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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롬13:11-14
제목:지금은 자다가 깰때
오늘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하여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과연 나는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바로 알고 있는가? 지금 세계는 무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2008년 5월 2일 미얀마에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가 지나가며 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2만 2천명 이상의 사망자와 4만 명 이상의 실종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피해지역 5개주를 자연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국제적 구호를 요청하여 미국, 유럽연합, 프랑스, 네덜란드, 일본, 태국, 인도, 싱가포르 등이 지원을 하였다.
2008년5월12일 진앙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원촨현(汶川县)입니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2시 28분에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진원 깊이는 지표로부터 14km 이내, 지진 규모는 8.0이다.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하면서 유라시아 지각판 내 티베트 고원 지대의 지각이 동쪽으로 움직였고, 그 영향으로 쓰촨성 서북쪽에 있는 룽먼산(龍門山) 단층 활동을 유발한 것이 지진 발생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규모 4.0 이상의 여진이 약 240회 이어져 피해 규모가 커졌다. 그중 155회는 본진 발생 후 일주일간 나타났으며 한 달 동안 총 205회 발생했다. 전체 여진의 횟수는 약 2만 1,500건 이상이다. 최대 여진은 6.2로 기록됐다.
피해의 현황을 샇펴 보면 피해 면적은 약 10만km²에 이른다. 영향을 받은 지역은 쓰촨성을 포함한 10여 개 성과 직할시로 현은 약 434개입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6만 9천 명으로 대부분 쓰촨성에서 발생했습니다. 실종자는 약 1만 7천 명, 부상자는 약 37만 4천 명 이상입니다. 140만 명 이상이 긴급구조 후 이송됐으며 응급 처치한 전체 부상자 수는 386만 명 이상입니다. 영향 지역 내 450만 동 이상의 건물이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쓰촨성 내에서만 학교 7천 여 동이 무너지면서 학생과 교직원의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도로가 붕괴하며 교통 마비와 통신두절이 발생했으며 쓰촨성 내 발전소 5곳과 변전소 6곳이 무너졌다. 쓰촨성 베이촨현의 경우 건물의 80%가 붕괴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밖에도 산사태와 그로 인한 언색호(堰塞湖), 열차 탈선과 화재 등의 피해가 있었다. 지진으로 인한 경제 손실은 약 1조 위안(160조 원) 이상으로 추정합니다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경 미야기 현 센다이 동쪽 179 km 지점의 산리쿠오키(三陸沖) 해역에서 모멘트 규모 9.0의 강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지진으로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의 대부분은 물론 홋카이도, 주에쓰 지방 및 나가노 현 등지에서도 강한 진동이 관측되어 큰 혼란이 일어났습ㅂ니다. 특히 미야기현을 중심으로 한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은 지진의 여파로 지진 해일이 강타하여 더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의 사실상 수도인 도쿄에서도 강한 진동이 관측되어 오다이바의 텔레콤센터 인근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지진은 미 지질조사국의 지진 규모 기준으로, 근대적인 지진 진도 관측이 시작된 이래 4번째 규모이자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한편 세계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본이 이 지진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 그 파장이 막대한 가운데, 원자력 발전소도 지진의 피해를 입어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 지진은 지금까지 일본을 강타한 지진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알려졌고, 1900년에 현대적 기록을 시작한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개의 지진 중 하나입니다. 지진은 도호쿠의 이와테 현의 미야코에서 40.5m에 달하는 강력한 쓰나미를 발생시켰고, 센다이 지역에서, 10 km 내륙에 이르기까지 나아갔습니다. 지진은 혼슈를 2.4m 동쪽으로 이동시켰고, 2012년 9월 12일, 일본 경시청 보고서는 15,878 명 사망, 6,126 명 부상, 2,713 명 실종을 확인했고 또한, 25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9,225 동이 붕괴되었고 69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지진과 쓰나미는 많은 구역에서 화재와 댐 붕괴와 마찬가지로 도로와 철로에 대한 많은 손상을 포함하여 동북 일본에 광대하고 혹독한 구조적 손상을 일으켰습니다. 일본 수상 간 나오토는, "세계 2차 대전의 종결 이후 65년 동안, 이것은 일본에 닥친 가장 거칠고 가장 어려운 재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북 일본의 약 440만 세대는 전기 없이 남겨졌고, 150만 세대는 물 없이 남겨졌다. 지금은 온 세계가 중국 우환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국민들이 고통을 받으며 특히 우리 개신교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홍수 때문에 난리입니다.
작금의 세계가 상항은 기근과 가뭄이 갈수록 심해져 국제 곡물가가 급등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 또한 미국과 이북의 문에 뿐만 아니라 곳곳에 전쟁위기가 감돌고, 엘니뇨로 인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전쟁과 지진, 홍수와 화산 폭발, 가뭄과 이상 기후, 자연세계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언가 모르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양 무관심으로 돌리고 맙니다.
그저 그날그날을 별 탈 없이 살아가면서 쾌락을 즐기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은 성경적인 바른 종말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과연 역사의 종말은 오는 것인가? 성경은 종말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개인의 종말과 우주만물의 종말,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일부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듣기 싫어합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거의 다 같습니다.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강해설교가로 유명한 척 스미스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특히 종말에 관한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텔레비전에 방영되지를 않습니다. 텔레비전에 방영할 설교프로그램을 만들어가도 방송사의 심사에서 통과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종류의 설교를 세상 사람들이 듣거나 보려고 하지를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잘 아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설교는 수년 동안 계속해서 방영을 해 줍니다. 왜 그런가? 그런 설교는 세상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를 광신자로 취급하고 뭔가 지적인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을 합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였던 C.S 루이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변화를 받고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거나 세상 종말을 말하는 것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마땅한 미덕이다. 현실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 종말을 경고하는 것과 같은 미래에 대한 설교가 약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종말을 절대로 비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준비하지 않는 나 자신, 무관심한 나 자신이 언제나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1절)
이 말씀을 의지하여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면서 은혜의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종말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더욱더 가까워 왔습니다. 이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이 시기를 분명히 알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11-12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서론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환경적인 볼 때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영적 각성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하면 우는 사자로 비유하겠습니까?
군대에서 전방 GOP 부대(휴전선 지키는 부대)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보초를 설 때 항상 숙지해야 되는 수칙이 하나 있습니다. “졸면 죽는다!” 보초 서다 졸고 자면 간첩에 넘어와도 속수무책입니다. 보초를 서나 마나 철조망이 뚫리고 큰일 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각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런 각성 상태를 유지할 때 신앙생활에 활력이 있고 항상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대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어거스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분입니다. 방탕한 사람이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30년 기도로 변화된 것으로 유명하죠. 그가 결정적으로 변화된 회심의 간증이 있습니다. 386년 밀라노의 정원 벤치에 친구와 함께 앉아 있는데, 어린아이들의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책을 펴서 읽어라 ! 책을 펴서 읽어라!”
성경책을 펼쳐 보니 롬13:13~14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세였습니다. 그 후 그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고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 각성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만큼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바울이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벌써 됐다는 이 말씀은 종말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느끼라는 겁니다.
‘자다가 깰 때’라는 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자다가 깰 때라는 말은 말세에는 잠들 수 있는 유혹이 그만큼 많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갈 때 위기의식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성도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정신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까?
1)어둠을 볼 수 있는 눈, 영적 눈, 영적인 눈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세의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이 등불을 들고 걸어갑니다. 자기는 보지 못해도 지나가는 사람이 그 등불을 보고 자기를 피해가라는 뜻으로 등불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매우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그 장애인과 부딪혔습니다.
이 장애인이 화가 나서 “당신은 눈도 없소. 이 불이 안 보입니까?” 하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행인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등불은 꺼진지 오래요!”오늘 우리의 등불도 꺼져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어두움을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어두움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어두움이 주는 폐해에 대해 경각심을 높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두움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멸망 직전 예루살렘에 깔린 짙은 어두움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돌아와야 한다. 이 어두움이 지속되는 한 너희는 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가장 귀중한 축복은 시대의 어두움을 꿰뚫어 보는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짙은 어두움 가운데서 내가 먼저 회개의 기도를 하며 또한 깨어 기도함으로써 영안이 열려 이 시대를 분별하며 바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사람이 되어합니다. 그리하여 내 가정을 지키고 우리 교회를 지키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지키는 에덴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어두움이 깊어 감에 따라 아침이 오고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보통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가 동트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어두울 때 무엇을 직감해야 합니까? 이제 곧 새벽이 가까워오겠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죽으면 살고, 잃으면 얻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역설적입니다. 나의 삶에 가장 어두운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옵니다. 이 시대가 어두워지고 타락하여 뒤죽박죽되어 가면 그때 “이제 곧 진정한 부흥, 질적인 부흥을 부어주시겠구나!”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영적으로 얼마나 어두워져가고 있습니까? 사람이 짐승 못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사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 받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영적인 권세를 다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무너졌다” “큰일 났다” “한심하다”며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이제는 사람이 일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온 것입니다. 이제야 진정한 부흥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내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기도 할 때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다시금 이 땅에 나타날 것입니다. 결코 실망하지 마시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에덴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깨어 있는 성도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12-14절)
오늘 본문롬 13:12-14“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12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사도바울 선생님은 낮과 밤에 다른 옷을 입는 것에 착안하여 지금 벗어버려야 할 것과 새로 입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벗는다(아포티테미)는 것은 집어 치우다, 버리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잠옷을 홀홀 벗어버리듯이 어두움의 행위 등을 제거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일은 13절에 나온 종교 윤리적인 불법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빛은 어두움과 반대되는 것으로 도덕적 종교적으로 성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영생을 소망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어두움은 악한 세력으로, 빛은 선한 세력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어두움의 일을 거절하고 낮에 사는 사람처럼 단정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13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바울사도 선생님은 어두움의 일로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 등과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하지말라? 단호한 의지입니다.
-방탕(코모스): 흥청거림 / 술취함.
-음란(코이테)과 호색(아셀게이아)는 성적 타락을 말함. 당시 로마 사회의 음란한 모습을 드러냄. 음란은 성교. 법적, 도덕적으로 무절제한 성행위.
호색은 음탕함, 억제 불가능한 애욕. 둘 다 방탕한 성문화를 의미함.
-다툼(에리스)과 시기(젤로스)
예화) 게 바구니는 뚜껑이 없습니다.
게를 대여섯 마리 바구니에 넣어 놓아도 한 마리가 올라오면 다른 케가 툭 쳐서 뚝 떨어지고 하기 때문에 뚜껑을 닫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를 가리켜 “게 바구니 사회”라고 합니다.
서로 죽이려고 안간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올라가려고 하면 넘어뜨리고 잡아당깁니다. 이런 게바구니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내 몸을 집어 던져서 다른 게를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존재, 나를 낮추고 겸손히 섬기는 존재임을 기억하서야 합니다.
사랑을 잃은 사회는 타락한 사회, 정글과 같은 사회입니다. 마지막 시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24: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 결과 나다나는 것이 시기와 다툼입니다.
약3:14-16“14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시기하고 다투고 서로 아웅다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피차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을 부어주면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입니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빛의 갑옷 즉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14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성품으로 우리의 영혼이 옷 입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의 인격과 삶을 말합니다.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두움의 세상에서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의 특징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던지 그곳에서 빛을 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말보다 꽃] . 타고르 시인의 시입니다.
나무에게 말했네 신을 보여 달라고
그러자 나무는 말없이 웃으며 꽃을 활짝 피워냈다네
사람들이 말하네 신이 있다면 보여 달라고
그러나 나는 많은 말을 할 뿐 꽃 하나 피우지 못하네
많은 말보다 꽃 피운 삶이기를 많은 일보다 꽃 가꾼 삶이기를
많은 돈보다 꽃 나눈 삶이기를 그래 그렇게 꽃내음을 날리며 살래
꽃 한 송이 피우며 살래
이 시를 보며 -말 복음이 변하여 .몸 복음으로 삶 복음으로
남쪽 유댜 왕들 가운데 선한 왕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여호사밧 왕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하19:8-9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주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9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
재판관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성품으로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성품을 보게 됩니다. 진실과 성심.
-진실은 변치않는 성실함을 의미/ -성심은 온전한 마음, 전심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과 불의와 늘 싸워 이겨야 합니다. 거짓에 미혹되면 우리는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항상 어디서든지 진실하십시오. 진실의 다른 말은 착한 것입니다.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십시오. 그러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모두가 좋아할 겁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에덴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 때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입니다.
마24:36“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런데 왜 아직 오시지 않느냐고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벧후3:8~9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살전5:3,6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우리나라 전통 육아교육법 중에 이런 게 있다고 합니다.
신문의 칼럼에서 읽었는데, 도리도리, 짝짜꿍 짝짜꿍, 곤지 곤지, 깍꿍 ... 등이 있는데 본래 한자어로 각각 뜻이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 ‘깍꿍’이 있죠. 어릴 적에 영문 모르고 들었는데 어른들도 그냥 했는데, 본래 각궁(覺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자신을 깨달아라!” 이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각성’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입니다. 영적 각성!
“너희는 이 시기를 알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이 깊어갈수록 밝은 아침이 온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사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하십시오. 누구에게든지 성심으로 대하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그것이 빛을 발하는 삶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영적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보이듯이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세상의 때 묻지 말고 경건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언제 주님을 만나도 부끄러움 없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에덴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