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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미정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젊은 여자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빽팩을 메고 있었다. 여자는 카메라 가방과 작은 보스턴 백을 어깨에 매고 있었다.
“체이스!”
미정이 쓰러지듯 체이스에게 안겼다.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미정아~ 여기 앉아서 안정을 좀 취해.”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두분은 누구고, 어떻게 오셨습니까?”
미정을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히고 한 발짝 미정이 곁에서 떨어져 서서 그들을 향해 물었다.
“저는 이현주이고 이쪽은 김성태라 해요. 이 분에게서 모든 상황을 들었어요. 저가 이번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요. 우연히 그 사건 현장에 있었기에 그 상황을 마침 가지고 있던 비디오 카메라로 녹화하여 두었어요.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여기 제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혹시 저의 진술이나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저희들은 지금 서울로 올라가야 하거든요.”
“아.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게 하여 미안하군요.”
체이스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각본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히 이 사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에 경찰이 매달리는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가 없었다. 또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의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사람이 그 곳에 있어서 비디오로 상황을 녹화하였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뭔가 오해나 판단 잘못으로 뒤 틀어져 있는 것이므로 곧 바로 잡힐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느닷없이 미정의 남편인 장이규가 나타나 이혼을 선언하며 올라 간 것 또한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체이스의 생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앞 뒤를 들어보고 판단해도 될 것인데, 그는 작정한 것 처럼 뺨 한대 때리고 그것이 댓가인양 돌아갔다.
미정이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사태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정이 앉아있는 의자로 가서 부드럽게 말했다.
“미정아~ 지금 바로 집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어. 이곳은 걱정하지마. 내일 아침이면 모든 상황이 정상으로 되어 나갈 수 있을거야.”
그녀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먼저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선은 악화된 감정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은 미정이 당연히 생각할 수 있었다.
이현주와 김성태 그리고 조미정 세사람이 경찰서를 떠나자 비로서 체이스는 혼자가 되어 오늘 일을 다시 정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 가는 미정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파고 들어 슬프게 하였다. 어쩌면 긴 세월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 힘든 시간을 또 보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운명일 것이다 라는 생각에 체이스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왜 지금 이 상황을 운명이라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자신이 너무 무력함을 느꼈다.
당분간 혹은 며칠이 될 수도 있는 이 유치장은 그런대로 견딜만 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하얗게 사방 벽을 칠해 놓았다. 벽을 만지니 미끌하였다. 특수 유성페인트를 칠해 벽에 어떤 펜으로든 글을 쓸 수 없게 해 놓았다. 천정에는 30촉 전등만 하나 달랑 메달려 있었다. 그리고 전면은 철창살로 바둑판을 만들어 놓았다. 철문도 바둑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들어 올 때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린 것으로 미루어 밖에서 통제할 수 있는 자동문인 것은 틀림없었다. 혹 폭발사고가 나고 정전이 되면 꼼작없이 갇혀 버릴 수 있는 유치장이었다. 그 바둑판 모양 철창살 맞은 편 벽에 일인용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의 다리쪽 벽에 침대와 나란히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가 있었고 물이 흘러내리는 꼭지는 하나가 있었다. 그 옆에 역시 변기가 놓여 있었다. 물은 세면대에서 손바닥으로 받아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적어도 2-3일은 족히 지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그렇게 둘러보니 그에게는 편안한 공간이 되었다. 늘 그는 이렇게 침묵같은 공간에 동그마니 앉아 있기를 바란 때도 있었다. 지금 그 곳에 그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
“체이스! 나 그렌다워이요.”
토요권투를 보고 있던 시각은 밤 8시 20분이었다. 그는 권투를 보는 이 시간이 일주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중 하나이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 시간에는 집에 혼자 있었으므로. 언제나 혼자였지만... 저녁을 먹어며 보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놓칠 수 없었다.
“웬일이요. 그 곳에서 이 시간에.”
“제품 넘버 3024R25 필드쟈켓 110벌 있습니까?”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마 충분한 수량이 있을겁니다. 왜 그러시지요?”
“나 좀 살려주시요. 내일 가게 문 열기 전에 필드쟈켓 110벌이 있어야 해요. 갑자기 CGS에서 주문이 들어 왔어요. 거절할 수 없는 곳에서. 캐나다 굴지의 깨스 공급회사요. 나에게는 너무 좋은 거래요. 그러나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나를 도와 줄 수 있도록 해 주시요.”
“재고가 전혀 없어요?”
“5벌이 있습니다. 계약금도 받았어요. 어떻게 합니까?”
“그렌! 지금이 밤 9시가 되어갑니다. 월요일도 아니고 지금은 토요일이란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알아요. 알아. 그들이 일요일 오픈하기 전에 온다고 했어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필요한 경비는 내가 다 부담하겠오. 그것도 현금으로 즉시 다 지불하겠오. 공급 되도록만 해 준다면… 체이스. 도와주시오.”
“물품가격만 1만 5천불입니다.”
“압니다. 10%더해서 1만6천 5백불 현금으로 물품 인수와 동시 지불하겠오.”
1만 6천 5백불. 더구나 일요일. 현금으로. 캐나다의 그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다. 그러나 체이스는 가기로했다. 창고가 있는 베리는 이곳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이런 밤이면 40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그가 창고에서 3024R25 110벌을 벤 뒷좌석에 가득 싣고 베리를 출발한 시각은 밤 9시 30분이었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일요일 오전 11시쯤에는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였다. 캐나다 전역의 몰(백화점)은 일요일 12시에 문을 연다. 커피는 가는 도중 간간히 사서 마시면 될 것이고, 한국산 바카스 6병과 우루사 박스와 아로나민 골드를 박스 채로 챙겼다. 이것들은 졸음과 피로를 잠시나마 막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무사히 공급하고 돌아 온다면 좋은 거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 올 때는 천천히 오리라 고 생각했다.
문제는 운전 중 졸음이었고, 진행중 급작히 도로를 가로 질러 건너는 사슴이나 무스 혹은 작은 각종 짐승들이었다. 이들과 조우하여 충돌한다면, 거래는 보지도 못하고 끝날 것이었다. 한국 가요 CD 10장을 챙겼다. 두 번씩 듣기 전에 도착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밤 12시가 넘은 일요일부터는 초 긴장모드로 들어가야 했다. 칠흙의 밤 속에 상향으로 바꾼 헤드라잇만 의지하여야 했다. 커브길 언덕길 그리고 작은 동네를 지나면서는 온 몸이 땀으로 축축히 젖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반복되었다.
틀어 놓은 CD에서는 그와 관계없이 노래는 흘러나왔다.
‘날 보러 와요. 날 보러 와요’ ‘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누가 무엇을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냥 곡이 흘러 나오고 그 곡에 머리를 식히려 애썻다. 막장의 어둠속 적막강산을 뚫고 그렇게 달렸다. 할로겐 빔이 직선으로 쏘아 읽어 낸 도로변 주유소 팻말을 보고 우회전하여 동네로 들어가 커피를 사 마셨다. 그것이 두번이었다. 여름날 해는 새벽 5시20분이면 뜨고 4시 30분쯤에는 동쪽 하늘이 여명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그러나 체이스는 북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시야는 점점 밝아져 오고 있었다. 와타나퍼스를 지날 때는 존재를 알리는 기본 라이트외에는 모두를 껏다. 그는 감기는 눈을 비벼 정신을 깨우며 대시보드 중간에서 빛을 발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장장 11시간을 달려 온 셈이었다. 그 동안 속도 계기판의 알림 침은 100에서 130km/hour 사이를 오락 가락하였었다. 멀리 글레드스톤 팻말이 보이자 그는 속도계기판의 침이 80으로 내려 오도록 줄이며 서서히 우측 휴개소 진입로를 탓다.
주차장에는 이미 몇 대의 관광뻐스가 주차하고 있었고 여행객들이 아침과 화장실을 오가느라 분주하였다. 이러한 광경은 한국이나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그 관광 뻐스의 옆 면에 쓰여진 ‘푸른관광’이라는 한글자를 보자 갑자기 반가웠다.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라도 잡고 말하며 반가움에 노닥거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나가며 겨우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한국말을 듣고만 있었다.
“예. 벨리하튼빌에서 기다릴겁니다. 틀림없이 픽업하여 토론토까지 와서 전화해 주십시요. 부탁해요.”
안내원인듯한 사내가 휴대폰으로 크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관심을 끄고 있었다. 그냥 그 말이 흘러 귀로 들어왔을 뿐이다. 들을려고 하지 않았었다. 팀하튼에서 커피 트리플 트리플을 사서 나오며 그는 그 ‘푸른관광’이 그가 오던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고 있음을 부러운듯 보았다. 아마도 토론토를 거쳐 오타와 몬트리얼 그리고 퀘벡까지 갔다 돌아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2주 이상의 긴 여행일 것이다.
그가 창문을 다 열어제치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일요일 아침의 싱그러운 공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마시며 즐길 때 17번째의 CD에서 ‘운명으로 만난 나와 당신. 영원까지 함께 합시다’ 하는 노래 말이 트롯의 리듬을 타고 밝고 화사하고 싱그러운 청명한 하늘로 빠져 흩어져 나갔다.
바디 컨디션이 좋았다. 씽씽하였다. 기분도 아주 좋았다. 여름날 특히 일요일 아침은 자주 이렇게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이 캐나다 날씨이다.
다시 커피 생각이 났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담배 생각이 났다. 그는 주머니를 뒤졌지만, 준비해 온 2갑의 담배가 다 떨어졌음을 알고 다가오는 팻말의 벨리하튼빌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차의 방향을 바꾸었다. 페트롤 케나다나 엣소를 붙인 주유소에서는 담배를 살 수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번갈아 가며 두 주유소가 깨스를 감당하고 있다. 이런 것도 경제적 폭력이다. 유전유익이다. 어쨌든 담배가 필요했다. 운전을하며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는 자유스럽고 편안한 기분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낭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멋진 기분을 만끽할 수가 있음을 체이스는 익히 알고 가끔 즐겨왔다.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진입로 입구에 있는 주유소에는 항상 팀하튼이나 로컬브랜드 커피점이 있었다. 그곳은 다행스럽게도 팀하튼이었다. 조용한 아침시간대라서 주변 동네 사람들이 스프와 도넛으로 아침을 때우기 위해 군데 군데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금 뽑아낸 구수한 커피 향이 코를 자극하였다. 그의 커피는 역시 라지 싸이즈 트리플 트리플이었다. 커피를 받아서 창가에 난 자리에 앉았다. 담배를 피우기 전에 이곳의 평화스러운 아침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미정은 당황했다. 아니, 황당하였다. 르자이나(Regina)호텔에서 출발하기 전 컨티넨탈 브릭페스트라며 구운 베이컨 한쪽과 구운 토스트 하나를 급히 먹었던 것이 배탈을 나게 만들었다. 한국을 출발하면서 혼자였기에 누구에게 라도 새롭게 웃으며 화장실 다녀 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왁자지껄하는 중에 들은 말로는 30분 휴식한다 기에 마음 놓고 볼 일을 보고 손 씻고 나오니 기다려야 할 뻐스가 보이지 않았다. 밖 앗 전체를 둘러 보았지만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미정이 내렸다 승차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지 않고 뭐가 바쁜지 그대로 떠나 버린 것이다. 처음에 황당했던 마음이 서서히 불안해지며 점차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시작하였다. ‘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이 어디쯤 인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영어도 되지 않는다. 울고 싶었지만, 울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미정은 입구 쪽에 햇볕 받이로 세워 둔 철 기둥을 잡고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그때 허름한 미군 점퍼를 입은 키가 큰 사람이 차에서 내려 성큼 성큼 휴게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얼굴 생김이 한국 사람 같았다. 최소한 동양 사람이었다. 지푸라기였다. 미정은 힘을 내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 사람은 창가에 막 앉아 종이컵을 입에 대려고 하였다. ‘저 지푸라기를 잡아야 돼!’ 미정의 본능이 소리쳤다.
“저 혹시 한국사람 아니 세요?”
체이스는 깜짝 놀랐다. 그는 컵을 입에 대려 다 말고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의자 뒤쪽에 서 있는 하얀 캡을 쓴 40대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눈이 크고 얼굴이 맑았다. 놀라며 느낀 것은 참 아름다운 여자구나 였다. 그 때 번개같이 떠 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글레드스톤에서의 귓가로 흘러 들어 온 대화였다. 왜 그런 생각이 먼저 떠 올랐는지는 그도 몰랐다. 의외의 여러 곳에서 한국사람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먼저 떠 올랐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 여성은 여행객 차림이었다. 흰 캡에 얇은 물색 점퍼와 그 속에 네비블루 면 티셔츠. 회색 면 바지 그리고 흰색 나이키 운동화. 그는 헤블레스럽게 입을 벌려 웃지는 않았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더 말하려 다 멈췄다. 그 여성이 반색을 하며 앞 의자에 앉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어요?”
“제가 물어야 할 말인데, 먼저 묻는 군요. 저는 토론토에서 출발하여 골드스톤까지 가는 중에 커피 생각이 나서 잠깐 들렸습니다. 어떻게 이곳에 계십니까?”
그 여성은 주저하였다. 처음엔 반가웠겠지만, 아마도 선뜻 내키지 않음 이리라.
“아. 잠깐. 제가 커피 한잔 사가지고 올께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곧 그는 라지 싸이즈 따블 따블 커피를 손에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보편적인 커피였다. 그녀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눈길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음을 체이스가 알 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