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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제목 : 사랑이 없으면
사도바울은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습니다.
즉 은사를 활용하는 방법을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를 가장 잘 활용하여 유익을 주는 사람은
바로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본장에서는 ①사랑의 필요성 ②사랑의 특성 ③사랑의 영원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사랑의 필요성(1~3절)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던 네가지 은사 (방언, 예언,믿음,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란 말이 세번이나 반복되는데 이는 사랑이 아니면 어떤 귀한 은사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왜 필요한 가를 살펴보면
1) 사랑이 있어야 말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1절).
“[1]내가 사람의 방언(方言)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유창하게 천사처럼 말을 할 수 있어도 사랑이 없는 말은 빈 말이요 공허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책망하는 말과
미워서 책망하는 말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그 말이 생명이 있고, 말이 힘이 있는 것이므로,
말에 있어 분명한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언도 기적적인 믿음도 소용이 없습니다(2절).
“[2]내가 예언(豫言)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을 받아서 비밀 된 일을 예언할 수 있어도 또한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意義)를 성립시킵니다.
3) 희생적인 모든 수고와 구제(救濟)도 헛되게 됩니다(3a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를 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남을 도와주는데 있어서도 사랑이 없이 그냥 돕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해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접한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하여 주님은 반드시 상(償)을 잊지 않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구제 그것은 자기 이름을 들어내는 것이요, 그 구제를 통하여 더 큰 유익을 얻고자 하는 상술에 지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4)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3b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할 찌라도 참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되지 못할 때는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없으면 말도 헛되고, 예언도, 믿음도, 구제도, 희생도 다 헛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있게 됩니다.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일지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 줄 아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名譽)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 합니다.
그 행하는 일이 선(善)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합니다.
2. 사랑의 특성(4~7절)
본문은 사랑의 특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정적 특성]-아니하며 8
➀ 시기하지 아니하며 ② 자랑하지 아니하며
③ 교만하지 아니하며 ④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⑥ 성내지 아니하며
⑦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⑧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긍정적 특성] - 7
➀ 오래참고, ② 온유하며, ③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④ 모든 것을 참으며, ⑤ 모든 것을 믿으며, ⑥ 모든 것을 바라며
⑦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 사랑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하니합니다(4절)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긍적적 특성.
이 두 가지 덕행은, 공격(攻擊)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여도 보복(報復)하지 않음입니다.
Ⓐ"오래 참고"란 화를 내는 데서 멀리함을 이름이니,
곧, 격동성(激動性)있는 감정을 피함입니다. 그리고
Ⓑ"온유하며"란 말은 친절을 베풀기로 준비된 태도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이 두 가지 덕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➀ 사랑은 수고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아 8:6,7),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을 생각하여 어려움을 참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② 사랑은 소망을 내포(內包)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망(贖罪的 死亡)은 그의 재림을 성립시켰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는 장차 두 번째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려 모든 난관을 참게 됩니다.
약 5:7,8에 말하기를,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였습니다.
(2) 시기(猜忌)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驕慢)하지 아니하며 -부정적 특성.
여기 기록된 세 가지 말씀도 서로 연락(連絡)있는 한 뭉치입니다. 이 셋은,
➀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경쟁(競爭)하는 심리로 범하는 죄를 범치 않음이고, ② 명예주의(名譽主義)를 가지지 않음입니다.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경하는 것은 옳으나(빌 2:3),
나보다 우월하다고 섭섭히 여김은 투기(시기)입니다.
의(義)와 선이 결핍(缺乏)한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한 의(義)와 선을 남이 가졌다면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것은 기쁜 일이지 섭섭한 일은 아닙니다.
남에게 있는 의(義)와 선도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救贖運動)
곧, 사랑에서 생겼을 것이니,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움직임 입니다.
시기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죄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는 독립인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기독자의 별명은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고, 그는 독생자의 속죄 희생(贖罪犧牲)을 받음에 따라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요일 4:9-11).
Ⓒ"교만치 아니하며".
"교만(驕慢)"은 스스로 높아진 심리입니다.
사람이 일단 스스로 높아지면 낮아지는 처세를 못합니다.
그가 겸손을 힘씀도 실상은 높아지기 위한 심리로 그리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기독자는 처음부터 높아지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 아들이 적신(赤身)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낮아지심이니,
이와 같은 속죄의 사랑을 받은 기독자로서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2)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절).-부정적 특성.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 두 가지 말씀도 역시 서로 통함이 있는 한 뭉치입니다.
(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무례"란 말은 합당치 안게 행함입니다. 그것은,
➀공중(公衆)을 위한 예의(禮儀)가 없이 행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②권위(權威)를 존중히 하지 않음이 역시 "무례"에 속합니다.
이 세상에는 권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실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의 권위요, 선생은 제자의 권위요, 노인은 젊은 자들이 권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땅의 권위들을 존경하도록 된 것은, 그들이 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경외(敬畏)에 이르는 훈련을 받도록 한 것입니다.
레 19:32에 말하기를,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권위를 존경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가 곤란합니다.
존경의식(尊敬意識)은, 어떤 의미에선 경건을 돕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것이 우리의 경건도 증진(增進)시킵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상습적(常習的)으로 개인적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벌써 독생자와 함께 모든 것을 받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는 욥과 같이 "주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합니다(욥 13:15 脚註).
그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행합니다.
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자아(自我)가 없어진 까닭이 아닙니다. 그에게 자아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자아는"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입니다(행 20:35).
(3)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이 두 마디 말씀도 서로 유사(類似)한 방면을 가진 한 쌍(雙)입니다.
성내는 것이나, 악한 것을 생각함은 둘 다 악독한 심리를 발함입니다.
성내는 것은 잠재(潛在)하였던 증오(憎惡)가 폭발(爆發)함이니 그것이 곧, 살인독(殺人毒)입니다.
분노(忿怒)는 남을 죽이려는 마음의 발작(發作)입니다.
➀ 이것은 영생의 생명운동을 방해하며(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②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에서 내쫓으며(요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③ 분노하는 자 자신이 죽는데 나아갑니다(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남을 죽이려다가 먼저 자기를 죽이고 맙니다.
속죄의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요일 3:16에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내는 죄를 이기는 비결은 무엇인가?
➀ 남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할 때에 분노하나, 그때에 우리가 생각하여야 될 것은 "내가 그 형제를 위하여 죽을 책임까지 있는데 그 형제의 그만한 괴롭힘을 당하지 못하랴"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함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지니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입으로는 받는다고 하면서,
행위로는 그것을 받지 않은 자처럼 행하면 안 됩니다.
말로만 믿는 다하고 행위로 그렇지 않으면,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정성스러이 받지 않는 불행입니다.
② 분노를 이기는 또 한 가지 비결은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음에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누구든지 간절히 원할 때에 받아집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엡 5:18).
특별히 성내기 잘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성질 하나가 자기를 망치는 줄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4)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기독자가 억울함을 당하였을 때에 가해자(加害者)에게 복수(復讐)를 안 할뿐 아니고 그 받은 손해를 생각하지도 않음을 의미합니다.
벧전 4:8에 말하기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속죄(贖罪)의 사랑은, 사죄의 사랑이니 이 사랑을 받은 사랑의 사람이 어찌 복수 사상(復讐思想)을 가지랴? 손양원 목사님 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그의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음심 이었습니다(롬 5:10).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리차드. 윌렘손(Richard Willemson)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얼음 가운데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그를 건져주었습니다.
3)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6절)
(1)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➀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시 5: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②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사 53:4-6) 신자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③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속에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2)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 할 바(복음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킵니다(골 1:5;엡 1:13;갈 5:7;살후 3:13,14;요 1:17).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➀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②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 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됩니다.
4)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
기독자는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것입니다.
(1) 기독신자와 모든 것. 여기 "모든"이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롬 8: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
(2) 저렇게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 기독자는 모든 역경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릅니다.
기독자는 평안한 일들에 있어서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모든 역경과 고난 그자체도 자기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압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롬 5:3,4). 약 1:2-4.
기독자가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기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습니다(약 1:12).
3. 사랑의 영원성(8~13절)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영원하며,
모든 은사보다, 또 믿음, 소망 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1) 그 사랑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8절).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➀ 사랑이 내세에까지 들어가서도 폐지되지 않지만
②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끝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은사가 절대적이 아니라 한시적이며,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성도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자기가 받은 은사와 경험한 능력을 절대적으로 여겨 교만(驕慢)하기 쉽습니다.
반면 영적 성숙에는 무관심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사랑과 내세와의 관련성을 가르칩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할 때에,
사랑이 이 세상에서도 존속(存續)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캄캄한 세상에도 내세의 요소(要素)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시어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으로 나타내셨습니다(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2) 이 속죄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기독자의 심령에 움직이고 그 생활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움으로 이 사랑을 체현(體
現)합니다(골 1:24). 사랑은 수고입니다(살전 1:3).
*골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3) 고난에 참예함이 사랑의 생활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세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어 집니다.
(빌 3:10,11,요일 4:16-17).
2)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받는 하늘나라의 지식이 부분적(部分的)의 것인 사실을 밝힙니다(9~12절).
(1)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적인 것은 온적한 것이 올때에 페합니다(9,10절).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내세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유가 무엇입니가?
그것은 곧,
➀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별 수 없이 내세에 대하여 전적이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어두움의 벌을 받아야 합당합니다.
이 어두움은 그의 성결(聖潔)이 진보(進步)함에 따라서 조금씩 벗어집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대하여 좀 더 알기 위하여 더욱 착한 일을 힘쓰며 성결을
힘씁니다.
② 죄 있는 인생으로서는 완전한 계시(啓示)의 빛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네사렛 호수에서 베드로를 지도하시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5:8).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은 완전한 지식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③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입니다.
롬 8: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13),
신자로서는 땅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하고야,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깁니다.
벧전 1: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2)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11절)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귀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줍니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 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됩니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합니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습니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합니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참으로 어린 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합니다.
(3) 현재의 삶은 청동거울에 비친 얼굴과도 같습니다(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는 청동 거울 생산지로도 유명했습니다.
근대의 유리 거울과는 달리 청동 거울에 비친 모습은 희미합니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 말씀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확실하나 그 정체(正體)는 전적(全的)으로 알기 어려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보이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13절)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 망 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입니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됩니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특성을 인식하고,
그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을 견인하며 영원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아 우리도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랑 없는 은사는 무익합니다(1~3절)
고린도 교인들이 최고의 은사라고 여기던 ‘방언’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탁월한 지식과 대단한 믿음을 소유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구제나 목숨을 내어주는 순교도 사랑에서 나온 게 아니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것이 사랑이오, 은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앞서는 것은 없습니다.
2) 십자가의 도(1:18)는 결국 사랑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완성됩니다(4~7절).
그 사랑의 시작은 ‘오래 참음’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과 공동체를 보며 오늘의 모습보다 주께서 빚어가실 내일을 기대하며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지 않고 남과 견주지 않으며, 불의에 눈감지 않고 진리 편에서며, 성내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고 온유하며 참고 견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특성 하나하나를 읊조려보십시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에 대한 찬사나 개념 정리가 아니라 실천이 아닐까요? 내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3) 고린도 교인들이 추구하던 각종 은사들은 ‘언젠가’그 역할을 다하면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8~11절).
끝까지 변치 않고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또 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하는 것은 미숙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습니다.
모든 은사를 온전하게 하고, 영적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이끄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라질 것들을 좇다가 사랑을 놓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4) ‘그때’다 되면, ‘지금’ 우리가 사모해야 할 영원한 가치가 ‘사랑’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12,13절).
모든 은사도 그 가치와 목적을 수단일 뿐입니다.
‘믿음과 소망’(7절)을 견인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죄의 은총 속에 사귐으로 부르시는 초청에 응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새 창조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