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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으로 투옥된 아버지는 감옥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섬, 고향 사르데냐 알레스, 어린 시절 추억을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 보내지 못한 편지는 먼 훗날 책으로 출판됐다.
이탈리아 문학상을 수상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 1.22~1937. 4. 27)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작년 가을 그림책 <여우와 망아지>로 출간되어 한국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다.
그람시는 4살 때 사고로 척추를 다쳐 장애를 입고 키 150cm 곱추로 살았다. 게다가 사고의 영향이었는지 평생 병약했다. 어렸을 적 어머니는 밤에 자다가 죽으면 바로 장례를 치르려고 매일 정장을 입혀서 재울 정도로 병치레가 잦았다.
그의 어머니는 실직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삿바느질로 7남매를 키웠다. 가난한 때문에 11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열정은 독학으로 토리노 대학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지만 그마저도 건강이 발목을 잡아 대학생활을 포기했다.
1913년 사회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조직해 사회당 내 좌파 세력을 결집해 1920년 파업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 미인 바이올리니스트와 혼인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1926년 투옥되는 바람에 아들들은 끝내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라나야만 했다.
한 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다. 자칫 이탈리아 파시스트 창시자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1883. 7.29~1945. 4.26)와 원 팀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대학 중퇴 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토리노 지국에 입사했는데 당시 토리노 지국장이 무솔리니였다. 이런저런 내부 갈등을 겪다 때려치고 나와 1919년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 신질서를 창간해 다른 길을 걸었지만, 무솔리니와의 인연은 끝이 아니었다.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다수의 활동가들 마저도 파시스트 정당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람시의 공산당과 그람시는 반파시스트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일례로 의회에서 만난 무솔리니가 그람시와 친한 척해 보겠답시고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냉랭하게 무시했다.
물론 그의 단호한 태도가 훗날 그람시를 죽음으로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람시와 공산당을 겁낸 무솔리니 정부는 파시스트 국민당 외의 모든 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고 이를 빌미로 공산당의 리더인 그람시를 투옥시켰다.
무솔리니는 그람시가 투옥된 직후, 20년 형을 선고하면서 "우리는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라고 그람시의 사상과 철학이 전파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애썼으나, 오히려 옥중에서 그람시의 두뇌는 빛났다.
그렇게 나온 여러 저서 가운데 대표작이 《옥중수고》다. 파시스트 정부는 철저하게 감시했으나 그나마 건강이 악화되어 의료센터로 옮겨져 친구로부터 필기구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작성된 옥중수고는 총 29권, 2848페이지에 달한다.
그람시는 1945년 4월 11년 옥살이 끝에 사망한다. 무솔리니는 뭐가 두려웠는지 그의 죽음이 완전히 확인된 며칠 뒤에야 그람시의 사망을 공식 발표하게 되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러 저작들이 밀반출되어 사후 10년 만에 빚을 보게 된다.
칼 마르크스도 그랬고 마르크스 글쟁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람시 또한 누구를 막론하고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젊은이들과 즐겁게 산책하면서 토론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람시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람시가 활동하던 시기엔 전 지구를 강타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비롯해 세계 혁명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당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달리,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해 양쪽 모두를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안정화되는 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점에서 고전적 마르스크주의와 입장을 달리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북부 공업지대와 농업 등 1차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남부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서로 상충하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즉, 남북 간 산업구조 문제와 지역 문제가 매우 심각한 차이를 보이며, 공산혁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새로운 지적 영감을 얻었다.
북부 도시노동자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공산당 활동은 남부지역 농민들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그람시 자신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상호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과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이른다는 정통 맑시즘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을 깨닫고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주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람시에게는 물적 토대에 대한 분석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의식, 국가와 같은 상부구조가 더 관심사였다. 그래서 그를 "상부구조의 이론가"라고도 부른다. 더욱 중요한 차별성의 하나는, 고전적 정치경제학자가 빠지기 쉬운 경제적/기계주의적 위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람시는 비결정주의적 역사관을 지향했다. 비결정주의 역사관이란 역사와 사회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로서 참가하는 인간의 투쟁, 의지, 참여에 의해 결정된되는 것으로,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미래가 그때 그때 인간자의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본 것은 아니다. 기본적 지향은 사회주의이나 그것의 필연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학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장기간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러한 맥락에서 왜 자본주의는 안정화되고 내구성을 지니느냐에 관하여 규명하려 했다.
그람시는 1871년 이후 혼란 속에서 자본주의가 벗어나 안정화되고 확산되어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람시는 상부구조의 중요성, 특히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안정화되어가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가 관념보다는 물질, 상부구조보다는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전도시켰다면, 그람시는 상부구조를 강조하고 그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기초를 떠나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 마르스크주의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통적 마르스크주의를 보완,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주요개념은, 1.정치와 헤게모니, 2.역사적 지배블록, 3.시민사회와 통합국가(Integral State), 4.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5.진지전과 기동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국가의 기능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훨씬 더 확장, 발전, 성숙되어 가고 있다고 보았다. 즉 자본주의가 경쟁적 자본주의에서 독점적 자본주의로 발전해가면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어 갔다고 본 것인데, 그는 이 과정에서 경찰국가가 아니라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말했다.
또한 국가는 경제사회영역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주도하며 더 나아가 복지 국가로까지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해주는 기능과 역할로까지 확대되었다고 하면서, 국가는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시민사회를 통해 모든 영역의 활동과 의식을 지배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헤게모니적 지배를 확장시키려고 확립하였다고도 한다.
만약 그람시가 좀 더 살았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은 만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