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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4장의 해설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
=====24:1
다시 / 이는 다윗 치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 재앙이 지난번 3년 연속 기근(21:1)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임을 밝혀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 2-9절은 다윗의 인구 조사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적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우선적으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자 다윗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셨던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다윗이 사단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방임하셨던 것이다(대상 21:1).
다윗을 감동시키사 …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 본서 저자는 다윗의 범죄 행위(인구 조사)를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自由意志)를 말살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모든 인간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섭리하여 가신다. 따라서 다윗의 인구 조사는 다윗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의식 속에 있던 악한 의도를 허용하셨을 뿐이다. 한편, 대상 21:1에서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기록은 상호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이용하시기 때문이다(욥 1:12; 삼상 26:19).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 조사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징계코자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허용 하에서 사단의 격동으로 일시 교만한 마음을 품은 다윗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본장의 인구 조사는 다윗 통치의 말기에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그 근거로서 인구 조사가 약 10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군대 장관 요압이 수도를 오랫동안 떠나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당시의 태평성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이때는 대내외적으로 모든 정벌과 반란이 완료되고 진압됨으로써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다윗 통치의 말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4:2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 단(Dan)은 이스라엘 북쪽 경계 성읍이며,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남쪽 경계 성읍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온 땅을 통칭하는 표현이다(삿 20:1; 삼상 3:20; 대상 21:2; 대하 30:5).
인구를 조사하여 … 내게 알게 하라 / 다윗의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의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정하에 여러번 인구를 계수한 바 있기 때문이다(출 30:12; 38:26; 민 1:44-46; 26:51). 문제는 다윗의 인구 조사가 군사적인 목적, 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우선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제사장들이 그 일을 감당하였다(민 1:3; 26:1, 2). 이에 반해 여기서 다윗은 요압을 인구 조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조사받은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贖錢)을 내게 하였다(출 30:2). 그리고 이 생명의 속전은 성소에 봉헌됨으로써 여호와께 속하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하는 의식이었다(출 30:13).
그러나 다윗은 본 인구 조사에서 이를 시행치 않았다. 이로 보아, 다윗은 단순한 인구 조사를 명령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목적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려 하지 않고, 강화된 군사력과 왕권에서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삼상 17:47).
그러므로 이는 후일 바벨론 왕의 사신들의 방문을 받은 히스기야 왕이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보여 줌으로써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한 교만죄와 같은 성질의 죄인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 자기의 세력과 영광스러운 번영을 확인하고 자랑하려했다. 특히 군사력에 대한 실세를 파악(9절)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는 ① 번영의 근거가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며, ② 하나님보다는 군사력을 더욱 신뢰하려 했던 다윗의 교만을 반영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들은 흔히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과 번영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목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간의 과시욕과 명예욕은 그러한 번영과 힘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일로서 결국 그분의 진노를 자초하고야 만다(시 94:2; 잠 21:4; 눅 1:51).
여기에서 다윗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다. 싸워야 할 전투가 다 끝나고 나니까 그 동안의 업적을 뒤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한 마음이 몇 %나 되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는 생각이 몇 %나 되었겠는가? 감사충만이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에 더 큰 은혜를 주셨겠지만 그렇지 않고 고개를 들자 사탄이 고개를 들고 설치게 된 것이다.
=====24:3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 이는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을 반대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요압의 반대는 다윗의 범죄를 방지해보려 했던 충언이었다. 하나님은 신정(神政) 국가의 복된 미래를 약속하신 바 있다(신 33:9). 그러나 그 약속에는 어디까지나 왕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하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다윗이 이러한 전제에서 벗어나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힘을 의지하려 하자 이에 요압이 다윗의 잘못됨을 인식하고 충언을 하였다.
한편, 정세(政勢)에 대단히 민감했던(19:5-7) 요압은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다윗의 명령에 반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The Interpreter's Bible). 즉, 주변 이방나라들의 경우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와 징병의 목적으로 실시되었기 때문에, 자칫 이번의 인구 조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오해와 원성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 이때에 요압과 더불어 요압 휘하의 각 부대 장관들도 함께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은 공식 석상에서 하달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원문상으로 볼 때 이들이 요압의 견해에 동조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이 요압과 군대장관들 각각에게 인구 조사 시행을 재촉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재촉하다'는 '강퍅하다, 완악하다'란 의미로(출 8:19; 9:35) 이는 다윗이 신하들의 만류를 끝까지 뿌리치고 자기의 고집을 극구 주장하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4:8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 이 기간 동안에 펼친 요압의 인구 조사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즉 병행 구절인 대상 21:6에 보면, 요압이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조사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대상 27:24에 의하면, 인구 조사를 채 끝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인구 조사 기간은 매우 긴 기간으로서,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못 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소홀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요압의 왕의 명령에 대한 불충으로 결코 잘한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하면 결국 나라는 분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4:9
이스라엘 … 팔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이었더라 / 이 기록은 병행 구절인 대상 21:5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역대기에서는 이스라엘의 병력이 110만이요 유다의 병력은 47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론이 있겠으나,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27:24)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이 같은 차이는 그 수치가 구전(口傳)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지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병력이 130만이든 아니면 157만이든, 이 숫자는 출애굽 당시의 군사력(603,550명; 민 2:32)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보고를 받고 자기의 국력을 확인하고는 크게 만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다윗은 어리석게도 이 모든 번영과 강성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또한 많은 대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시기 않는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24:10
다윗이 … 그 마음에 자책하고 / 다윗의 만족은 얼마 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곧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책하다'란 말은 '때리다', '치다'란 의미로 곧 신앙 양심이 무디어진 마음을 쿵쿵 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여호와께 아뢰되 …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 자신의 행위를 깨닫고 여호와께 진심으로 회개하는 다윗의 겸손한 모습이다. 여기서 '큰 죄'라 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군사력(힘)을 의지한 그의 자고하고 교만한 생각과 행동이었다.
여호와여 …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사울 왕과는 달리 다윗을 다윗이 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다윗의 솔직하고도 겸허한 '회개'에 있었다. 즉 다윗도 간음, 살인, 교만 등 온갖 죄악을 저질렀으나, 그는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체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여기서도 다윗은 요압의 보고를 접한 직후에 무디어졌던 양심의 기능이 회복되어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기까지는 약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8절). 그는 그 동안 이생의 자랑이라는 편협한 사고에 의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길이 참으시는 사랑을 보이셨던 것이다(눅 15:17-24).
한편 다윗의 회개는 자신의 실수에 따르는 책임(형벌)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길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맡김으로써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적 태도였다.
=====24: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 이는 다윗이 습관적으로 평소와 같이 일찍 일어났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특별히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밤새도록 침대 안에서 뜬 눈으로 뒤척이다가 일어났거나 또는 밤새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한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여호와의 선지자 갓의 방문은 다윗의 회개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응답이었다.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 / 여기서 '선견자'(先見者)는 하나님의 이상 또는 계시를 받은 자를 의미한다(단 2:26, 41, 43, 45;4:20; 7:2). 갓 선지자는 다윗의 망명 시절에 모압 땅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갈 것을 다윗에게 권면하기도 하였다(삼상 22:5).
=====24:12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내가 네 위에 세 가지를 두노니'이다. 즉 '보이노니'에 해당하는 말은 ' ~ 위에 짐을 지우다, 위에 올려놓다'는 뜻으로(애 3:8), 이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무거운 형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24:13
칠년 기근 / 병행 구절인 대상 21:12에서는 7년이 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3년이 보다 정확한 기록인 것 같다. 왜냐하면 본 구절에서 갓 선지자를 통해 제시된 재앙들이 모두 3이란 숫자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에 제시된 세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네 가지 중한 벌(罰)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 네 가지는 기근, 전쟁(칼), 온역, 그리고 사나운 짐승이다(겔 14:21). 이중 두 가지(칼과 기근)는 이미 다윗이 당한 바 있다.
=====24:14
내가 곤경에 있도다 / 여기서 '곤경'이란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감을 뜻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 다윗에게 제시한 3가지 징벌은 하나 같이 다윗이 자랑하던 이스라엘의 명예와 힘을 꺾어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의 선택을 위임받았던 다윗은 결국 하나님의 품보다 더 나은 피난처가 없음을 깨닫고(시 46:1; 90:1),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 시행되는 징벌인 '3일 동안의 온역'을 택하였다. 결국 그는 위임받은 선택권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렸던 것이다. 다윗의 이러한 태도는 ❶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며(시 131편), ❷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은혜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안 올바른 신지식(新知識)에 따른 결정이었으며(민 6:24-26), ❸ 모든 문제의 원천적 해결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마 11:28).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 '전쟁의 재앙'은 대적의 손에 죽는 것이며, '기근의 재앙'은 흉작을 유발하여 사회를 피폐시킨다. 반면, '온역'은 '불치의 전염병'으로서 고대인들은 이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하였다. 다윗은 이 중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생각된 온역의 재앙을 택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선택은 기왕이면 하나님께 직접 매 맞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해진 것 같다. 즉, 다윗은 사악한 인간이나 피폐된 사회에 붙여지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형벌을 받는 것이 긍휼하신 여호와의 위로와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재앙을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다윗의 신앙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24:15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 '그 아침'이란 갓 선지자가 다윗 왕을 방문한 그날 아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하신 때'는 염병이 시작된 날로부터 3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재앙의 시간을 단축시키셨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 원어상 이 말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때는 하나님께서 본래 작정하셨던 바로 '그 때'(만 3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정하신 때'란 하나님께서 재앙을 맞이하는 다윗의 신앙적 태도를 보시고 그 재앙의 기간을 단축한 그 마지막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 이스라엘 전역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20; 삿 20:1).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 짧은 기간에 이토록 많은 자가 죽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실상을 생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1절)에 진노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무서운 온역(전염병) 재앙이 맹렬하고도 급속히 이스라엘 전역을 내리 덮은 것이다. 이로써 다윗과 이스라엘은 큰 병력의 손실을 보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자의 그 힘을 현저히 약화시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똑똑히 발견하게 된다.
=====24:16
천사 / 이 천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실행하는 '멸하는 천사'(출 12:23)를 가리키는데, 온역 재앙시 이 천사는 다윗에게 가견적(可見的)으로 나타났다(17절). 대상 21:16에서도 다윗이 천지(天地) 사이에 서 있는 천사를 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천사가 가견적 모습으로 나타나 백성을 쳤다는 사실은 이 온역(溫疫) 재앙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 여기서 '뉘우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뜻을 돌이키다'는 뜻으로서(창 6:6; 출 32:14; 삿 2:18; 시 106:45),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거두셨다는 의미의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돌이키심은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진실한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윗과 그 백성을 사랑하신 긍휼과 자비의 은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가변적(可變的) 속성을 반영하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불변성(不變性)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초월적인 품격을 지니신 분으로서 당신의 목적을 수행하실 때 인간과 더불어 섭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대응 여부에 따라 그 섭리의 방식을 다양하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의인화(擬人化)시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적으로 묘사할 때,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가변성 품성인양 비쳐질 뿐이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 여부스인은 예루살렘성의 원주민이다(5:6-8). 그리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모리아 산 곧 예루살렘 동북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대하 3:1). 그런데 타작마당은 추수한 곡물의 겨나 지푸라기 등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해 일반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결국 이곳은 얼마 후 솔로몬 성전의 터가 된다(대하 3:1). 한편 역대상에는 '아라우나'의 이름이 '오르난'으로 기록되어 있다(대상 21:15, 18, 20, 21, 22, 23). 여기서 '아라우나'는 여부스식 표기이며, '오르난'은 히브리식 표기이다. 그런데 70인역(LXX)에는 일괄적으로 '오르나'로 표기되어 있다.
=====24:17
나는 범죄하였고 …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 다윗의 진정한 회개의 기도이다. 히브리어에서 인칭은 동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인데, 여기서 다윗은 인칭 대명사 '아노키'를 두 번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범죄의 주범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즉 다윗은 여기서 오직 자기만이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일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회개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참된 회개란 ❶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 그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에 대해서까지 달게 책임지려는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며, ❷ 타인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통회하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 자세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병행 구절인 대상 21:16을 보면, 다윗은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였다. 이는 다윗이 일국의 왕이라는 처지에 결코 연연치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의 겸손과 회개의 모습을 보여드린 것이었다.
=====24:18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 단을 쌓으소서 / 이와 같은 갓 선지자의 말은 다윗의 겸허한 회개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자애로운 응답이요 화해 선언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당신의 진노를 진정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갓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전달하신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그 화해의 장소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지시하신 것은 그곳에서 천사의 심판 활동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나타난 곳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화해와 자비의 장소로 지정하시고, 이곳을 성별케 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후에 이곳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져 택한 백성들의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
=====24:19
다윗이 … 올라가니라 / 다윗은 크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지체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24:20
아라우나가 … 나가서 / 병행 구절인 대상 21:20, 21에서는 아라우나가 밀을 타작하다가 다윗을 맞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 이마가 땅에 닿도록 무릎을 꿇고 몸을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데, 이는 윗 사람에 대한 경외와 절대 복종의 자세이다(삼상 25:23; 에 8:3; 왕하 4:37).
=====24:21
어찌하여 …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 한때 사울은 그 왜곡된 종교적 열정으로 가나안 땅의 이방 족속을 멸절시키고자 시도하기도 했었다(21:2). 이런 배경하에서 가나안 땅의 잔존 원주민인 아라우나는 자신의 외진 타작마당에 왕이 그 수행원들과 더불어 친히 당도했다는 사실에 두려움부터 앞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라우나는 분명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다윗 왕과 그 수행원들을 맞이했을 것이다(삼상 16:4).
=====24:22
소가 있고 …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 '아라우나'(Araunah)는 다윗 왕에게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소'( 하바카르)는 탈곡 썰매를 끌도록 하기 위해 멍에로 함께 매어 놓은 '한 쌍의 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당질하는 제구'는 소가 끌고 다니면서 곡식을 떠는 썰매의 일종이다(신 25:4). 그런데 이러한 제구와 멍에는 모두 나무로 제작되었다(렘 28:13). 또한 이러한 나무는 제물을 태우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24:23
왕이여 아라우나가 … 왕께 드리나이다 / 혹자는 여기서 '왕이여'란 말을 호격(呼格)으로 보지 않고, 주격(主格)으로 보아 아라우나를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아라우나가 이전에 여부스족의 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없는 억측이다. 그리고 고대 역본들은 아예 이 말을 생략해 버리고 단순히 간접 화법으로 처리하여, 곧 "아라우나가. … 왕께 주었다"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24절에서 다윗 왕이 값주고 샀다는 묘사와 모순되기 때문에 취할 수 없다. 결국 본 어구는 히브리 원문 그대로 "왕이여! 아라우나가 … 왕께 드리나이다"로 해석함이 가장 좋다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 성공적인 제사는 하나님께서 제물과 함께 그 제물 드리는 사람을 함께 받으시는 제사이다(창 4:4, 5). 그러므로 여기서 아라우나는 다윗 왕의 제사에서 제물과 더불어 제물 드리는 자가 모두 기쁘게 여호와께 열납됨으로써 성공적인 제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로 보아 아라우나는 예루살렘 정복 이후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한 것이 분명하다.
=====24:24
값 없이는 …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 다윗은 아라우나의 소유를 취해 그냥 드릴 경우, 그 제사는 완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정 다윗은 자신의 재산을 바쳐 최대한의 정성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방 출신 개종자 아라우나의 아낌없는 헌신과 참된 눈물의 회개자 다윗 왕의 희생적인 순수함을 보게 된다.
이같이 아름다운 정경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① 참된 헌신은 결코 이해 타산이나 인색함 없이 온전하고도 자발적으로 드려야 한다(고후 9:7). ② 자기 희생 없는 값싼 제사는 여호와께 무의미한 것이다(신 16:16). ③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온전한 헌신과 순수한 희생의 마음 자세이다(삼상 15:22; 사 1:11-17; 히 13:16).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 병행 구절인 대상 21:25에는 그 땅 값으로 금 600세겔을 지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혹자는 이 같은 차이를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誤記)로 보려 한다. 그러나 착오 치고는 너무나 큰 차이다. 또 혹자는 대략 금화가 은화의 12배의 가치에 해당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즉 50X12=600), 여기서의 '은'을 단지 '돈'이란 뜻을 지닌, 실상의 '금'으로 본다. 그리고 대상 21:25의 '금'을 '은 600세겔에 해당하는 금'으로 고쳐 해석한다. 그러나 이처럼 원문을 임의로 고쳐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각기 다른 두 품목에 대한 두 가격으로 보아야 한다. 즉, 여기에서 지불된 은 50세겔(은 1세겔은 대략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됨)은 소와 타작마당에 해당하는 값이며, 대상 21:25에 나타난 금 600세겔은 성전 부지로 사들인 모리아 산 전체에 대한 값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4:25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 하나님은 다윗과의 화해를 표시로 아라우나 마당에서의 제사를 요구하셨다(18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징벌하시는 방법과 더불어 그 형벌을 해결하시는 방법까지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회개와 죄로부터의 회복은 인간 스스로의 자의식과 자발적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 섭리에서 비롯된다(시 51:10-13).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의 처소로 '아라우나 마당'을 특별히 요구하신 데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예루살렘 성 동쪽 모리아 산에 위치한 그 마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곳으로서(창 22:1-14), 아브라함의 순종 및 신앙과 하나님의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기억되는 장소였다. 이런 역사적인 명소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화해와 자비의 처소로 다시 한 번 택하시고 성별케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보살피시는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이고 내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에 얼마 후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다(대하 3:1).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 '번제'는 다윗이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린 제사이다(레 1:4). 그리고 다윗은 번제에 이어 화목제를 드렸다. 이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셨다는 근거하에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과 앞으로 베풀어 주실 은혜를 감사하여 드린 제사이다(레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에 … 재앙이 그쳤더라 / 다윗의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내의 온역 재앙은 완전히 그쳤다. 이것은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재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이 왜 죄가 되는 것일까?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명령도 없었고 그 목적도 세속적 인구조사와 같았다. 자기 왕국이 얼마나 번성했고 전쟁에 동원할 군사력이 얼마나 되나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인구조사가 잘못임을 알았던 요압장군도 명령을 받고 극구 반대하였다. 다윗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도 자기 육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우리는 다윗의 실패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아둘람 굴의 오합지졸로 사울의 군대를 막았고, 빈곤한 약소국에서 가나안의 맹주국이 되는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지를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의 노년에 군사력을 의지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의지가 약해졌거나 해이해졌음을 반증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굳세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강해지면 환경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믿음이 강할 때는 영적싸움에서 이겼다. 영과 육의 승패는 다 믿음에 달려 있다. 삶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이 커져있다면 우리의 구원자시고 보호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시기 바란다.
무서운 재앙(징계)에 이어 다윗의 깊고 넓은 회개에 뒤이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전이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듯이 이제는 예루살렘도 사마리아도 아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경건한 부흥의 운동을 통해 교회들이 새롭게 세워질 것이다.
2.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신앙으로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박윤선 목사님은 ‘여기 목숨이란 말은 영혼을 의미하는데 영혼의 가치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라고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나 권력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현재 교회들은 교인이 몇 명이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상대하시며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엄청난 일을 하시면서 12명의 제자들을 택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군사들을 300명으로 제한시키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소수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다수주의를 주장하지도 않으셨다.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보셨다. 예수님은 넓은 문을 선호하시기 보다는 좁은 문을 선호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한 영혼 한 영혼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물론 우리가 소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3천 명이 회개하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량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너무 크고 부요한 교회를 추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교회였던 서머나 교회의 특징은 부하지도 않았고, 강하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고, 태평하지도 않았다. 서머나 교회의 특징은 환난과 궁핍 두 가지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가장 크게 칭찬하셨고 가장 귀하게 사용하셨다(계 2:9).
3. 깊은 회개의 기도를 한 다윗
사탄의 시험에 무너진 다윗은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높이며 교만했던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다(10절). 더 나아가 자신의 교만함을 촉매로 7만여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게 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자 오히려 하나님의 손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의 집을 쳐달라며 그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한다(17절).
사실 반복해서 죄를 짓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징계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물론 사탄의 시험에 넘어간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의 징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시화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다윗,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그런 상황을 그저 방임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선지자였던 갓이 알려준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시는 방식대로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구입한 후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공동체를 온전한 회개의 자리까지 이끌어 갔다.
오늘 다윗은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까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회개의 터전 위에 솔로몬 성전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성결치 못한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자신은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아닌 책임을 회피하려는 죄까지 범하기 쉽다. 예수님처럼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보자는 못될망정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범죄보다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재앙이 임하였다고 하며 모든 형벌과 재앙을 자신과 자기 집안에만 내려달라고 부르짖은 다윗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
삼하 24:17 / 다윗은 전염병으로 온 백성을 쳐죽이는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여, 죄를 지었어도 저 혼자 지었으며 어리석고 불의한 일을 저질렀어도 저 한사람이 저질렀습니다. 이 백성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 백성들이야말로 정말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벌과 재앙은 저와 제 집안에만 내려 주십시오.'
4. 재앙을 막아서서 기도할 자가 누구인가?
삼하 24:25 / 다윗이 그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며 그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여호와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땅에 퍼지던 재앙을 거두어 주셨다.
성경에서 중보기도를 올렸던 몇 사람의 예를 살펴보며 우리도 중보기도자가 되었으면 한다.
1. 아브라함(창 18:22-32)
아브라함처럼 3가지 성품을 중보기도자는 갖추어야 한다.
❶ 거룩한 용기 /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아브라함의 요구사항을 담대하게 말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한 결단에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하는 담대한 용기를 가졌다.
❷ 하나님 앞에서 겸손 / 자신은 롯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려면 우리 인간은 아무 능력이 없고 보잘 것 없음을 먼저 인정하고 겸손해야 한다.
❸ 끈질기게 요구하는 끈기와 인내 /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하나님께 6번이나 요청을 했다. 하나님께 끝까지 요구하는 기도는 이루어질 수 있다.
2. 모세(출 32:1-14)
중보기도는 기도자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가 산 위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였다(1). 모든 것이 불안정한 광야에서 모세마저 보이지 않으니 불안했다. 불안을 잠재울 확실한 무엇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금고리로 만든 송아지 형상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낸 신이 되었다(2-4).
이러한 모습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9-10). 그러자 모세는 친히 애굽 땅에서 인도해내신 주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말씀드린다. ‘이스라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약속한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환기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부른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14).
모세의 기도는 설득력 있는 기도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킨 핵심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멸하기로 작정할 정도로 노하셨다. 그 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대상이었다.
모세는 그 사랑의 자리를 정확히 파고 든 중보자였다. 왜냐하면 그 또한 이스라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 이 대책 없는 사랑의 자리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중보기도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드린 기도도 그랬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은 아들을 내어 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3. 예레미야(렘 14:1-22)
예레미야 14장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유다 백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기도를 보면 우리의 기도에 있어야 하는 4가지를 보게 된다.
❶ 믿음
19절 / 주님, 주께서는 아주 주님의 땅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주께서는 이제 시온이라면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고칠 수도 없이 치셨습니까? 그래도 모든 일이 다시 한 번 호전되어 제대로 돌아가기를 저희가 기대하였는데 좋은 일은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래도 치유받기를 원하였는데 점점 더 병만 악화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질문을 그렇게 하지만 유다를 온전히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예레미야의 질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었다.
22절 / 세상 천지에 주님과 같은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세계 만민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 비라도 내릴 수 있는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주께서 세계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질문의 형식을 빌었지만 질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신의 삶으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바르고 성숙한 믿음은 삶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믿음은 구체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내가 상대방을 믿는다면 상대방이 한 말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❷ 회개
20절 / 주님, 저희가 죄를 짓고 저희 조상들이 범죄한 것을 인정합니다. 저희의 모든 죄와 흉악함을 잘 압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 없이는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란 자복하는 것이요, 동의하는 것이요, 약속하는 것이며,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하시며 그의 뜻을 굽히지 않으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그 뜻을 펼쳐나가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뜻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나가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께 범죄함을 고백하고 자신의 뜻을 돌이켰다.
❸ 소망
21절 / 그러나 이제 저희가 완전히 멸망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영광과 성호에 문제가 됩니다. 주님 자신의 성호를 위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버리지는 마소서. 그곳은 주님의 영광스런 보좌를 모신 시온성이 아닙니까? 또 주께서 저희와 맺으신 계약도 기억하시고, 그것을 무효가 되게 하지 마소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것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유다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을 믿었다.
22절 / …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주께서 세계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소망이 있었기에 예레미야는 주님을 앙망한다고 했다. 신앙인에게 이 한 가지 자질은 꼭 있어야 한다. 그것은 최후의 승리를 믿는 신앙적 자질이다. 오늘은 비록 손해가 날지라도 내일은 확실한 보상이 주어짐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어떻게 오늘 영적 투자를 하고 헌신을 하겠는가? 진실한 기도를 심으면 반드시 기도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어 있다. 선은 반드시 선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악은 반드시 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선한 씨는 악한 씨보다 늦게 자라고 결과가 더디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헛되다는 생각을 하면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이 온 땅에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면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❹ 사랑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를 보면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가진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도 그런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우리 기도에도 영혼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 기도와 눈물이 필요할 때입니다"- 애 1:12-22
속담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는 말이 있다. 남의 일이기에 무관심한 태도를 의미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망함으로 슬픔에 잠긴 예레미야는 멸망당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있는 자들에게 내가 당하고 있는 슬픔이 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 있다.
애 1:12 / 길 가는 나그네들이여. 이리 와 한번 보시오. 그대들은 나 같은 운명에 빠지지 않길 바라오! 내가 겪는 이런 고통을 본 적이나 있소? 여호와께서 분통을 터뜨리시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오.
예루살렘이 망함으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 세상가운데 제사장 나라인 유다의 죄악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비아냥거린다. 어떤 이는 ‘예루살렘의 망함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망국의 슬픔과 눈물로 지내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관계가 없는가? 너희에게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마음이 없는가?’, ‘내가 당한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다.’라고 하였다.
예루살렘의 망함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자들은 예레미야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관심하다. 그 망함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다와 예루살렘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다가온다는 말에도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 살아갔다. 그 결과가 멸망이었다.
▶ 12절을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보게 된다. 이 세대도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하나님을 쉽게 생각한다. 이 나라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는 영광의 칭호를 얻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세상의 비판을 당하고 있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 소리들로 점점 교회의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다. 아니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교회가 우한폐렴의 근원지나 되는 것처럼 교회들의 모임 숫자가 줄어들고 있으며, 노인분만이 아니라 젊은이들도 교회에 나오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이 막히고, 부흥이 정체되어간다. 뿐만 아니라 이단과 사이비는 더 많아지고 늘어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교회들은 아니 교회에 있는 많은 분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금 더 솔직히 ‘무엇을 놓고 기도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교회의 육적인 부흥 즉 교회가 큰 곳으로 이전하는 것, 교인의 숫자가 늘어나는 부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교회 건물이 크면, 교회 교인 숫자가 많으면 그 교회의 교인들은 구원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다닌다. 반면 교회 건물이 사글세나 10-20명 정도 모이는 교회 교인들은 얼굴 한 번 펴지 못하고 늘 죄인처럼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처럼 진지하게 예수님 앞에 나와 보았느냐? 예수님께 내 자신이 거듭났습니까?‘ 라고 질문이라도 해 보았느냐?” 말이다.
교회에 와서 누가복음 18:11-12의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지, 세관원처럼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몇 번이나 눈물로 기도를 드렸느냐?”고 묻고 싶다.
예수님께서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눅 11:9-10)라고 하심은 ‘성령을 구하라! 즉 새언약에 근거하여 거룩한 마음을 구하라!’는 것인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아직도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지 않는가?
그 결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꺼진 등불이요,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흙으로도 못쓰고 사료로도 쓸 수가 없어 밖에 버려지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보면서 ‘예레미야의 슬픔의 마음이 내 안에 있는가? 예레미야의 눈물이 내게도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어쩌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처럼 내리듯 기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제자들과 같지는 않은지?
4. 에스겔(겔 22:23-33)
에스겔 선지자의 외침도 이러하였다.
겔 22:23-31 /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24) “너 사람아, 유다 나라에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는 너무나 더러운 나라가 되어 버렸구나. 그러므로 내가 화가 나서 비 한 방울, 소나기 한 줄기도 보내지 않겠다! 25) 이 땅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지도자라는 것들은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사자 떼처럼 으르렁거리며 백성을 잡아먹고 민중의 재산과 보화를 있는 대로 빼앗아가니 그 때문에 생겨난 과부들의 숫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다. 26) 이 땅의 제사장들은 나의 가르침을 제 편리한 대로 설명하고, 내게 바친 제물과 헌금을 더럽혀 놓았으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백성에게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안식일이 수치스럽게 되는 것도 마음 아파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제멋대로 죄에 빠져 산 것은 모두 그들의 책임이다. 27) 이 나라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재판관들도 다른 짐승을 찢어 먹는 굶주린 이리 떼와 다를 바 없이 불의한 이득을 얻기 위해 서슴없이 사형 선고를 내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다.' 28) 그런데도 이 나라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놓으려고 듣기 좋은 말만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으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며 그럴듯하게 꾸며대며 거짓 예언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내가 그들에게 부탁한 일이 없는데도 내 이름을 걸고 설교한다고 떠들어댄다. 순전히 기만적인 망상들을 퍼뜨린다. 29) 이 나라의 지도자와 학자들은 탄압과 강탈을 일삼고 있다. 백성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갈 데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 30) 나는 혹시라도 민족을 위하여 무너진 성벽의 틈 사이로 뛰어들며, 내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내 앞에 막아서서 멸망의 위기에 놓인 네 백성을 구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이라도 있을까 두루 찾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31) 그래서 나는 타오르는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들을 멸망의 언덕으로 내려 보냈다. 그들이 저지른 죄값대로 그들에게 되돌려 보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 대로 행하였다.”
그러나 중보기도자들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새언약을 주셨다.
겔 36:22-29 /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다시 고국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너희들의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다. 너희가 어디를 가나 더럽혀 놓은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23) 세계 만민이 나의 위대한 이름을 다시 존숭하도록 내가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일을 보고 내가 여호와인 줄을 세계 만민이 깨닫게 만들겠다. 24) 이제 나는 너희를 세계 만민 속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다시 옛 고향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런 다음에 너희 몸에 정한 물을 뿌려 그동안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더러워진 오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26) 너희 속에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넣어 주겠다. 너희 가슴속에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들어 내고 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내가 이렇게 내 영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놓아 너희가 내 뜻에 따라 생활하고 내가 준 모든 계명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겠다. 28) 그렇게 되면 내가 옛날에 너희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에서 다시는 쫓겨나는 일 없이 너희는 영원히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29) 내가 이렇게 깨끗이 씻어 주면 너희가 다시는 과거의 더러운 행실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가 다시 깨끗해지는 그날에는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흉년이나 굶주림을 보내지 않겠다.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여호와께서 다윗을 만나실 때에 다윗이 여부스 사람인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성전터로 정해 둔 곳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듯이, 이제 우리 모두는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요 4:21-24),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대로 두 세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 18:19-20)는 말씀에 근거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중보기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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