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인 금요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어' 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고 있습니다. 그 날개는 우리의 삶 자체를, 이 불안정한 지구가 매달려 있는 광활한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깊은 내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만들어 줍니다. 만약 아이작 뉴턴이 '는 모르겠어'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사과가 그의 눈 앞에서 우박같이 쏟아져도 그저 몸을 굽혀 열심히 주워서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중략)
시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 를 되풀이 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 합니다. 이 작품 또한 일시적인 답변에 불과하며,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통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 번 더' , 또 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동안 쓴 작품' 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 <비스와바 쉼브르카> 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의 한 부분이다.
나는 이제야 이 위대한 시인의 이름을 알았다. 그동안 읽었던 어떠한 시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동적이었다. 극내에 나와 있는 그녀의 시집을 모조리 입수했다. 그래서 시선집 <끝과시작> 을 펼쳤다.
처음 작품부터 나의 고민과 슬픔을 느끼고 동감했다. 그래서 아주 두꺼운 시집을 차근차근 읽었다. 모든 시를 베끼며 읽으면 좋을 듯 했다. 사용하는언어가 소박하고 다채롭고 생각의 흐름이 파격적인 점이 압권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이 시인은 80이 넘도록 꾸준히 시를 썼으나 12권 정도만 시집을 냈다. 아주 정제된 시를 빚어내느라 땀흘린 결과다.
다음은 옮긴이의 시 해설이다.
쉼보르스카의시에는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전복적' 인 시선이 담겨져 있다. 그 뒤틀린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들은 왜곡된 형태로 포장된 현대인의 고독한 숙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좀처럼 시의 소재가 될 것 같지 않은 파격적인 상상들을 끌어모아 한 편의 낯설고도 새로운 작품을 빚어내다.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에 의해 규정지어진 정체성과 사실성이야말로허위와 환상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시인은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시선과 혀를 찌르는 날카로운 풍자를 동원하여 이성과 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삶의 단면을 조목조목 드러내 보이고 있다. 진실의 사각지대에서 현실을 응시하는 시인의 독특한 관점은 개인과 거대한 집단 사이의 괴리감, 각자의 욕망 추구에 따른 인간관계의 고독을 개탄하면서 동시에 정형화된 규범이나 완벽싼 틀에 얽매이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님을 강조한다.
* 내가 꼭 베겨 놓고 싶은 시를 적어 보있다.
* 121 쪽
쓰는 즐거움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투사자처럼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를 들었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아래서 귀를 종긋거리고 있다.
"고요" ㅡ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 이라는 낱알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 놓는다
혹시 잘못 연결될 수도 있는 글자들이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다.
겹겹이 포위된 문장들은
구조를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의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노루를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서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짖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이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고리를 동여매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 198쪽
경이로움
무엇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사람인 걹까요?
다른 이가 아닌 오직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닌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수없이 오랜 세월 존재조차 없다가 왜 갑자기?
모든 시간과 지평선을 뛰어넘어 왜 하필?
어째서 해조류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닌 걸까요?
무엇 때문에 지금일까요? 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와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와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치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읖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강아지처럼.
*250 쪽
양파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 이란껍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깝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아수라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
하지만 영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의 알몸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아무리 깊숙이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커플, 또 한 커플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도 양파, 네번째도 양파.
차례차려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求心性)의 푸카
메아리는 화성(和聲)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러운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겨ㆍ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영파가 가진 저 완절무결한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 379 쪽
가장 이상한 세 단어
내가 "미래" 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 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 (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신재하는 그 무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