 25:5).
⑧ 안식년 산물은 경작자 본인, 종, 품꾼, 객이라도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레 25:6).
⑨ 안식년 산물은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레 25:7).
<희년 관련>
① 희년은 7 안식년 다음 해 50년 째마다 돌아오는 49년 주기를 가진다(레 25:8).
② 희년의 기간 산정은 희년법이 제정된 주전 1445년 7월 10일부터 시작한다(레 25:9).
③ 희년에는 뿔나팔(요벨)을 불어서 백성들에게 희년의 도래를 알려야 한다(레 25:10).
④ 희년에는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여야 한다(레 25:10).
⑤ 희년에는 각기 자기 가족에게 돌아갈 자유를 주어야 한다(레 25:10).
⑥ 희년에는 각기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권리를 주어야 한다(레 25:10).
⑦ 희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한다(레 25:11).
<토지거래 관련>
① 토지는 희년까지 연수를 따라 팔고 사야 한다(레 25:15).
② 토지는 희년까지 생산될 열매의 다소를 따라 가격을 매겨야 한다(레 25:16).
③ 토지를 팔고 살 때는 경작권자는 희년까지만 경작을 할 수가 있다(레 25:28).
④ 토지를 팔고 살 때는 본주나 본주의 형제나 친족에게 무르기 우선권이 있다(레 25:24).
⑤ 토지는 경작, 사용, 상속은 할 수 있으나 소유는 하지 못한다(레 25:23).
⑥ 토지거래의 기간 계산은 희년과 속하는 날(속죄일, 속전일)을 기준으로 한다(레 25:9,10).
⑦ 토지의 영구매매와 소유권 매매는 금지한다(레 25:23).
<토지 무르기 관련>
① 토지가 팔린 경우 무르기를 할 수 있다(레 25:24).
② 토지 무르기는 본인이 하지 못하면 고엘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가 대행을 해야 한다(레 25:25).
③ 토지 무르기의 권리와 의무는 형제, 친족 간에 고엘 의무자의 순서를 따른다(레 25:25, 민 27:10,11).
④ 토지 무르기는 경작자가 응해야 하며, 이때 잔존가격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다(레 25:24,28)).
⑤ 무르기 가격은 희년까지 남은 연수가 많으면 팔린 값에서 지난 해의 값을 제하고, 남은 연수가 적으면 남은 연수의 가격으로 한다(레 51,52).
⑥ 토지 무르기는 증인을 세워야 한다(룻 4:2, 렘 32:10).
⑦ 토지 무르기는 매매증서를 복수(2통 이상)로 작성하여 거래 당사자와 증인이 보관한다(렘 32:11).
⑧ 토지가 팔리어서 무르기를 하지 못하면 희년에 돌아온다(레 25:28).
⑨ 이방인에게 몸이 팔렸으면 희년에 돌아온다(레 25:50).
<속죄일, 속전일 관련>
① 속죄일(속전일)은 7월 10일이다(레 23:27).
② 속죄일은 두 마리의 염소를 취하여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물로(레 16:9)
③ 다른 한 마리는 살아있는 그대로 광야에서 놓아주어야 한다(레 16:10).
④ 토지거래는 속죄일을(속전일) 기준으로 정하여야 한다(레 25:15,9).
⑤ 토지 무르기는 속죄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레 25:24,9, 25:15).
⑥ 종을 자유하게 하는 날은 속죄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신 15:12, 25:9).
⑦ 부채의 면제일은 속죄일을 기준으로 한다(신 15:1, 23:27)
⑧ 구제년 기산일도 속죄일을 기준으로 한다(신 14:28).
주) 속죄일 관련 두 마리의 염소는 아직 학계에서도 아직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필자는 ②번 염소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지고 ③번 염소는 "아세셀"이 '보낸다'와 '염소'의 합성어이므로, 산 채로 광야에 놓아주어 자유하게 하는 의식으로 본다. 곧 ②은 속죄일 제사의 희생물이고, ③은 속전일의 값 치르기 속전으로 자유함을 얻는 의식으로 본다(참고, 나병 환자의 정결의식, 레 14:4~7) .
<민수기 상속법 관련>
① 기업은 아들에게 상속하며(민 27:7), 장남은 두 몫의 분깃을 주어 장자의 명분을 지키게 해야 한다(신 21:16,17).
② 아들이 없으면 그 기업은 딸에게 주어야 한다(민 27:8) =>유대 율법에 있음
③ 딸이 없으면 형제에게 주어야 한다(민 27:9).
④ 형제가 없으면 아버지의 형제(3촌)에게 주어야 한다(민 27:10).
⑤ 아버지의 형제가 없으면 가까운 친족의 순위로 주어야 한다(민 27:11)
⑥ 기업을 상속 받은 딸은 자기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민 36:8).
⑦ 기업은 희년에도 자기 지파에게 가감되지 않게 하여 자기 조상의 기업을 보존해야 한다(민 36:3,9).
유대인 율법에서 추가해야 한다고 보는 위의 조항들은 필자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땅과 집, 부동산 등의 소유와 임대는 시장거래에서 가격과 중요도에서도 그 비중이 높은 거래입니다. 따라서 유대인 율법 613개 조항에서 희년법을 준행하려면, 실무적으로 이런 조항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율법은 이런 조항들이 빠져있으므로, 유대인들이 성경 희년법을 지키지 않은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율법과 희년, 그리고 기업 무르기
레위기 25:8~10에 근거하여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면, 그 희년의 발효 시점이 1년 중 어느 때인지를 정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속죄일은 제사와 금식에 관한 조항들만 있고, 이날 해야 하는 토지거래와 귀속 절차에 관한 규정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종합하여 볼 때 희년법이 정한 토지의 시한부 거래와 팔린 토지를 속량하여 회복시키는 무르기 규정은 아예 무시하고 정하지도 않았습니다. 토지거래와 무르기는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가 없으므로 자유방임상태로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과 토지거래의 규정을 지킨 사례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기업 무르기를 하였고(룻기 3장, 4장), 선지가 예레미야가 사촌 하나멜의 기업을 무르기 한 것이 전부입니다(렘 32:6~15). 룻기와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러한 기업 무르기는 형제와 친족들 간에 절차를 밟아야 하고, 증인을 세우며, 매매증서는 2통을 작성하는 등 명시적인 조건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 율법은 이러한 토지거래와 무르기에 대한 규정이 없습니다. 성경 외에 유대의 사회나 경제제도를 설명하는 문헌들을 보아도 토지거래와 기업 무르기, 그리고 희년과 토지권 회복에 관한 내용은 용어조차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진단은 유대인 율법 613개 조항 외에 다른 규정(미쉬나, 탈무드)에 희년과 토지거래, 무르기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율법에서 희년법 관련 내용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의 지도자나 백성들이 희년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가 유대인들이 희년과 안식년이 언제인지를 모르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유대교가 희년법대로 희년을 지키고, 룻과 보아스처럼 기업 무르기를 하였다면 희년과 속죄일 무르기를 모를 수가 없습니다. 또 신명기 면제년 규정을 잘 지켰어도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또는 면제년이 언제인지 모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로 이스라엘 토지제도의 부당성을 우회적으로 들고나오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그 비유가 자기들을 표적으로 삼은 것을 직감하고 있습니다(마 22:45, 막 12:12, 눅 20:19). 비유 연구가 다드(C.H. Dodd)와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는 주후 30년경 갈릴리 지역의 토지제도를 소재로 했다고 보았습니다. 이 당시 갈릴리 지역의 토지는 예루살렘에 거주한 부유층, 부재지주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주) 최갑종, 예수님의 비유 연구, 1994, 기독교문서선교회, 224쪽.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전통 유대교의 지도자는 머리카락을 세듯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년 부채 탕감을 피하기(하지 않기) 위하여 613개 조항과는 별개로 프로스블(Prosboul)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프로스블이란 채권의 집행을 법정으로 넘겨서 유예시킨 제도입니다. 안식년이면 탕감해야 할 채권은 법정에 넘겨서 그 효력을 유예시켜 두고, 안식년 다음 해에 되살리는 제도입니다. 바리새인 중 힐렐 학파가 이런 제도를 창시했습니다.
주) 프로스블은 '법정 앞에서(pros boulē)'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프로스블은 안식년이 지난 후에도 채권자가 자신의 채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채권자가 아닌 법정이 빚을 대신 받아 주는 방법이며, 안식년(면제년)의 빚 탕감 규례를 이런 방법으로 회피하였다.
그들은 레위기 25장에 있는 희년과 기업 무르기, 그리고 토지거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성경을 은폐하여 왔습니다. 백성들에게 금식, 기도, 안식일 준수, 십일조, 음식 규례, 할례 등은 엄격하게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가르칠 때,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입에 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희년과 기업 무르기를 이처럼 철저하게 숨기고, 지키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당시 성경은 두루마리로 되어있고, 성전이나 회당의 특별한 장소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경을 소지할 수가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희년과 토지 무르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몰라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희년법을 지키지는 않았더라도 관심을 가지거나 연구만 하였어도 오늘날 유대인들이 희년이 언제인지, 속죄일은 금식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주의, 오늘날의 근본주의는?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지도자로 백성들은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에게 소경 된 인도자라는 평을 받습니다(마 23:16). 그들은 율법을 외식과 형식으로 지키는 문자적 준행자들이고,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계명이고, 약속의 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나쁜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형식만을, 그것도 문자적으로만 지켰습니다. 율법주의는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겉보기는 거룩하고 깨끗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함이 가득했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루살이처럼 작고 자질구레한 법은 엄격하게 해석, 적용하여 지키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또 세분하여 적용시킨 것이 그 예입니다.
왕정시대에 왕과 백성들은 바알 우상을 섬기고 생활도 바알의 율례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바알 우상을 섬기지 않았고, 외래 종교와는 분리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준수에도 철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작에 백성들의 삶을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켜줄 희년법은 거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종교지도자와 율법주의자들이 가진 한결같은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약시대에서 성경 말씀을 복음적으로 믿고 따르기보다 문자나 형식에 치중하여 행동하는 편협한 신앙관을 가진 부류가 있습니다. 이를 근본주의 또는 원리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은 나쁘지 않지만, 율법주의는 잘못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근본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옳지만, 이를 기계처럼 지키려는 근본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는 사전을 찾아보면 20세기 초부터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파 사이에서 자유주의에 대립하여 일어난 보수파의 신앙 운동이라고 소개합니다(다음 백과). 위키백과는 독실한 신앙이 종교와 교리에 충실한 것이라면, 근본주의는 전통주의나 보수주의 또는 종교적 극단주의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과 코란은 음력을 사용합니다. 음력은 달의 운동을 따라 날짜와 시기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력은 해의 운동은 따라 날짜를 정합니다. 달력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는 한 달 두 달, 달을 세는 기간은 달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음력이 편리했습니다. 그러나 햇수를 세고, 계절을 따라 농사를 짓는 농사력은 해의 움직임을 따르는 양력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음력을 사용하는 성경과 코란은 달의 운동과 해의 운동 시간을 달력으로 맞추어 주는 윤달을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슬람 종교는 이 윤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코란이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절기(명절)는 계절에 관련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종교 행사 라마단은 여름에도 오고 겨울에도 옵니다. 라마단은 원래 이슬람력으로 9월입니다. 이 9월은 태양력에 비하여 매년 11일 정도 빠르기 때문에 1년 중 아무 때나 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설날이 겨울에도 오고, 여름에도 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절기는 계절과 맞지 않습니다. 아주 어색하지요. 그들은 음력은 계절과 다르기에 생활에 불편하고, 절기 행사가 계절과 맞지 않아서 창조질서를 거스르게 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윤달을 두지 않는 것이 코란의 근본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코란은 번역하면 의미가 훼손된다고 하여 번역본을 경전으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런 사고나 행동이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도 음력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성경에 윤달을 지키라는 말은 없지만, 윤달을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실절, 맥추절, 초막절이 모두 추수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농사철과 추수기는 해의 움직임과 계절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음력 달력은 이러한 계절과 일치하는 양력에 맞추어야 하므로 윤달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없더라도 교리를 어긴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질서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시대에 걸맞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인간의 생활 양식에 대한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필자의 말은 윤달을 두지 않은 이슬람은 근본주의, 윤달을 두는 유대교는 복음주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달력 사용을 예로 든 것뿐입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게 행한 질책을 보면서 복음시대를 사는 우리도 근본주의는 조심해야 합니다. 근본주의와 상반된 자유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 그리고 더 빗나간 영지주의 등도 모두 주의해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종교인들은 성경의 해석과 적용에서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에 치우치고 자기 의를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나치면 바리새인처럼 믿음도 좋고, 교리도 잘 지키지만, 그런 신앙이 오히려 율법주의나 근본주의자들처럼 오류를 범하게 됩니니다. 나의 신앙이 남을 정죄하는 수단이 되거나 잘 지키려는 신앙적 행위들이 형식주의나 교조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가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세상에 본이 되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털을 세듯이 율법을 지켜서도 그 율법 안에 들어있는, 희년법은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 눈에는 죄가 사해져야 영적인 자유가 회복되는 것을 아는데, 땅이 있어야 사람이 육적인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단순 사실을 모를까요?
땅이 있어야 내가 숨을 쉬고, 땅이 있어야 사람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남성 중심이었던 유대 사회에서 여성과 과부도 땅이 있어야 내가 먹을 양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희년법은 인간의 생존과 자유에 필수 요소인 땅을 주기 위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희년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성된 가정에서 가족과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이 세상 마지막 때까지 존속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입니다. 대가 끊어지면 씨를 빌려서라도 대를 잇고, 기업이 팔려 있으면 값을 치를 무르기로 그 기업을 회복시켜 존속시키는 것이 희년법입니다. 여기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인 속량과 대속제도가 생겼고, 이것이 십자가의 구원원리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이들의 생존과 자유를 지켜주는 희년법을 어기면서까지 과부의 집(땅, 재산, 생존권, 자유권, 인권)을 삼켜버렸을까(눅 20:47)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레위기 제사법은 잘 지켰습니다. 레위기 정결법, 속죄일 금식, 안식법, 음식법, 정결법, 할례 등은 모두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뒷부분에 있는 희년법과 경제 규례는 거의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희년법 불순종은 그 법이 시내산 성막에서 제정된 후 가나안 진입 목전에서 첫 희년을 거부한 이래, 지금 예수님 앞에서 꾸중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단, 여호수아 시대 1회 희년은 예외). 광야에서부터 사사시대, 왕조시대, 포로시대 그리고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바리새인까지 모두 지도자가 먼저 희년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년법은 백성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성전 강론은 이런 영성을 가진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뱀과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표현을 쓰며, 강하게 꾸짖습니다(눅 3:7, 마 23:33).
지금 우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위선을 떨지도 않고, 과부의 집을 삼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대감을 보여왔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받게 했던 바리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 희년법에 대한 순종의 여부로는 지금의 우리도 유대교와 많이 닮았습니다. 희년법에 대한 일반적 반응만을 비교하면 붕어빵처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시대에 살아서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지켰습니다. 우리는 복음시대에 살아서 신약성경을 복음으로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년법을 무시, 방관, 거부하는 태도는 그때는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희년법은 실천 불가능한 이상론이며, 유대인들도 지킨 사례가 없는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희년법은 성경 말씀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죽여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기회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천지는 사라질 수 있으나 희년법이 담긴 성경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마 5:17~20, 마 24:35, 막 13:31, 눅 21:33).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시작 시기에 희년을 직접 선포하셨습니다(눅 4:16~19). 공생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희년에 필요한 소중한 값을 직접 치러주셨습니다(요 19:30). 십자가의 값 치르기는 경제적으로만 보면, 목적은 희년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방법은 희년법의 속량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에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교리가 예수님이 보실 때 하루살이처럼 작고 보잘것 없는 것도 있지만, 낙타처럼 커서 중시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레위기를 기준으로 율법의 경중을 말하면, 앞에 나오는 제사법은 먼저 지켜야 하는 계명이고, 중간에 나오는 식사법, 정결법, 안식일법, 할례법 등은 작은 것이라서 신약시대에 폐기해도 되는 계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뒷부분에 나오는 희년법은 인간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어야 할 필수적 계명입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큰 율법이며, 신약시대에도 토지 휴경제와 같이 개선해야 할 것은 있지만, 폐기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중시해야 할 계명입니다. 희년법이 가진 경제원리와 구원의 윈리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유효하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