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4호
- 공식명칭 : 구례 연곡사 북 승탑(求禮 鷰谷寺 北 僧塔)
- 지정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 수량/면적 : 1기
- 시대 : 고려시대
- 주소 : 전남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806-16, 연곡사 (내동리)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승탑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基壇)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塔身)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문화재청]
북 승탑(北 僧塔)
국보 제54호 연곡사 북승탑은 국보 제53호 연곡사 동승탑에서 150m쯤 올라가면 있다.
한 절집 안에 국보급 승탑이 2개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큰스님이 주석하셨다는 것으로 예측이 되나 아쉽게도 어느 분인지 알 수 없어 그저 북쪽에 있는 승탑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일부에서는 현각선사 승탑으로 보기도 한다.
▲ 국보 제54호 연곡사 북승탑, 국보 제53호 동승탑과 비슷한 모습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네모난 지대석은 바닥돌과 8각 받침돌이 한몸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상세한 구름무늬를 음각하였다. 53호 국보의 받침돌이 2단에 양각 느낌의 조각인점과 비교되는데 부분별로 54호 국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열세한 점을 감안하면 54호 국보가 53호 국보를 모방하여 후대에 만든것이라는 느낌이다.
하대석은 상대석과 대칭적인 모습이면서도 훨씬 큰 탓에 안정적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8각이지만 16개의 복련 겹꽃잎을 새겨 원만하게 둥근 모습이며 귀퉁이 8곳에는 귀꽃을 너무 도드라지지 않게 조신하게 새겨붙였다. 하대석과 중대석 사이에는 3단의 굄돌이 있는데 하대석에 1단, 중대석에 2단을 새겼으며 8각 중대석에는 커다란 안상을 조각하고 안상마다 다양한 모양을 새겼다. 아쉽기는 정확하게 무엇을 새겼는지 식별이 어렵다.
▲ 8각의 지대석 받침돌에는 운룡문을 음각으로 촘촘하게 새겼으며, 하대석에는 큼직한 복련의 겹꽃잎과 귀꽃을 새겼다. 53호 국보의 경우 하대석은 꽃잎이 아니라 8각면을 다소 경사지게 만든후 안상을 창문틀처럼 도드라지게 새기고 안상 칸마다 다양한 모습의 사자상을 새긴것과 중대석에는 칸마다 8부중상을 새긴점이 54호 국보와 다른 점이며 나머지 부분들은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상대석은 53호 국보와 매우 흡사하다. 하대석과 중대석은 조금씩 변형시킨데 비하여 상대석은 그대로 가져와서 얹은듯 하다. 즉, 상대석에는 큼직한 홑 꽃잎 세겹을 앙련형식으로 새겼으며 꽃잎 가운데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나씩 도장 찍듯이 새겼다. 상대석 위 몸돌 받침에는 난간처럼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칸마다 반인반조(半人半鳥)의 극락조, 다양한 모습의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양각으로 새겼다.
몸돌 받침위에 얹힌 8각 몸돌역시 2곳에는 문비를, 2곳에는 향완(香垸)을 새겼으며 나머지 네 곳에는 사천왕상을 새긴것이 53호 국보와 거의 같다.
▲ 큼직한 앙련의 연꽃잎을 새긴 상대석과 난간 모습의 기둥이 있는 몸돌 받침에는 가릉빈가를 새겼다. 그 위에 얹힌 8각 몸돌의 각 면마다에는 2개씩의 문비와 향완(香垸), 그리고 사천왕상을 새긴점이 역시 53호 국보와 같다.
▲ 몸돌에 새겨진 문비, 사천왕상, 향완(香垸)의 모습이다.
몸돌 위 지붕돌(옥개석)과 상륜부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화려한데 특히 지붕돌의 경우 윗면에는 섬세한 기왓골을 있는 그대로 새겼으며 아랫면에는 서까래 등을 목조건물 느낌처럼 세밀하게 새겼다. 지붕돌 위에 이어진 상륜부도 53호 국보와 거의 비슷하게 앙화와 복발, 보륜등이 보이며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를 새겼는데 아쉽게도 머리부분이 모두 깨어졌다.
▲ 8각 몸돌의 문비, 향완, 사천왕상을 새긴 모습은 53호 국보와 같다. 다만 전체적인 석질의 느낌이 다소 차이가 나고 조각의 얕고 높음의 차이정도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옥개석 일부와 상륜부 꼭대기의 조각은 깨진채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국보 제53호 동승탑과 제54호 북승탑은 닮은 모습인데 54호가 앞선 53호를 모본으로하여 만들어진듯 하다.
연곡사에 들려 동승탑과 북승탑 국보 2점을 살펴본 후 조금 내려오면 서승탑이라 부르는 승탑이 또 하나 있다. 앞선 국보 2점은 누구의 승탑인지 몰라 동, 북 방향으로 부르지만 서승탑은 몸돌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이라고 씌어 있어 소요대사 승탑임을 알 수 있으니 보물 제154호 연곡사 소요대사 승탑이다.
▲ 북 승탑에서 100m쯤 내려가면 있는 소요대사 승탑(보물 제154호), 서승탑이라고 불렀지만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한 승탑이다.
소요대사 승탑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조선시대 승탑으로 보이는 종형 승탑이 몇개 지나고 그 아래 동백나무 숲속에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1907년 음력 9월 11일, 이곳 연곡사에서 부하들과 장열히 산화한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이다. 이로써 정유재란에 이어 왜군과 일본군에 의하여 절이 피해를 입고 불타버린 까닭이다.
▲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순국 100주년인 2007년 봄에 구례군민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
순절비 아래 평지로 내려서면 승탑이 하나 서 있는데 비신은 간데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국보 제54호가 현각선사의 승탑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함에 영향을 끼치는 현각선사 탑비로 보물 제152호이다.
다소 우수꽝스럽게 보이는 거북은 한발을 들어오리려는 모습이며 등에 있는 비석을 세우는 비좌에는 커다란 안상을 새기고 꽃무늬까지 특이한 형상에 전체적으로 철분 성분탓인지 색상도 붉은 빛이다. 비신 없이 비좌에 바로 얹힌 이수 중앙에는 玄覺王師碑銘(현각왕사비명)이라고 전서체로 쓰여있어 현각왕사 승탑임을 알려주며 국보 제54호 북 승탑이 현각왕사 승탑일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 현각선사 탑비(보물 제152호), 비신은 깨어져 없지만 비문은 고려시대 학사 왕융이 지었다고 하며 깨어진 파편들은 7곳에 분산 보관되는바 모두 236자가 해독 가능하다고 한다. 지금의 귀부도 여기저기 흩어진것을 1970년 수습하여 세운 것이다.
구례 연곡사는 지리산에 함께 위치한 화엄사 등에 비하여 덜 알려진채 정유재란과 구한말 의병전투 등으로 수차례 파괴되고 불타버렸으며, 해방후에는 6. 25전쟁과 빨지산 토벌등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어 최근까지도 사세가 많이 기울어 어려웠던 절집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국보 승탑이 2기가 있고 그 승탑과 연결된것으로 보이는 보물 탑비도 2기가 있으며 보물 승탑 1기는 소요대사승탑으로 비슷하면서도 시대를 지나며 달라지는 승탑의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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