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뫼(星山)가 어드메뇨.
"사람들 사는 곳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江山을 사랑하여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 나오지 않으시는가. 소나무 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평상에 자리를 잡고 넌즈시 앉아 위를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 서석대(瑞石臺)를 집을 삼아 나는 듯 드는 모습이 주인을 닮았구나. 푸른 시내(蒼溪) 하얀 물결이 정자 앞에 둘렀으니 구름 비단(雲錦)을 그 누가 잘라 내어 놓았는 듯 펼쳤는 듯 야단스럽기도 하구나. 산중에 책력 없어 四時를 몰랐더니 눈앞에 펼친 경치가 철철이 저절로 나니 듣는 것과 보는 것이 모두 仙境이로구나."
별뫼의 식영정 아래에 위치한 부용당(芙蓉堂)
눈치 빠른 벗님들은 아셨겠지만, 宋江(정철, 1536~1593)선생이 별뫼(星山)에 내려와 있을 때 식영정에 올라 지었다는 성산별곡의 앞부분(약간 첨삭함)으로, 주인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과 문답하는 내용이다. 우리 <탐방> 꾼들이 춘설헌(春雪軒)을 나서 다음으로 찾아나선 데가 이 식영정과 조선 선비들의 로망이라는 원림(園林) 소쇄원(蕭灑園), 등이다. 아침잠 없는 중늙이들 새벽부터 설쳐대더니 오전 7시에 벌써 차에 올라 민생고를 해결하고 해설자를 만날 광주 시내 山水洞을 향해 출발했다. 동네 이름만큼 우아한 곳은 아니나 아침 국밥은 꽤 일품이다.
모과를 닮은 해설녀
배가 좀 든든해 지자 곧 만나게 될 해설자가 어떤 여인일까 설왕설래했는데, 역시 대부분 큰 기대(?)는 않는 분위기다. 전화벨이 울리고 이쪽을 향해 걸어 오는 여인은 7학년에 가까운 할머니로 미색만으로 보면 우리 <탐방> 꾼들이 선호할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나 차에 올라 무등산의 다른 자락을 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면서 뱉어내는 해설은 장난(?)이 아니다.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인테리로 가끔 영어를 섞어 쓰고, 송강의 가사를 읊조리며, 한문 실력도 대단하여 한자 일급이라는 柳翁과 한시를 합네하는 필자가 쥐구멍을 찾을 정도다. 그녀의 희망대로 생김새보다는 은은한 향기를 지닌 모과같은 여인임에 틀림없다.
나무백일홍 줄지어 선 담양 시골길을 따라
유흥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듯이 식영정을 찾아가는 여정은 온통 베롱나무길이다. 열흘 붉은 꽃 없다(花無十日紅)지만, 이 나무백일홍(베롱나무의 다른 이름)은 말 그대로 백일 붉은 꽃으로 우리 꾼들을 위해 아직도 눈부시게 피어서 반겨주고 있다. 목적지는 식영정과 소쇄원이지만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도 또한 <탐방>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가다가는 가끔 내려 해설자의 입을 빌어 선인들의 냄새도 맡고 역사의 흔적도 살피며 쉬엄쉬엄 찾아가는 길..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息影亭)에 올라
베롱나무와 소나무와 어우러진 식영정
굳이 송강이 아니라도 시 한수, 가사 한자락이 절로 나올만한 風光이다. 성산별곡에도 있듯이 멀리 무등산 서석대가 보이고 이제는 호수(광주호 준공 후) 처럼 변한 '蒼溪'가 눈앞에 펼쳐진다. 식영정 옆에는 커다란 노송이 몸을 뒤틀며 솟았는데 그 밑둥을 안으면 소원을 이룬다 하여 온통 맨질맨질하다. 왼쪽 아래에는 식영정과 거의 동시대에 지었다는 환벽당(環碧堂)과 환벽당의 짝으로 1970년 대에 세웠다는 부용당(芙蓉堂)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자리잡고 있다. 식영정에서 바라보면 부용당 앞 연못에 환벽당과 부용당이 다정한 연인처럼 비춘다는데 이날은 연못속에 수초들이 많아 불행히도 볼 수 없었다.
식영정(息影亭):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면암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이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비들이 꿈꾸던 원림, 소쇄원(瀟灑園)
光風閣이 보이는 소쇄원 풍경
식영정 지척에 시원하게 우거진 대숲을 지나 들어가면 홀연히 조선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원림(園林)이 펼쳐진다. 이 멋들어진 정원이 지금까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梁山甫)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남에게 팔지 말며,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말라고 했으니 그의 뜻대로 지금껏 보존되어온 것은 다행이다. 소쇄원에 대한 소회는 보는 이마다 다르기에 여기에서는 중언부언 하지 않고 인터넷 사이트에 나와 있는 걸로 대신하니 관심이 있는 제현들께선 직접 한번 와 보시길..
소쇄원(瀟灑園):
중종 때 개혁 정치를 펼치던 조광조가 정적들의 모함으로 화순 능주로 귀양가 사사되는데, 그의 제자였던 양산보(梁山甫, 1503~1507)는 이에 크게 실망한다. 그는 더 이상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와 10여 년에 걸쳐 소쇄원을 꾸미고 이곳에 머물며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 만나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곳을 드나든 사람은 송순, 정철, 송시열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조선 중기 문인들로 가사 문학의 대가들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대숲이 시원하게 우거져 있으며, 소쇄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작은 천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제월당, 광풍각 등의 건물이 있다. 계곡 옆 정자인 광풍각은 ‘침계문방’이라 하여 머리맡에서 계곡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비의 방이라 이름 붙은 곳으로 소쇄원 48영 중에서 제2영에 해당한다. 소쇄원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제월당은 ‘비 갠 뒤 하늘의 맑은 달’을 뜻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 한눈에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없어 이름만 듣고 찾아왔다면 실망할 수 있겠으나, 잠시 머물며 건물 마루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며 계류의 물소리를 들어보면 옛 선비들의 융자적하는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식영정, 소쇄원을 둘러 본 후에 후에 면앙정, 죽녹원 등도 구경하였으나 <탐방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나이들며 점점 더 게을러지는건지..)
<탐방>시 찍은 사진 몇컷
식영정 가는 도중에 만난 엄청나게 큰 버드나무 아래서..
식영정 아래에 있는 환벽덩 특이한 서체(전서)의 식영정 현판
식영정 옆에 온몸을 뒤틀며 올라간 '소원을 이뤄준다'는 소나무
소쇄원 담을 통과해서 흐르는 개울 소쇄원 제월당(霽月堂)의 한시를 보고 있는 <탐방단>
(詩를 가리키고 있는 이는 그렇찮아도 키가 큰 金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