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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는
신경외과 의사다. 곧 전문의 수련을 마치고 세계 최고의 대학에 교수로 임용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가 말기 폐암에 걸렸다. 나이 36세에.
그는 글을 썼다.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정체성에 대하여. 투병 생활 속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사랑했고 행동했는지.
그는 <뉴욕타임지>에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가’와 <스탠퍼드메디슨>에 ‘떠나기 전에’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독자들의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 그가 죽고 책이 출간되었다. 그의 아내 루시와 동료 의사 버기즈가 글을 보탰다.
사람은
아파 봐야 고통을, 죽어 봐야 죽음을 안다. 경험의 비언어성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자의 체험을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근접은 할 수 있다. 분투하고 성찰하는 소통의 능력을 갖춘 이의 글을 읽는 다면 말이다. 폴의 가식 없는 고통스런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아내 루시의 애정 어린 담담한 문체를 접하다 보면 그렇다.
우리는
죽음을 성찰하면서 삶의 가치를 확인한다. 시공간이라는 유한성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채워 넣어야 할 것인가? 폴은 그런 고민을 했던 것이다. 유능한 신경과학자의 삶을 설계하다가 병을 앓는 사람이 되면서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결국 그는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폐암 치료에 임했다. 다시 환자를 보았다. 글을 썼고 아내와 상의 후 딸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8개월 후 가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I can't go on, I will go no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 환자로서 폴은 전자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폴은 후자의 길로 나아 갔다.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 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마지막 글귀를 인용한 것이다. 각 자 힘든 삶의 고개를 오르다 보면, 우리가 이 두 문장 어디에 서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폴과 우리의 고민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즐겨 했다. 그의 감성과 이성, 도덕은 독서에서 비롯되었다. 문학으로서 영문학과 과학으로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그는 ‘생리적.영적 인간’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의학과 의술에 교차점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사의 길은 어렵다. 특히 신경외과 수련은 더욱 그렇다. 그는 뇌와 뇌의 작용에 학문적 호기심이 있엇고, 또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신경외과 수술에 소명의식을 갖었다.
그는 의사로서 의무를 여기까지 확장했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 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의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의사로서
그의 글에 쉽게 공감이 간다. 죽어 가는 환자를 살린다고 지새운 밤들이 주마등처럼 지나 간다. 오늘의 나는 그러한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성하고 분투할 일이다. 내게 죽음이 예고되는 때가 오면 아마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 믿는다. 물론 감정은 모르겠다. 잘 추스르며 가야겠지.
어찌됐든, 우리는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일주일은 짧지만 하루는 길다.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순간일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그의 가족 사진이 보인다. 한참을 들여다 본다. 눈물이 난다. 얼마나 애썼을까. 그에게 한마디 해 준다. “잘 살았어요. 친구. 담에 봅시다”
책 익는 마을 원진호
첫댓글 이 순간에도 고군분투하실 의료진들께 감사를 .... 폴에게 평안한 안식의 기도를 .....드립니다. 53회를 지나오는 동안 써내려가신 글을 통해서 성장한 이들의 마음을 함께 모아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