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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共産主義), 지금은 실패한 ‘주의(主義)’로 여겨지지만 한 때는 우세한 사상으로 세계를 휩쓸었고, 다른 한쪽에 사는 우리들을 겁 먹게 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산주의도 인간의 사유(思惟)에 의해 탄생한 위대한 철학의 하나라고 철학자들은 말한다.
타이틀은 거창하지만 실은 그것은 껍데기일 뿐이다. 쉽게 갈 수도 없었고 가려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던 시절, 직업상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갔으니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것을 단편적으로 적어 볼 뿐이다.
지금이야 공산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세계 대부분 나라들는 비자 없이 혹은 비자만 받으면 자유롭게 여행할 수가 있어 어디든 갈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1980년대만 해도 구(舊)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란 것이 있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업무상 가야 하는 상사(商社) 맨이나 선박의 승무원들도 자국(自國)과 방문국의 관계에 따라 제약이 따랐다. 외국 선박에 승무하는 선원은 일종의 인력(人力) 수출이었다. 승무하는 선박은 세계 각국으로 다양하며 운항자들의 오더(Order)에 따라 어디든지 가야 한다. 선주(船主)나 운항자들은 대개 선진국들이다. 우리 정부에서 정한 공산권 국가에 기항해야 할 경우는 반드시 사전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인근 영사관에서 입항 허가를 얻고, 다녀온 후에는 일정 기간내에 입항 중의 소감이나 내용을 보고 하는 등의 규정이 있었다. 본선에서 입항허가를 얻지 못할 경우에는 선주(船主)나 맨닝회사에서 외무부 혹은 영사관에서 허가를 받아 본선에 연락해 주기도 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폐쇄적인 공산국가로서 불가리아, 큐바, 알바니아, 그리고 북한이 있었다. 승선 당시 절차에 따라 허가를 얻어 입항한 국가가 북한을 제외한 3개국과 소련연방 라트비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모잠비크였었다.
짧은 기간, 극히 일부만 경험하고 전체를 말한다는 것은 많은 우를 범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직접 현장에서 부딪치며 보고 겪은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단편적이나 남겨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게으런 사람들이 살기에는 딱 좋은 사회였다. 일반적으로 일. 일한다는 것을 영어로 표시하면 Labour와 Work가 있다. 얕은 식견으로 labour을 ‘노동’으로, work를 ‘일’로 생각하고자 한다.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자신의 사업장을 차린 주인이 휘파람을 불며 즐겨 하는 일이 ‘work’요, 마지못해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일이 labour이다.
살아가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거나 강제로 하는 일이랄 수 있는 labour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이다.
희랍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바윗덩이를 굴려 올리면 떨어지고 다시 굴려 올리면 떨어지는 그런 일을 영구히 되풀이 하는 것으로 형벌을 받고 있다. 레이버인 것이다.
프랑스의 寓話(우화)작가 라 퐁테느는 〈개미와 베짱이〉의 이솝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확대 전개시키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가 신(神)의 소환을 받고 심판을 받는데 베짱이에게는 매일같이 한 주먹의 흙만을 옮기면 먹고 살게 해주고, 개미에게는 산덩이 같은 흙더미를 영원히 옮기도록 상반된 심판을 한다. 다만 개미에게는 많이 나르면 나를수록 그에 대한 보상도 많아진다는 차이는 있었다. 일할 의욕을 북돋우는 인센티브와 발전 동기를 개미에게는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우화는 베짱이에게 레이버를 주어 고달프게 하고 개미에게는 워크를 주어 살맛나게 해준 것이 된다.
우리 옛말에도 ‘날일을 시키면 개가 전봇댄 줄 알고 오줌을 갈기고, 돈내기 주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날 일은 labor이고 돈내기는 work이다. ‘돈내기’란 ‘동나기’의 일본식 발음이란다.
왜 이 얘길 먼저 하는가 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모두가 labour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니 게으런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것이다. 시간만 떼우면 되니까.
1. 불가리아
맨처음으로 입항한 곳이 흑해(黑海 : Black sea)에 있는 불가리아였다. 생전 처음으로 가는 곳이기도 하고 처음 경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날의 일기를 보면,
「1987년 Sep/12(토) :
에에게해(Aegean Sea)를 거쳐 새벽 2시부터 S/B. 다라다날레스 해협(Dardanells Straite) 도선사(Pilot)를 승선, 흑해 입구의 마르마라해(Sea of Marmara)를 들어선다. 12:40시 다시 보스포르스 해협(Bosporus) Pilot를 바꿔 태우고 흑해(Black Sea)로 들어섰다. 동서양을 가르는, 지정학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목줄기다. 한번 쯤 튀르키에의 Istanbul을 다녀갔으면 싶다만-.
양쪽 해안에 늘어선 집과 건물들의 외관은 깨끗하고 아담하지만 직접 고개를 디밀고 보면 엉망으로 지저분함과 고민과 불의가 득실거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Pilot들의 하는 짓을 보면 더욱 그렇다.
20:40에 Burgalia의 Burgas 외항 비좁은 곳에 겨우 닻을 내린다. 쉬이 잘 끝나야 할텐데. 머리속이 텅 빈 느낌이다. 책을 읽어도 도무지 의미를 모르겠다. 이곳을 다시 뜰 때까지는 계속 될 것이지만 무엇보다 상황에 따른 순발력과 적응력을 쉬이 인정하고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의 불편이 없다는 것과 만족한다는 것은 천지 차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가듯이 마음도 자라고 변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걸 잊어버리는 데서 항시 남에게 뒤지기만 한다. 그래도 조용한 명곡이 흐르는 FM Radio가 있어 좋다. 처음 와 보는 흑해와 동구권, 약간의 긴장과 호기심이 찰랑거린다.」
흑해(黑海)! 최근 계속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지형상으로는 육지 속의 호수 같지만 분명히 바다이다. 거대한 폭풍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불가리아의 역사를 보면 1908년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으며, 1941년 아돌프 히틀러의 강요에 의해 추축국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약 34만 명의 불가리아군 전사했다고 한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에 중립국이 되었으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공산국가인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어왔다.
느닷없이 닥친 Boarding Office(입항한 선박에 오는 관리들) 6명과 국영 Agent 1명.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만 아침부터 Whisky 한 병을 앉은 자리에서 비우고 담배는 가져갔다. 알만하다.
그런데도 작업일정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명확하게 아는 자가 없다. 공산주의 체제라 전부 국영(國營)이니 자기 일 이외는 모른다는 것과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여실하다. 오히려 3-4일간은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지만 늘 움직여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일 일정을 모르는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오후 늦게 수화주(受貨主)인 큐바인 2명과 현지 직원 1명이 선창(船艙)검사차 다시 왔다. 역시 Whisky 한 병을 바닥내고 담배는 곽을 뜯어서 낱개로 주머니에 넣고 간다. 7-10일 걸리겠단다. 전 선원을 모아 다시 얘길했다. 우리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역사가 그런 것을 어쩌냐. 어디까지나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인 만큼 조심하는 것이 상수(上手)라고….
어떤 날은 해양오염(Oil Pollution Inspect)를 한다며 두 녀석이 다녀갔다. 매일 한 Team 씩 제멋대로 오간다. 내일은 또 어떤 놈이 오려나? 아마도 술(Whisky)이 생각나면 오는 모양이다. 가져가지는 못 하고 뱃속에 넣어 가는 것이다. 이런 검사나 방문이 있으면 대리점(Agent)에서 미리 본선에 알려 주는 것이 이쪽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관례이다
선원들의 상륙은 가능하지만 시·공간적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적하작업 스케쥴이며, 출항예정일, 기타 업무에 대한 정보 교환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날그날 위에서 내려온 지시 이외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차이는 있을망정 어느 정도의 권한과 재량이 있다. 그런데 이놈의 사회는 그런 것이 없다. 도대체가 모른다는 것이다. 지시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답답해서 대리점(Agenst)나 항무국(Port control)에, 그것도 무전으로 전화하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짧막한 한마디 대답뿐이다. 환장할 지경이다.
역시 한마디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도선사(Pilot)가 와서 선박을 이전(移轉:Shifting) 해야 한다고 했다. 이유도 목적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Order가 나와 있기에 자기는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또 감감 소식이 없다. 결국 자정 바로 전에 2번 부두(No.2 Quay)로 옮겨 접안했다.
‘한계’란 말이 문득 떠오르고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역시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는 말인가. 책을 봐도 글씨를 써도, 운동을 해도 진척이 없다. 마음이 정신이 풀려 버린 나사처럼 헐렁해진 탓인가? 도무지 의욕이 나질 않는다.
겨우 큐바로 가져갈 불가리아산 사과를 적하하기 시작했는데, 밤톨만한 사과, 흙덩이가 덕지덕지 묻은 상자를 들었다 놓기만 해도 부서질 엉성한 포장으로 외국에 수출이라고 한다. 1950년대 중반, 내 손으로 만들어 넣어 시장에 출하(出荷)했던 상자보다 못하다.
한 트럭 싣고는 몇 시간을 기다린다. 왜냐고 물으니 수십키로 떨어진 곳에서 와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뿐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도 가질 않는다.
만약 우리네 사회에서 이렇게 사업하다간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한다. 그러나 저들 사이의 구상무역(求償貿易)이므로 국가간의 사업이라 아무도 책임을 지질 않는다. 모두가 국가의 책임이다. 언제쯤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오후 시내를 잠시 둘러 보았다. 궁상스럽고 활기나 생동감이 없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켓이라 해서 들어갔다. 상품이 없다. 별로 쓸모없는 것들만이 더러 남아 있을 뿐이다. 죽은 사회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득바득 핏대 세우며 고함지르고 생존을 위한 오기가 곳곳에서 처절하게 벌어져도 그 번뜩이는 활기가 있는 곳이 좋다. 자유경쟁이나 자신의 독특한 능력에 의한 자기 삶의 영위 방식, 그것이 곧 인간 생활 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임을 절감한다. 그러나 마을 주위에 만든 자그만 공원의 설비나 산책길 등은 조용하면서도 깔끔하다. 연일 Radio에서 울려 나오는 감미로운 음악 역시 그렇다. 아마도 싱싱한 생존을 위한 강렬한 열망을 그러한 방법으로 달래고 어루만지며 억누르는 모양이다.
Inspector(감독자)로 왔다던 두 명의 큐바인(Cuban)들을 우연히 시내에서 만났다. “여기서 뭘하오? 배에는 오지 않고-” 우물쭈물한다. 그렇겠지. 제 것인가? 적당히 시간 보내고 제 실속 챙기다 가면 그만이지.
Agent의 Mr. Mihailow가 11시경 왔다. 그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 온 몸에 질질 흐른다. 의례적으로 얼굴만 내밀면 끝난다는 눈치다. 입으로는 온갖 소릴 지껄인다만 역시 흰소리 같다. Cuba의 하바나 대리점 주소를 받아 용선자에게 연락해 주다.
운송온도(Carring Temperature)는 선장이 직접 큐바에 Telex하란다. “뭐라꼬? 그건 너희가 할 일 아닌가?” 고개만 절래절래 흔든다. 쌍말로 뭣 같은 놈이다. 서로 연락도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역시 같은 공산주의 나라끼리의 무역이라 그런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선박만 불러들이는 것을 보면 사는 쪽이나 파는 쪽이나 피장파장이다. 결국 선박을 빌려준 일본회사만 손 안 데고 코푸는 격이다. 그들이야 시간만 가면 용선료는 챙길 수 있으니까. 그 사이에서 땀 흘리며 죽으라 재주만 넘는 것이 바로 선장인 내가 아닌가 싶다.
개인의 상업이 죽은 거리는 마치 불꺼진 항구 같다만 우거진 가로수 특히 낙엽들이 물들기 시작한 푸라타나스의 무성함은 어디가나 인상적이다.
오후부터 바람이 거세진다. 방파제를 뛰어 넘어 물보라가 휘날려 온다. 대륙으로 둘러 쌓인 Black Sea(흑해)도 역시 거대한 바다임에 틀림없다.
Burgas항 이후 두 번째 양하를 위해서 같은 발칸반도에 있는 Albania의 Durres(두러스)항으로 가랬다. 참 제기랄이다. 갈수록 태산이다. 거기서 900톤의 사과를 싣는다고 했다. 일본 용선자인 NYK에 연락, Tonichi(東日:선주)에도 알려달라고 했다. 부산의 회사나 집에서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 선원이 죽는다 해도 어느 곳인지 알고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럼에도 이곳에선 출항예정일을 아는 놈이 없다. 부득이 큐바의 ‘Cuflet Varna(기관의 전신약호)’에 직접 문의했지만 회답이 없다. 진짜라는 꿀 2병을 사다. 이곳의 유일한 특산품이랬다. 그래도 묵어야 산다는 욕망과 희망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이틀 연속 직접 Agent 사무실에 갔다. 설렁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담당자인 Mr. Mihailov 녀석은 코끝도 안 보인다만 Telex는 순조롭게 잘 간다. 출항예정일이 26-27일로 거의 정해져 가는 모양이다. 다음 기항지인 알바니아 국기(國旗)와 해도(海圖)를 신청하니, 여기서는 불가능하니 터키의 Istanbul Agent와 직접 연락하여 보스포르스(Bosporus)을 통과할 때 받아란다. 허허허. 참 기막힌 곳이다. 그래도 Agent Charge는 모두 받아 챙길 것 아닌가. 물론 그게 개인이나 회사의 수입이 아니고 국가의 몫이긴 해도-. 넉살좋게 걱정 말라며 잘난 척 얘기하지만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다.
출항 전날은 오후부터 갈팡질팡이었다. 화물이 있다 없다, 출항이 오늘이다 내일이다 통 종잡을 수가 없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당장 밤중에 떠나란다. 설마를 믿지 않고 선원들의 상륙을 금지하고 잡아 둔 것이 천만다행. 자정(子正)에 출항했다. 우선 속부터 시원하다.
아침나절에 Bosporus 해협을, 오후에 Daradanills 해협을 항과했다. 도중에 방선한 터키 Agent에게 해도와 알바니아 국기(國旗)는 받았으나 필요한 약은 끝내 받지 못했다.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출항시 왔던 4명의 관리들이 끝내 질질 끌더니 담배만 가져간다. 그러면서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히려 목에 힘을 주며 당연한 일처럼 구는 꼴이 더욱 가증스럽다만 없으니 도리없지 않은가. 구부득고(求不得苦)일 것이다. 내가 이해하자.
Albania는 또 어떨는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의 하나라고 알고 있다. 온통 먼지와 때가 온 배에 덕지덕지 묻었다. 내일쯤 확 씻어 내자. 특수지역이고 나발이고 이래서야 될 일이 아니다. 치솟는 분노와 모멸감, 알 수 없는 것들이 심원(心源)에서 생겨나는 듯하다.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