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9년 선전포고
- 1359.02.22 홍건적이 우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백성들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들어가 있던 것을 통탄하여 우리들은 의(義)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켜 중원(中原)을 회복한 후, 동쪽으로는 제(齊)와 노(魯)를 넘고 서쪽으로는 함진(函秦)에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민광(閩廣)을 지나고 북쪽으로는 유연(幽燕)까지 이르니, 마치 굶주린 자가 산해진미를 얻고 병든 자가 좋은 약을 만난 것과 같이 모두 기뻐 귀부해 왔다. 이제 장수들에게 사졸을 엄중히 타일러 민(民)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했으니, 귀순한 민들은 어루만질 것이며 어리석게도 반항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359년 제1차 홍건적 침입
- 1359.11.29 홍건적 3,00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는데도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이 이를 감추어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호부시랑 정지상을 보내어 호되게 질책했으나 처벌하지는 않았다.
-1359.11.30 경천흥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안우를 그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였다.
- 1359.12.08 홍건적 괴수로 평장(平章)을 사칭한 모거경이 군사를 40,000명이라고 떠벌이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함락시킨 후 부사(副使) 주영세와 의주의 민(民)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 1359.12.09 홍건적이 정주(靜州)를 함락시키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을 살해한 후 마침내 인주(麟州)까지 함락하였다.
- 1359.12.11 홍건적이 철주(鐵州)로 들어와 안우·이방실 등이 격퇴하자 적들은 인주(麟州)·정주(靜州) 등지로 퇴각하여 진을 쳤다.
- 1359.12.16 청강에서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정주(定州)로 물러나 진을 쳤다. 안우가 그를 청강(淸江)에서 만나 힘껏 싸워서 물리쳤으므로, 안우에게 금대를 하사하였다.
경천흥은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까지 가서 주둔하였으나,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법으로 논하고자 하니, 홍언박이 말하기를, “경천흥은 공정하고 청렴하며 근신하고 독실하지만 장수로서의 지략은 없으니, 이는 그를 등용한 자의 잘못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의 노여움이 풀어졌다.
- 1359.12.28 적에게 서경(평양)이 함락되었다.
1360년 서경 탈환과 격퇴
- 1360.01.11 판사 김진이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와 보고하기를, “홍건적이 서경에 들어오자 제가 몰래 의주(義州)·정주(靜州) 등지로 가서 부근 현(縣)에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적들이 남겨둔 보병 150명을 죽이고 비축해둔 곡식을 빼앗는 한편,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굳게 뭉쳐 의주를 지켰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가상히 여겨 그에게 형부상서를 제수하였다.
- 1360.01.15 형부상서 김진과 환관김현이 기병 수백 기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사잇길을 따라 가서 서경에서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 300여 인을 만나서 죽기로 싸워서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 1360.01.16 상장군 이방실이 철화(鐵化)에서 홍건적과 마주쳐 100여명을 죽였다.
- 1360.01.18 여러 군(軍)이 생양역(生陽驛)에 기다리는데 총 20,000인이었고, 마침 혹한이 닥쳐 손발이 동상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군사가 매우 많았다. 홍건적이 우리 군이 장차 진격할 것을 알고는 포로로 잡은 의주·정주 및 서경 사람들을 죽이니 10,000명을 헤아렸고 쌓인 시체가 언덕을 이룰 지경이었다.
- 1360.01.19 서경탈환: 아군이 서경으로 진격하자 먼저 진입한 보병 가운데 밟혀 죽은 자가 1,000명이 넘었고 홍건적의 전사자도 수천 명을 헤아렸다. 이에 적들은 용강(龍岡)·함종(咸從)으로 퇴각하여 진을 쳤다.
- 1360.01.29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로, 이방실을 상만호(上萬戶)로, 김어진을 부만호(副萬戶)로 임명하였다. (전장의 범위가 줄어들었음을 읨한다)
- 1360.02.02 함종전투: 함종으로 진격한 안우 등이 홍건적과 싸웠으나 유리함을 잃었다.
-1360.02.04 적 400여 명이 숙주(肅州)의 산골짜기에 주둔하고 있다가 그 무리가 서경에서 패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가서 의주로 나아갔다. 중랑장 유당과 낭장 김경이 의주에 있으면서 성문을 수축하다가 적이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주천호(義州千戶) 장륜(張倫)을 불러 용주(龍州) 등 지역의 군대를 내어서 적을 맞이하여 공격하였다. 적이 정주(靜州) 성에 입보(入保)하니, 유당 등이 진군하여 공격하여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 1360.02.15 아군이 다시 함종(咸從)에서 싸웠는데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와 장군 이견(李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0,000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인 심자·황지선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홍건적 10,000여 명이 증산현(甑山縣)으로 퇴각하여 수비하였다.
- 1360.02.16 안우·이방실 등이 옛 선주(宣州)까지 추격하여 수백 급을 베었지만, 나머지 적 300여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제1차 고려-홍건적 전쟁 마무리
- 1360.03 .01 경천흥(慶千興)·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가 전(箋)을 올려 승첩을 보고하였다.
- 1360.03.25 이승경에게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을, 경천흥에게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을 하사했으며, 안우(安祐)에게 추충절의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推忠節義定亂功臣 中書平章政事)을, 김득배에게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輸忠保節定遠功臣 政堂文學)을, 이방실에게 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推誠協輔功臣 樞密院副使)를 내려주었다.
- 1360.03.28 황지선(黃志善)을 참형에 처한 후 호부상서(戶部尙書) 주사충(朱思忠)을 원에 보내 홍건적을 평정한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요양(遼陽)에 이르러 길이 막혀 돌아왔다.
- 1360.04.27 홍건적 토벌군을 위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요약:
- 전쟁이 터지자 그 다음날 경천홍은 서북면 원수, 안우는 서북면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전쟁을 위한 발령으로 보인다.
- 서경 탈환 후에는 안우는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 이방실은 상만호, 김어진은 부만호 임명되었다. 전쟁 후 서북면 최전방 전투를 담당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 제1차 고려-홍건적 전쟁으로 안우와 이방실은 사실상의 고려 최고의 대장군이 되었다.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 절요 고려시대 사료 DB (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