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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20장22~34절
제목 : 공의와 맞바꾼 협상
벤하닷은 교만하여 패배하였습니다.
선지자가 아합에게 조언하신 대로 이듬해 벤하닷은 2차 출격을 강행했고,
수적 열세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또 승리를 주십니다.
하지만 아합은 자만하여 벤하닷의 항복과 화해 의사를 손쉽게 수용합니다.
1. 이스라엘 왕에게 조언(22절)
“[22]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
1)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22a절)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準備)하소서”
아합에게 내린 선지자의 예언처럼 싸움을 준비하고 훈련된 자만이,
다가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일회적 승리는 있을지언정 계속된 승리의 보장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무장할 때(엡6:10-13;벧전5:9)
연승이 약속될 것입니다.
*엡6:10~13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따라서 아합은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여호와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을 예비해야만 했었습니다.
2)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22b절).
해가 바뀌면.('테슈바트하솨나')는 '해 의 되돌아감'(the return of the year)이란 뜻으로 '명년 봄'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테쿠파트하솨나'가 있는데 이는 '해의 회전'(the turning of the year)이란 뜻으로 '명년가을'을 의미합니다.
한편 근동 지방의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므로 전쟁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침공은 대개 건기(乾期)인 여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는 수치에 절치 부심(切齒腐心)한 벤하닷은 해가 바뀌자마자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2. 아람 왕에게 조언(23~25절)
1)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평지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23절).
“[23]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 고대의 다신론적 관념에 따르면 한 신은 보통 한 지역 또는 한 기능을 맡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아람인들 눈에 산신(山神)으로 비치었습니다.
한편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처럼 산의 신이라 믿은 데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왕정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
가나안 주민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철병거와 마병을 소유한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이 잡은 거점은 팔레스틴의 여러 산악 지대입니다.
즉 그러한 장소에서는 가나안의 우수한 병기들이 크게 효력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삿 4:1-16).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악 지대에서 물을 찾아내고 거기서 거주하는 적응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점이 곧 주변 부족 및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전투에서 호되게 패한바 있는 아람 왕의 신복들은, 가장 큰 패인(敗因)을 어떤 이적적 신통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23절).
또한 그러한 미신적 배경 외에 객관적 전략 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우세하리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지에서는 기습 공격이 쉽사리 먹혀들지 않으며 더구나 아람군은 기병들과 전차병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 25절).
2) 왕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십시오(24절)
“[24] 또 왕은 이 일을 행하실지니 곧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왕들을 제하여 각각 그 곳에서 떠나게 하고. - '제하여 떠나게 하고'에 해당하는 '하세르'는 '돌이키다', '떠나다'는 뜻인 '수르'에서 온 말입니다.
여기서는 32왕들(1절)이 아람 연합군 내에서 맡았던 임무를 해제하도록 권고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즉 벤하닷의 신복들은 나름대로 이전의 패인(敗因)을 분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들의 지휘 체계에 구멍이 났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왕들은 엇갈린 이해관계 때문에 성의 있게 전투에 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반 접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밀리자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대로 퇴각하기 바빴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벤하닷의 신복들은 이번에는 그런 결함을 제거하고 전쟁에 임하자고 건의한 것입니다.
그들 대신에 총독들을 두시고. - 비록 아람 소국(小國)의 32왕들이 명색상 군통솔 자들이었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전투 지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벤하닷의 신복들은 벤하닷에게 그들 대신 실제 작전에 능한 군대 장관들로 병력을 통솔하도록 주청(奏請)한 것입니다.
3) 잃어버린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소서(25절).
“[25] 또 왕의 잃어버린 군대와 같은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말은 말대로, 병거는 병거대로 보충하고 우리가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하리이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리하니라”
군대를 왕을 위하여 보충하고. -혹자는 앞서 벤하닷의 신복들이 32왕들을 연합군에서 배제하자 한 것(24절)은 곧 지원군들의 철수를 주장한 것이라고 풀이합니다(Bahr).
그러나 본절은 군대를 이전 규모로 복원할 것을 건의하는 말입니다.
특히 여기서 '보충하고'(티메네)는 '수를 세다'는 뜻인'마나'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정확히 이전에 유지했던 군대의 숫자만큼 보충하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각 왕들의 휘하 부대를 제외하고 단지 벤하닷의 다메섹군 만으로 그만치의 군대를 보유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24절에서 벤하닷 신복들의 건의는 다만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32왕들만 실제적으로 유능한 총독들로 교체하자는 뜻이었음이 분명 해집니다.
그 말을 듣고 그리 하니라.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당혹감, 의지할 곳 없는 자의 외로옴....이러한 자들이 선택하여야 할 길은 겉만 번지르르한 사망(死亡)의 길입니다(잠 2:18;시 1:6).
*잠2:18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인간의 생각에 일견 번쩍이는 섬광 같은 지혜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따를 순 없습니다.
3. 선지자의 예언대로 승리하는 이스라엘(26~30절)
1)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합니다(26절).
“[26]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해가 바뀌니. – 즉 '명년 봄이 되매' 22절 주석 참조.
사람을 소집하고. -전쟁에 나갈만한 성인 남자의 수를 센다는 뜻으로 곧 병력 소집을 의미합니다.
아벡(Aphek) 또는 아빅(Aphik)의 뜻은 '샘터', '강바닥', '요새'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같은 지명이지만 서로 다른 곳이 몇 군데 나오니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수 13:4;삿1:31;삼상4:1;왕하 13:17),
그 중에서 본 절의 아벡은 트랜스 요르단 북부 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 다메섹과 벧산 또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연결하는 도로상에 위치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 진영을 칩니다(27절).
“[27]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때는 염소 떼와 같으나 영안으로 보면 만군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아람 군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이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고 합니다(28절).
“[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 원문에는 이 단어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13,22절에 나오는 선지자와 동일인인 것으로 사료(思料)됩니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사항이긴 하나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일개 지역신으로 간주한 아람 인들의 처사는 여호와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독신(瀆神) 행위입니다. 23절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벡 평지에서의 전투를 통해, 아랍인들의 편협하고 우매한 생각을 무너뜨림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듯 허탄한 이교 사상에 물들지 않도록 미연에 조치를 강구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 중에도 기독교의 생성 배경을 이스라엘 역사의 발전 과정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원래 여호와는 씨족 신 내지는 부족 신이었으나 가나안 정착 이후로는 주로 국가 신으로 받들어졌으며, 그 후 예수에 의해 문자 그대로 온 인류의 신으로 발전 소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얄팍한 인지(人智)에 근거한 추측으로서,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온 인류와 우주의 역사틀 꿰뚫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의심한데서 기인한 것입니다(엡1:4).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4) 칠일간 대치하다가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아람 보병 10만명이 죽습니다(29절).
“[29]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접전하다'('카라브')는 '전투에 들어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두 군대가 막바로 접전하지 않고 왜 하필 7일째 되어서야 비로소 전투를 개시하였을까?
한번 패배한 적이 있는 아람군(16-21절)이 신중한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라든지(hammond).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스라엘인들의 관념 때문이라든지(bahr)하는 주장들도 물론 일면의 통찰을 제공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개입(28절)에 의한 승리라는 점에서
여리고의 승리와 아벡의 승리가 갖는 유사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여호수아 당시 여리고 성읍도 제 7일째에 함락되었습니다(수6:1-21).
십만을 죽이매. - 여기서 '죽이다'로 번역된 '나카'는 '치다','격파하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8만 대군을 모두 죽였다는 뜻이기 보다는 그들을 격파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절에서 남은 자 27,000명이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30절).
5)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남은 자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30절).
“[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 이처럼 아백 성이 무너진 현상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습니다.
즉 지진이라든가 이스라엘군의 작업에 의한 결과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상세한 방식을 본문이 알리지 않는 한, 집요하게 추측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정작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이 여호와를 무소 부재하신 분으로 선포하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즉 인위적인 수단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이 붕괴된 일은 명백히 여리고 성의 전례에 비교 됩니다(수 6:20).
*수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리고 두 사건의 유사성에서 아벡 성의 붕괴는 여리고 성의 붕괴를 일으킨 같은 주체, 즉 하나님에 의한 결과라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실 평지에 위치한 아벡 성의 붕괴는 여호와가 산의 신만이 아님을 명백히 알리는 사건입니다(23, 28절).
벤하닷은...골방으로 들어가니라. - 본절의 '골방'(헤데르 베헤데르)은
'가장 깊숙한 내실'을 의미하는 '헤데르'가 두번 거듭된 말입니다.
즉 이는 '골방 중의 골방'이란 뜻입니다.
사실 대개의 성은 유사시에 대비해 은밀히 숨을 곳이 만들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벤하닷이 피신한 곳도 아벡 성내의 바로 그와 같은 장소입니다.
4. 하나님의 공의와 무관한 화해 협상(31~34절)
1) 아람 왕의 신하들이 그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왕의 생명을 살리리라 합나디(31절)
“[3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 여기서 이스라엘의 왕정(王政)이 당시 고대 근동의 주변 국가들에게 어떻게 비쳤었는지 그 일면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즉 대개의 주변 국가들에 비해 이스라엘의 왕정은 덜 포학하고 덜 전체적인 것으로 비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이스라엘 왕정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출발한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애굽 왕권의 포학성을 익히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역사적 요구에 따라 왕정 시대를 개막하긴 했으되, 율법으로써 왕권에 상당한 제동을 가하였던 것입니다(신 17:14-20).
그러므로 비록 자체의 기준(즉 율법)으로 볼 때는 열왕의 성향은 대체로 타락한 것이지만, 주변 국가들의 눈에는 상당히 어질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 이러한 행동은 죄인이 용서를 빌거나 또는 상대방에게 복을 표할 때 취하던 고대의 관습적 자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굵은 베는 '참회'의 표시이며 테두리(rope)는 '굴복'의 표시입니다(Bahr).
2)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러 벤하닷이 청하기를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32절).
“[32]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왕의 종 벤하닷. - 여기서 '왕의 종'이란 말은 신하의 입장을 자청하는 굴복의 표시입니다.
앞서 4절에서 '내 주 왕이여'라는 굴욕적 표현을 써야 했던 인물은 이스라엘 왕 아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본절에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처지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역전은 벤하닷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28-30절).
내 생명을 샅려 주옵소서. - 이처럼 비참한 벤하닷의 간구는 한때 기세 등등했던 그의 오만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6, 10절).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어 티끌 속에 묻어 버리시며(욥 40:11-13) 자신의 힘을 믿고 악한 계교와 횡포를 일삼는 무리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올무에 빠져 들게 만드십니다(시 141:9, 10).
*욥40:11~13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12]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13]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시141:9,10 “[9]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10]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그는 내 형제이니라. - 여기서 '형제'란 말은 이웃 나라끼리 사용하는 공식적 외교 용어일 경우, '동맹국'또는 '동맹국의 수반(首班)'을 가리킵니다.
본절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의미인데 이는 아합의 경솔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한 자입니다. 28절 주석 참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벤하닷을 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42절).
그런데도 아합이 벤하닷을 가리켜 '나의 형제'라 아였으니 이는 크나큰 실책인 것입니다.
3) 벤하닷이 아합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립니다(33절).
“[33] 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징조(徵兆)로 여기고. – 이에 해당하는 '열심히 관찰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때 이 말은 곧 어떤 결과를 판단해 내기 위해 열심히 동정을 살펴보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본절은 항복 소식을 전하러 온 벤하닷의 신복들이 과연 벤하닷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 열심히 살피는 교활한 눈매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얼른 받아 대답하여. - 벤하닷의 신복들은 아합 왕이 자신이 뱉은 말을 철회할 수 없게끔 얼른 그 말을 받아 되풀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아합으로서는 설령 자신의 말을 철회할 마음이 생기더라도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왕기 기자로부터 역대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는 아합은 줏대 없음과 함쩨(19:1) 이처럼 경솔한 면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 이처럼 아합이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태워 자세를 나란히 한 것은 곧 그와의 동반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또한 이스라엘 영토를 침략한 벤하닷에게 아합은 마치 동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32절 주석 참조.
그런데 아합의 이처럼 애매한 처신은 곧 아합 통치의 성격을 은연 중 드러내보여 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아합의 통치는 외국과의 교류와 경제에 의존하는 기반위에 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아합이 속한 오므라 왕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하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합이 이방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인 점(16:31)이나,
우상 숭배를 자행(恣行)한 점(16:32, 33),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경시한 점 등은
모두 이스라엘의 민족적 입장에 대치되는 처사들이었습니다.
즉 그 모든 행위들은 피아(彼我)를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이 지금 벤하닷을 자신의 병거에 함께 태우고 있음 역시 그 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 주고 있는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한편 아합의 이러한 처사를 다른 각도에서 살핀다면, 그는 아람 같은 강국(强國)과 적대하기를 피하고 싶었는지 도 모릅니다.
4) 아합은 벤하닷과 새로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아 줍니다(34절)
“[34] 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 - 혹자는 이 말을 15:20-22에 기록된 내용과 동일시하면서, 벤하닷이 바아사(Baasha, B. C. 909-886)를 아합의 부친으로 착각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Hammond).
그러나 이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아합의 부친 오므리(Omri, B.C. 885-874)는 당시 주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왕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이스라엘과 때로는 친선, 때로는 적대 관계를 맺어 온 아람국들이 바하사와 오므리를 구별 못할 리 만무합니다.
더군다나 사마리아 성읍은 바아사 당시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가 건축된 때는 오므리 시대입니다(16:24).
또한 우리는 열왕기가 왕정 시대의 모든 사건을 수록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전쟁이 벤하닷 1세와 오므리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절에서 말하는 '거리' (후초트)를 도시의 특정 지역에 세워진 무역 시장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전까지는 사마리아에만 아람의 무역시장이 있어 아람인들 만이 일방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다메섹에 '거리'를 만들도록 한다는 조치가 항복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 거기서 올릴 수 있는 수입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 이처럼 아합이 몇몇 성읍의 반환과 무역 이익을 보장 받고선 벤하닷을 살려준 조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가들에겐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분명 아합의 처사가 눈앞의 조그마한 경제적 이익과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맞바꾼 불순한 결정으로 보였을 것입니다(42절).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신뢰하는 것이 승리의 조건입니다.
살 길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 일견 번쩍이는 섬광 같은 지혜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따를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 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아합 왕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야망에 눈이 멀어 아람 왕과 타협하였습니다.
사사로운 찬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 눈앞의 대적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온전하며 행복합니다.
오늘도 전신갑주를 입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하루 되시 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다시 선지자를 보내 적의 반격에 준비하게 하십니다(22,26~28절).
해가 바뀌어 봄이 되자 벤하닷은 2차 출격에 나섭니다.
아벡에 포진한 아람 군대에 비해,
이스라엘군대는 염소 두 떼에 비할 만큼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수적 우위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신뢰하는 것이 승리의 조건입니다.
아무리 많은 승리를 거둬도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치명적인 패배일 뿐입니다.
나와 교회, 이 민족의 생존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살 길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임을 믿습니까?
2) 아람 군대의 예상을 깨고 평지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셔서 그들의 거만하고 그릇된 신관을 깨뜨리십니다(28~30절).
산지와 평지는 물론 천지와 열방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재”임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승리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요, 목적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람 왕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니 평지에서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조언하며 병력 보충을 제안합니다(23~25절).
설득력 있는 추론일지 모르나 하나님을 모르는 오만한 착각이요, 헛된 전략일 뿐입니다.
이전엔 이스라엘 군대를 무시하더니,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아무리 전열을 갖추고 전략을 세우고 전략을 키워도 하나님을 오해하면 반드시 패하고 맙니다.
교회가 수세에 몰리는 것도 세상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하고 불신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2) 전쟁에서 패한 벤하닷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인 채 아합에게 나아가 목숨을 구걸하자, 아합은 그의 솔깃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살려 줍니다(30~34절).
승자의 아량이나 실리적인 외교 역량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승리감에 도취되고 야망에 눈멀어 아람 왕과 타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임을 기억한다면,
결코 자신을 과시하거나 사사로운 찬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내 눈앞의 대적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있는 ‘자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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