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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나를 오라 하네
2018년 12월 11일 / ♬ 324장 / 요한복음 22:15-22
요한복음 21:18-22을 보면 3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과 베드로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19절과 22절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이제부터라도 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기도 / 주님! 저는 ‘저를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렇게 화답하렵니다. “7전 8기라는 말이 부끄럽게도 헤아릴 수 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하였던 쓸모없는 이 몸을 그래도 믿어주시며 다시 찾아오셔서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따스한 음성에 힘없이 ‘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십시오. 여린 저를 버리지 마시옵소서!’라는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잠시 베드로의 이러한 장면이 있게 된 상황을 되돌려본다 / 우리들은 열두제자 가운데 베드로에게 수제자라는 단어를 쓴다. 복음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그런 말이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❶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을 받고 대단히 기뻤을 것이다. 그동안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른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❷ 이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절히 만류하였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눅 9:23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욕망과 편안한 것들을 다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❸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음에도 베드로는 가끔 다른 제자들을 무시하면서 예수님 앞에 인정을 받으려고 자기를 내세웠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시던 중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내가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어라.'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주님, 저는 이미 감옥에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베드로야, 내 말을 명심해 두어라. 지금부터 내일 아침 닭이 울 때까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❹ 몇 시간 후 베드로는 가야바 법정에서 모닥불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누가복음 22:54-62 / 그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가자 베드로도 멀찍이 따라 나섰다. 그리고 군인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쬐고 있는 것을 보자 그들 가운데 끼여 앉았다. 한 여종이 불빛을 받고 앉은 베드로를 자세히 뜯어보다가 ‘이 사람도 예수와 한패예요.’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이봐,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해.’ 하고 말했다.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 아니오?’ 하자 베드로는 ‘아니오, 나는 아니오.’ 하고 부인하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이 강경하게 ‘나는 이 사람이 예수의 제자라는 걸 다 알고 있소. 둘 다 갈릴리 사람이란 말이오.’ 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닭이 울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이 ‘내일 아침 닭이 울기 전까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뜰 밖으로 나가서 큰소리로 울었다. 베드로가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상상해 볼 때 참 많은 은혜가 된다.
자기 앞에 나타나는 부끄러운 자신을 보자 ‘내가 어쩌면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되었을까?’ “아! 이것이 나로구나! 이것이 인간이요 이것이 바요나 시몬의 모습이구나. 죽음의 현장을 혼자만이라도 끝까지 따라가겠다던 베드로, 반석과 같은 믿음의 대장부라고 자랑했던 내 모습은 어디에 갔는고? 부정한 입술을 매끄럽게 놀리는 나 베드로요. 화로다 나여!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❺ 한동안 실의(失意)에 빠져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갔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기진맥진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그곳을 찾아오셨다. 아침 식사가 끝났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돌보라.’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이 생겨서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면 내 양들을 먹이라.’
만일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베드로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평생을 낙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회개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용기를 불어넣어 제자에서 사도의 단계로 들어가게 하셨다. 그때 ‘나를 따르라’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다.
1. 내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우리들의 다짐과 결심은 어느 정도 합격점에 있다면 실제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누가복음 10:25-37 / 하루는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율법학자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돌보아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자기 동족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체 지나쳐 갔다.
그런데 그 길을 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응급처치한 후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해 주었고, 다음날이 되자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하고 하였다. 글자 그대로 이웃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하자.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옳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 만일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네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비판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는 아니할지라도 무관심으로 대처했다면 과연 영생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까?
신학자들이 강의할 때 또는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말씀을 거울로 삼아 나의 모습을 비춰본다면 어떠한 모습일까? 나는 제사장인가? 레위사람인가? 사마리아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일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모습 / 눅 6:27-37 / 모두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29) 만일 누가 네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 대고 … 31)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주라. 32)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 35)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 코리텐붐 여사의 용서와 사랑 /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텐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코리텐붐 여사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부모님과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코리텐붐 여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코리텐붐 여사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 코리텐붐 여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코리텐붐 여사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가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에만은 못 갑니다. 하나님. 그 곳만은 빼 주십시오. 독일 사람이 우리 부모님도 죽이고 언니도 죽였습니다.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독일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저주하고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하라. 네가 내 딸이면 독일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말씀을 듣고 코리텐붐 여사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코리 여사는 심장이 멎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간수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한겨울 이른 새벽에 여자 포로들을 나체로 밖에 서 있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장본인이다.
바로 그 사람 손에 여사의 사촌언니 벳시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악몽 같은 괴로운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는데 앞에 있는 바로 그 남자가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쟁 당시 수많은 여자 포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코리텐붐 여사는 꿈에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와 같이 벌거벗기운 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언니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되면서 자기의 청춘을 짓밟은 장본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을 내어 밀지를 않았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예수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못합니다.”라고 여사가 기도하자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여사의 손이 나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거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사람인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❶ 그 순간 갑자기 하늘문이 열리고 주님의 사랑이 여사에게 넘치게 임했다. ❷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❸ 그를 용서하고 나자 여사의 영혼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❹ 거기에서 10년이나 젊어지는듯한 재생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❺ 코리텐붐 여사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❻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❼ 그 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그 이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힘 있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2. 하나님 앞에 선 내 모습은?
이사야 6장은 유다의 열 번째 왕이었던 웃시야가 죽었다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웃시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명군(名君)이었으며, 위대한 왕 중에 한 사람이었다. 52년 치리하던 동안 국력도 튼튼하여 외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경제는 부강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어 백성은 태평세월을 누렸다(대하 26:1-15).
그러나 말년에는 자기 성공에 교만해져 성전에 들어가 직접 분향하려고 시도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그 이후 남은 인생은 별궁에 격리되어 지내다 쓸쓸하게 죽어갔다(대하 26:16-23).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 안이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인접 국가들의 위협의 검은 구름이 서서히 유다를 향하여 몰려왔다. 온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좌절과 실망 가운데 빠졌다.
이런 와중에 성전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던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웠다. 왕은 죽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자기네들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소망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다. `이제 나는 죽었구나. 입술이 더러운 이것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임금님을 눈으로 직접 뵙다니! 아, 이제 나는 저주받은 몸이 되었구나.'(사 6:5)
▶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유다 백성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상과 상도덕 및 정치가들의 타락으로 인해 분노가 차서 하나님 앞에 이사야 1-5장까지의 내용을 고발하였다. 그렇다고 무조건 책망하며 야단을 치는 것은 아니다. 6장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 나왔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그동안 많은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 이사야 선지자가 6장 4-5절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야웨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게 되었다. 참으로 회개해야 할 사람은 타인에 앞서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처럼 성전 혹은 골방에 깊숙이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고 추한가를 금방 알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자 이사야는 자기의 죄를 탄식하였다. 그러자 스랍 천사가 화저(火箸)로 단에서 피운 숯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는 ‘네 죄악이 사해졌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죄를 고백하던 이사야는 하나님의 단에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불로 부정한 입술이 정결케 되었다. 말로서 범죄한 일이 많고 앞으로 큰 일을 하려면 더욱 말조심해야 한다.
▶ 입술 즉 마음이 정결케 되자 이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그만큼 준비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그래, 그럼 네가 가서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는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 유명한 부흥사 D. L. Moody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러나 그의 과거는 구두 고치는 사람이었다. 무식하고 공부한 바가 별로 없었다. 정열적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그 마을 신문에다가 무디에 대해서 그 무식한 것과 그의 허물들을 줄줄이 나열하며 험담을 늘어놓았다. 무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파겠는가? 그러나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내버려두라고.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럴 것 없네.”하며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인이다’
■ 왜 입술을 성결케 하는 역사가 필요한가? 민수기 20장이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는 신 광야로 옮겨 오랫동안 가데스에 머물렀다. 그들이 진을 친 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러자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몰려와 대들면서 ‘우리 이스라엘 형제들이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죽을 때 차라리 우리도 함께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소! 당신들은 어째서 여호와를 모시고 사는 이 무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던 가축까지 모조리 죽게 하는 거요? 어쩌자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렇게 험악한 광야까지 끌고 나왔단 말이오? 이 거친 광야에서는 농사지을 곳도 없고, 무화과 포도도 석류도 자라지 못하오. 더구나 마실 물마저 없지 않소!’라고 원망했다. 모세와 아론이 무리를 떠나 성막문 앞에 이르러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와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세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목전까지 오는 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쉬운 것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 ...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지금도 성령님은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태워서 깨끗케 해주신다. 입술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일생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나의 잘못, 나의 실수, 나의 고집, 나의 정욕, 나의 부정을 성령의 불로 태워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의 더럽고, 때 묻고, 냄새 나고, 추한 죄악을 성령의 뜨거운 불로 태워주신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격자, 완전히 변화된 거룩한 분들이 되자.
딤후 2:20-21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21)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론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자.
살전 5:14-23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게으른 자들을 나무라고 소심한 자들을 격려하며 허약한 자들이 있거든 돌보아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인내로 대하십시오. 15)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언제나 서로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언제나 기도에 힘쓰십시오. 18)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하는 자를 비웃지 마십시오. … 22) 모든 종류의 악을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감사로 하나님의 일을 한 스콴토 / 1621년 박해를 피해 미국대륙에 건너간 102명의 영국 청교도들은 거친 항해와 풍토병과 추위 속에서 죽고 겨우 27명만 생존하였다. 그들이 가져 간 밀과 식물의 씨앗을 파종했지만 토양이 맞지 않아 농사는 실패했고 모두는 굶어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발을 디딘 바로 그 땅은 10년 전 영국의 무역상이 먼저 들어왔던 곳이다. 그들은 그 지역의 모든 인디언 원주민들을 속여 노예로 잡아갔다. 그 중에 스콴토라는 청년이 있었다. 스콴토는 스페인의 한 사제에게 팔려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는 늘 세 가지를 기도했다. ➊ 고향에 돌아가는 것 ➋ 백인들을 원망하지 않고 같이 좋은 고향을 만들겠다는 것 ➌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다는 것. 스콴토는 독실한 기독교인 새 주인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이끌고 땅을 개간하여 마을을 새롭게 재건했다. 바로 그 다음해 1621년 청교도들이 스콴토의 마을에 들어온 것이다. 스콴토는 기도해 온 대로 청교도 성도들을 환영하고 먹을 것을 나눠주고, 유창한 영어로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청교도들을 인도한 브래포드 목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콴토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는 옥수수 심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땅을 개간하고 낚시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를 인도했다.’
스콴토가 없었다면 그 해 청교도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죽음의 항해를 떠난 청교도 성도들을 위해 신실하게 도움의 손길을 예비해 주셨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그래서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유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이어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빈치는 즉시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또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핍박하는 자도 있다. 이러한 때에 마음에 미움과 증오의 쓴 뿌리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를 핍박하고 고통을 준다고 해서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있고 그를 저주한다면 어떻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에 미움과 증오를 걷어내고 오로지 사랑만 남겨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 형상이 내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인관계(對人關係)의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 작업을 하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늘 불러보고 싶은 찬양으로 기도의 내용으로 삼는다 /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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