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난 프랑스인 “미스터 부르쥬”
진정한 사회주의자와 사이비 사회주의자
파리1대학 철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였다. 당시 내가 존경한 두 사람이 우리 과에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또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한 사람은 나의 지도교수였던 ‘헤미 브라그’교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부르쥬’ 교수였다. 당시 DEA과정에서 몇 과목 되지 않은 수업 중 한 과목을 ‘부르쥬’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부르쥬 교수는 당시 우리학과의 학과장이었고, 또 <전국철학자 연합>의 회장 역을 맡고 있었다. 매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매우 검소하였고, 매우 너그러웠지만 또한 행정적으로나 법적으로 ‘용서’가 없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부르쥬 교수의 수업에는 ‘용서’가 없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였다. 그래서 당시 나는 그를 약간 두려워하였다. 너무 엄격하고 마치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금욕주의자’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옷을 입고 다녔고, 차도 딱정벌래 같은 조금만 차를 타고 다녔고, 점심도 자주 학생들이 먹는 싸구려 카페에서 먹었다.
내가 그의 강의를 들은 과목은 ‘헤겔의 역사철학’으로 기억된다. 기말시험을 볼 때였다. 초겨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새벽부터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뉴스에서는 20년 만의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속보를 전해주었다. 아침에 시험을 보러 가는데, 눈이 거의 무릎까지 차서 버스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가지말까 하다가 그래도 너무나 엄격한 부르쥬 교수의 얼굴을 떠 올리니 왠지 시험을 못 봐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로 5~10분 만에 갈 수 있는 길을 걷고 걸어서 거의 40분이 결려 학교에 도착하였다. 과연 몇 명이나 왔을까? 시험은 볼까? 궁금하였다. 강의실 앞에는 나보다 먼저 온 학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라고 있었다. 놀라왔다. 그 눈 속을 뚫고 온 학생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 중에는 대다수 학교 근처에 사는 학생인 듯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어항 같은 유리그릇에 쪽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집어서 펴니 질문이 들어 있었다. 아직도 그 질문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탄생한 사건과 프랑스 혁명의 사건에 대해서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해보라!”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질문 같았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소위 말하는 좌파교수, 사회주의자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적당히 얼버무리면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내 소신대로 말하자고 생각하고 답변을 하였다. 나의 답변에 또 다른 질문이 한두 가지 더 이어졌다. 답변을 모두 하고 났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그는 손을 꼭 잡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눈 속을 오느라 쉽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빠지지 않고 시험에 참여해 주어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잘 답변하였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자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앞으로 좋은 철학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속으로 감동하였다. 사회주의교수가 어떻게 크리스천의 신념을 이토록 존중해 주는 것일까? 어떻게 프랑스 최고의 철학교수가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외국인 학생에게 저렇게 겸손하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그날 일은 내가 부르쥬 교수를 두려워하다가 존경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파리1대학(판테옹 솔본느) 중앙 도서관의 모습 :
처음 들어가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고요함과 학구적 열정에 압도 당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박사학위를 받기 전, 2년 전쯤이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과학강국’이라는 열풍이 불었는데, 유럽도 마찬가지였고,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회적 사조에 맞장구쳐서 교육부 장관이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과학강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어린 학생들에게 더 많은 과학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학, 사학, 철학의 고교 교사 TO를 조금 줄이고, 생물학, 물리학 등에 자리를 더 늘이겠다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발표는 적잖은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왜냐하면 프랑스 사람들의 평등사상은 단순히 만인이 평등하게 대우 받는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모든 학문이 곧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모든 과목의 교사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대모가 열렸다. 교육부 장관이 평등을 깨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부르쥬 교수가 고별 강의를 한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들렸다. 아직 정년이 몇 년 남았는데 왜 고별강의를 하는지 어리둥절하였다. 물론 학생들은 이미 그 이유를 다 알고 있었다. 교육부 장관의 정책을 정식으로 비판을 하고 철회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었다. 고별강의가 있었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나는 강의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복도에 서서 창문으로 그분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느라, 눈이 부셨다. 당연히 교육부의 참관인(inspecteur)도 왔다. 부르쥬 교수는 그 참관인을 일으켜 세우고 그 동안 오랫동안 참관인 역할을 하느라 수고 했다고 인사를 하고는, 수업에 온 사람들에게 박수도 부탁했다. 너무나 의연하고, 너그러운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강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학문을 돈과 연결시키는 것은 가장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했고, 경제 강대국이 되자고 정신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프랑스인의 정신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는 좀 더 잘 먹고 잘 살자고 우리의 자녀들을 바보로 만들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날 내가 받은 인상은 “물질문명에 정신을 양보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천박한 마르크스 사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날 진정한 사회주의자를 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국민들이 훌륭한 도덕의식을 가져야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돈이나 권력이나 물질에 굴복하지 않는 사회법과 사회적 합의나 사회적 통념에 대한 존중을 겨냥하는 그러한 사회였다. ‘똘레랑스’와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철저히 실천되는 사회 그리하여 개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사회적인 엘리트란 검소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일종의 관념주의 사회였다. 누구도 특권을 주장해서는 안 되며, 누구도 사회적인 합의나 사회적인 상식을 무시할 수 없는 그러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각자가 자신의 이익보다는 사회적 공동선을 우선시 하는 그러한 사회가 곧 사회주의 였다. 당연히 이러한 사회에서는 오히려 모두가 자유로운 사회, 각자가 자유를 누리는 사회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2주 동안 프랑스의 어머니들이 거리로 나왔다. 교육부 정책을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대모가 시작된 지 2주 만에 대모는 거의 전국적으로 번졌고, 결국 교육부 장관이 사임을 하고 정책도 철회 되었다. 그 다음날 「르몽드誌」에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기사의 제목은 큰 글씨로 “훌륭한 우리 프랑스의 어머니들”이었고, 작은 글씨로 부제목이 “멋진 우리 장관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프랑스인들의 ‘페어플레이’ 즉 ‘오네뜨망’의 정신을 절절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선진국사람들의 정신이라는 것이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파리1대학의 원형 대강당 모습>
아래 내용은 이 행사를 알리는 내용이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으로 알리는 글이어서 번역 해 보았습니다.
"L'université Paris 1 Panthéon-Sorbonne organise une grande cerémonie de remise des insignes de Docteur Honoris Causa à Monsieur Juan Manuel Santos,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de Colombie et Prix Nobel de la paix, le vendredi 23 juin 2017, dans le Grand Amphithéâtre de la Sorbonne. Si vous souhaitez assister à ce grand événement, n'hésitez pas à vous inscrire en ligne (nombre de places limitées) : http://bit.ly/2seZCBy / (c) facewall.fr - Doctorat Honoris Causa de Ban Ki-moon" ------ 파리1대학, 판테옹 소르본 대학 (Panthéon-Sorbonne University)은 2017 년 6 월 23 일 (금요일), 원형대 강당에서 노벨 평화상 (Nobel Peace Prize)을 받은 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후안 마누엘 산토스 (Juan Manuel Santos)씨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하는 행사를 기획합니다. 이 행사에 참석하려면 주저하지 말고 온라인으로 등록하십시오 (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 명예 박사 반기문"
부르쥬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중국공산당이나 북한과 같은 공산당은 모두 사이비 사회주의일 뿐이며, 사회주의를 포장한 천박한 전체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사회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은 ‘똘레랑스’와 ‘평등’이다. 똘레랑스란 가급적 개개인의 개성이나 사상의 다름을 존중하고 결과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그러한 사회, 그리하여 사회적 통합이 잘 된 사회가 똘레랑스의 사회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에는 이러한 자유가 없다. 그리고 진정한 사회주의는 복지정책을 통해 가급적 엘리트와 하층민의 차이를 줄이고자 노력하지만, 공산국가에는 모든 부와 권력을 공산당이나 한 두 사람의 지배자가 소유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공산당 간부들이 뇌물을 통해 부를 축척하는 것은 자본주의 보다 더 천박한 ‘비-정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복자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오늘날 공산국가에서 자칭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완전히 그 의미가 다르다. 권력을 밝히고, 돈을 밝히고, 사회적 합의나 법률을 존중하지 않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사회적 통합 보다는 계속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증오를 유발하는 사람들은 결코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정 반대되는 ‘천박한 전체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라면 이들도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자유’를,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짜 사회주의자는 비판당해야만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모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결국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제거하고 우리사회를 천박한 전체주의 나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이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을 독점하고자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상이 그 아래 교묘하게 깔려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김정은이 처럼 비싼차나 값비산 음식이나 항상 초고급 명품만 취하는 사람이, 그리고 항상 권력을 독차지 하고자 숙청을 감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사회주의'를 입에 올릴 수 있는지, 이는 '삶은 소대가리가 하늘을 보고 웃을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