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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대한민국
박상인 지음, 21세기북스 2022.
이스라엘 재벌 개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이스라엘 재벌의 출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도 우리나라와 같은 재벌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에 대해 잘 몰랐다.
2014년 이후 이스라엘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 재벌 개혁에 관한 주제로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스라엘 재벌 개혁의 주요 인사들과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심도 깊게 연구했다. 그 주제는 ‘어떻게 재벌 개혁을 하게 됐을까?’, ‘어떤 과정으로 개혁을 했을까?’, ‘구체적인 개혁 내용은 무엇일까?’, ‘실제 집행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집행에 대해 어떤 의미를 둘 수 있을까?’ 등이었다.
이스라엘의 재벌에 대해 논하기 전에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에 1985년까지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체제였다. 이스라엘 집권당은 노동당이었고, 그전에는 이스라엘 좌익 세력들이 결성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마파이당’이 집권했었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까지 가장 영향력이 컸던 정치 세력으로 오늘날 이스라엘 노동당의 전신이다. 이렇게 마파이당이 장기집권하면서 아랍 국가들과 많은 전쟁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재정적으로도 굉장히 취약해졌다.
1985년경에는 이스라엘 경제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해결하고자 사회주의 체제를 급격하게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개혁을 시도한다. 1985년 이전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소유주는 국가와 노동조합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노동조합은 이스라엘 기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파산 위기가 오자 민영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민영화 과정을 20년 정도 거치다 보니 경제력 집중이 생겨났다. 과거부터 자본력이 있던 집안이나 많은 돈을 갖고 외국에서 살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민영화된 회사를 사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보험회사와 은행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그리고 그 돈으로 민영화한 기업을 추가로 계속 사들이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의 재벌처럼 경제력이 집중되는 피라미드 구조의 기업집단이 생기게 된 것이다.
2015년 이스라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약 31개의 개별사들이 2,500개 이상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스라엘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는 상위 10대 기업의 시가총액이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40퍼센트를 넘어설 정도로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재벌개혁을 했는가
이스라엘 기업집단은 다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방식을 차용해 표현하자면 ‘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 이렇게 내려가는 식이다. 그리고 금융회사, 비금융회사가 분리되지 않아 금융회사 돈을 이용해 비금융회사를 사들이는 관행이 반복되었다. 금융회사를 이용해 경쟁 관계에 있는 비금융회사에 불리한 조건을 제시해 경쟁 자체를 없애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생겼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2013년 이스라엘의 ‘반反경제력집중법’이 제정됐다.
이 법은 흥미롭게도 위로부터의 개혁을 이끌어냈다. 2010년 이스라엘 정부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위원회는 개혁안을 만들고 의견을 취합해서 의회에 제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실 우리나라도 1986년, 대규모 기업집단 규제가 공정거래법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당시 관료들이 재벌 규제의 필요성을 절감해서 나온 조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규제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스라엘도 2010년쯤부터 이스라엘 관료나 정치인들이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개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당시 《더마커》라는 특정 경제지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이로 인해 개혁의 모멘텀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국민도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스라엘 재벌 개혁에 대해 재벌들의 반발도 상당했다. 당시 이스라엘 최대 재벌인 IDB그룹은 당국의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이스라엘처럼 작은 규모의 경제에서는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경제 집중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전직 대법원장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경제력 집중이 이스라엘 경제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의회knesett는 2013년 12월에 반경제력집중법(Law for the Promotion of Competition and Reduction of Economic Concentration, 5774-2013, 줄여서 통상 ‘Concentration Law’ 또는 ‘Anti-Concentration Law’라고 부름)을 반대표 없이 연정을 구성한 42명의 여당 의원과 30명의 야당 의원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한 명의 의원만 기권했는데, 당시 그가 기권한 이유는 ‘법안이 약하다, 더 강하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안은 6년 동안 시행되었고 2019년 소유지배구조 규제와 금산분리는 완료되었다.
그 이후에도 국공유 자산 할당을 위해 집중화된 기관의 민영화, 주요 공공입찰, 라이선스 획득 등에 참여 허용 여부를 권고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어 활동 중이다. 민영화를 통해 이스라엘 재벌이 탄생했으니 또다시 재벌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국이 중심이 되어 국공유 자산이나 M&A를 할 때 경제력 집중이 일어나는지 지속적으로 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 내 재벌 중 IDB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반경제력 집중의 조건을 2019년 말까지 만족시켰다. 이를 더 살펴보면 2019년까지 법의 내용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동법에 따라 주식을 관재인에게 넘겨야 하고 관재인은 그것을 처분하게 되어 있었다. 만약 처분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의결권을 제한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대 재벌 IDB는 개혁이 시작될 무렵 주인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부동산으로 막대한 돈을 번 유대인이 IDB를 인수했지만 그는 6년 안에 법이 정한 2층 출자구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자신의 주식을 법원에 넘기고 사업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소유지배구조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금산분리와 경제력 집중 모니터링
금산분리란 은행, 보험, 기금 등의 금융자본과 실물 기업을 지배하는 산업자본 간의 결합을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금산분리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은행이나 금융기관의 돈을 쉽게 활용해 무분별한 투자와 사업 확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본 조달 측면에서 불공정을 야기할 수 있고, 투자 자금이 부실화되면 금융위기를 초래해 경제 전체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금산분리와 관련해 이스라엘의 초기 아이디어는 엄격하게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조금 완화해서 대형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 기업은 하나의 회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업집단을 지칭한다. 금융회사 집단과 비금융회사 집단이 특정한 규모가 되면 동일인이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다.
따라서 입법된 이스라엘 금산분리의 핵심 내용도 주요 금융회사와 주요 비금융회사의 동시 소유 금지다. 주요 금융회사는 기업집단 전체의 금융자산이 400억 세겔을 초과하는 은행과 비은행 금융기관 또는 자금결제기관을 의미한다. 주요 비금융회사는 기업집단 전체의 매출 또는 부채가 60억 세겔 이상이거나 한 개 이상의 독점시장에서 기업집단 전체의 매출이 20억 세겔 이상인 회사로 규정했다. 그리고 국공유 자산 할당 조건은 이런 소유지배구조나 금산분리 아이디어가 민영화를 통해서 다시 망가지지 않도록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경제력 집중 우려 집단concentrated Entities’은 주요 금융회사, 주요 비금융 회사와 더불어 언론사나 인프라 독점적 사업자까지 포함한다. 이들 집단은 주요 공공입찰이나 라이선스 등을 획득할 때 경제력 집중의 우려에 대해 사전적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해당 내용을 심사하고 권고하는 위원회를 별도로 만들었다.
경제력 집중을 막는 보완적 입법
그 외에도 경제력 집중법의 보완적 입법을 시행했다. 소수주주 보호를 위해 주총에 ‘소수주주 동의제Majority of Minority, MoM’를 도입했다. 지배주주의 사익 편취가 발생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이스라엘은 상법에서 소수주주, 즉 지배주주와 계열사 지분을 뺀 비지배주주의 다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기업이 일감 몰아주기를 하기 전에 감사위원회와 이사회,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내부거래가 경영상의 합리성 때문에 하는 것인지 대주주가 착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소수주주가 MoM을 활용해 판단하도록 만든 것이다. 소수주주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경영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되면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대주주 사익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판단될 때는 자신들의 손해를 막기 위해 반대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기업의 총수일가가 임원으로서 받는 보수에 대해서도 3년에 한 번씩 소수주주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재벌의 경우 총수일가가 여러 개 회사에서 직책 보수를 동시에 받고 있으며 그만큼 퇴직금도 많이 받는 사례가 계속 생기고 있다. 이는 소수주주에 대한 또 하나의 착취 사례다. 이스라엘은 이런 사안에 대해서도 소수주주의 사전 동의를 받게 하므로 지배주주의 친척이나 관련 있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급여를 가져가는 사례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도 MoM제도가 도입된 이후 일감 몰아주기가 상당히 감소했다는 학술적인 연구도 나왔다. 우리나라는 재벌 기업들이 사익 편취 수단으로 일감 몰아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이를 공정거래법으로 규율하고 있다.
재벌 개혁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열사 간의 M&A 문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할 때 합병 비율이 큰 문제가 됐었다. 결국 관련된 사람들이 형사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계열사 간의 합병을 할 때도 총수일가에게 유리하게 합병 비율을 정할 수 있다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사실 이런 사안들도 소수주주의 동의를 받게 했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회사의 미래 성장에 중요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합병이라면 소수주주가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건설적인 이유가 아니라 총수일가가 사익 편취의 일환으로 계열사를 합병한다면, 이 일로 손해를 보는 소수주주는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이처럼 소수주주 동의를 강제하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이스라엘이 MoM 제도를 도입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은 기업집단 자체를 없앤 건 아니다. 상장회사 2층 구조의 작은 재벌은 존재한다. 재벌이라고 부를 만큼 경제력 집중을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총수가 있는 중견기업집단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수주주가 착취를 당할 가능성이 여전히 있으므로 MoM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스라엘의 재벌 개혁제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미국 델라웨어 법원의 상법부 모델과 유사하게 텔아비브 지방법원에 ‘경제부the Economic Division’라는 특별 재판부를 만든 점이다. 경제부에서는 증권법과 회사법 관련 소송만을 다룬다.
그렇다면 이 재판부는 어떤 역할을 할까? 회사법의 경우 해석의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데 경제부는 일관되고 친경쟁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법리나 판례가 신속하게 형성되면서 각종 개혁들을 아주 효과적이고도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소송 비용까지 지원해준다. 대주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소송이 필요한데, 이때 비용 문제로 소송을 못할까 봐 지원해주는 것이다. 집단소송이나 주주 대표소송을 할 때는 이스라엘 증권 감독원인 ISA Israel Security Authority가 소송 비용을 지원해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주주대표소송을 한다고 하면 소송 공화국을 만들 것이냐며 난리가 난다. 2020년 말에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서는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할 요건도 강화되어 실효성이 더 없어지게 되었다. 주주대표 소송은 일부 주주들이 회사 경영진에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반면 다중대표소송은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에게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실제로 자회사의 경영진이 모회사 최대주주와 결탁해서 모회사 소수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모회사 소수주주에게는 이에 대응할 수단이 없다. 따라서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제도가 다중대표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주대표소송도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개혁연구소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17년 사이에 법원 판결이 내려진 주주대표소송은 총 137건이었다. 1년 평균 6.5건에 불과했으며, 137건 중 상장회사에 대한 주주대표소송은 47건에 불과했다. 대표소송이나 다중대표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배상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에 귀속된다. 따라서 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할 유인이 매우 낮은 게 현실이다.
소송은 무조건 나쁘다는 프레임으로 바라볼 게 아니다. 기득권의 이익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도 적정한 수준의 소송은 필요하다. 그리고 소송이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이스라엘 정부처럼 우리도 국가나 여타 기관이 지원해주는 정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198-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