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년 정월 6일에 학초서실(鶴樵書室)에 모여서 “유상미이고담전청(幽賞未已高談轉淸)”으로 운자를 나눴는데, 나는 전(轉)자를 얻었다. 당시 나는 열하(熱河)로 가는 사신의 명을 받아 국경을 나서려 할 때였으므로 우선 장구(長句)를 남겨서 여러 친구들과 작별하였다〔辛酉孟春之六日 集鶴樵書室 分韻幽賞未已高談轉淸 余得轉字 時余奉使熱河將出疆 聊以長句留別諸公〕
벗들이 나를 만류하여 작은 연회를 여니 / 故人留我開小宴
동이 술이 곧장 도성문의 전별연이 되었네 / 尊酒便作都門餞
도성 문 나가 서쪽으로 사천 리 길에 / 都門西出四千里
사신의 행차가 아련히 중국으로 향하네 / 使蓋遙遙指赤縣
평생 제왕의 고을을 꿈에서도 생각하여 / 平生夢想帝王州
대청마루에서 서성거리며 부러워만 했네 / 蹩躄中堂空流羡
《삼보황도》는 눈에 삼삼하고 / 三輔黃圖眼森森
상상하던 수레바퀴 삐걱대며 돌아가리 / 意中轣轆車輪轉
오늘 아침 문을 나서면 참으로 쾌활하여 / 今朝出門眞快活
춤추는 참마가 맷돌처럼 평탄한 큰 길을 달리리 / 舞驂周道平如輾
여러분들이 진정 나를 위해 축하해주니 / 諸公端合爲我賀
어찌 이별의 수심을 미간에 지으랴 / 胡爲離愁眉頭現
승냥이와 범이 날뛰고 고래들이 출몰하며 / 豺虎縱橫鯨鯢出
육지와 바다에 풍진이 가득하네 / 風塵鴻洞陸海遍
굳센 병마인들 어찌 믿을 수 있으랴 / 兵强馬壯豈足恃
기강이 잃은 결과를 여기에서 보겠네/ 綱紀一失此可見
하물며 서역 장사꾼의 교묘한 설은 / 況復西域賈胡說
사람과 하늘을 속이도록 서로 선동하네 / 矯誣人天來相煽
모두들 우리 유교가 액운이 들었다 말하는데 / 皆言斯文厄陽九
도탄에 빠진 천하를 누가 구원할 수 있으랴 / 天下胥溺誰能援
단문의 통곡은 반드시 기필할 수 없으나 / 端門痛哭雖未必
촉강 골짜기 거슬러 오름도 쉽지 않도다/ 蜀江溯峽諒不便
우리들은 모두 기개 높은 사람이라 / 吾曹盡是磊落人
작은 이별에 그리움 자아내지 않네 / 非爲小別生睠戀
아, 성인께서 어찌 우리를 속였으랴 / 嗚呼聖人豈欺我
그대들은 근심걱정으로 마음 졸이지 마소 / 請君且莫憂思煎
육경은 중천에 뜬 해와 달 같으니 / 六經中天如日月
음이 다하고 양이 회복되느라 일선을 다투네 / 窮陰復陽爭一線
왕년에 불교가 중국을 해쳐 / 當年佛敎賊中國
눈 깜짝할 새 온통 금수로 변했건만 / 盡化禽獸卽轉眄
남조 시대의 사백 사찰 어디에 있나 / 南朝四百寺安在
희생을 밀가루로 대신한 것 사람들이 비웃네/ 而今人笑犧代麵
더러운 찌꺼기가 맑아짐도 잠시 사이라 / 滓穢太淸亦暫爾
저 쌓인 눈처럼 잠깐 사이에 사그라지리 / 如彼集霰消見睍
듣자하니말라카와 싱가포르에 / 傳聞馬六新嘉坡
문자를 번역하는 서원이 있어 / 繙繹文字有書院
마치 《논어》나 《효경》의 문장을 / 頗似論語孝經文
이로하로 일본어 적듯이 한다네/ 伊呂波寫日本諺
많은 책 상자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데 / 縹籤緗帙走海航
헤아려보면 해마다 수만 권에 달한다 하네 / 歲課動計書萬卷
이단이 유교를 표절함은 예로부터 있었지만 / 異端剽竊古來有
제멋대로 꾸미고 잘난 체 뽐내게 두어라 / 任他文飾恣誇眩
오랜 세월 뒤에 걸출한 사람이 나오면 / 久後生出魁傑人
사사로운 지혜에 집착한 것 뒤늦게 깨닫고 부끄러워하리 / 慙愧晩覺私智穿
천하 어느 곳의 혈기를 지닌 사람이든지 / 環瀛帀地血氣倫
귀순하여 같은 문자 쓴다면 오랑캐도 중화로 변하리 / 歸我同文夷一變
알겠노라,운수가 바뀌고 왕래하는 즈음에 / 從知消息往來際
비바람이 천둥번개와 섞이는 일 없지 않으리/ 不無風雨雜震電
서생이 어찌 시무를 알랴만 / 書生豈曾識時務
오늘 영광스럽게 사신에 선발되었네 / 此日榮被專對選
백단과 유수가 어디인지 알고 있나니 / 白檀濡水知何處
사막 구름과 변방 수풀 속의행궁을 물으리 / 漠雲塞艸問行殿
그대들은 한 섬의 술을 빚어 놓으라 / 勸君多釀一斛酒
서쪽의 누런 게는 맛이 좋아 안주할 만하지 / 西屯金䱶美可饌
돌아와 다시 천하의 일을 논하면 / 歸來重論天下事
짙은 그늘에 해는 더디고 꾀꼬리소리 요란하리 / 濃陰遲日鶯百囀
[주-D001] 신유년 …… 작별하였다:
신유년은 철종 12년(1861)으로 환재 나이 55세 때에 지은 시이다. 학초서실(鶴樵書室)은 안응수(安膺壽, 1804~1871)의 서실을 가리킨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복경(福卿), 호는 학초(鶴樵)ㆍ학산(鶴山)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1831년(순조31)에 진사에 합격, 내직으로 상의원ㆍ전생서 직장, 형조 좌랑, 경모궁 영, 군자감 정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남평 현감, 영평 군수, 부평 부사, 수원 판관 등을 지냈다. 환재 외에도 옥수(玉垂) 조면호(趙冕鎬),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환재는 1861년(철종12) 음력 1월 18일에 열하 문안사(熱河問安使)의 부사(副使)로 연행을 떠났는데, 떠나기 며칠 전에 지은 시이다.
[주-D002] 삼보황도(三輔黃圖):
당대(唐代)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작자 미상의 지리서인데, 모두 6권이다. 삼보는 안사고(顔師古)의 설에 의하면 장안(長安) 이동(以東)을 지칭하는 경조(京兆), 장안 이북(以北)인 좌풍익(左馮翊), 위성(渭城) 이서(以西)인 우부풍(右扶風)을 지칭하는 말이다. 《四庫全書總目提要 卷68 史部24 地理類1》
[주-D003] 승냥이와 …… 보겠네:
당시의 위태로운 중국정세를 서술한 말이다. 중국이 1840~42년에 걸쳐 영국과 벌인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다시 1856~60년에 걸친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북경(北京)이 함락되고 황제가 열하로 몽진하였다.
[주-D004] 단문(端門)의 …… 않도다:
청나라가 망하여 궁궐문에 나아가 통곡할지 아닐지 알 수 없으나, 서양 세력에 밀려 한쪽 변방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D005] 남조 …… 비웃네:
옛날 불교가 왕성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쇠퇴하여 오히려 비웃음만 야기하듯이, 서양의 왕성한 세력도 꺾일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의미이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재위 48년 동안 종묘의 제사에 살생을 피하여 밀가루로 제물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주-D006] 말라카:
원문의 ‘마육(馬六)’은 말라카(Malacca)를 가리킨다. 한자로는 만랄가(滿剌加)ㆍ만랄(滿剌)ㆍ마육갑(麻六甲)ㆍ마랄갑(麻剌甲)ㆍ마육갑(馬六甲)ㆍ문노고(文魯古)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말레이반도의 남서부에 있어 해상 실크로드의 요로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1641년 네덜란드가 지배하였고, 1824년에는 영국이 점령해 해로를 통한 동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주-D007] 마치 …… 한다네:
서양인들이 말라카와 싱가포르에 영화서원(英華書院)과 견하서원(堅夏書院)을 세우고 《논어》와 《효경》 등 유교 경전들을 수입ㆍ번역한 것을 가리킨다. 《김명호, 환재 박규수 연구, 창비, 2008, 391~2쪽》 이로하(伊呂波)는 일본의 국문(國文) 히라가나를 가리킨다. 일본의 승려 공해(空海, 774~835)가 히라가나[平假名] 47자(字)로 이려파가(伊呂波歌)를 지었다. 히라가나는 중국의 초서(草書)에 기원하였으므로, 공해(空海) 이전에도 벌써 있었던 것인데, 이려파가(伊呂波歌)에 쓰인 자체(字體)가 후에 와서 드디어 히라가나의 본체(本體)로 정해졌다.
[주-D008] 운수가 …… 않으리:
천도(天道)가 순환하므로 음과 양이 융성하고 쇠퇴함에 따라 크고 작은 사태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의미이다.
[주-D009] 백단과 유수:
백단(白檀)은 한(漢)나라 때 설치한 현(縣)으로 열하성(熱河省) 승덕현(承德縣) 서쪽에 있다. 유수(濡水)는 하북성(河北省) 동북부를 흐르는 난하(灤河)의 옛날 이름이다.
[주-D010] 행궁:
원문의 ‘행전(行殿)’은 제왕의 행궁을 달리 이른 말이다. 여기서는 황제가 몽진한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을 가리킨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