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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여인 / 시 124:1-8, 요 4:5-26
마 12장에 보면 ‘빈 집’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빈 집이 깨끗이 청소된 것을 보고 마귀는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했다.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악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악한 세대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비워있는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밤새 술을 마신다. 어떤 사람은 밤새 춤을 춘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면 그의 마음은 더욱 허망해진다.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라는 것은 중요한 신앙적 요소이다. 계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으로 우리 마음 속을 채우기 전까지는 절대로 만족은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채운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것으로 속을 채웠다면 오리려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한다.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다. 세상의 수많은 것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과학이 발달하고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고 갈증을 내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재벌들의 모습이 이렇다. 남이 하는 장사가 잘 되는 것 같고 돈좀 벌 것 같으면 무조건 뛰어든다. 기아자동차만 보아도 그렇다. 자동차 하나로 승부를 걸어야지 건설회사도 만들었지, 쓰레기 소각하는 회사도 만들었지, 자기 자본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회사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덤볐기 때문에 부도가 나는 것이다. 삼성도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반도체에서 벌어들인 돈을 10조원 이상 수입이 없는 자동차에 퍼붓고 있다. 자동차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과잉생산되고 있는 터에 회사 하나를 더 만들었으니 문제다. 부산의 자동차 공장도 3조원이나 들어서 지었는데 지반이 자꾸 가라앉아 옮겨야 할 형편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수입이 없기에 삼성도 부도가 난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사마리아 여인도 현대인의 모습과 같다. 속은 썩어가지만 겉은 많은 것으로 치장하고, 많은 남편을 가지고 있엇지만 자신의 남편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 볼 때에 그녀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만 마음이 비어 있는 여인이었다. 사마리아는 주전 922년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리된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상당히 많은 상류층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북이스라엘로 이주시켜 혼혈정치를 하게 된다. 일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끌려가고,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개치던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이 되었고, 유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이방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모세5경만을 성서로 삼아 편집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상당히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던 지방이었다. 마 10: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에게 전도하지 말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전도하게 하셨다. 이렇듯 사마리아 여인은 천시받던 사람이었다. 또한 이 여인은 다섯명의 남편이 있었다. 복음서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과 긴 시간 동안 얘기한 여인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새롭게 변화시켰으며, 메시야를 증거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오늘 분문이 너무 길어서 생략했지만 42절까지 읽어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얘기하며, 또한 이 여인이 주는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도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여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나? 우리는 세상에서 착한 척하지만 속은 굉장히 더러울 때가 많다.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는 척하지만 없을 때가 더 많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속의 주인이 되고 삶의 주체가 되기 전까지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 예수님과 이 여인과의 대화를 보며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중요한 말씀도 하셨다.
1. 이방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이방 남자로 보았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시간이 제6시쯤 되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보면 낮 12시이다. 유대 지방은 굉장히 더운 지방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사람들은 집안에서 쉬고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낮 12시에 우물가에 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남자를 만났다.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갔는데, 유대 사람을 만난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리 사람이 자기에게 ‘물을 달라’라고 말을 걸어온다. 예수님은 지위와 신분과 혈통에 관계없이 사람을 만나셨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에 이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나? 그녀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반문했다.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말을 건네는 예수님을 본 이 여인은 상당히 놀랬다. 이 여인은 대화 자체에 의심을 가졌다. 유대 사람이 이방 여인에게 말을 건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랍비의 가르침을 보면, 길 밖에서는 자기 아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 유대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함께 걷지도 않고, 함께 얘기하지도 않는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가장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필요없다고 말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 여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치듯 한다’라는 말을 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며, 예수님을 만나야 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필요없다고 말하며,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으로 볼 때가 많다.
2.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날카롭게 이 여인의 약점을 찔렀다. 이것이 이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약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기에 가장 큰 방해 요소는 이 여인에게 다섯명의 남편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는 양심의 충격이 있어야 한다. 양심의 충격으로 인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마음 속에 충격을 주셨다. 많은 분들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예수님께로 돌아온다. 가장 아끼는 자녀를 잃어버리고 예수님께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제거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거하기 전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다.
성서를 보면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은 돈도 많고 지위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부모를 공경하고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이 법을 지키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청년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 지키고 행했다’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떠나갔다. 청년에게 재물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였다. 이 청년이 재물이 적었다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영적인 남편으로 모시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 때가 있다. 어떤 분은 다섯 남편을 이렇게 재미있게 해석하기도 한다. ‘다섯 남편이 무엇이냐 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체면)와 지식과 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다섯 가지를 좀처럼 극복하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많은 남편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섬기고 있다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께 ‘나는 남편이 없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지만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아마 이 여인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은 선지자’라고 고백한다. 이 여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을 이방사람에서 선지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현실을 통해서 미래를 예언하는 선지자가 아니다. 점쟁이처럼 남편 다섯이 있다는 것을 잘 지적하는 사람이 아니다.
3.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도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오경을 통해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도 ‘메시야가 오실 줄을 내가 안다’라고 하며, 자신의 지식적인 메시야관을 말했다. 그러나 메시야관은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을 벗어나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지식에 대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이 여인은 메시야관을 지식적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녀는 진리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었다. 우리가 머리로 또는 많은 지식으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경험이 없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메시야관의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고 성서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이 없다면 절대로 세상에 나가서 증거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세상에 나가 전할 수 있겠나? 그것은 예수 그리그도를 만나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살을 살아야 한다.
이 여인은 사람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람들이 두렵지 않았다. 내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받은 사람들의 자세이다. 사람의 눈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동네로 당당하게 들어가서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모든 더러운 것들은 다 청산되었다. 우리는 꼳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있나? 머리로 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체험하고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체험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고 있나? 아직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방 사람으로만 여기고 있나? 아니면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선지자로 보나? 아니면 체험한 메시야인가? 만일 예수님을 메시야로 체험했다면 세상에 나가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가장 부끄러운 사람이었으며 흠이 많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의 모든 과거를 깨끗이 해결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할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이방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전지자로서이 예수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