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이다. 할머니 치맛자락에 얼굴을 파묻은 듯 알근달근한 길이다. 차들이 급하게 달리는대로를 벗어나자마자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든 듯 펼쳐지는 풍경들. 도심 한가운데서 개발바람에도 용케 살아남아 근대 역사문화의 흔적을 곳곳에 새겨두고 있는 양림(陽林)동(광주시 남구). ‘햇볕이 드는 숲’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진 양림동 골목길을 타박타박 걷는다.
<산줄기에 올라 바라보면/ 언제나 꽃처럼 피어 있는 나의 도시/ 지난 날 자유를 위하여/ 공중에 꽂힌 칼날처럼 강하게 싸우던,/ (중략) 길들은 치마끈인 양 풀어져,/ 낯익은 주점과 책사와 이발소와/ 잔잔한 시냇물과 푸른 가로수들을/ 가까운 이웃을 손잡게 하여주는…> (‘산줄기에 올라-K도시에 바치는-’ 중)
‘양림동 시인’ 김현승이 노래한, 치마끈인 양 풀어진 그 길을 따라가노라면 촘촘하게 들어선 옛건물들 사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 양파정
그 옛날 물방앗간이 있었다네
양림동 치안센터 뒤로 난 계단을 오르면 광주천이 굽어보이는 자리에 정자 하나가 있다. 양파정(楊波亭). 1914년 처음 세운 이 정자의 건립자는 일제강점기 광주 대부호였던 양파 정낙교. 옛날엔 그 아래 벼랑으로 상류에서 밀려온 광주천이 부딪치면서 깊게 팬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을 ‘꽃바심’이라 불렀다. 직강공사 이전의 광주천은 폭이 널찍하고 강둑엔 수목들이 빼곡했다 한다. 본디 건천(乾川)인 광주천에서 유독 강물이 방방하게 들어차 있던 곳에 돌을 쌓아 만든 보가 조탄보(棗灘洑)다. 광주천의 다른 이름인 조탄(대추여울)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광주
천변 양림동과 불로동 사람들은 이 보를 징검다리 삼아 물을 건넜다. 7~8할이 농사로 벌어먹고 살던 시절 조탄보는 광주시민의 생명수가 담아진 곳이었다.
1920년대 초엽만 하더라도 광주천변엔 물방앗간이 참으로 많았다. 양림동 149번지 일대 광주천에서 200m 가량 떨어진 이곳에도 물방앗간이 있었다 한다.
양림오거리를 거쳐 양파정 아래까지, 지금은 아스팔트 덮인 그 길 위로 퍼런 강물 한 자락이 흘렀다. 이 물길을 명락강, 양림강 혹은 밋밋들물이라 불렀으며, 그 물길 옆에 자리한 마을을 명락강변이라 불렀다. 그‘갱변’사람들이 수차를 돌려 곡식을 찧던 곳이 양림동 물방앗간이다. 광주천 물흐름이 지금과 달랐음을 증거하는 얘기다.
예부터 광주천은 자주 범람해 사람들의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 하여, 상류의 물을 나눠 물살을 줄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중류에서 물줄기를 셋으로 나눠 한 줄기를 우회시켰다. ‘강물의 이익’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강물이 난폭한 힘을 잃고 순조롭게 흘렀다. 중국 진나라 소왕 때 이빙 부자가 도강언을 축조한 뒤 물소의 형상을 본딴 수위표를 세웠다는 전설처럼, 천 중심에 세운 정자가 석서정(石犀亭)이다. 글자 그대로 돌로 물소를 만들어 기념한다는 뜻이다.
- 양림동 건축물들
회색 벽돌에서 붉은 벽돌로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1호)은 1899년 정낙교의 아들 정병호가 건축했다. 집의 나이를 따지면 110살. 당시는 안채와 대문간밖에 없었지만 1959년 이장우가 사들인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채까지 완성했다. 안채는 문화재로 지정됐다.
오랫동안 정원수와 석물들로 채워져 있던 일본식 정원을 비우고, 빈 마당을 들여놓은 것은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계기가 됐다. 비질의 흔적을 정갈하게 새기고 바람과 구름을 흘려보내고 있는 너른 마당에서, 비움으로써 채우는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2호)은 독립운동가 최상현이 1920년 지은 일자형 팔작지붕 고택으로 한말 전통가옥에서 개화기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건축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양림동 골목에서 자주 만나지는 오래된 벽돌집. 100년 전 광주가 근대도시로 발돋움할 무렵 도시의 얼굴을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 벽돌이라는 건축재다.
양림동에 벽돌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0년대. 광주에 처음으로 서양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살면서 학교와 사택, 교회를 벽돌로 짓기 시작했다. 이 무렵 벽돌집은 대부분 회색이었다. 당시 벽돌건물 짓기의 고수들이었던 중국인들이 회색 벽돌에 익숙했으며, 국내엔 붉은 벽돌을 만들어 낼 성능 좋은 가마가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1911년에 완공된 수피아홀, 유진벨 선교사와 더불어 전라남도 최초 선교사였던 클레먼트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을 기념하기 위해 1914년 세운 2층 건물 오웬 기념각(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26호), 광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으로 한센병 환자를 가족처럼 돌보았던 미국인 우일선 선교사의 사택(광주광역시기념물 제15호) 등은 회색 벽돌건물로 양림동에 이국적인 경관을 더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웬 기념각은 공연장이라는 게 따로 없던 광주에서 1911년 최초의 서양극(신극) <늑대와 소년>이 올려진 곳이기도 하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붉은 벽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제 붉은 색이 도시 경관의 중요한 색조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광주 시내에서 지은 지 50년 넘는 벽돌집은 손으로 꼽을정도에 불과하니, 격동의 근대사를 전해주는 벽돌건물 한 채가 더욱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