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강정마을을 알게되고 인생의 궤적이 바뀌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 '제주의 영혼들'(The Ghost of Jeju)을 만든 레지스 트렘블레이 감독(70)은 14일 강정마을에서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전작에서 담아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야기할 차기작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강정으로 왔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는 한국어 자막본을 제작한 평화활동가 조약골씨가 함께 자리했다. 트렘블레이 감독은 그 차기작으로 제주, 오키나와, 하와이, 괌, 마샬제도들의 군사주의 반대 싸움을 연결하는 '자정 3분 전'(가제) 촬영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1년쯤 후에 완성할 계획으로 '섬 주민들의 저항'을 담는다. 이를 위해 마샬제도, 오키나와 등 세계 미군기지가 있는 섬을 찾아 촬영하게 된다.
'제주의 영혼들'은 제주의 아픈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특히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지난해 '시카고 세계평화영화제'에서 '특별발굴상'을 수상했다. 현재 6개 국어로 번역이 되어 미국은 물론 제주, 일본, 대만,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상영되어 왔고 가는 곳마다 강정과 제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별발굴상'의 의미는 어떤 거였을까. 트렘블레이 감독은 "강정을 다녀간뒤 워싱턴에서 4·3진압관련 미군의 책임이 드러난 비밀문서를 찾아냈어요. 당시 미군정이 4·3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영화제에서 처음 본 이들은 큰 충격에 빠졌고 화제작으로 대두되면서 대상작 후보에 올랐고 결국 드물게 수여하는 '특별발굴상'에 선정됐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 했다.
그때 충격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으로서 화가 났습니다. 진실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세계를 돌면서 영화를 함께 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총 80분 분량으로, 제주 4·3사건으로부터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태까지 제주의 아픈 현대사를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향과 공권력에 맞서 자결권을 외치는 사람들'이란 하나의 주제로 이어간다. 시카고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등도 출연해 제주문제를 직접 설명한다. 이 영화는 해군기지 건설에 저항하는 강정이 세계평화의 중심에 서 있고, 전쟁과 국가폭력에 반대하는 평화행동 및 연대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는 비밀해제된 문서와 사진들, 각계 전문가들의 증언을 통해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Pivot to Asia)'과 강정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또 해군기지로 인한 환경의 파괴, 일상이 되어버린 인권침해와 평화운동 탄압을 묘사하면서, '인간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그는 제주 문제를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군사주의적 성향이 빚어낸 일련의 사태로 해석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수십년 전 자행한 일, 지금까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일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라며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무언가 하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트렘블레이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2012년 9월 제주 강정마을을 처음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달간 머물며 현장을 취재하고 자료를 모았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8개월 동안 매일 10~12시간씩 강행군해 영화를 만들었다
주변의 도움을 얻어 제주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도 모을 수 있었다. 시카고대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AP통신의 찰스 핸리 기자 등이 도움을 줬다. 꼼꼼한 자료 조사는 제주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줬다.
"제주 사람들은 신화 또는 종교적 신념으로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실제 올리버 스톤 감독은 사람들의 귀신(영혼) 목격담을 들려줬고, 찰스 핸리 기자도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미군 병사들이 귀신을 봤다는 증언을 했다고 말해줬죠. 그래서 '제주의 영혼들'을 제목으로 하기로 한 겁니다."
그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지금 제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궁금해했다. 제주 역사와 강정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전 세계가 들을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트렘블레이 감독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 "2012년에 강정 이야기를 듣고 8분 짜리 영화를 만들려고 강정을 갔다. 3주 동안 강정에 머무르면서 제주의 역사와 강정 마을 사람들의 평화적 저항에 감동을 받아 영화를 만들다보니 80분 짜리가 되었다". 그는 "제주강정마을이 세계인에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상징마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마지막 대사를 다시한번 강조했다.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각한 사람들이 깨어나 힘을 모으는 것이다." 70대 노장 독립영화감독의 말은 울림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