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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0년 병오(1786) 9월 7일(정축) 양력 1786-10-28
10-09-07[04] 상언 72통을 판부하다
상언(上言) 72통을 판부(判付)하였다.
예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신이 임인년(1782, 정조6)에 예조에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 아버지의 효행과 관련하여 격쟁(擊錚)하고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은 ‘효자와 열녀에게 정문을 내려 포상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전례(典禮)인데, 주상에게 보고하고 시행을 허락하는 것에 원래 일정한 규식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관원과 유생이 예조에 단자(單子)를 올리고, 지방에서는 해당 수령에게 올리면 해당 고을에서는 감영(監營)에 올리고 감사(監司)는 신중하게 알아보고 선별한 뒤 비로소 주상에게 보고합니다. 주상에게 아뢰어 예조에 내려 준 뒤에 의정부에 통고하면 비로소 등급을 나누어 포상을 청합니다. 그러니 대단히 엄격하게 선별한다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표창하는 디딤돌로 삼게 한다면, 어버이를 드러내어 높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같으니 각 도의 효자와 열녀의 수많은 자손들이 틀림없이 뒤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본도에서 효자와 열녀를 선발해 아뢸 때 널리 신중하게 알아보도록 하소서.’라고 이치를 따져 아뢰었습니다.
그 뒤 예조 판서 정창순(鄭昌順)이 다시 이렇게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청하였고, 이를 묘당(廟堂)에 내리니, 영의정 서명선(徐命善)과 좌의정 홍낙성(洪樂性)이 모두 그대로 시행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그에 대한 비답에 ‘식년(式年)마다 나에게 아뢰는 정식이 이미 있다. 자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 표창을 청하거나 증직을 청하는 것은 결국은 은전(恩典)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법을 정해서 금지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상의 뜻이 비록 법으로 정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셨지만, 일의 체모는 결국 은전을 요구하는 것이니, 이번의 조상을 위한 상언 4통은 그냥 두어야 하겠습니다.
여러 선비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표창해 줄 것을 청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옛 규례에 따라 해당 관아와 감영에 올려야 하는데, 장황하게 이름을 나열하여 멋대로 성상께 아뢰었으며 게다가 그 가운데에 거짓으로 기록한 것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언이 지금 12통인데 모두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버이를 현양하려는 마음은 자식의 지극한 심정이다. 일이 비록 은전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지만 법을 정해 막을 수는 없다. 한 고을의 공의(公議) 역시 어찌 일률적으로 금지할 수 있겠는가. 단지 명성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는지를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국가의 막중한 은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각 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실제의 행적을 자세히 알아보고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창평(昌平)의 유학(幼學) 고시옥(高時沃)이 상언하여 자신의 7대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와 방계(傍系)의 7대조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에 대하여 불천위(不遷位)의 은전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서유린이 의견을 갖추어 아뢰기를,
“고인후와 고종후는 문열공(文烈公)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모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니 한 가문의 충절이 천고에 빛납니다. 근래 자손의 상언으로 인해 그 아버지인 문열공의 불천위를 특별히 허락하였으니 조정에서 동등하게 대우하는 도리상 차이를 두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나주(羅州)의 유학 김득려(金得麗)가 상언하여 자신의 5대조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과 4대조 증(贈) 승지 김상건(金象乾)에 대하여 불천위의 은전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서유린이 의견을 갖추어 아뢰기를,
“김천일 부자의 충절은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습니다. 송상현(宋象賢)과 조헌(趙憲) 등의 예에 따라 불천위의 은전을 받기를 요청한 것은 인정과 도리로 보아 맞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 두 사람에게 동시에 불천위를 허락하는 것은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문열공 김천일에게만 특별히 불천위를 허락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함평(咸平)의 유학 이양직(李養直)이 상언하여 자신의 조부 이두삼(李斗三)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고(故) 판서 이태중(李台重)이 당시 결성(結城)에 살았는데,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심리사(審理使)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를 ‘이두삼이 충의(忠義)로 분발했던 마음을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의 편지에 ‘결성 현감(結城縣監) 이두삼은 세상에서 지극히 원통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서유린이 의견을 갖추어 아뢰기를,
“이두삼이 당초에 연루된 것이 어떠한 죄안입니까. 그래서 달포 전의 격쟁을 예조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렇게 호소하니 지극히 무엄합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형장(刑杖)을 치고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끝내 의심스럽고 명백하지 않다. 더군다나 고 중신(重臣) 이태중의 말에 근거가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문정공 이재의 편지에서도 말했으니 곧장 외람된 것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일이 오래되어 밝히기 어려운 일이니 우선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주-D001] 다른 …… 하는데 : 영읍(營邑)을 거치지 않고 상언하면 장두(狀頭)를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典律通補 卷3 禮典 奬勸》[주-D002] 고인후와 …… 사람들이니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아들 고인후, 고종후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금산(錦山)에서 고경명과 고인후가 같은 날 순절하고, 고종후도 그로부터 한 달이 안 되어 사망하였다. 《承政院日記 仁祖 10年 2月 19日》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검색일: 2013. 8. 9.》[주-D003] 김천일 부자의 충절 : 김천일 부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다. 김천일은 왜군의 진주성(晉州城) 공격으로 성이 함락되자 아들 김상건과 함께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검색일: 2013. 8. 9.》[주-D004] 송상현(宋象賢)과 조헌(趙憲) : 송상현은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순절하였고, 조헌은 의병장으로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 people.aks.ac.kr 검색일: 2013. 8. 9.》[주-D005] 이두삼(李斗三) : 이인좌(李麟佐)의 난 당시 적의 관문(關文)을 수영(水營)에 보내면서 역적의 괴수를 ‘대원수(大元帥)’라고 호칭한 죄로 머리를 베어 내거는 처벌을 받았다. 《英祖實錄 4年 3月 21日》[주-D006] 이재(李縡)의 …… 하였습니다 : 이재가 그의 외숙 민진원(閔鎭遠)에게 올린 편지에 이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陶菴集 卷9 上丹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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