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영웅
넷플릭스에서 <약한 영웅>이라는 작품을 보았다. 4월말에 시즌 2가 공개되니까 그전에 시즌 1을 보라는 주의의 권유가 재촉으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웹툰이 원작이고 아이돌 출신 배우 박지훈이 주인공이고, 제목도 딱히 인상 깊지 않은 그 작품을 본 건 배우 홍경이 출연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약한 영웅>은 4월 25일에 공개되는 <약한 영웅 Class 2>의 프리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네이버에서 연재한 웹툰이 영상화된 것은 <약한 영웅 Class 2>이고, <약한 영웅>( <약한 영웅 Class 1>)은 그 웹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에 있었던 일을 구성한 작품인 것이다. <약한 영웅>은 공부 잘하는 범생이 연시은(박지훈)이 친구 수호(최현욱)와 범석(홍경)을 만나서 우정을 쌓고 헤어지는 과정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홍경의 연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했다. 만약 이 작품에서 홍경을 처음 만났더라도 난 단번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홍경을 처음 본 건 영화 <결백>에서였다. 주인공의 남동생 역으로 출연 분량은 짧았지만, 나는 바로 사랑에 빠졌다.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상되는 인상적인 연기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2023년에 김태리 주연의 드라마 <악귀>에서 형사로 분한 홍경을 나는 알아보지 못한 채 다시 마음을 뺏겼다. 두 캐릭터가 동일 배우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도파민이란.
홍경이 기대만큼이었다면 주인공 박지훈은 기대 이상이었고 예상 밖이었다. 전반적으로 그늘진 우울하면서도 과묵한 역을 너무나 잘 소화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약한 영웅>이 성공하고 나서 찍은 판타지 사극 로맨스에서는 연기력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혜리가 다음 작품을 말아먹은 경우와 같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약한 영웅>에서 박지훈은 진정한 주연이었고 매혹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작품 자체는 뭐랄까.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프리퀄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잘 만든 드라마였다. 프리퀄을 잘 뽑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실패한 프리퀄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드라마만 놓고 봤을 때는 말하기가 좀 조심스럽다. 폭력 사건에 얽히는 세 친구의 이야기가 영화 <친구>에서 드라마 <소년시대>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형성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난 죽 범생이었다. 폭력 성향을 가진 친구와 어울린 적이 없었다. 주위에 그런 사건에 휘말린 사람을 본 적도 없었다. 폭력을 당하지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약한 영웅>은 내게 문학예술로만 경험하는 전쟁 같은 거다. 전쟁의 참상, 민낯을 전혀 모르는 채로 그저 상상해보는 고통과 시련인 것이다.
<약한 영웅>을 보면서 내가 하는 생각이란 이런 거다. 왜 부모에게 털어놓지 않지? 왜 경찰에게 더 빨리 연락하지 않지? 왜 혼자 무모하게 저러지? 꼭 폭력이어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나? 그러면서도 나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개연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작가가 서사 안에 뭔가를 깔아 놓았기를 바라면서 거기에서 작품과 인물을 움직이는 동력을 찾으려고 애쓴다.
이해는 한다. 폭력에 폭력 아닌 다른 방법이 무소용일 때 우리는 뭘로 대처해야 할까. 공권력을 비롯해 보호막처럼 보이는 것들, 학교, 가족, 친구가 나의 위기 상황에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지 못할 때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폭력 이외에 어떤 방법으로 나와 친구를 지킬 것인가. 만약 내가 묻지마 폭력이나 왕따를 당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까. 도망치고 숨어도 안 된다면 말이다. 절벽 끝까지 몰린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이젠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영화 <친구>를 볼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나와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학창시절을 훔쳐보는 느낌. 그건 아마도 공부 천재들의 이야기였어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NPC(Non- player character)이고, 주인공 옆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평범한 학생 중 한 명인 것이다. 배경인 것이다. 배경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주인공들이 피 철철 흘려가며 싸우는 게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즉 상관이 없다.
배경의 입장은 그렇지만, 관객 혹은 독자의 입장은 또 다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싶고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퀄만 가지고는 완벽한 이해가 불가했다. <약한 영웅 2>가 나오면 봐 볼 생각이다. 주인공을 이끈 자력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관객을 충분히 납득시킬만한 핍진성이었는지 보고 싶다. <약한 영웅>의 학창시절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나 같은 범생이에 비폭력주의자는 그 폭력에 정당성이 없으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