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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집(淵齋集) 송병선(宋秉璿)생년1836년(헌종 2)몰년1905년(고종 42)자화옥(華玉)호연재(淵齋), 동방일사(東方一士)본관은진(恩津)소자구범(九範)시호문충(文忠)
淵齋先生文集卷之二十三 / 序 / 春睡堂鄭公遺集序
昔太史遷曰。巖穴之士名湮滅而不稱。蓋悲之也。廼若春睡堂鄭公。遯跡行義。而不見知於世者。豈非其人歟。其偉言高誼。亦歸於湮滅。尤可悲也已。公生於文獻古家。敦本實而後文藝。修之於身者。足以施於家。風於鄕。故人以
小一蠧
稱焉。文獻公言行。遭罹慘禍。其得傳者無幾。公收拾而奉質于寒岡鄭先生。纂成實紀。凡於先德。竭誠闡揚。殆同李潛溪之於文元先生也。嗚呼。以公之賢。阨於韋布。晩霑一命。而亦非展其所蘊也。良材置散於溝壑。逸步局促於皁櫪。是果命與數者有以限之耶。且其遺文。以後承零替。散佚。而幸存者。亦甚寂寥。竊念公非蘄名於身後。而世莫有聞而知之者。則安得太史大筆。爲之揮發潛幽。使之不落莫耶。雖然。公早登寒岡之門。講質經禮。亟蒙印可。許以大賢有後。則此足以不朽公矣。奚待於後世之子雲堯夫哉。今此遺編。雖云零碎。猶足爲全鼎之一臠。則固不可以不傳。至於詩文之聲調格力。非余膚淺所可議到也。故只敍所感如右。非曰玄晏。塞其後昆之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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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집(寒水齋集) 권상하(權尙夏)생년1641년(인조 19)몰년1721년(경종 1)자치도(致道)호수암(遂庵), 한수재(寒水齋), 황강거사(黃江居士)본관안동(安東)시호문순(文純)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적전제자(適傳弟子).
寒水齋先生文集卷之三十一 / 墓表 / 監察贈參判崔公 世榮 墓表
光海昏亂。賊臣爾瞻倡讎母論。勢焰黨天。時則有若太學生崔公琢。倡多士抗章。直斥其兇邪。聲名震一時。遂杜門田廬。與世相忘者十餘年。仁廟改玉。擢文科官郡守。尤菴宋先生銘其墓。亟稱其賢。有丈夫子二人。公其長也。諱世榮字夢與。生於萬曆癸丑復月廿日。天資厚重。不妄游戲。自幼好讀書。及長修擧子業。有名場屋。庚寅中司馬。壬辰丁外艱。居喪盡禮。制終奉母夫人居于墓下。爲力田專養計。戊戌筮仕爲典牲參奉。庚子陞奉事。乙巳母夫人下世。公年已衰而率禮如前。公嘗爲奉事時。値慶科。做點于泮宮。臺官流言以詆訾國子長劾遞。後國子長秉銓。知其誣。首先牽復。除寧陵參奉。例遷司瞻奉事。仁宣大妃之喪。以山陵監董勞陞司圃別提。出爲三嘉縣監。時邑儒權鑑以尊尙儒賢。見仇於兇黨。方伯欲鍛鍊成獄。而公終始守正。確然不撓。方伯大加慍怒。而亦不敢中傷。有一勢家子畜邑妓橫甚。公大斥不饒。其人銜之。嗾繡衣構誣。經年逮獄。卒無事實。壬戌拜司憲府監察。有盡職稱。秋除平陵察訪。時値荐饑。盡心撫摩。郵卒穌馬政擧。漁戶徵供。一倂蠲除。積瘼如洗。衆皆懷惠。秩滿閒居數年。氣力康健。丙寅五月廿日無疾而逝。壽七十四。始葬交河綱橋里。丙戌移窆于公州治西曲火川負坎之原。後以長子貴贈嘉善大夫戶曹參判。二配俱贈貞夫人。淑人徐氏祔焉。公性至孝。竭力事親。左右無違。奉先極其誠敬。與弟世章友愛篤至。世章早歿。躬莅凡百。至鬻己田而營葬。撫視諸孤如己出。推以至於宗族。無不得其歡心。所與交皆當世賢人君子。平生無躁暴之言。峭刻之行。酒戶甚寬。而居官未嘗近口。律己甚嚴而撫下以仁。去後民追思不忘。樹石而誦之。蓋其廉節。是公之長物。所至不以一毫自累。及歸環堵蕭然。而處之晏然。常以爲譜牒不可不明。裒稡氏族之書。編成一部。以爲講睦之資。全州之崔。以高麗侍中阿爲上祖。入我朝。有曰霮。集賢殿提學。有曰德之。藝文館直提學。世號煙村先生。立祠俎豆。高祖諱彥淸。奉事。是一蠹之彌甥。人稱
小一蠹
。曾祖諱稀壽。判官。祖諱應夏。縣監。妣平康蔡氏。宣敎郞忠益之女。尤齋先生撰郡守公墓表。備列其賢德。淑人貫連山。其考贈佐郞效積。稟性淑哲。取與不妄。甘旨之供。蘋蘩之薦。一出於至誠。宗門式之。年八十六。歿於乙亥八月十日。擧三男二女。男長邦彥。以學術屢登別薦。歷幾官。今爲老職同樞。次邦藎,邦顯。女適宋彝錫縣監。次許玶。邦彥四男。守綱,守紀,守經,守約。守紀爲邦藎後。四女黃鐏,李挺英郡守,金日井,尹壽兼。邦顯三男。守遜,守道,守迪佐郞。二女安希仁,尹侃。宋壻三男百源,性源參奉,萬源。四女李興朝進士,李思道,金時敍,趙明濟。許壻二男紳,繗。女未行。內外曾玄不盡錄。嗚呼。公以名父之子。祇承慈訓。行誼兼備。文藝夙成。宜其早揚王庭。大鳴于世。而不幸蹉跎。棲遲朱墨之間。惜哉。余綴戚屬。自幼周旋於牀下。景仰有素矣。顧今長老零落已盡。知公之詳莫余若也。同樞公徵以墓文。義不敢辭。遂撮少日所見聞。略序如右。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 묘표(墓表) / 감찰(監察) 증(贈) 참판(參判) 최공(崔公) 세영(世榮) 묘표
광해(光海) 난정(亂政) 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앞장 서서 수모론(讎母論)을 주장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런데 그때 태학생(太學生) 최공 탁(崔公琢) 같은 분이 있어 많은 선비들의 앞에 서서 그의 흉물스럽고 간사함을 항장(抗章)으로 곧바로 배척하여 그 명성이 당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는 마침내 문을 닫고 전려(田廬)에 앉아 세상을 잊고 살기를 10여 년 만에, 인조(仁祖)가 반정하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우암(尤菴) 송 선생도 그의 묘에 명(銘)을 쓰면서 그의 어짊을 극구 찬양하였다.
그에게 장부다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공이 맏으로 휘는 세영(世榮) 자는 몽여(夢與)였다. 만력(萬曆) 계축년(1613, 광해5) 11월 20일에 태어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중후하여 함부로 놀거나 장난하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과거에 관한 공부를 하여 과거 마당에서 이름을 날려 경인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임진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으면서 예도를 다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 아래에 살면서 오로지 농사지어 봉양하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술년에 벼슬길에 올라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이 되고 경자년에 봉사(奉事)에 올랐다. 을사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공이 그때 나이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버지 상 때와 똑같이 예를 지켰다.
공이 봉사로 있던 시절 경과(慶科)를 당하여 반궁(泮宮)에서 주점(做點)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국자장(國子長 성균관 대사성)을 공이 헐뜯었다는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공을 탄핵하고 체직시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국자장이 전지(銓地)에 있으면서 그 사실이 무함인 것을 알고 공을 맨 먼저 복직시켜 영릉 참봉(寧陵參奉)을 제수하였다. 그 뒤 예에 따라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가 되었고, 인선대비(仁宣大妃 현종(顯宗)의 비)의 상에 산릉(山陵)의 일을 맡아 다스렸던 공로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올랐다가 삼가 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그 고을 선비 권감(權鑑)이 유현(儒賢)을 존중히 여긴다는 이유로 흉한 무리들이 원수로 여기고 방백(方伯)은 그것을 죄로 만들어 옥(獄)을 꾸미려고 하였는데, 공은 끝까지 정도를 지키며 확고부동하였다. 그리하여 방백이 그에 대해 크게 화를 내었지만 감히 중상은 하지 못하였다. 그 뒤 한 세력가의 자제가 읍기(邑妓)를 데리고 살면서 횡포가 심하자 공이 그를 용서없이 물리쳤는데, 그가 앙심을 품고 수의(繡衣)를 사주하여 공을 무함한 결과 1년 넘게 옥에 갇혔으나 끝내 그러한 사실이 없어 풀려났다.
임술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책을 다한다는 칭송이 있었고, 가을에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기근이 거듭 닥친 때였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손을 써서 우졸(郵卒)도 되살아나고 마정(馬政)도 잘 되었으며, 어호(漁戶)의 징공(徵供)도 일체를 면제하여 쌓였던 폐단들이 씻은 듯 없어졌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은혜로움을 느끼었다. 질(秩)이 차고 나서 몇 년을 한가히 보내며 기력도 강건하다가, 병인년 5월 20일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74세였다. 처음에는 교하(交河)의 강교리(綱橋里)에 장사 지냈다가 병술년에 공주(公州) 읍 서쪽 곡화천(曲火川) 자좌(子坐)의 둔덕으로 이장하였는데, 그후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두 배위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숙인(淑人) 서씨(徐氏)가 부장되어 있다.
공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있는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좌우로 뜻을 어김이 없었고 조상도 성경(誠敬)을 다하여 받들었다. 아우 세장(世章)과 우애가 돈독하였는데, 세장이 일찍 죽자 모든 일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전답까지 팔아 장례를 치렀고, 아비 잃은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그리고 겨레붙이들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환심을 얻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가 사귄 친구는 모두가 당대의 현인이요 군자였다. 공은 평소 조급해 하거나 폭언하는 일이 없었고 각박한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술도 무척 좋아했지만 관직에 있으면서는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자기 몸가짐은 매우 엄하게 하면서도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하여 그가 떠난 뒤에 백성들이 잊지 않고 그리워하면서 비를 세워 송덕하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청렴한 절조야말로 공을 대변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될 정도로 가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자신에게 누가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돌아오고 나면 온 집 안이 썰렁하였으나 자신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공은 항상 보첩(譜牒)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씨족(氏族)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1권의 책을 만들어두고 그것을 화목을 다지는 자료로 삼았다.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고려국의 시중(侍中) 아(阿)를 시조로 하고 있다. 아조에 와서 담(霮)이라는 이는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었고, 덕지(德之)라는 이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세상에서 그를 연촌 선생(煙村先生)이라고 불렀는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고조인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로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소일두(小一蠹)
라고 불렀다. 증조의 휘는 희수(稀壽)로 판관(判官)이고, 조부의 휘는 응하(應夏)로 현감이었다.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선교랑(宣敎郞) 충익(忠益)의 딸인데, 우재(尤齋) 선생이 공의 아버지 군수공(郡守公)의 묘표(墓表)를 쓰면서 부인의 현덕(賢德)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숙인(淑人)은 관향이 연산(連山)이고 그의 아버지는 좌랑(佐郞)에 추증된 효적(效積)이다. 부인은 성품이 정숙 명철하고 주고받음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시부모 봉양하는 일과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일을 하나같이 지성으로 하여 온 집안이 존경하고 본받았다. 나이 86세로 을해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방언(邦彦)은 학술(學術)로 여러 번 별천(別薦)에 올라 몇 관직을 역임하고 지금은 노직(老職)으로 동추(同樞)가 되어 있다. 그 다음은 방신(邦藎)과 방현(邦顯)이다. 큰딸은 현감 송이석(宋彝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허평(許玶)에게 시집갔다. 방언은 4남을 두었으니 수강(守綱)ㆍ수기(守紀)ㆍ수경(守經)ㆍ수약(守約)인데, 수기는 방신의 양자가 되어 갔으며, 네 딸은 황준(黃鐏)ㆍ군수 이정영(李挺英)ㆍ김일정(金日井)ㆍ윤수겸(尹壽兼)에게 각각 시집갔다. 방현은 3남을 두었는데, 수손(守遜)ㆍ수도(守道)와 좌랑 수적(守迪)이고, 2녀는 안희인(安希仁)ㆍ윤간(尹侃)에게 시집갔다. 사위 송씨는 3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백원(百源)ㆍ참봉 성원(性源) 그리고 만원(萬源)이고, 딸은 진사 이흥조(李興朝)ㆍ이사도(李思道)ㆍ김시서(金時叙)ㆍ조명제(趙明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 허씨의 두 아들은 신(紳)ㆍ인(繗)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밖에 내외 증손과 현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했다.
아, 공은 이름 있는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자훈(慈訓)을 잘 받아 행의(行誼)까지 겸하여 갖추었으며 문예(文藝) 또한 숙성하였으니, 일찍이 왕정(王庭)에 이름을 날리고 세상을 크게 울렸어야 옳았을 것인데, 불행히도 길이 어긋나 주묵(朱墨 하급 관리를 의미함)의 사이에서 맴돌다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내가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의자 밑에서 놀았기에 평소에 공을 존경하고 사모해 왔었는데, 지금 보면 장로(長老)들이 이미 다 가 버리고 없어 공에 관하여 나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동추공이 부탁한 묘도 문자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젊은 시절 듣고 보았던 것을 엮어 대략 이상과 같이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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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미생(彌甥 자매(姉妹)의 손자)이었는데->미생(彌甥 외손자)이었는데
*일두 사위 최호문 그 아들 최언청 최언청은 일두의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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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재집(厚齋集) 김간(金榦)생년1646년(인조 24)몰년1732년(영조 8)자직경(直卿)호후재(厚齋)본관청풍(淸風)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의 문인
厚齋先生集卷之四十五 / 行狀 / 同知中樞府事崔公行狀
公諱邦彥字美伯姓崔氏。系出全州。遠祖諱阿。高麗門下侍中諡文成。入我朝有諱霮。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是生諱德之號煙村。早負時望。以藝文館直提學。告老歸鄕。其時如六臣諸賢。歌頌其行。比之二疏。士林尊慕。凡平日遺馥之地。皆立祠俎豆之。見東儒師友錄。歷三世諱彥淸。濟用監奉事。一蠹鄭先生之彌甥也。素無外慕。移疾守靜。世稱
小一蠹
。卽公五代祖也。高祖諱稀壽。歷典七邑。俱有聲績。晩爲安東判官。見官長年少。恥於折腰。遂投紱歸家。曾祖諱應夏縣監。能潔己自靖。終不染迹於昏朝。沙溪金先生稱其賢。以爲長者人也。祖諱琢。當金墉禍作。疏論爾瞻奸凶。杜門不出。絶意世事。仁祖改玉。始闡大科。而志操高潔。不肯與俗軒輊。以此不偶於時。官止騎曹郞。尤菴宋先生銘其墓。考諱世榮。爲三嘉監務。伸爲斯文士人權鑑之獄。見忤於方伯。而終始守正不撓。爲政仁恕。一境大治。去後邑人立石頌其德。至今追思歌之。妣連山徐氏。贈戶曹佐郞效績之女。贈兵曹參判澍之孫也。慈惠溫良。安貧樂義。菽水屢匱而少無咨嗟語。以崇禎甲戌九月一日甲寅擧公。公天資沈靜。氣宇端重。自在髫齔。不妄言笑。坐必跪行必徐。儼然有成人規度。見者異之。皆以爲生而得之。及長受業於尤菴先生門下。篤志力行。刻苦用工。時遊先生門者甚衆。而至其忠實敦礭。皆讓於公矣。以親意不廢公車業。屢擅場屋。輒居前列。癸丑發兩解。覆試只隔一宵。而有女弟產病。公曰科事雖重。同氣之憂不輕。遂不赴。自此無意進取。專心此學。一以涵養本原爲主。不事章句文字之末。踐履日益固。造詣日益深。華聞日以益彰。閔老峯鼎重,金退憂壽興兩相國。以經明行修。薦于朝。癸亥除顯陵參奉。公聞命卽出謝。人或疑其自輕。公曰抱關擊柝。聖訓昭然。古人奉檄之喜。正吾今日事。自昔聖賢行事。只求其合於道而已。未聞以官之高下。爲出處也。陵是世遠。祧位。經亂之後。罍爵之屬。遺失頗多。前任者因循苟度。不虔甚矣。公曰一日在職。當盡一日之責。卽報于禮部而修改之。晨則早起奉審陵寢。晝則不用肩輿。徒步巡山。雖祁寒溽暑。無一日或廢也。律己甚嚴。自奉且約。當夏日長。不進午飯曰。古人爲祠官。有私自齎糧而往者。吾何可復責剩哺於朝夕之外哉。陵人感其惠。到今稱美之不衰。丙寅陞廣興倉副奉事。倉多流來積逋。公別儲斛上餘米。以補舊縮。未卒事而遭外艱。時公年踰五十。血泣過制。致有目疾。尤菴先生貽書戒之。朋舊亦有泣懇者。而砭焫無功。竟致左眼不辨色。己巳群兇當朝。坤殿出宮。尊卑易位。倫紀斁絶。前判書吳公斗寅與朴公泰輔等。叫閽抗章。公亦與之同參。疏入天威震疊。親鞫殿庭。吳,朴兩公被重刑。纔出都門而死。公撫屍哭曰。人孰無死。死得其所爲難。吾以人微官卑。同其事而不得同其死。豈不有愧於心。終身以爲恨。未幾尤菴先生有楚山後命。公與同志李汝九諸人。議疏伸師冤。爭爲疏頭。汝九以公有老親在堂。強自當之。及汝九竄。公以爲罪同幸免。於義有歉。上章請罪。喉司格不奏。操文哭尤菴先生。築室於楊州松楸下。扁其堂曰養正。卽先生所嘗手書者也。揭諸楣間。以爲依仰。嚴恭肅敬。若侍亟丈焉。甲戌更化。拜黃山察訪。初欲不赴。人多以家貧親老爲勸者。公黽勉作行。到任盡除其弊瘼。驛卒大蘇。冬陞典牲署直長。遞歸郵卒立碑以頌之。乙亥秋遭內憂。哭踊頓絶一如前喪。柴毀成疾。幾不能起。見者危之。服闋除慶安察訪。呈病圖遞。是後家食者又二年。辛巳除光陵參奉。八月移翊衛司侍直。每入書筵。講官勸令同爲敷奏文義。公曰侍直之任。只管侍衛左右而已。與講官事體不同。若迭奏經義。是越吾職也。且恐有自售之嫌也。家貧入直時。不能備朝晡食。至日中一飯而已。人謂之日中宮僚。轉副率,衛率,司宰監主簿。甲申出爲利仁察訪。驛有三日支供。十驛輪回之規。流來已久。各驛務勝。以致三日屠一牛。中間一督郵除牛捧米。後來者旣捧其米。又徵其肉。遂爲驛中巨弊。公到卽除其米。復減饌數。一驛安之。稱其廉平。己丑拜翊贊。庚寅轉司禦。癸巳遷尙衣院僉正。以正四品年八十。陞僉知中樞府事。己亥用肅宗大王耆社恩。加嘉善階拜同知中樞府事。癸卯公年九十。或勸公子弟聞朝以祈恩。公聞之大驚曰。凡諸干澤。君子恥之。況今師門遭辱。親舊罹禍。惟願速死而無知。此時何時。乃出此言耶。四月患毒痢。稍間輒梳洗扶將。拜謁家廟如平時。諸子泣爭不聽。證復劇。尫羸委頓。坐臥須人。而手不釋師門文集薛氏讀書錄。翌年甲辰三月。疾病。喟然歎曰。吾今九十一歲。死無所恨。惟同門諸人。盡爲淪喪。只餘一樓巖而垂死遠謫。賜環無期。師門益孤。吾目不瞑矣。欲強起手書遺敎。而氣竭還臥。竟以閏四月二十六日。考終于城西正寢。以是年十月九日。葬于楊州治東金村枕亥之原。從先兆也。公爲人。篤厚慈諒。不飾邊幅。溫如春風。浻如氷壺。發軔正路。德器夙成。少日挾冊過巷。有一少艾倚門獻笑。公自後不復由其路。人或問之。公曰有不潔之物。終不明言。知之者已知有儒者氣象。家業素寒。不奠厥居。金參奉榮後。公之從祖姑夫也。富甲湖中。許一別業。公不肯曰一被難忘之恩。終有難處之端。又有一親舊分與其莊。公曰吾若一朝入居。其守莊僕隷必失所而怨我。我何爲哉。尤菴先生甚器重之。爲書行一不義殺一不辜得天下不爲及閉戶看書獨睹昭曠等語以與之。其所以奬許勸勉之意可見矣。嘗承師旨。與李箕洪,李喜朝。共編摩二程書。事具載遂菴權公弁文中。讀書如遇疑晦。隨處付籤。不以書質。躬造師席。逐件細叩。以極其歸趣焉。所居斗屋。不蔽風雨。有一小戶。僅能容人。閔尙書鎭厚來見曰。此屋外看似甚熱。內頗淸涼。公曰廣廈之人。安知草屋之事。屋卑天遠。涼自生矣。權尙書尙游體肥大。出入罣礙。不覺汗出曰。此戶不改。不可復來。世傳以爲美譚。湫卑隘陋。不可堪處。而公常在其中。怡然自適。雨則以器承漏。隨其燥處移床看書曰。樂在此矣。曾於尹美村宣擧。亦有東面之義。及其子拯以尤菴門人。後極狼狽。公痛斥曰邢七復生也。然前後儒疏之攻尹者。語涉美村則輒戒子姪。幷令不參曰。吾於魯西。嘗有師生之分。何可摳衣於生前。而倒戈於死後也。人或疑其所處。公曰吾若忘其舊義。到今反噬。則亦一拯也。吾所以爲此者。非專爲魯西。實爲吾師門也。楊州時。與南溪朴先生居相近。時往講論。先生聞公待魯西事曰。子可謂古之君子人。非今世士也。其後利仁之行。歷拜魯院。不見尹拯而去。其子行敎以應敎往營封疏。不入郵館。遞馬郵村以嘗之。公終不出見。行敎大銜之。常戒子孫曰居家孝慈。接人恭謹。仕宦無躁進之心。處貧存溝壑之念。則自無憂畏苟且之事。酒戶甚寬。而浹洽則止。未嘗及於亂也。筆法亦遒勁。人爭傳之。遍於屛障。晩而鰥居。有勸卜姓者。公誦鄭古玉我今三十六年鰥之句曰。古玉於吾爲祖先。以孫法祖不亦可乎。九十之年。猶夙興盥櫛。祗謁家廟。當忌祀則雖盛冬。不廢沐浴。家人慮其病。引朱夫子七十傳重事以爲喩。公曰此只當自量其筋力如何。筋力可爲則何可預爲慮病而廢之耶。益致澡潔。以盡如在之誠焉。公胸次坦然。絶無査滓。制行甚高。一於忠實。持身必嚴整。處世務韜晦。爲學以誠意正心爲本。讀書以窮理致知爲先。端坐一室。終日對越。望之凜然可畏。卽之溫然可親。此雖本於稟質之美。亦可見其淵源之所自也。平生無疾言遽色。處事必從容優爲。惰慢之氣。不設於身上。營爲之言。不出於口外。聞人之善。思必體行。見人之失。誘而導之。無論賢愚。咸得其心。雖在異趣。皆知尊敬。其中亦多有感而化者。金三淵昌翕常語人曰。玉洞崔丈。金玉其人。譚者以爲實錄也。以公之賢。如使遇時。盡展其平日所蘊。則上可以補君德。下可以鎭淆俗。其所施爲。必有卓然可觀者。而迺沈于下僚。位不充德。至其晩年超資。皆以壽得。又非朝家命德之秩。人莫不以世無知公者爲歎焉。常時所著述及與人問答者。多不收輯。只有若干篇藏于家。配咸平李氏。學生鳳陽之女。龍溪先生榮元之孫也。溫仁和柔。甚有婦道。先公二十一年歿。初葬于楊州東板谷。及公之葬。遷而合窆焉。生四男四女。男長守綱,次守紀出爲仲父邦藎後,次守經公在時皆先死,次守約。女通德郞黃鐏,府使李挺英,金日井,尹壽兼。守綱初娶完山李命寬女。生一男普命。再娶綾城具廈女。生二男二女。男普翼,普天。普天出爲宗人斗一後。女辛聖憲,趙光臣。三娶淸風金礭女。生一男普昌殀。守經娶豐壤趙振耘女。生一男二女。男普淵。女趙重彬,金相鼎武科。守約娶嘉平李時膺女。生一女。無子。取從弟正郞守迪子普悅爲後。女李鳴岐。黃鐏繼子宅河武科。李挺英生一男一女。男相華縣監。女金相良。金日井生一男一女。男普演。女朴弼商。尹壽兼生二男一女。男佾,儐。女高翊聖。普翼生一男致雲。以公命爲普命後。其餘內外玄曾。不能盡錄。榦與公有契數十年有餘。雖不能源源相從。其愛悅而尊慕之則深矣。不幸年來一番人運氣不佳。汝九,同甫。相繼淪亡。今公又告逝矣。白首餘生。只有後死之痛。今者公之孤守約。以纍然縗服。不遠數百里而來。爲請公狀德之文。第念榦衰耗甚矣。又不嫺於文字。則其於不朽之託。何敢承當。顧守約責以平日相許之義。而其請愈勤。其義有終不可得而辭者。玆敢不自量度。謹就狀藁。略加檃括而歸之。以備立言君子之財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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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來庵集) 정인홍(鄭仁弘)생년1536년(중종 31)몰년1623년(인조 1)자덕원(德遠)호내암(來庵)본관서산(瑞山)봉호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특기사항조식(曺植)의 문인.
來庵先生文集卷之十三 / 碑文 / 一蠹鄭先生墓表銘 幷序
先生諱汝昌。字伯勖。河東其本貫也。曾王父之義。判宗府寺事。王父復周。判典農寺事。父六乙。贈漢城府左尹。先生景泰元年庚午生。生有異質。左尹爲義州通判時。華使張寧作說名之。後左尹死於叛將施愛之亂。先生號痛幾絶。亂定。入衆屍中求遺體。歸葬鄕山。先生時年十七。服關。自上錄左尹衛國功。爵其嗣。先生以父敗子榮。心不忍。辭之。不求仕進。奉母夫人甘旨不懈。凡母夫人所爲。不至不義。不敢違。母夫人亦不以非義。傷子志。故子母俱無過擧曲順之失。人稱行義家。母夫人以決科爲榮。乃遊太學。竝遊輩流皆尊敬之。南歸省親。親家癘染方熾。人勸令次外。先生便入。未幾母夫人病不起。哭泣幾滅性。俗多拘忌。先生直行不顧。襲歛殯奠皆如禮。癘患自熄。先生終無恙。人以爲癘不能相染也。及葬。方伯令郡官辦葬具。辭以煩民怨歸先親。郡守曺偉感其意。親往弔祭。人有助者亦不聽。又移左尹墓同穴。三年足不出墳山外。目不見婦人面。旣祥。入頭流山刹。遑遑如有求而不得者。或勸酒肉。輒涕泣不已。郡守親往。勉以先王中制不敢過之義。乃不敢辭。成廟特除昭格署參奉。先生以人子分內事。上章固辭。成廟題其紙尾曰。聞汝之行。予不覺涕出。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其磽薄老弱者。先生自占。兄弟猶心不厭者。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不悅。便求補外。甲寅除安陰縣監。知民疾苦。明立科條。期年合境相戒。莫敢欺負。方伯信重。凡獄事難辨者。必與諮議。乃折自言。而不利者咸稱神明。莅事之暇。選鄕子弟秀者。親爲誘誨。學者多歸之。被戊午史禍。謫鍾城。無怨悔色。定庭燎役。每使星入公廨。執事惟謹。蓋行患難而自得者也。鍾城近胡境。舊無文風。先生敎誨不倦。未久有中進士科者。在謫所七年。甲子夏四月不淑。轝歸咸陽。葬昇安洞左尹墓傍某坐某向之岡。萬曆三十八年庚戌八月。國王遣官致祭于家。其文曰。曰眞儒。曰百世師也。士子建書院于郡東面。賜號蘫溪。春秋行享事。先生道德。於是乎彌彰矣。先生之學。以篤行踐實爲本。以不自欺爲日用工程。黯然之實。充積於在世之日。日章之美。自孚於歿世之後也。嗚呼。宇宙漫漫。犧黃而宋元。幾箇人是男兒。幾男兒是聖賢。況我東土聖遠地偏。道學不明。士趨多岐。訓誥以汨之。詞章以奪之。敺之以聲習。亂之以似非。故其能晦明謙光。不梏於俗學者。蓋絶無而僅有。先生以濂洛爲準的。不炫燿。不求知。爲己任者。斯道也。自期待者。聖賢也。故生事葬祭以禮者。平生之百源也。至于兄弟。信乎朋友者。百行中一事也。爲縣。吏慴民懷。愈久不忘者。設施之端緖也。惜乎道德。不咸于世。偏於一縣而已也。先生取婦宗室桃平君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男長曰希稷。次曰希卨。希稷嫡無嗣。更取良家女。生子如山。以母家非顯族。希卨自主後久不歸。如山生子天壽。天壽生子元禮。始以名賢後授參奉。桂壽生子興禮。亦授參奉。女長適副護軍趙浩文。生子
彦淸
。女壻曰任虎臣。觀察使。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先生塋域。迄無表。桂壽倩工赴役。旣就緖。元禮立祠堂。妥靈承祀。後事其庶幾矣。銘曰。
鳳來周岐。去後遺儀。麟遊魯郊。僕且留蹤。惟我先生。鳳麟于東。昇安舊洞。水洋山崇。爰樹之石。三也無窮。
[주-D001] 趙 : 《一蠹集》 遺集 卷3 行狀, 《桐溪集》 卷4 〈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 등에는 '崔'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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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옹집(炭翁集) 권시(權諰)생년1604년(선조 37)몰년1672년(현종 13)자사성(思誠)호팔음재(八吟齋), 탄옹(炭翁)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문인.
炭翁先生集卷之十二 / 墓碣銘 / 崔孝子墓碣銘改刪定
君諱璥。字仲潤。生長懷德宋村。懷乃鄒魯之鄕。鄕人狀其行。轉聞于朝曰。崔璥誠孝。得之天性。其制行古人所罕。士夫庶氓。莫不歎誦。謂斯人不可使泯沒。己酉四月。贈務功郞靑巖道察訪。君本全州人。高麗平章事阿之後。
七世祖德之。直提學。名德丕顯。文廟禮遇之。年滿退居靈巖。一時諸賢如六臣。皆贈詩以別之。全州靈巖人。立祠享之。
曾祖彥淸。濟用奉事。一蠹鄭先生之外孫。
祖耆壽。
考應生。沖庵金先生之外曾孫。
妣恩津宋氏。錫昌之女。大族世有聞人。君稟美質。篤志力行。勤學好問。不幸短命。生天啓丙寅三月廿二日。卒庚寅九月廿一日。先生長者皆惜其早夭。金氏世居尼山。高麗高陽府院君南得之後。祖水軍虞候潔。考奉直郞名立。妣丹陽禹氏。學生忠男之女。孝於親。父病臨死。血其指進之。旣嫁。順承內助爲賢婦。旣寡。養孤游學以有成。生甲子二月廿七日。卒丁未正月廿九日。君初葬尼山月谷。甲辰三月。改葬公州南大谷辛向之山。金氏祔葬。男基萬。娶學生慶州崔淨女。基億。娶驪興閔光熠女。基萬要余墓表。銘孝子令妻之云。非余妄也。樂道人善者。其傳以揚之。銘曰。
孝子令妻。餘慶不匱。子孫保之。永錫爾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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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헌집(白軒集) 이경석(李景奭)생년1595년(선조 28)몰년1671년(현종 12)자상보(尙輔)호백헌(白軒), 쌍계(雙溪)본관전주(全州)시호문충(文忠)특기사항조찬한(趙纘韓)의 문인.
白軒先生集卷之三十五○文稿 / 行狀 / 處士成公行狀
公諱輅。字重任。其先昌寧人。代有衣冠。五代祖曰槪。嘉善大夫。京畿都觀察黜陟使。高祖諱熹。朝散大夫。承文院校理。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曾祖諱聃命。成均生員。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雲。資憲大夫。兵曹判書兼世子右賓客。贈諡景肅公。考諱永國。奉正大夫。行通禮院引儀。
妣全州崔氏。承訓郞行濟用監副奉事彥淸之女。
奉事公。乃一蠹鄭先生之外孫也。有至行。
崔氏誠孝卓異。生公於嘉靖庚戌。幼而穎秀。纔勝冠。受業于松江鄭相公之門。有能詩聲。中庚午進士。游泮宮。言論凜然有正直氣。多士推重。自少時。已無宦情。不事擧子業。乃書九容,九思。揭諸座右。常自省察。所與友善。多一代名公卿。行誼著聞。薦剡交加。初授司饔院參奉。再除齊陵參奉而皆不起。松江爲時輩所吹毛。公以其門徒。亦困於唇舌。益無意於世。惟麴糱是托。醉則悲咤歌呼。放形骸於風塵之表。好善嫉惡。出乎其性。如其人之善也。則雖疏如舊識。笑語訢訢。惟恐其不我欲也。如其人之不善。則羞與之同席。叫號傲睨。若無覩焉。知公者謂公放達。不知公者誚公之狂。所著詩篇。動盈箱篋。而一夕盡取以焚之。今所存一卷。收聚於散逸者耳。家于西湖之上。謝絶人事。隣翁置酒相邀。則輒造飮。自號石田。亦曰三一堂。曰潛巖。常戴蔽陽子。又自稱曰平涼子。公嘗自序曰。先生不知何許人也。見水底有一石狀甚奇古。水淸則見。水濁則不見。因以爲號。又號三一堂。三一者。民生於三。事之如一之義也。又號石田。蓋取其土薄不用也。性嗜酒。自謂陶靖節死後。獨得其妙爾。抱迂守拙。無意人間事。又不喜讀書。只解作絶句。自吟自遣。好談仙方。醉酒則高聲放歌。或長吟景翳翳而將入撫孤而盤桓之句。唏噓歎息。年老而氣不衰。遇酒必大呼痛飮。人皆笑之而不知人之笑之也。平生有詩曰。男子心懷一嘯中。仰看天日俯書空。此其大略也而然。見此則可想其氣槩矣。公十三而孤。奉偏親以禮。朝夕進飯。必先嘗躬奉。己食。必斂其盤器。盛之一櫃。晨昏愉惋。滫瀡備供。亦不苟求人。以誠饋。侍側不以褻服。常衣直領衣。嘗有親癠月有旬餘。日夜憂煎。年未四十。而鬚髮爲之白。旣復常。白者還黑。壬辰。慈親患目疾不能視。且足病不良。逢亂。親負以避。得船便。自江都轉往湖南海隅。蚩甿猶知感慕。餉遺相繼。甘旨之奉。得如平日。戊戌丁憂。公年已衰而致毀不少懈。公以少孤不克秉禮。至老孺慕不衰。家廟朔望之參。大小之祭。靡不致愨。且必親莅。公有一妹。有無共之。於其所求。無所靳焉。至於生產。未嘗留意。倭變時。見友人子被俘。欲贖無銀。爲之解裝。盡與其五六大銀器。其輕財重義類此。常願不作呻吟。醉臥長逝。一日飮酣而寢。仍不起。傍人莫之覺。卽萬曆乙卯三月五日也。得年六十六。月沙李相公賦挽以哭之。谿谷張相公操文以祭之。是年五月。竁于高陽某村某山某向之原引儀公墓左。與公配李氏同兆。李氏系出國姓。長水縣監孜之女。事姑孝。事公敬。先公三十年而歿。生二女。公以爲再娶而或不賢。則反害於事親。以此不娶。亦不畜妾。獨處以終。生來不喜巫覡。家庭肅然。若於酒筵。見歌舞之兒。則時或玩戲。而一不近之。世間尤物。無足以累其心者。其天稟然也。公無子而不立後。乃曰。吾長女誠孝出天。此可爲慰。長女適士人趙嶸。栗谷李文成公之甥也。早寡。節行最著。旌其閭。季女適工曹佐郞鄭沄。松江之孫也。趙君有男成後。後公而奉祀事。生四男。佐郞生一女。嗚呼。公有才有行而自放於江湖之上。托跡於無何之鄕。一臥長寐。竟如其願。公可謂不羈之士不凡之流。殆非俗兒曹所可窺其涯者也。然公之不赴擧不拜職。非果於忘世。蓋不偶於世也。而若無天只之諒焉。則亦何得而從其所好。夫惟公之素行。有足以感慈親之心。慈親之愛信之也。亦克度越乎常情。故廢科而不之勸。不仕而不之強。酣飮而不之禁。卒使潛魚泳水。倦鳥歸林。息偃俯仰。惟意之適。又何奇也。公與石洲權公特相好。石洲坐詩案死。公常悲痛涕泣。其焚藁在於甲寅年間。自此不復出庭外。癸丑以來。時事大變。搢紳名勝之骨機辟者踵相接。而公獨斂蹤逃世。危遜隨時。全歸於昏亂之際。非有見識之遠。烏能如此哉。謹据家狀。撮其梗槩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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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집(浦渚集) 조익(趙翼)생년1579년(선조 12)몰년1655년(효종 6)자비경(飛卿)호포저(浦渚), 존재(存齋)본관풍양(豐壤)시호문효(文孝)특기사항이정귀(李廷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浦渚先生集卷之三十三 / 墓誌銘 十首 / 崔處士墓誌銘 幷序
吾舊家在於義洞。卽城中東偏也。同洞有崔氏。兩家門墻相比。子姓於洞中爲最多而聚居。以是。兩家長幼以年輩相從。朝暮常相與處。其親如骨肉。經壬辰亂。兩族皆分散。家皆丘墟。雖其後有來仕於京者。皆寓居他洞。然得相見。輒懽然喜如親戚居遠者也。處士。吾祖考行也。有三子。伯仲。吾諸父行也。季應亨。少吾二歲。與吾爲童稚友也。處士於壬辰亂。老母年八十有幾。奉而行至朔寧病卒。權殯于山中。晝夜號哭不離側。賊至。負魂帛箱隱林間。賊搜得見其箱。以爲有奇寶。欲害之。及開。乃魂帛也。賊亦感動。指生路而去。至明年秋。返葬于衿川先麓。廬于墓惻。終三年餟粥。不一日離。是時兵禍之餘。人民飢餓。起爲盜賊。殺掠相望。至有相食者。畿甸尤爲甚。處士不爲懼。獨守廬山中不去。其哭泣之哀。柴毀之狀。見者皆垂淚。其仲子應善。日負薪至城中。得升米而歸。所以粥不絶也。嗚呼。人子誰無父母。能爲孝者至鮮。是時處士亦有弟及諸姪。皆善人也。然獨處士爲然。於此見其行實天性。非由勉也。當亂離搶攘。死生不可期。而篤行乃如是。平居孝友。皆常行不足道也。其後處士就食靈巖。湖南人以狀言于監司。上聞命賞職。其後居楊州。楊州人又言于監司。上聞復戶。其後居龍山。龍山人又呈于禮曹。皆爲禮曹所廢閣。
處士諱得壽。字德叟。丙辰某月日。卒于某地。其年某月日。葬于楊州金正里酉坐卯向之原。享年七十二。
考諱彥淸。奉事。
祖諱浩文。某官。
曾祖諱智成。縣監。
其先全州人。五世祖德之。當世祖朝。以藝文直提學。棄官歸靈巖以終焉。
祖妣河東鄭氏。從祀文廟。贈右議政一蠹先生汝昌之女也。其善實有本也。
娶靑松沈氏。子長應聖。應善。熊川縣監。應亨。今爲召村察訪。記壬辰兩家同出城。宿吾家東門外宅。明日慟哭而別。余以童子立堂邊泣。處士持余。悲不自勝。幸各脫死。己酉歲。拜處士於龍山。是時應亨中司馬矣。處士平生。誠信無僞。見其貌。可知其純善無纖毫邪念也。處士卒今二紀矣。應聖丈屬余誌。敬諾而銘焉。銘曰。
自古至行。於世絶儔。誠所不已。豈有所求。是何與己。人自敬慕。亦豈外假。性惟同賦。何今之人。而獨反此。王命旌異。忽焉而已。乃使善人。終死草野。於公何恨。可嗟世也。唯天不然。施報無虛。其所可期。其在後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