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괴테-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달빛
휘영청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저 멀리 길에서 뽀얀 먼지 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아득할 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졌어도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나를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괴테는 사춘기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만났다. 베르테르가 롯데를 사랑하다 결국 이루지 못하자 자살하는... 그 아픔과 슬픔에 동참했던 감수성 예민했던 그
시절이 떠 오른다. 오늘날까지도 '베르테르'의 영향을 받고 세상과 이별하는 아픔들이 이어지고 있지 않는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빌레머와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의 현장을 확인했다. 베츨라로 이동하여 괴테 거리와 기념관 방문후 프랑크푸르트로 귀환하여 괴테 생가에 도착했다.
괴테는 아름다운 사랑시를 많이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라는 시를 음미 해본다.
괴테에 대해서 요약한 백과사전을 인용해 보자.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에서 태어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북독일계 아버지로부터는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를, 남독일계의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 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 오시안 , 셰익스피어 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중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1775년 바이마르 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는 대표적인 교양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에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 색채론 ](1810),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 이탈리아 기행
』(1829) 등을 완성했다.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 파우스트 ]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가 태어나 자라고 작품을 탐생 시킨 괴테 하우스는 4층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 저택이다. 철저한 감시와
감독이 이루어진다. 사진촬영은 절대 금물이다. 괴테 하우스에 도착하여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1층 로비에서 보이는 밖의 정원이 아름답게 드러난다.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다. 괴테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세게
정신사적 큰 족적을 남기고 파우스트라는 불멸의 작품을 선사한 괴테.. 그의 전부적 예술성 앞에서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2층에는 희귀한
피아노가 있었다. 음악의 방 그리고 살롱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천문시계가 걸려 있다.
괴테 가족은 합주를 할
정도로 음악적 기능이 출중했다고 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작품을 사들였고 전시도 했다고 한다.
3층에는 괴태가 태어난 방과 여동생방,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괴테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황실 고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예술적
감수성이 변호사로 머물게 놔두지를 않았다.
특히 부모님들의 예술적 심미안도 만만치 않아 그런 예술적 분위기에서 자란 괴테는 주체할
길 없는 문학적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
4층에는 젊은비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1편을 썼던
작품실이었다. 서서 집필할 정도로 높은 책상은 세상을 감동 시키도록 밑받침을 한 영원한 사랑의 책상이다.이곳에서 괴테의 상상과 집필 등 수많은
문학작품이 만들어진 산실이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이 번 괴테를 방문하며 옛날에 읽은 파우스트를 다시 읽어 보았다. 파우스트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24살에 시작하여 82세가 될때까지
60여년간을 쓴 책이다. 그의 사상과 지식, 지헤등이 총 망라된 그의 인생 자체라고 해야 할까? 괴테는 파우스트고 파우스트는 괴테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파우스트라는 역작은 괴테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개의 방이 존재하는 저택엔 유명 인사들이 들 끌었을
것이다. 천재적 머리를 가진 괴테는 다재다능 했다. 각국의 언어 역사, 정치, 경제, 문학, 신학, 철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추었고 승마,
무용, 미술, 무술에도 흥미를 가졌다고 하니 그 다재다능한 열정의 소유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야 말로 세상을 감동 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한 열정과 감수성이 수많은 여성 편력을 낳았고,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 시켰다. 그가 사랑했던 몇 사람의 여인들을 살펴보자. 괴테의 나이
22-23세대에 '젊은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샤를롯데 부프, 26세때 만난 릴리 쇠네만, 26세에서 39세까지 가장 오랜 사랑을 주고 받은
샤를 롯데 폰 슈타인 부인, 39세때부터 18년 동안 동거후 정식 결혼한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 65세 때에 만난 당시 30세였던 마리안네
빌레머, 괴테 71세때 만난 당시 17세였던 올리버 폰 레베초프, 레베초프와의 사랑을 '마지막 사랑'이라 부른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고통을 '마리엔 바트 비가'에서 이렇게 절규 했다.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
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 /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 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 /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울리케 폰 레베초프는 레벤초 부인의 첫째 딸이었다. 괴테는 이 17세 소녀에게 반한다.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다 결국 청혼을 한다. 레베초프는
고민을 하다 거절한다. 괴테는 절망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 시킨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은
높이 살만하다.
세속적으로 보면 지탄할 만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괴테를 통해서 만나는 사랑의 감정은 결코 유치 하거나 치졸하지
않다. 경박하거나 속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순진무구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기 때문이리라.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는 감정이입이다. 괴테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모든 사랑을 작품으로 승화 시켜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울리케 가족은 괴테를 피해 이사를 간다. 괴테는 그곳을 찾아가 구애를 하지만 울리케는 마지막 작별 키스로
대신하고 이들의 사랑은 막을 내린다. 그 아픔을 한 줄 한줄 써서 탄생시킨 것이 '마리안 바트 비가'다.
이별은 아프지만 새롭게
태어나 승화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영원하다.
'순간이여, 영웒라'라는 파우스트의 외침이 절절히 파고든다. 괴테.. 그는 '좀 더
빛을...' 이 마지막 말을 남긴채 가장 사랑했던 실러 곁에 잠들었지만, 영원히 살아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