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암나무 향 그윽한 헤이즐넛을 마시는 저녁 고 은영 우리는 멀어져 가고 있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개미의 보폭만큼 TV를 켜는 순간만큼 들숨의 순간만큼 순간과 순간들이 모여 완성돼 가는 분침과 시침 우리는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뜨거운 불씨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 보잘 것 없이 표류하는 신의 악보 속에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맹세는 날조된 문서처럼 허공을 치고 마는 추억들 삶은 배롱나무처럼 미끄럽고 휘어진 가지 당신과 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헤이즐넛은 향기가 없다. 단지 개암나무 향을 입힌 것이다. 시간의 틀에 갇혀 하루를 종종거리다 7월이 나부끼는 창가에 개암나무 향 그윽한 헤이즐넛을 마시는 저녁
조금씩 멀어지는 계절만큼 조금씩 멀어지는 마음만큼 우리가 멀어져 가는 것들에 안녕을 고할 때조차 우리의 멀어짐을 수용하는 생각들은 언제나 섭섭하다. 중독은 항상 뜨거운 열기로 끓고 있지만 세월의 속성 안에 엷어져 가는 인연의 끈을 탓할 수는 없다. |
한 혹부리영감이 도깨비를 속여서 부자가 되지만, 이를 흉내 낸 다른 혹부리영감은 망신만 당했다는 ‘혹부리영감’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가 바로 개암나무다. 개암나무 열매는 껍질이 두껍고 단단하기에 열매를 깨물 때 ‘딱’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도깨비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로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전승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개암나무는 생장이 왕성한 시기에 암 꽃눈과 수 꽃눈을 만들어 겨울을 맞는다. 봄이 되면 암꽃이 앙증맞게 피고 수꽃은 벼 이삭처럼 늘어진다. 살랑살랑 부드럽게 부는 봄바람은 수꽃의 꽃가루를 날려 암꽃에서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암꽃이 핀 자리에 조그만 밤톨 같은 열매가 달린다. 처음에는 초록색이던 열매가 익어가면서 점점 갈색으로 변해 껍질이 딱딱해진다. 이 열매를 ‘개암’ 또는 지방에 따라 ‘깨금’ 이라고 한다.
‘개암’은 고려시대 때 제사상에 올려놓기도 하였고, 숲에서는 다람쥐나 청설모의 소중한 먹거리이다. 개암나무의 ‘개암’은 개(접두어)와 밤의 합성어인 ‘개밤’에서 바뀐 것이다. 북부지방 일부에서는 개암나무 기름으로 첫날밤 신방에 불을 밝히는 의식이 행해졌다. 잡귀를 쫓아내고 행복을 비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용평면 백옥포리에는 개암나무가 많아서 개암나무 밭이란 뜻의 ‘갬밭골’이란 동네, 진전동(榛田洞개암나무진, 밭전)이란 동네, 진전길이란 도로명이 있다. 또한 진전길51에는 ‘진전(榛田)’ 이라는 산속 지명이 지도에 남아있다.
출처 : 장이기(2016). 이야기 숲에서 놀자. 프로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