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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영성 [브뤼기에르 소(蘇)주교 심포지엄 2차 자료]
장정란(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머리말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023년 10월 12일 교황청 시성부로부터 시복 추진에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인받음으로써 초대 조선교구장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蘇,1792~1835) 주교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며 시복시성 추진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광영스럽게도 필자는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시성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 위원의 소명을 받아 주교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덕행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분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연구 수행과정중 주교와 자주 연상되며 겹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方濟各沙勿畧, 1506~1552) 성인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 선교 성에 관한 연구 주제는 다양하게 많을 것이나, ‘이렇게 닮은꼴의 생애, 선교 행적과 영성이라면 우리 브뤼기에르 주교님도 하비에르 성인처럼 복자 성인품에 바로 오르시지 않을까?’라는 치졸한(?) 생각에 사로잡혔음을 고백한다.
본고에서 다루려는 내용은 첫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와 선교를 조선 대목구 설정의 주역이란 관점에서 살펴보고, 둘째, 하비에르 성인의 생애와 선교를 선교 여정을 따라가며 본 다음, 마지막으로 두 분 선교 영성의 닮은꼴을 추출해보려 한다.
기본 참조자료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관련해서는 정양모⋅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그리고 정양모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가톨릭출판사, 2007이다. 하비에르 성인 관련 참조자료는 앙드레 라비에 S.J. 지음, 엘렌 르브렝⋅김지수 옮김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가톨릭출판사, 1994이다.
1.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émy 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의 생애와 선교
1) 출생~시암 대목구 선교사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카르카손(Carcassone) 교구의 나르본
(Narbonne) 근교 오드 지역 레삭(Raissacd’Aude)마을에서 농부 프랑수아(François Bruguière) 와 테레즈(Thérèse)의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805년 카르카손 소신학교에 입학해 1815년 대신학교를 졸업하며 1814년 3월 26일 부제, 1815년 12월 2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814년 브뤼기에르 부제는 신학교 교사로 임명되어 이후 5년 동안 헌신적 교사로 재직하고 그 후 1819년 르카손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7월 19일에는 카르카손 주교좌성당 참사회(參事會, chanoine)1)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나이 26세에 불과한 브뤼기에르 신부에게는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카르카손 대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다른 사도직, 즉 선교사라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품게 되었다.2) 어떠한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려움을 이겨내며 먼 아시아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구체적 결심이었다. 그리하여 파리로 가서 1825년 9월 17일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넉달 반 동안 선교사가 되기 위한 해외선교 연수과정을 마친 후 선교 사명 수행 준비를 평가받았다.
1826년 2월 5일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를 떠나 2월 24일 프랑스 보르도 항구에서 중개무역회사 발게리 스튀탕베르(Balguerie-Stuttenberg)의 상선 에스페랑스 호(Espérance)를 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7월 1일 자바섬의 바타비아(자카르타) 도착, 8월 28일 바타비아 항구 출발, 싱가포르를 거쳐 영국 배를 얻어 타고 1826년 10월 중순 파리외방전교회 아시아 활동 거점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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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구 주교 또는 수도회 수도원장 자문위원으로 임명된 사제평의회. 교구 대표 기관.
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이하『서한집』으로 약칭), 정양모 신부 윤종국 신부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7, 380~381쪽.
3) 이 결정에는 시암 대목구 선교사 페코(M. Pécot, 1786~1823) 신부와 퓌피에(J. Pupier, 1797~1826) 신부가 몇 년 사이 차례로 사망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현범, 「시암 대목구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와 조선 선교지」,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자료집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31쪽.
4) 조현범, 위의 발표문, 34~35쪽.
5) 지금은 사라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있던 교구.
낭으로 가서 1932년 8월 4일 조선 선교지로 출발할 때까지 말레이반도에 속한 지역 사목을 담당 하였다. 당시 시암 대목구장 재치권 적용지역은 싱가포르 선교지 포함 말레이반도 끝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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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출발 당시 브뤼기에르의 배속지는 베트남 남부지역 코친차이나 대목구였다. 그러나 각 대목구 선교사 인원점검으로 인력을 보강할 곳은 코친차이나가 아니라 시암이라는 결론에 따라 마카오 도착 후 신임 브뤼기에르 신부의 행선지는 시암(Siam 현재 태국) 대목구로 변경되었다.3)
대표부의 결정에 따라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12월 11일 마카오를 출발해 1827년 1월 12일 시암 대목구 소속 페낭(Penang)에 도착해 머무르다가 6월 4일 시암의 수도 방콕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시암 대목구장 플로랑(E. M. J. Florens, 1762~1834) 주교를 보필했는데 첫 번째 임무는 방콕의 시암 대목구 신학교 운영이었다. 처음 신학생 3명으로 시작했지만 22개월 뒤인 1829년 4월 1일에는 22명으로 늘었다. 또한 소신학교가 따로 없었기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신학교에 라틴어, 철학, 신학 반을 개설해 다양한 수준의 수업을 진행하였다. 두 번째 임무는 당시 방콕 시내 4개 성당 본당사목을 맡고, 교구청 사무도 겸임하였다.
세 번째로는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활동이었다. 마카오 대표부의 바루델(J. Baroudel) 신부에게 보낸 1828년 1월 29일자 서한에 보면 브뤼기에르 신부는 방콕 도착 이래 어린이 1,6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4)
연로한 시암 대목구장 플로랑 주교는 유능한 브뤼기에르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기 위해 교황청에 청원서를 올려 1828년 「브뤼기에르 신부를 갑사(Capsa)5) 명의 주교 겸 시암 대목구장 계승권을 지닌 부주교로 임명한다.」는 교황 칙서를 받아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6월 29일 방콕 성모몽소승천주교좌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 후 시암 대목구장의 위임을 받아 곧 페낭으로가서 1932년 8월4일 조선으로 출발 할 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속한 지역 사목을 담당 하였다. 당시 시암 대목구장의 위임을 받아 곧 페낭으로 가서 1932년 8월 4일 조성 성교지로 출발 할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속한 지역 사목을 담당 하였다. 당시 시암 대목구장 재치권 적용 지역은 싱가포르 선교지 포함 말레이반도 끝까지엿다.
2) 조선 대목구 설정의 주역
조선 선교지는 1690년 이래 포르투갈의 선교 관할권(Padroado) 교구인 중국 남경교구(南京敎區)에 속해 있었다. 1784년 자생적으로 설립된 조선 교회는 1792년 4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었고 북경교구가 파견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 후 사제는 더이상 영입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그랬듯 박해와 가난, 굶주림 속에서도 성직자를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사제 영입에 주력하였다. 1811년 신태보⋅권기인⋅이여진, 1825년 정하상⋅유진길⋅조신철 이름으로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1816 년 이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의 북경 밀사 활동 등을 통해 서신들이 교황청에 전달되었다. 이 같은 그간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 마침내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의 결실을 맺었 는데 이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제가 바로 브뤼기에르 주교다.
1826년 마카오에서 시암 대목구로 떠날 준비를 하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현재 교황청 복음화부) 대표부 경리부장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와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 라미오(L. F. M. Lamiot) 신부에게서 조선 신자들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여러 차례 교황께 올리는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1824년 연말 조선 동지사를 수행해 북경에 도착한 유진길과 정하상은 남천주당을 방문해 ‘조선 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 이름으로 성직자 파견 청원 서한을 북경 교구장서리 누네스(J. R. Nunes) 신부에게 제출하였다. 교황께 올리는 서한이었으므로 이는 누네스 신부 손을 거쳐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에서 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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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현범, 앞의 발표문,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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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부터 북경교구까지 관할하게 된 남경교구장 페레이라(C. Pires-Pereira, 畢學源) 주교는 조선 선교사 파견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당시 포교성성 움피에레스 신부는 중국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서한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북경에서 오래 활동해 한문에 능통한 라미오 신부에게 번역문 검토를 부탁한 후 교황청에 전달하면서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수도회에 맡길 것을 건의하였다. 포교성성 문서고에 남아 있는 번역문에 마카오에서 번역이 이루어진 날짜가 1826년 11월 29일(tertio Kalendas Decembris, Anno Domini 1826)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때는 브뤼기에르 신부가 마카오에 체류하던 시기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10월 중순 마카오에 도착해 12월 11일 발령받은 시암 대목구를 향해 마카오를 떠났다.6)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신자들이 사제 파견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마카오에서 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페낭으로 향하며 잠시 착한 바타비아 항구에서 카르카손 교구 총대리 드 귀알리(deGualy)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도 알 수 있다.
…(전략)…중국 동북쪽에 ‘조선’이라는 왕국이 있습니다. 19세기 초(정확히는 1784년)에 북경에서
개종한 조선인 청년(이승훈 베드로)의 열성으로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서 동포들의 사도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그 열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1801년) 순교했습니다. 조선의 신입 교우들은 사목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간청했습니다. 북경 주교는 (1794년에) 신부(주문모 신부) 한 명을 파견했는데, 그는 조선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잠입한 지 몇 년 되지않아(1801년)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그 이후 조선 교우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북경으로 교우 대표를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했지만 늘 성과가 없었습니다. 북경 주교는 매번 조선 교우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817년7) 조선 교우들은 같은 목적으로 교황님께도 서신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올해 다시 교황님께 서신을 올렸다고 합니다. 제가 마카오에서 만나 뵌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경리부장(움피에레스 신부)이 새 서신에 관해 제게 언급했습니다. 경리부장은 매우 열심하고 용감한 프랑스 신부가 조선으로 갔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시암 교구 사목)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후략)…”8)
이로써 브뤼기에르 신부는 자신의 조선 선교 소명을 이미 자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속적 염원이었던 듯, 1827년 페낭에 도착해 2월 4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르와(C. F.Langlois)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도 조선 선교에 대해 다시 언급하였다.
“…(전략)…(주문모) 신부가 (1801년) 순교한 이래 조선 교우들은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열심한 신입 교우들은 매년 밀사를 보내어 성직자를 보내달라고 북경 주교에게 간청하지만 북경 주교는 이제까지 그 간청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선 교우들은 같은내용의 서한을 로마로 보냈습니다. 제가 착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황님께 올린 두 번째 서한입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는 일본인들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처럼 조선인들도 쾌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이 강하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신앙심이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점에 동의합니다.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후략)…”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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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811년의 오류.
8) 『서한집』, 제6신 (1826년 말~1827년 초, 바타비아), 83~84쪽.
9) 『서한집』, 제7신, (1827년 2월 4일, 페낭),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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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신부는 시암 대목구로 발령받아 파견되지만, 조선같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선교지에 지체 없이 자신이 가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브뤼기에르 신부가 시암 대목구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B. A.Cappellari, 1765~1846) 추기경은 조선 선교지를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대목구로 설정할 계획을세우고 있었다. 조선 교우들의 편지와 움피에레스 신부의 건의가 그 타당성을 설득시킨 듯하다.
카페랄리 추기경은 1827년 9월 1일과 11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 랑글르와 총장에게 조선 선교를 담당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그러나 파리 본부는 조선 선교지를 맡기에 선교 인원과 재원이 부족하고 더 큰 문제점은 조선 입국 방법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으로 회답하였다. 이에 카펠라리 추기경은 조선 선교지를 위한 초기 필요비용을 포교성성이 지원하겠다는 제안과, 조선 입국로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정보와 함께 유진길과 정하상의 서한 번역문을 동봉 해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랑글르와 총장은 마카오 대표부에 이 어려운 계획에서 주의할 것과 희망적인 것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해 달라겠노라 답신하였다. 그런 후 1828년 1월 6일 아시아지역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그간 조선 선교지를 두고 포교성성과 전교회 사이에 있었던 논의들을 설명하는 공동서한을 발송해 의견을 구하였다.10)
브뤼기에르 신부는 공동서한을 다각적으로 심도 있게 검토 후, 선교 자금과 선교 인원 부족 해결 방도와 조선 입국의 어려움도 현지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장장 열두 장의 편지를 썼다. 이는 1829년 5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본부 지도신부들에게 조선선교 자원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힌 첫 번째 편지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영성을 상징하는 표징어 “제가 가겠습니다.”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요 서신 원문을 요약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 우리는 기금이 없다.
그러나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의 도움으로 수지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뿐 아 니라 포교성성에서 몇 해 동안은 보조를 하겠다고 합니다. … 우리 신학교에서 일찍이 불가능한일이라고 하며 어떤 일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까?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선교지 가운데 한군데라도 포기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지요.
2. 우리는 선교사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젊은 신부 들이 선교를 지원하는 숫자가 지금보다 더 많았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회람에는 한꺼번에 15명내지 18명까지 지원자가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다른 지원자들이 많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 그뿐 아니라, 지원자가 없다고 우선 가정한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이 하면 틀림없이 지원자들이 얼마든지 모여들 것입니다. 『교훈이 되는 새 서한집』(아시아 선교사들의 서한집)에서 ‘조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를 모두 인쇄하고 거기에다가 열심한 조선 교우들이 여러번에 걸쳐 우리 교황님께 올린 편지도 인쇄해 넣으십시오. 그 견본은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프랑스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 전부 보내고, 성직을 지망하는 그 모든 신학생들의 애덕과 열성에 간절한 호소를 하십시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선교사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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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828년 1월 6일 자 공동서한의 번역문은 조현범, 앞의 발표문,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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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프랑스인들의 성격을 잘 압니다. 이 위험한 포교지에서 봉착하게 될 갖가지 어려움은 그들의열성을 자극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는 구실을 할 것입니다. 지원자 한 사람을 구하면 10명이 올 것입니다.
3. 다른 선교지에도 부족한 것이 많다.
급한 일은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저 불쌍한 조선인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습니다. … 지구 저 끝에 있는 불쌍한 교우들은 여러 해 전부터 교우들의 공동 아버지이신 교황님께 두 손모아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를 맡아 보살피시는 교황님께서는 우리 회를 선택하신다는 영광을 우리에게 내리셨고, 두 차례(1827년 9월 1일과 11월 17일)나 우리의 애덕에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도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조선은 우리 선교지에 속하지 않으니 책임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동감입니다. … 신부 한두 명쯤 줄어든다 해도 우리 선교지 전체로 볼 때에는 그리 큰 공백 상태를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림받은 선교지에서 볼 때에는 신부 한두 명도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시암 선교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선교사 한 명을 빼내어 슬픔에 잠긴 조선에 보내는 것을 조금도 가슴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4.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 점이야말로 여러 반대 이유 중에서 가장 그럴듯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계
획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 북경에서 출발한 한 중국인(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가 박해가 극심한 가운데서 여러 해 동안 성직을 행하다가 영광스러운 순교로 선교사업을 끝맺었습니다(1801년). 그런데 사천(四川)이나 산서(山西)에 가 있는 서양인 신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입니까? 몇 해 되지 않는 동안에 여러 장의 편지를 로마에까지 보낼 수 있었던 조선인들이 신부 한 명쯤 자기네 나라에 인도해 들이지 못하겠습니까? … 그러나 여기에 넘을 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어, 그 나라에 뚫고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도들에게,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밝히 내리실 때에 조선을 빼놓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과 같은 환경에 놓여 있는, 저 관심 끄는 조선 교회를 위해 서는 이 명령이 특히 엄중해지는 것입니다. 아니, 복음의 빛을 받자마자 신자가 된 한 가련한 조선 사람(이승훈)이 사도가 되어 얼마 안 되는 동안에 수천 명의 동포를 입교시켰는데, 이 훌륭한 사업이 계속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겠습니까? 믿음의 빛이 한순간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이 그들을 그전보다도 더 캄캄한 암흑 속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말하자면 자기 힘으로 이루어져서 시초부터 용감한 순교자와 순결한 동정녀들을 그렇게도 많이 예수그리스도께 바쳐, 사도 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을 바쳤던 것과 비길 만한 일을 한 저 새로운 교회, 귀양살이와 종살이를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망나니들의 도끼날 밑에서 아직 복음을 전하고 신입 교우의 숫자를 끝없이 불려가는 용감한 증거자들을 아직도 수많이 가지고 있는 저 교회, 그래 저 교회가 버림을 받아야겠습니까? 아니,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자마자 공경하고 사랑한 조선인들에게 엄하고 매정하게 하시겠습니까?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둘러싸여 그분의 일꾼들이 아무도 그들에게까지 다다를 수 없게 만들려고 하시겠습니까? 이와 같은 생각이 잠시나마 생겨난다면, 저는 섭리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5.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 앞서 말씀드린 것으로 우리 회가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 어떻든, 여러분이 심사숙고한 뒤에 그래도 미루는 것이 현명한 일이고 천주교회의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아주 간단한 계획을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면 조선의 신입 교우들에게는 대단히 유익할 수밖에 없고, 또 우리가 현재 책임지고 있는 선교지의 물질적 이익과 영신적 이익도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언질은 주지 말고, 우선 신부 한두 명을 보내겠다고 포교성성에 제의하십시오. 이들은 조선에 들어 갈 여러 가지 현명한 방법을 열심히 시험해보면 될 것입니다. 혹시 조선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면, 이들은 자기들 힘으로나 조선 신입 교우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뒤를 따를 선교사들을 맞아들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서양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일 것입니다. 그곳에 이른 신부는 목자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소멸될 위험을 시시각각으로 겪고 있는 저 선교지를 지탱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섭리는 다른 구제책을 마련하실 것입니다. 만일 이 나라에 파견된 신부가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다든지 사형을 당한다든지 하면 그 당사자에게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선교지에 크나큰 손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다는 만족감을 갖게 될 것이고, 자책하는 일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11)
이같이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지와 조선 신자들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한두 명 사제라 도 조선에 보내자고 제안하며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섰다. 또한 자신의 장상 시암 대목구 장 플로랑 주교도 자신의 뜻을 알고 찬성하며 직접 포교성성에 편지를 보내겠다고 한다고 했다.
아울러 포교성성에도 자신을 조선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는 청원 편지를 이미 썼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과 1830년에 거듭 포교성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표명하며 허락을 간청하였다. 또한 플로랑 주교도 브뤼기에르의 열정에 감동해 자신의 후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고 1829년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으로 보내는 데 동의한다.’ 는 서한을 포교성성으로 보냈다.
1831년 2월 2일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초대 조선대목구장 임명칙서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조선대목구장 임명을 알게 된 것은 10개월이 지난 후인 1832년 7월 25일 태국 선교사 뒤브와(J. Dubois) 신부의 서한을 통해서다.12) 주교는 즉시 조선을 향해 페낭을 출발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 입국 방안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파리 본부에 쓰던 1829년 5월 19일로부터 열흘 뒤인 5월 29일에 주교는 라미오 신부에게 12항에 달하는 조선 입국 방도를 묻는 서신을 보내고 있다.
“…북경에서 오랜 기간 체류하시는 동안 신부님은 조선 선교의 시작과 발전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필경 조선의 열심한 신입 교우들 중 몇 명도 만나보셨겠지요. 북경 교회와 새로 생긴 조선 교회가 서로 연락하고자 취한 온갖 소통을 진행시키기 위해 사용된 모든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계 실 것입니다. 『교훈이 되는 새 서한집』제5권 조선 관련 내용에 있는, 조선 선교지에 관해 흥미로운 지적을 해 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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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한집』, 제10신 (1829년 5월 19일, 방콕), 126~136쪽.
12) 『서한집』, 제17신 (1832년 8월 22일, 싱가포르),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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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교우들의 여러 편지들을 번역하기로 자청하신 분도, 주석을 달아 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그리고 제가 영광스럽게도 마카오에서 만나 뵈었을 때 조선 신입 교우들에 대해 매우 좋게 이야기해 주신 분도 신부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 사항들에 관해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첫째, 북경으로 편지를 보내 조선 교우들에게, 선교사 한 명이 곧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할 방법이 있습니까?
둘째, 조선으로 가려는 유럽인 선교사가 매우 조심하면 북경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셋째, 유럽인으로서 황제의 도시에 몰래 잠입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북경시 외곽의 교우들이 살고있는 어떤 읍내나 마을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넷째, 그 방법 역시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면, 산서나 사천으로 가서 거기서 조선 교우들을 기다리는것은 어떻겠습니까? 북경으로 미리 편지를 보내 선교사의 주소를 알려주고서 말입니다.
다섯째, 이 두 지방, 그러니까 산서와 사천 중에서 약속 장소로 가장 적당해 보이는 곳은 어디인지요?
여섯째, 조선 교우들이 이 두 지방 중 어느 한 곳으로라도 오는 것이 너무 멀거나 너무 어렵다면 만리장성까지 안내 할 중국인 안내자를 구할 수는 없는지요? 그래서 장성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날 수는 없을까요? 저희가 서로 알아보게끔 어떤 신호나 표식을 미리 합의하고서 말입니다.
일곱째, 바다를 통한 여행이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만 어렵다는 것입니까? 덜 위험하게 항해할 방법이 없을까요? 가령, 아무 짐도 없이 승선해서 약속한 장소에 당도한 후에 운임비를 지불하면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다에서 버림받지 않을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때 짐과 돈은 상인으로 가장한 중국인 혹은 조선 교우에게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짐과 돈을 맡은 사람은 다른 배를 타고 선교사보다 앞질러서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이지요.
여덟째,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간다고 할 때, 마카오에서 혹은 광동에서 혹은 복건에서 출발하여 조선에 상륙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아홉째, 조선에 장사하러 가는 사람은 중국인들밖에 없는지요? 조선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위해 어디가 되었든 중국의 항구로 오는 일은 도무지 없습니까?
열째, 조선 교회 심부름꾼들을 중국 대륙을 거쳐 광동이나 마카오까지 오게 하려는 계획은 절대 실현 불가능한 것입니까? 저는 '불가능’이라고 했지만, 현재로서는 무엇이든, 불가능한 것까지도 모두 시도해야만 합니다.
열한째, 마지막으로 여기서 제시한 방법 중 어떤 것도 실행에 옮길 수 없다면, 달단이나 러시아를 거쳐 갈 수는 없을까요?
열두째, 위에서 제가 제시한 것보다도 쉬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신부님이 직접 알아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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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한집』, 제11신 (1829년 5월 29일, 방콕, 출처: 로마 라자로회 고문서고), 137~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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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많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어떻든 저는 신부님이 이 질문들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하고 있는 조선 교우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저는 신부님이 제 뜻에 찬동하는 마음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의 여러 가지 질문에 하루 빨리 답장해주시길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후략)…”13)
3) 조선 대목구를 향한 선교 여정 : 페낭에서 마가자까지
자신의 조선대목구장 임명을 알게 된 1832년 7월 25일부터 서둘러 여행 준비를 마치고 8월 4일 말레이시아 페낭을 출발하며 시작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여정은 내몽골 마가자 교우촌에서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선종하는 1835년 10월 20일까지 3년 2개월여 동안 이어졌다.
곧 페낭-싱가포르-마닐라-마카오-복건 복안현 정두촌-히아푸-남경-직예 지역-산서 태원부 기현 구급촌-서만자-마가자다. 주교의 여정을 따르며 선교 영성을 살핀다.
(1) 페낭 출발~싱가포르 도착 (1832년 8월 4일~8월 17일)
: 1832년 8월 4일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신학교를 중퇴한 중국인 왕(王)요셉을 대동하고 조선을 향해 페낭을 출발하였다. 이때 페낭신학교 교수샤스탕(J. H. 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신부가 브뤼기에르를 따라 조선에서 선교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주교는 이를 수락하며 훗날을 기약하였다.
(2) 싱가포르 출발~마닐라 도착 (1832년 9월 12일~9월 30일)
(3) 마닐라 출발~마카오 도착 (1832년 10월 12일~10월 18일)
: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에르는 10월 21일 포교성성의 마카오 대표부에서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19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내린 조선대목구 설정 칙서14) 와 대목구장 임명 칙서15)를 수령하였다. 주교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처음 한 일은 조선 선교지 에 대한 재치권을 행사해 온 북경교구장 서리를 겸하며 북경에 머물던 남경교구장 페레이라(C. Pires-Pereira, 畢學源) 주교에게 조선대목구 설정과 대목구장 임명 사실을 알리는 서한을 작성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11월 18일에 조선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사목 서한을 작성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감동적 선교영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교황님께서, 여러분이 서한을 통해 청한 유럽인 주교를 어떤 중국인과 함께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있는 양들에게 목자들이 없다는 소식이 여러분들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우리는 조국을 떠나 다른 대리 감목구를 맡고 있었으나, 교황님께 서한을 통해, 빵을 청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쪼개어 나누어줄 사명을 지닌 주교들과 사제들을 파견해 주십사고 줄곧 청해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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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한집』, 제12신 (1831년 9월 9일, 로마), 142~143쪽.
15) 『서한집』, 제13신 (1831년 9월 9일, 로마), 144~145쪽.
16) 『서한집』, 제21신 (1832년 11월 18일, 마카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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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매일 기도 중에 복되신 동정녀와 모든 천사들의 보호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느님
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구원의 해 1832년 윤9월 26일 조선의 교황 대리 감목 바르톨로메오 주교 드림”16) 주교는 이 서한들을 11월 23일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송달케 하였다.17)
한편 마카오 체류 중에는 도착 직후인 10월 20일 이후부터 마카오 참사위원 총대리의 요청으로 견진성사 및 서품식을 집전하였다.18)
또한 마카오를 떠나기 직전인 12월 14일에는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연보』편집자와 전교후원 회원들에게 보내는 장문의 서한을 썼다. 전교후원회 이사회 후원금 5,600프랑에 대해 감사하면 서 조선 교회의 위험과 희망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는데, 특별한 의미는 조선 천주교회 역사와 현황을 알리는 상세 요약문을 동봉하며 연보에 게재를 부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목은 「조선 천주교회 약사」로 1. 조선 개관, 2. 임진왜란과 천주교, 2-① 가이오 수사, 2-② 권 빈센시오 가베에(嘉兵衛) 수사, 2-③ 오타 줄리아 동정녀, 3. 이승훈의 영세(1784년)와 김범우의 유배(1785년), 4. 성직자 영입 실패와 신해박해(1791년), 5. 주문모 신부 밀입국(1794년), 을묘박해(1795년) 와 신유박해(1801년), 5-① 최필공 토마스의 행적, 5-②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행적, 5-③ 황사영 알렉시오의 행적, 5-④ 강완숙 골롬바의 행적, 5-⑤ 윤점혜 아가타의 행적, 5-⑥ 이순이 루갈다의 행적으로 구성되어 있다.19) 특히 ‘맺는말’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을 향한 굳은 선교
영성의 근원을 명료히 보여주고 있다.
“전교후원회원 여러분,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사례들만 보아도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조선 교우들이 자기네가 받은 은총을 동포들에게 베풀려는 열성, 조선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숫자와 항구한 믿음, 선교사들을 모시려고 베이징과 교황청에 간청하는 그 열성은 정말 경이롭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조선 선교의 앞날은 밝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이미백배의 열매를 맺은 이 낯선 땅에서 장차 복음이 크게 발전할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20)
이로써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순교자들부터, 조선 교회의 자생적 설립, 그간 있었던 박해와 순교자들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조선 교회 역사에 관해 넓고 깊은 지식이 있었고, 그것이 조선 교회와 신자들에게 감탄, 감동하며 필생의 선교 의지를 다지고 펼치려한 근원임을 알 수 있다.
(4) 마카오 출발~복건성 복안 정두촌 도착 (1832년 12월 19일 혹은 20일~1833년 3월 1일)
: 1832년 12월 19일 혹은 20일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스페인 도미니코회의 복건(福建) 대목구장 디아즈(R. J. Carpegna Díaz, 羅羅各) 주교가 보낸 배로 복안(福安) 정두촌(頂頭村)을 향해 떠났다. 배에는 중국 각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 다섯 명이 동승해 일행은 1833년 3월 1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조선으로 향하는 중국 대륙 남에서 북으로의 종단 여정에 오른 것이다. 도착 8일 후인 3월 9일, 동승했던 모방(P. P. Maubant, 羅伯多綠, 1803~1839) 신부는 자신의 임지 사천(四川) 대목구 대신 조선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일단 모방 신부의 의향을 사천대목구장 폰타나(G. L. Fontana) 주교에게 전하는 한편, 모방 신부가 당분간 복건 흥화(興化) 지역에서 사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폰타나 주교가 모방 신부의 조선 선교를 허락한 것은 다음해 8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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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이하『여행기』로 약칭), 정양모 신부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7, 110~111쪽.
18) 『여행기』, 110쪽.
19) 『서한집』, 제24신 (1832년 12월 14일, 마카오), 189~229쪽. 「조선 천주교회 약사」(출처 : APF, v. 6 (Lyon, 1833),ff. 552~587), 197~229쪽.
20) 위의 『서한집』,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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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건 출발~남경 도착 (1833년 4월 27일~5월 18일)
: 1833년 4월 2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南京)을 향해 출발, 5월 12일 절강성 북부 히아푸 (Hia pou)21) 포구 도착, 5월 15일 강남운하 인근 농가에 머물며 이튿날 그곳 소성당에서 예수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하였다. 다시 출발, 5월 18일 강남(남경 인근) 숙소에 도착해 64일을 체류하였다. 그동안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신자들에게 일고여덟 번 병자성사를 주었다.22)
도착 당일인 5월 18일 남경교구 주교 총대리 카스트로(Castro) 신부가 방문해 5월 23일까지 머물렀고, 6월 26일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전달하러 북경에 갔던 왕 요셉이 임무를 수 행하고 돌아와 강남 숙소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6) 남경 (인근) 출발~직예(直隷) 지역 도착 (1833년 7월 20일~8월 26일)
: 1833년 7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 요셉과 안내인 두 명(도 바오로 노인과 양 요한)을 앞
세우고 조선 교회 밀사들을 만날 수 있는 북경을 향해 출발해, 7월 28일~31일 양자강을 건넌 후 육로 약 3천리를 걸어 산서성 경계까지 도착했고, 8월 13일에 황하를 건넜다. 이즈음 브뤼기에르 주교는 남경 인근에 있을 때부터 앓기 시작한 열병으로 큰 고통을 겪었는데, 지속된 병고로 때로는 한 발자국을 옮길 수 없도록 쇠약해져 하루나 이틀 앓아눕곤 하였다. 무리한 일정과 영양실조는 건강 악화를 부채질하였다. 그런 몸으로 여정을 이어간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동성(山東省)을 거쳐 8월 26일 북경에서 멀지 않은 산동⋅직예(直隷) 접경 교우촌 지역에 도착해 한 교우 집에 한 달여를 머물며 요양해야만 하였다.
(7) 직예 지역 출발~산서 태원부 기현 구급촌 도착 (1833년 9월 29일~10월 10일)
: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9월 29일에 이탈리아 출신 프란치스코회원 살베티(J. Salvetti) 주교가 산서 대목구장으로 사목하고 있던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 기현(祁縣) 구급촌(九汲村)으로 출발하였다. 10월 10일 주교관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곳에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이듬해 9월 22일까지 11개월 12일 동안 머무르며 건강회복에 힘쓰고 조선 교회와의 연계에 노력하였다. 11월 18일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광범위한 교시와 편지를 밀사에게 주고 조선 교회 상황에 대해 알아오도록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북경에 조선 교우들이 나타나지 않아 무위로 돌아갔다.23) 또한 이듬해 1834년 5월 12일에 이번에는 조선으로의 새로운 행로 개척을 위해 왕 요셉을 보내 달단 지역을 횡단해 조선 국경까지 바짝 다가가 그 지역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집 한 채를 빌리거나 구입하는 가능성 여부도 타진하도록 하였다.24)
(8) 산서성 태원부 기현 구급촌 출발~서만자 도착 (1834년 9월 22일~10월 8일)
: 1834년 9월 22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1년여를 지낸 산서 대목구 구급촌을 떠나 하북성의 장
가구(張家口)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으로 향하였다. 북경 북당의 프랑스 라자로회 리치(S. Ricci,薛瑪竇) 신부 등이 박해를 피해 1829년 사목지를 만리장성 밖으로 옮겨 설립한 서만자 교우촌은 북경은 물론 조선과도 한 발 더 가깝기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과의 교유가 훨씬 용이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0월 8일 서만자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전 해 복건에서 헤어졌던 모방 신부를 만났다. 그동안 모방 신부는 1833년 12월 4일 복건을 출발해 육로로 북경으로 갔고, 1834년 6월 8일 서만자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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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차기진은 히아푸가 첫째 절강성 영파(寧波) 해포진(蟹浦鎭, 현 澥浦鎭), 둘째 절강성 가흥(嘉興) 사포진(乍浦鎭)일 두 가능성이 있는데, 브뤼기에르 여행기에 기록된 여행 기간으로 볼 때, 히아푸는 남경에 더 가까운 가흥시 사포(乍浦)인 듯하다고 하였다. 차기진,「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선교 여정과 선종, 유해 이장」,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소 주교 시복 추진 제1차 심포지엄’ 자료집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생애와 조선 선교 배경』, 한국교회사연구소, 2023, 94쪽.
22) 『여행기』,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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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7일까지 1년 동안 서만자에 체류하였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만 전을 기하며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박해와 체포령 소식에 피신하는 일도 겪었다. 1835년 6월 17일에는 마을 뒤 토굴로 피신했다가 6월 23일 거처로 귀환했고 사흘 뒤인 6월 26일에도 다시 박해 소식에 산속 오두막으로 피신했다가 7월 3일 거처로 돌아왔다.25)
조선 입국을 위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9일에 쓴 장문의 편지를 들려 왕 요셉을 다시 북경으로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자신의 조선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에게서 받은 임무임을 밝히고, 이 의무 이행을 위해 어떠한 방해와 난관이 있더라도 반드시 조선에 입국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하였다.
“여러분들의 결정이 어떠하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서 위임받은 선교 의무 를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음력 11월 중에 조선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의 문을 두드릴 것이고, 교우 여러분들 스스로 청하자 하늘이 자비를 베풀어 보내주시는 주교를 받아들일만
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의 교우들 중에 적어도 한 명쯤은 있는 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26)
왕 요셉은 1월 19일 북경에 온 조선 교회 밀사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조신철(趙信喆 가 로), 김 프란치스코(金方濟)를 만났고 그들은 오는 연말에 주교님을 반드시 조선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을 담은 1835년 1월 21일(음력 1834년 12월 23일) 자 서한을 주교 게 올렸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제시한 구체적 입국 방안의 이행도 약속하였다.
“지금 왕 선생께서 대신 전하신 편지를 받아보니 내년 11월 교우들을 책문(柵門)에 보내 주교님 을 영접하되 모든 것은 작년 신부님(파치피코)을 맞이하였을 때와 같이 하라 하시고, 또 그때 주 교님과 왕 선생이 기일에 앞서 책문에 오셔서 객점에 머무실 것이니 서로를 알아보는 호(號)는 ‘만신(萬信)’으로 하고 수건을 들어 표시하라고 하셨으니 지극히 옳고 또 옳은 일입니다.”27)
브뤼기에르 주교는 즉시 왕 요셉을 다시 북경으로 파견했으며, 2월 7일 조선 교우들과 만난 왕 요셉은 몇 가지 물건과 입국에 소요될 경비를 조선 교우들에게 넘겨주었고, 조선 교우들로부터 편지와 함께 조선 입국 때 갈아입을 조선 옷 한 벌을 수령하였다.28)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종일관 조선 선교만을 위한 일념뿐이었지만 조선과 인접한 서만자에 머
물며 그 소명은 한층 절실해졌다. 그 위에 주교 영입에 대한 조선 교우들의 진심 확인 후에는 망설임 없이 출발을 결정하며 서만자를 떠나기 전에 미리 특별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는 조선과 접한 요동지방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조선대목구장 관리 아래 두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로마에 발송하였다. 요동은 중국 대륙을 종단한 선교사가 조선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요동지방의 재치권을 다시금 열심히 청합니다. …저는 중국어로 펑티엔푸(奉天府, 지금의심양)라고 하는 곳이 그에 속한 모든 주현과 함께 저희에게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9)1835년 10월 1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이 서신에 이어 이튿날 10월 2일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르와 신부에게도 같은 청원 편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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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여행기』, 201~202쪽.
24) 1834년 6월 6일 산서에서 부모에게 보낸 편지, 『서한집』제32신, 259~263쪽.
25) 『여행기』, 329~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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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봉천부라고 부르는 도시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주십사고 요구하십시오. 조선에 이웃해 있 는 이 지방은 모든 부속 지역과 함께 저희 사정에 꼭 맞을 뿐더러 저희 계획의 온전한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입니다.”30)
그러나 이미 이전 1835년 7월 27일 서만자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신31)과 8월 7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32)에도 요동지역을 조선 대리감목의 재치권에 맡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그 주요 근거를 들어 상세히 설명하며 간곡히 청하고 있다. 또한 1835년 10월 5 일로 끝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마지막 당부도 “요동 지방 일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넘기 는 결정을 서둘러 내리도록 교황 성하께 촉구해 주십시오.”라는 글이다.33)
둘째는 조선 선교사를 희망하는 사천 대목구 소속 앵베르(L. Imbert, 1796~1839) 신부를 교구장
서리나 자신의 부주교로 임명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835년 10월 2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뜻을 명료히 하였다.
“남경에서 온 한 심부름꾼에 따르면 앵베르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뽑힌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정말 확실한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늘 기분이 좋아집니다. 진정 그런 선교사가 저희와 함께 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면서 요동지역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이 저희에게 그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되면 그는 이 지역의 교우들을 돌보고 심기일전 시킬 것이며, 달단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교지에 마침내 신학교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만이 홀로 조선 신학교를 괜찮은 규모로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 게다가 저는 조선 선교지를 모든 점에서 사천 선교지 수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앵베르 신부뿐입니다.”34)
이어 10월 6일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선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에게 보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서한에서도 이를 청원하였다.
“교황 성하께서 제 요청에 신뢰를 주시는 한, 앵베르 신부가 온다는 것은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가 오면 요동에 배치되어 교우들을 보살필 것이고, 달단인들을 개종시키기위해 일할 것이며 신학교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선교 지역의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품을 받는 게 바람직하기까지 합니다.”35)
이로써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사목할 교우들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갈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여행기 마지막 서술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심경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운명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나는 하느님 섭리의 품 안에 내 한 몸을 던져, 중도에서 죽거나 불가항력에 의해 저지당하지 않는 한, 나의 달음박질 종착지(조선) 에 이를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위험을 뚫으며 달릴 것입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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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여행기』, 292~293쪽.
27) 『여행기』부록: 브뤼기에르 주교 관련 한문 서한 (역자: 최기섭 신부, 김홍경 교수), 7.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 김 프란치스코가 연명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께 보낸 편지, 381~385쪽. 이 부분 내용은 여행기 본문(295~296)에 수록된 내용과 출입이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여행기 본문을 인용해 입국 방안을 조선 교우들의 의견이라 했으나, 조선 교우들의 한문 원문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제안임을 알 수 있다.
28) 『여행기』, 309쪽.
29) 『서한집』, 제50신 (1835년 10월 1일, 서만자), 345~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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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만자 출발~마가자 도착 (1835년 10월 7일~10월 19일) · 선종 (10월 20일)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모방 신부와 작별하고, 중국인 라자리스트 고(Ko) 신부와 왕 요셉 그리고 연락원들과 함께 서만자 교우촌을 출발하였다. 목적지는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국경 마을 변문(邊門)이었다. 문제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건강이었다. 수종병(水腫病)에 걸린데다가37) 심한 두통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두통이 잠시 가라앉자 출발을 감행한 것이다.
10월 8~9일 오호(五號, 장가구시 숭례구 五號村) 마을을 거쳐 10월 15일 서부 타타르 라마묘(喇嘛廟, 현 내몽고자치구 錫林郭勒盟; 多倫縣의 옛 이름)에 도착하였다.
그동안에도 두통은 도지고 구토까지 했으며 혹한으로 동상에도 걸리는 등 병은 악화일로여서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10월 19일 내몽골의 작은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 도착하였다. 마가자는 피엘리쿠(Pielikeou 別拉溝)로 표기하는 교우촌으로, 현재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 동산향(東山鄕)이다.38) 일행은 이 마을에서 보름 동안 체류했다가 다시 길을 나설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10월 20일 저녁 8시 15분경 브뤼기에르 주교는 갑자기 발병해 고 신부에게 병 자성자를 받고 홀연히 선종하였다.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는 11월 9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접하고 즉시 마가자로 출발해 17일 도착하였다. 11월 21일 신자들과 함께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주교의 시신을 마가자 교우촌 신자 묘지에 안장하였다. 모방 신부는 마카오 주재 르그레즈와 신부 및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신부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망 원인을 “광활한 중국 대륙을 북상하면서 겪은 궁핍과 피로와 온갖 고통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39)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인 1931년 마가자 현지에서 발굴되어 조선으로 옮겨졌으며, 10월 15일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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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한집』, 제51신 (1835년 10월 2일, 서만자), 350~352쪽.
31) 『서한집』, 제45신 (1835년 7월 27일, 서만자), 311~314쪽.
32) 『서한집』, 제47신 (1835년 8월 7일, 서만자), 323~338쪽.
33) 『여행기』, 348쪽.
34) 『서한집』, 제51신 (1835년 10월 2일, 서만자), 352쪽.
35) 『서한집』, 제52신 (1835년 10월 6일, 서만자), 353~358쪽.
36) 『여행기』, 346쪽.
37) 1835년 7월 28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추신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다리가 부었다 가라앉았다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며 특히 습한 날씨에 그런데, 수종증이라고 한다. 왕실 치료제라야 효과가 있을 것 같으니 적당한 도수의 치료제 몇병을 사용법과 함께 보내달라’고 청하고 있다. ‘왕실 치료제를 소개하는 책이 있고, 성 요셉신학교 사제들과 움피에레스 신부가그것을 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하였다. 『서한집』, 제46신 (1835년 7월 28일, 서만자), 322쪽.
38) 차기진, 앞의 발표문, 101쪽 참조
39) 『서한집』, 제54신 (1835년 11월 9일, 서만자), 361~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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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성인의 생애와 선교
1) 출생~선교 영성의 발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 나바라 왕국(Navarra)의 수도 팜플로나(Pamplona) 동쪽 52㎞ 하비에르 성의 성주 야수(Don Juan de Jassu)와 마리아(Maria)의 5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25년 9월 하비에르는 프랑스 파리의 오래된 명문 생 바르브 대학 (College de Sainte-Barbe)에 입학하였다. 이 때 하비에르는 프랑스 사부아(Savoie) 출신 피에르 파브르(Pierre Favre)와 방을 함께 쓰며 1529년 둘은 나란히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동시에 성직을 선택,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때 하비에르는 인근 도르망 보배(Dormans-Beauvais) 대학에서 강의도 했는데 숙식은 여전히 생 바르브에서 파브르와 함께 하였다.
그리고 1529년 10월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새로 온 학생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가 그들과 같은 숙소를 쓰게 되었다. 로욜라는 하비에르보다 열다섯 살 많은 만학도였고 또한 같은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지만 나바라 왕국을 둔 영토 전쟁에서 8년 전 하비에르 가문은 프랑스 편에서, 로욜라는 스페인 편에서 싸웠다.
하비에르는 다른 영혼을 구하기 위해 어서 사제가 되자는 로욜라의 조언을 무시하며 그가 다른 학생들을 회심시키는 것에도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1533년 초 로욜라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마르 8,36)는 말씀에 하비에르의 세속적 야망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으로 바뀌었다.40) 이어 합류한 스페인 출신 자크 라이네스(Jacques Laynez), 알퐁소 살메론
(Alphonso Salmeron), 니콜라스 보바디야(Nicolas Bobadilla), 포르투갈 출신 시몬 로드리게스
(Simon Rodriguez) 등 총 일곱 명은 함께 1534년 8월 15일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생 드니
(Saint Denys, 현재 몽마르트르 생 피에르 성당 Saint-Pierre de Montmartre) 지하 소성당에서 서원하였다.
정결과 청빈,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 비신자들 개종에 헌신하겠다는 예수회원 최초의 서원이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서원자들은 1536년 11월 15일 파리를 떠나 1537년 1월 6일 베네치아 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 1535년 클로드 제이(Claude Jay), 1536년 파샤스 브로에(Paschase Broet)와 장 코뒤르(Jean Codure) 등 프랑스 출신 사제 세 명이 합류해 초기 동료는 총 열 명이 되었다. 이들은 매년 8월 15일 몽마르트르에 올라 1534년 허원을 새롭게 새겼다.
1537년 3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청원한 예루살렘 순례와 사제 서품이 받아들여지며 6월 24일 하비에르는 로욜라 등 동료 네 명과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아드리아 해에서 벌어진 오스만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 간 전쟁으로 예루살렘 배편이 끊겨 예루살렘 행 계획은 접어야만 하였다. 9월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에 모인 동료들은 스스로를 봉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징으로 자신들을「예수회(la Compagnie de Jésus)」라 칭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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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후안 카트레트, 신원식 옮김, 『예수회 역사』,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99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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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 부활절 무렵 로마에 다시모인 열 명의 회원은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당분간 선교활동에 나섰다. 하비에르 신부는 생 루이 드 프랑세(Saint Louis des Français) 성당에서 강론, 고해성사를 맡고 아이들 교리도 가르쳤다. 이 시기 하비에르는 2년 동안 단체의 비서로 선출되어 헌신하였다. 1539년 3월 중순부터 6월 24일까지의 회합에서 회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종신 장상과 또한 ‘선교에 관해 교황에게 순명할 것’을 서약하는 작은 수도회로 일치해 나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자유로운 영신 수련모임 예수회는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의 ‘공식인가(Regimini Militantis Ecclesiae)’에 의해 정식 수도회로 탄생하게 되었다.41)
앞서 교황 바오로 3세는 1534년부터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539년 7월 8일 고아교구 설립을 인가하고 선교를 수도회나 단체에 수탁했으므로 인도 지역 선교를 예수회에 요청하였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선교 서약(circa missionaris)’으로 교황의 요청에 응답하였고, 하비에르 신부는 ‘선교에 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첫 예수회원’이 되었다.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회 공식승인 전에 이미 로마를 떠나 포르투갈로 향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예수회원들과 유대를 갖고 적극적 지원을 했던 포르투갈 국왕 주앙(João) 3세가 1540년 초 주바티칸 포르투갈 대사를 통해 선왕 마누엘 1세가 개척한 식민지 인도에서 예수회원들이 활동해 주기를 희망하며 교황에게 허가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보바디야와 로드리게스 신부의 파견을 결정했으나 건강 문제로 보바디야 신부가 긴 항해를 감당할 수 없자 1540년 3월 15일 대신 하비에르 신부 파견이 결정되었다. 하비에르 선종 후 로욜라 총장은 이 결정을 받아들이는 하비에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신부님은 자신이 “예 있노라.”고 지체 없이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물러나 곧 낡은 하의 두 벌과 누추한 수단을 꾸리시는 것이었다.”42)
로마를 떠날 때 하비에르 신부는 봉인된 편지세 통을 남겨 예수회가 승인되면 개봉할 것을 당부하였다.
첫째는 예수회의 회칙 제정, 승인 때 그의 권리를 다른 회원들에게 위임한다는 것,
둘째는 예수회 총장에 로욜라를 지지하며, 혹 그의 부재 시에는 파브르를 지지한다는 것,
셋째는 장차 선출될 총장 통제 하에 자신의 종신서원을 부탁한다는 라이네즈 앞으로 보내는 편지였다.43)
3월 16일 하비에르 신부는 로마를 출발, 볼로냐, 리옹, 퐁타라비를 경유해 6월 말 포르투갈 선 단이 인도 출범 준비를 갖추고 있던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하비에르와 로드리게스 신부는 동쪽 으로 부는 계절풍을 기다리며 이듬해 1541년 봄까지 사회적 신분이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만민을 위해 설교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영신수련을 가르쳤다. 또한 이단 죄목으로 종교재판을 받은 수감자들의 회두를 맡아했는데, 감옥에서 하비에르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회심한 23명이 사형을 면하였다. 두 예수회원의 헌신에 영적 위로를 얻은 백성들은 그들이 포르투갈에 남아 사도직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국왕에게 소청하였다. 국왕은 교황에게 청원하였고, 교황은 로욜라 총장에게 결정을 위임해 결국 로드리게스 신부가 포르투갈에 남고 하비에르 신부만 인도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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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위의 책, 17쪽.
42) 앙드레 라비에 S.J.(저), 엘렌 르브렝 · 김지수(역),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1994, 가톨릭출판사, 46쪽.
43) 예수회는 하비에르가 인도로 떠나기 전인 1540년 9월 27일에 교황승인을 받았고, 그의 출항 다음날인 1541년 4월 8일 로욜라가 초대 예수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1943년 10월말 인도 남부 코모린 곶에서 선교하던 중 증원 요청을 위해 잠시 고아에 갔을 때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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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541년 4월 7일, 35세 생일날, 하비에르 신부는 리스본에서 산티아고(Santiago)호에 올 라 인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신임 인도총독 마르탱 수자(Martin de Sousa)도 동승하였다. 이때 하비에르 신부의 짐은 두꺼운 옷 한 벌, 기도서, 그리고 평생 간직할 성직자들 작은 선집(選集)이 다였다. 그러나 하비에르의 신분 자격은 희망봉 동쪽 모든 동양제국의 교황대사(Nuntio Apostolico), 포르투갈 국왕 순찰사, 아시아 지역 예수회 최고 장상이었다. 교황대사 신분은 사도좌를 대신해 인도와 아시아 지역 가톨릭교회의 사목을 감독하는 자리이다. 포르투갈 국왕순찰사로서도 아시아의 식민지나 기타지역의 정치, 외교 상황에 대한 보고와 제안 임무가 맡겨졌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하비에르는 한 수도회의 수도자가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 선교지를 책임지고감독하는 위치였으며 그의 인도 및 말라카 · 몰루카제도 그리고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선교는 신분적 정체성에 기반한 의무와 책임 내지 선교 영성이라 할 수 있다.44)
2) 인도 선교
(1) 고아(Goa) (1542년 5월 6일~9월 20일)
하비에르 신부는 1542년 5월 6일 포르투갈령 동인도 수도 고아(Goa)에 도착해 1545년까지 선 교하였다. 예수회 초기 동료 10명 중 처음으로 유럽을 떠나 비그리스도교 국가에 파견되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실천하고자 했던 비그리스도인 복음화를 처음 실천한 셈이다.
그는 낯선 이방인 속에서도 선구적으로 교회를 개척, 설립해 그리스도 공동체를 조직하고 구성 하며 양성하게 할 결심을 하며 고아 선교에서 목표 두 가지를 세웠다.
첫째는 인도 안 포르투갈인들 신앙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고아 시민들은 거의 다 그리스도교 신 자이며 훌륭하게 건립된 대성당과 다수의 작은 성당, 프란치스코 수도원도 있었다. 그러나 탐욕 스러운 포르투갈인들과 여타 인종들이 다수 섞여 있었고, 포르투갈 군대가 상주하며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질서는 유지시켰으나 이면에는 온갖 음모와 착취가 자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는 하층민과 소외된 현지인들에 대한 우선 선교였다. 고아에는 성당과 사제들이 있었지 만 성문을 나서면 선교사제는 드물었다.
하비에르는 우선 포르투갈어로 간략한 가톨릭 교리서 「Doctirna Christina」를 썼다.
또한 생 포이(Sainte-Foy)로 불리는 성 바오로(Sainte-Paul) 신학대학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주앙 3세의 후원으로 인도, 실론, 말레이시아, 말라가시,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출신 총 60여명 젊 은이들이 기숙하며 교육받고 있었는데, 하비에르는 이미 토착민 성직자 양성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대학과정에서 문법, 수사학, 고전 강의를, 초급 과정에서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간단한 간호를 몸소 가르쳤다.
또한 병원 환자들을 위해 사목하고, 해안가 마을을 돌며 아이들과 낮은 신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하비에르 신부가 거리를 다니며 종을 흔들면 아이들과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하비에르는신학대학을 고아의 예수회 선교본부로 만들며 자신의 임무를 참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청빈, 고행, 희생, 기도, 설교로 점철된 선교 영성의 본보기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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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최영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와 적응주의의 탄생」, 『교회사연구』55집, 한국교 회사연구소, 2019, 7~5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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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 남단 코모린(Comorin) 곶 선교 (1542년 10월~1544년 12월)
1542년 9월 20일, 고아 도착 4개월 반 후, 하비에르 신부는 미세르 파울로(Miser Paulo)에게
성 바오로 대학을 맡겨두고 미세르 만실라(Miser Mansilhas)와 고아의 산타페 신학교 출신 현지 성직자 몇 명을 통역 삼아 인도 최남단 코모린 곶 북부 해안을 선교지로 정하고 남하하였다. 그 곳에는 약 3만 여명 파라바(Parava) 족이 30여개 부락에 흩어져 빈한하게 살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세계 최대 진주조개 어장이었지만 파라바족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힘이 없었다. 파라 바족 추장이 1532년 고아의 포르투갈에 도움을 청하자 포르투갈은 보호 조건으로 부족민들의 가톨릭 개종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전략 요충지 확보와 진주조개 어장 관리를 꾀하였다.
합의로 부족민 2만여 명이 집단 세례를 받았으나 그들의 개종은 단지 포르투갈의 보호증서였으며 그위에 교리를 가르쳐 줄 성직자도 없었으므로 순식간에 토속신앙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10월에 도착한 하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어와 파라바족의 타밀어를 모두 알아듣는 사람들을 선정해 교리교사로 임명하고 함께 라틴어 기도문을 타밀어로 번역했다. 성호경, 삼위일체 교리, 신경, 십계명, 주님의 기도, 성모송, 그리고 성모찬송가, 참회기도 순이었다. 교리교사들은 신자들 앞에서 타밀어 번역 기도문과 믿을 교리 요점을 운율에 맞추어 읽었고 사람들은 그 뜻을 알든 모르든 따라 불렀다. 하비에르 스스로도 이 번역문을 외워 낭독하거나 가능한 운율로 노래불렀다. 그렇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이미 세례 받은 이들에게는 교리를 설명하였다.
1542년 10월부터 1544년 12월까지 2년2개월 동안 하비에르 신부는 코모린 곶 해안가 160㎞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마을에 40여 개 성당을 세우고 교리교사들을 임명하였다. 코모린 곶 서쪽 연안 트라방코르(Travancore) 지역에서는 1544년 11월에서 12월 한 달 동안 무려 1만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45)
한편 하비에르 신부는 개종한 신자들을 교육시켜 선교 사업을 완성시킬 또 다른 선교사들 초빙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주교에게 “코모린 곶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빈곤과, 세례를 줄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가엾게도 죽어가고 있는지를 항상 기억하십시오.”라고 썼다.46)
3) 몰루카제도 선교
1545년 하비에르 신부는 코치(Cochi)에서 배를 타고 코모린 곶을 돌아 인도 동남쪽 밀라포레
(현재 첸나이 남부)로 이동해 성 토마스 사도 무덤 옆에 4월부터 8월까지 넉 달을 머물렀다. 1월 말레이시아 말라카(Malacca)에서 하비에르 신부를 방문한 파비아(Antoine de Pavia)라는 사람이 복음전파에 최적이라고 추천한 인도네시아 동쪽 끝 몰루카(Molucca)제도 선교를 고민하며 결정 하기 위해서였다. 선교 결정 후 9월부터 동서양 무역 중심지 포르투갈령 말라카에 3개월 간 정박하였다. 그동안 향락으로 흥청거리는 풍요로운 이 도시에서 직접 선교 방식으로 가정, 도박장, 오락실, 유곽 등을 방문하고, 주일마다 성당에서 강론하고 고해성사를 주었다. 가엾은 이웃인 유대인, 이슬람교도, 가난한 자, 죄수들도 잊지 않았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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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인도에 관한 소식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왕국에서 구세주께서는 무수한 사람들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한 달 동안 무려 만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비에르가 로욜라에게 보낸 편지」, 라비에, 앞의 책, 74쪽.
46) 라비에, 위의 책, 75쪽.
47) 라비에, 위의 책, 81~83쪽.
48) 라비에, 위의 책,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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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1월 1일 몰루카제도를 향해 출발해 2월 14일 암본(Ambon)섬에 상륙하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흩어져 있는 수많은 모든 섬들을 방문해 선교하고 싶어 그 안타까움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섬들이 있습니다.”라고 토로하였다.
(1) 암본(Ambon)섬
암본 섬은 포르투갈인들이 1512년부터 정착해 살던 곳으로 하비에르는 1546년 2월 14일부터 석 달을 머무르며 포르투갈 군인들을 사목하고 이미 형성된 7개 신자부락을 걸어 방문하며 선교하였다.
(2) 테르나트(Ternate)섬
1546년 6월 중순 테르나트 섬으로 이동해 포르투갈 요새에 머물렀는데 섬에 단 하나 있는 병원에 상주하며 병자들을 돌보고 강론하여 “그가 가르친 교리와 성가는 곧 소돔 성같이 퇴폐한 이 도시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48)
이 기간에 하비에르 신부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총괄적으로 다룬 유일한 저서 「사도신경 해설」 을 포르투갈어로 썼다. 12장으로 구성해 각장마다 사도신경 구절 하나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구절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한 일종의 개요서다.
(3) 모로(Moro)섬
살해된 사람들 머리를 잘라 수집하고 인육을 즐기는 야만인들이 주를 이루는 섬으로 3개월 체류하였다. 그들 언어를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던 하비에르 신부는 노상에서 마주치면 미소 지으며 그들을 얼싸안는 것이 유일한 언어활동이었다고 한다. 이 섬이 어떤 곳인가를 알면서도 간이유를 하비에르는 1546년 5월 10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모로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모로의 원주민들은 불신으로 가득차서 먹을것과 마실 것 속에 여러 가지 독약을 섞어놓곤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섬에 사는 신자들을 보살 필 만한 사람들이 그곳에 가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원주민들의 영신상의 필요를 채워주고, 아이들에게는 성세성사를 베풀어 그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곳에 갈 것을 결정했습
니다.”49)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비에르는 섬의 소수 신자 가운데 선별한 몇 사람에게 소공동체 책임을 맡도록 하였고, 몰루카제도를 떠나기 전 암본 섬에서 고아에 “인도에 새로 온 예수회원 몇 명을 몰루카제도로 보내라”는 편지를 썼다.
4) 일본 선교
(1) 일본 선교 준비기
1547년 7월 인도네시아에서 말라카로 간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児島) 출신 상인(혹은 사무라이) 야지로(彌次郞)를 만나며 그의 사도직 향방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야지로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던 중 1546년 야마카와(山川)항에 정박하던 포르투갈 무역선에 올라 선장 조르주 알바레스(Jorge Alvares)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였다. 하비에르 친구이던 알바레스는 야지로를 말라카로 도피시켜주면서 하비에르를 만날 것을 권유해 1547년 12월 마침내 야지로는 하비에르 신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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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라비에, 위의 책, 91쪽.
50) 河野純德 (역),『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東京: 平凡社, 1985, 書簡 59, 272-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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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는 야지로에게 일본인들의 가톨릭 개종 가능성에 대해 물었 다. 야지로는 일본인들이 당장 세례를 받지는 않겠지만 의문점이 풀리고 무엇보다 하비에르 신부의 행동을 살핀 후 반년이 지나지 않아 왕, 귀족, 상류계층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을 것이라고 답변하였다.50) 동시에 하비에르는 일본을 오가던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도 정보를 수집했 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하비에르 신부가 일본에서는 인도보다 훨씬 큰 선교 결실을 거둘 것이라고 하였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와의 만남, 일본에 관한 정보와 그의 선교 구상을 로마 예수회에 알리며 일본 개교를 구체화하였다. 특히 하층민 선교에 치중했던 인도에서의 선교와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를 구상하였다.
일본으로 떠나기에 앞서 하비에르 신부는 1548년 인도 고아로 귀환해 이후 1년 이상 머물며 이제 수십 명으로 늘어난 동료 예수회원들과 코모린 곶, 몰루카제도의 선교 사목활동을 조직화 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선교를 준비하였다. 하비에르 신부는 야지로에게서 일본어를 배우고, 야 지로는 포르투갈어를 학습하며 고아의 성 바오로 신학교에서 교리수업을 받았다. 1548년 5월 20일 성신강림축일에 야지로(본명: 생 푸아의 바오로Paul de la Sainte-Foy), 그의 동생(본명: 요한), 그리고 그의 수하(본명: 안토니오)가 고아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일본인 신자가 되었다.
1949년 1월 14일 하비에르 신부는 로욜라 총장에게 일본에서의 개교와 선교 계획과 희망을 개진한 편지를 보냈다.
“…일본(중국에 가까운 섬나라)에 관해 제가 얻은 많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전체적으로 이 교도이며, 유다인도 무어인도 없고, 단지 대단히 호기심이 많아 자연과 하느님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무척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혹은 (인도에서의 선교 현황에 관해) 너무 길게 설명된 다른 많은 이유들 때문에 저는 내적인 큰 만족을 느끼고 결국 이 나라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 예수회 형제들이 일생 동안에 얻을 결실은 바로 그 사람들 덕택으로 그곳에서 새로워 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도움을 주실 우리 주 그리스도께 큰 희망을 두고 우선 왕이 거주하는 곳에 갈 것이며, 이어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들을 찾아 가겠습니다. 저는 거기서 일본의 저서들을 연구해보고 또한 대학인을 만나보고 나서 이 모든 것에 관해 아주 긴 편지를 쓰겠습니다. 또한 반드시 파리 대학에도 편지를 쓰겠으며 이러한 중재물로 전 유럽의 대학들은 정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여행을 시도하는 가운데 체험한 모든 내적 위로를 어떻게 다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을지요.
그것은 죽음의 위험들, 즉 거센 폭풍우, 바람, 암초, 강도 등 도처에 수없이 큰 위험들 없이는 있 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의 심연에서 느끼는 모든 것들 때문에 저는 일본에 갈 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심각한 위험 속에 제가 처
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거룩한 신앙이 저쪽 먼 나라들에 널리 전파될 것이리라는 큰 희망을 우리 주 하느님께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51)
(2) 일본 선교(1549년 8월 15일~1551년 11월 15일)
1549년 4월 15일 하비에르는 예수회원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ès) 신부와 후안 페르 난데스(Juan Fernandez) 수사, 그리고 일본인 야지로와 그의 동생 요한, 수하 안토니오를대동 하고 일본을 향해 고아를 떠나, 말라카 기항(5월 31일~6월 24일) 후, 8월 15일 야지로의 고향 가고시마(鹿児島)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하비에르는 일본 땅을 디딘 첫 번째 가톨릭 사제, 규슈(九州) 남부 가고시마는 일본 최초의 그리스도교 전래지가 되었다.
1551년 11월 4일 일본을 떠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신앙의 씨앗을 뿌린 하비에르 신부의 일본선교 행적은 다음과 같다.
* 가고시마(鹿児島 1549년 8월 15일~1550년 8월)
하비에르 신부는 야지로의 집에 머물며 일본어와 일본 고유 풍습을 열심히 익혔다. 교리해설서 『공교요리(公敎要理)』를 써서 야지로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인들에게 읽어주고 인도에서 지참한 성화를 보여주며 전교해 1년 동안 1백~1백50여 명 신자를 얻었다.
그들 중 충실하고 학식이 깊으며 하비에르 신부의 교리해설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세례를 받은 무사 베르나르도를 눈여겨보며 그가 일본 교회의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예수회에 가입시키고 후에 로마로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1549년 9월 29일에는 다이묘(大名)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의 초빙을 받고 그에게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자신의 영내 선교를 묵인하던 다카히사가 그러나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불교 승려들의 반발과 설득으로 냉담해지자 하비에르는 가고시마 선교를 토레스 신부와 야지로에게 맡기고 자신은 페르난데스 수사, 신입 신자 베르나르도를 대동하고 덴노(天皇)가 있는 미야코(都, 현재 교토)를 향해 떠났다. 일본 사회가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사회로 지배계층 허가 없이는 선교가 불가능하고, 또한 다이묘 등 정치권력이 지원한다면 그 치하 일반 평민들 선교도 대단히 수월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하비에르는 미야코로 가서 직접 선교허가를 받기로 계획한 것이다.52)
* 히라도(平戸 1550년 9~10월) → 야마구치(山口 1550년 11~12월) → 미야코(1551년 1월 13~24일)
→ 히라도(1551년 3월) → 야마구치(1551년 4~9월) → 분고(豊後 1551년 9월~11월)미야코를 향하며 하비에르는 우선 나가사키의 국제무역항 히라도(平戸)를 거쳐 야마구치 동부 스오 국(周防國)에 도착해 다이묘(大名)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53)와 면담하였다. 평소의 남루한 행색으로 요시타카를 만난 하비에르는 당시 일본 보편종교 불교와 지배 계층의 도덕성에 대해 비판하는 등 예의를 잃어 요시타카는 경계하며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바닷길로 세토(瀬戸) 내해(内海) 동쪽을 따라 항해해 오사카와 맞닿은 항구도시 사카이(堺)를 경유, 1551년 1월 13일 미야코에 도착하였다. 그렇게 도착한 미야코는 센코구시대(戰國時代) 내란, 특히 1536년 테몽호케의 난(天文法華の乱)으로 경내 18만 가호의 절반 가까이가 불타고 파괴되어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비에르는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해 11일 동안 머물며 덴노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 면담을 청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즈음 하비에르 신부도 당시 덴노나 쇼군은 실질적 힘이 없다는 사실과 토착종교 불교 세력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미야코에서 물러나며 하비에르는 힘 있는 다이묘들 영지를 중심으로 선교한다는 새로운 선교 전략을 세웠다.
1551년 3월 히라도에 도착해 진상품을 준비해서 4월 하순 다시 스오의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를 찾았다. 두 번째 접견 때 하비에르 신부는 정식 의관을 갖추고 포르투갈 국왕과 고아 총독의 특명전권 대사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일본 덴노와 쇼군 면담을 위해 준비했던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과 고아 주교의 신임장(Cartas) 외에 자명종시계, 안경 2개, 화승총, 포르토(Porto) 포도주 한 통을 바쳤다.
하비에르의 선교전략은 주효해 요시타카는 마침내 포교를 허락하며 원하는 백성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허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 위에 당시 빈 절간 대도사(大道寺)를54) 주고 성당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하비에르는 당시를 1551년 12월 24일 말라카의 페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전하기에 미야코는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다시 야마구치 로 되돌아왔습니다. 가지고 온 인도 총독(가르시아 데 사)과 주교(죠안 데 아르부케르케)의 친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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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라비에, 앞의 책, 101~102쪽;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70,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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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친선의 징표로 지참한 선물을 야마구치의 영주에게 진상했습니다. 영주는 선물과 친서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영주는 나에게 답례로 많은 물건을 내놓으며 금과 은을 가득 하사하려고 했으나 우리들은 어떤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만일 영주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 한다면 영내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것을 허가하고 신자가 되고 싶은 자를 용인해주는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주는 큰 애정을 갖고 허가를 내려주었습니다. 영내에서 하느님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영주의 기쁨이며 신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는 신자가 되는 허가를 내린다고 영주 명의의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55)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의 선교허락과 지지를 받은 하비에르 신부는 여섯 달 동안 머물며 6백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불교에서 개종한 비파법사(琵琶法師) 라우렌시오는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겸손하고 신심 깊은 청년 마태오를 눈여겨보며 하비에르는 예수회 입회도 권유하였다.
스오에서 선교하는 동안 분고(豊後, 현재 규슈 오이타현大分縣)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56)은 하비에르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큰 관심을 표하며 분고에 입항한 포르투갈 선박 소식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 사안을 의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비에르는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수사를 스오에 불러 사목을 잇게 한 후 분고로 향했다. 오토모 소린은 비록 세례는 27년 후 받았으나 이때 하비에르 신부를 만나 처음 그리스도교를 접한 후 즉시 영내 선교활동을 허가하고 이후 계속 보호하였다.
일본 가고시마로 입국해 주로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서부지역 전교에 힘쓴 일본선교여정은 하비에르 신부에게 중국이란 나라의 위상과 의미를 새삼 깨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구심적 존재이며 역사와 문화의 표본으로 우러르는 대상이라는 것, 따라서 만약 중 국에 그리스도교가 수용, 공인된다면 일본은 물론 중국문화권에 속한 모든 나라들이 가톨릭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일본국 근처에는 지나(중국)라는 나라가 있고, 전에 썼던 것처럼 일본의 여러 종파는 지나에서 전해진 것입니다. 지나는 큰 나라이고 평화로우며 전쟁이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포르투갈 상인에 따르면 정의가 대단히 존중되며, 그리스도교 국가 어느 곳에도 없는 정의로운 나라라고 합니다. 일본이나 다른 지방에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지나인은 대단히 예민하고 재능이 풍부하고, 일본인 보다 훨씬 우수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57)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새로운 문명공간으로서의 중국 개교의 필요성을 절감한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인의 특성을 잘 파악한 선교방향 제시 후 중국대륙 전교를 위해 일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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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スト敎史, 東京: 吉川弘文館, 1990, 39쪽; 최영균, 앞의 논문.
53)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1507~1551): 오우치(大内)가(家) 제16대 당주로 야마구치의 스오(周防)・나가토(長門)・이와미(石見)・아키(安芸)・부젠(豊前)・지쿠젠(筑前)의 다이묘다. 요시타카 시대 오우치는 영토상 또한 문화면에서도 ‘오우치 문화’라 불리는 전성기였으나, 그의 문치(文治) 정치에 불만을 품은 가신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의 모반으로 1551년 9월 1일 요시타카는 자결하였다.
54) 당시 자리에 세워진 성당이 현재의 하비에르 기념성당이다.
55)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95, 529쪽.
56) 오토모 소린/오토모 요시시게(大友宗麟/大友義鎮, 1530~1587): 오토모씨의 제21대 당주. 스스로 세례를 받은 대표적 기리시탄 다이묘. 소린은 1551년 하비에르를 만나 그리스도교를 처음 접했으나 곧 영내 선교활동을 허가하고 나아가 보호하였다. 세례는 27년 후인 1578년 7월 예수회선교사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로부터 받고 (세례명: 돈 프란시스코Don Francisco), 포르투갈 왕국에 친서를 지닌 가신을 파견하였다. 예수회를 통해 소총 화약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포르투갈 대포‘불랑기포(佛狼機砲)’를 들여왔다.
57) 1552년 1월 29일 코친發, “유럽의 예수회원에게 보내는 편지”,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96, 543-544쪽; 최영균, 앞의 논문, 18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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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도로의 귀환 · 중국 개교의 첫 걸음
1551년 11월 15일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 마태오 등 일본인 예수회 지원자를 대동하고 일본 분고를 떠나 12월 27일 말라카 기항 후 1552년 1월 24일 인도 코친, 두 주일 후 고아에 도착하였다. 말라카에서는 「하비에르 신부가 인도와 그 너머의 나라들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는 1549년 10월 10일자 로욜라 예수회 총장이 보낸 편지를 2년이 지난 후 수령하였다. 그는 이 미 포르투갈령 인도 너머 동쪽 끝 나라들의 예수회 장상이 되어 있었다.
고아 도착 후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인 세례자 베르나르도와 마태오를 인도로 데려가 포르투갈을 거쳐 로마 예수회로 보내 사제로 양성한다는 계획대로 성 바오로 대학에 입학시켰다. 또한 선교지에 부적합한 예수회원 여섯 명을 퇴회시키고, 발타사 가고(Baltasar Gago) 신부를 일본으 로 파견하는 등 인사와 재정적 문제들을 상황이 허락하는 한 해결하였다.
그리고서 하비에르 신부는 중국 선교를 위해 교황대사 자격을 임명받고 1552년 4월 17일 고아에서 중국을 향해 출항, 5월 말 말라카, 9월 초 광동성(廣東省) 밖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하였다. 셋 뿐인 수행원 예수회 수사 알바로 페레이라(Alvaro Ferreira), 중국인 안토니오(Antonio), 인도 마라바르 출신 시종 크리스토퍼(Christopher)와 함께 하비에르는 섬에 올라 중국 입국을 시도하였다. 일행을 광동(廣東)으로 데려다줄 중국 상인을 수소문했으나 공식적 입항이 아니기에 아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은 명나라 초기 정화(鄭和)의 제7차 항해 이후 쇄국(封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1552년 10월 22일 말라카 페레즈(Perez)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하비에르 신부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쓰고 있다.
“상천은 광동에서 300리가 되는 거리에 있고 많은 상인들이 포르투갈인과 매매하기 위해 이곳에 다닙니다. 저는 그 상인들 가운데 혹시 한 사람이라도 저를 광동에 데려갈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여행은 두 가지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돈을 받은 뱃사공이 정부 관리인의 조사를 피하려고 우리를 멀리 떨어진 섬으로 데려가 버린다거나 혹은 그냥 바다 속에 우리를 처넣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광동에 도착하여 전부 관리인 앞에 출두하게 된다면, 그는 우리를 고문시키든가 감금시키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왕은 자기가 베풀어준 허가서가 없다면 외국인이 중국 영토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상천에 도착하여 우리는 작은 성당을 세웠고,58) 바로 거기에서 열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었을 때까지 저는 미사를 올렸습니다. 또한 두 주일간 아팠으나 지금은 하느님의 자비로 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고해성사와 환자 방문,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등의 많은 영적 활동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중국에 당도할 것을 절대적으로 결정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은 더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59)
그러던 11월 23일 열병이 하비에르 신부를 덮쳐 12월 3일 이른 아침 선종하였다. 중국 본토까 지 뱃길 14㎞를 남겨두고 46세로 생을 마감한 하비에르 신부는 그러나 그사이 로마의 예수회 장상 로욜라에게, 또한 포르투갈 국왕에게 많은 서간을 보내 중국 개교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선교는 31년 후인 1583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싹을 틔우며 하비에르 신부는 위대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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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당시 상천도에 머물던 몇몇 포르투갈인들이 초가지붕을 인 통나무 오두막집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변변찮은 작은 성당이었다. 라비에, 앞의 책,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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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신부의 시신은 끝까지 그를 지킨 안토니오에 의해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1553년 2월 17일 산타크루즈 호로 상천도를 떠나 말라카로 운송되었다. 놀랍게도 시신과 장기까지 전혀 손상되지 않고 깨끗한 생전 모습 그대로였기에 3월 22일 말라카 도착 후 그의 시신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성당 열린 관에 안치되었다. 그 후 4월 15일 인도로 향해 12월 11일 고아의 봄지저스 성당(Basílica do Bom Jesus)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3. 브뤼기에르 주교와 성 하비에르 선교 영성의 닮은꼴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발해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에서 선종하기까지 3년 넘게 위험하고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다가 건강을 잃고 43세에 선종하였다. 조선 임지에 부임하려 애쓰다가 기진맥진해 숨을 거둔 순직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똑같이 선교하다가 46세에 순직한 대선배가 하비에르 성인이다. 그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선교한 다음 중국에 복음을 전하러 가다가 광동 앞바다 상천도 해안 초막에서 1552년 12월 3일 외로이 숨을 거뒀다.
3백여 년 시차를 둔선교사들이었으나 이 두 순직 사제의 선교 영성은 참으로 닮아 있어 그 닮은꼴을 찾는다.
1) 선교 영성
(1) “제가 가겠습니다.” : 선교 영성의 상징
* 하비에르 성인 : 동아시아 선교의 밀알
성 하비에르는 교황 바오로 3세의 '공식인가'에 의해 1540년 9월 27일 정식 수도회로 탄생한 예수회의 ‘선교에 관해 교황에게 순명하는 첫 예수회원’이다. 인도 포르투갈령 식민지를 중심으로 본격 아시아 선교를 펼치기 위해 1539년 7월 8일 고아교구 설립이 인가되었고, 교황이 이 임무를 예수회에 수탁하자 1940년 3월 15일 하비에르 신부는 “예 있노라.”고 지체 없이 응답하고 다음날 선교지 인도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60)
* 브뤼기에르 주교 : 조선 대목구 설정의 주역
포교성성이 1827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타진했을 때 부정적 회답 후 1828년 아시 아지역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그간의 논의들을 설명하는 공동서한을 발송하며 의견을 구하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공동서한을 다각적으로 심도 있게 검토한 다음 1829년 5월 19일 파리 외방전교회본부 지도신부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편지를 쓰며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조선 선교 자원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교 영성을 상징하는 표징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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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라비에 위의 책, 114~115쪽.
60) 하비에르 선종 후 예수회 총장 로욜라가 그의 출발 당시 모습을 회고하며 남긴 기록. 앙드레 라비에, 앞의 책,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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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교를 각오한 선교 영성
* 하비에르 성인 :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의 모로(Moro) 섬은 살해된 사람들 머리를 잘라 수집하고 인육을 즐기 는 야만인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나 성 하비에르는 이 섬이 어떤 곳인가를 알면서도 순교를 각
오하고 가서 선교하였다. 1546년 5월 10일 자 편지에서 그는 순교를 각오한 선교 영성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잃을 모험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습
니다. 그리고 모든 죽음의 위험에 저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하느님께 저의 온 신뢰를 내맡기면서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구세주 말씀대로 살고자 죽음의 모든 위험 앞에 제 자신을 드러내 왔습니다.”61)
또한 일본 선교 결의를 다지며 1549년 1월 14일 코친에서 로욜라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죽음의 위험들을 통해 체험하는 ‘내적 위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여행을 시도하는 가운데 체험한 모든 내적 위로를 어떻게 다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을지 요. 그것은 죽음의 위험들, 즉 거센 폭풍우, 바람, 암초, 강도 등 도처에 수없이 큰 위험들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영혼의 심연에서 느끼는 모든 것들 때문에 저는 일본에 갈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심각한 위험 속에 제가 처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거룩한 신앙이 저쪽 먼 나라들에 널리 전파될 것이리라는 큰 희망을 우리 주 하느님께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62)
* 브뤼기에르 주교 :
주교는 1826년 2월 고국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 아시아 활동 거점 마카오 대표부를 향해 아프 리카 대륙을 돌아 7월 1일 자바섬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기항했을 때 카르카손 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이미 순교를 각오한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을 표명하였다.
“…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여러 번 있었지만, 제게 맡겨진 소임(시암 교구 사목)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선으로 가려고 제 소임을 버리는 것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포교성성에서 유럽 신부들에게 호소하듯이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호소한다면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63)
1832년 윤 6월 26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랑하는 자녀들이여”로 시작하며 최초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서신에도 이 같은 순교를 각오한 선교 영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매일 기도 중에 복되신 동정녀와 모든 천사들의 보호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구원의 해 1832년 윤 6월 26일 조선의 교황 대리 감목 바르톨로메오 주교 드림”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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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하비에르의 1546년 5월 10일자 편지. 라비에, 위의 책, 91쪽.
62) 라비에, 위의 책, 101~102쪽;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70,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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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혈 순교
정양모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번역본 해제에서 임지에 부임하려고 애쓰다가 기진 맥진해서 숨을 거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은 순직 또는 무혈 순교라 일컬으며, 이처럼 선교 하다가 순직한 대선배로 스페인 출신 예수회 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꼽았다.65) 이에 두
선교사 선교 영성의 닮은꼴로 무혈 순교를 기술한다.
* 하비에르 성인 :
인도-몰루카제도-일본 선교 후 고아로 돌아가 포르투갈령 인도 너머 동쪽 끝 나라들 예수회 장상으로서의 업무 처리를 마친 하비에르 신부는 새로운 선교지 중국을 향해 떠나 1552년 9월 광동성 상천도에 도착해 중국 입국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11월 23일 열병이 하비에르 신부를 덮쳐 12월 3일 이른 아침 상천도 해안 초막에서 선종하였다. 선교 목적지 중국 본토까지 뱃길 14㎞를 남겨두고 46세로 생을 마감한 무혈 순교인 것이다.
하비에르 신부의 시신은 끝까지 그를 지킨 안토니오에 의해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1553년 2월 상천도를 떠나 말라카로 운송되었다. 그 후 4월 15일 인도로 운구되어 12월 11일 고아의 봄 지저스 성당(Basílica do Bom Jesus)에 시신과 장기까지 전혀 손상되지 않고 깨끗한 생전 모습 그 대로 안치되어 오늘에 이른다.
* 브뤼기에르 주교 :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발해 3년 넘게 위험하고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다가 1835년 10월 20일 마가자에서 43세에 선종하였다. 가까이에서 모셨던 모방 신부의 기록처럼 “광활한 중국 대륙을 북상하면서 겪은 궁핍과 피로와 온갖 고통”으로 인한 무혈 순교다.
주교의 유해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인 1931년 마가자 현지에서 발굴되어 조선으로 옮겨졌 으며, 10월 15일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선교 영성에 기반한 선교 사목
성 하비에르와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한 및 보고서를 통해 소속 수도회인 예수회와 파리외방전 교회 그리고 교황청에 끊임없이 물심양면의 선교 지원과 선교 사제의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이 는 교회와 수도회 선교정책에 의거해 선교 사목을 실현하려는 선교 영성과 다름아니다.
(1) 선교지에 관한 상세 정보와 지식
* 하비에르 성인 :
1549년 8월 15일 일본 가고시마(鹿児島)에 입국한 하비에르 신부는 이후 1550년 8월까지 1년 여 간 야지로의 집에 머물며 일본어와 일본 고유 풍습을 열심히 익혔다. 이에 앞서 일본으로 떠 나기 전, 신부는 1548년 인도 고아에 1년 이상 머물며 일본 선교를 준비하였다. 이때도 야지로에게서 일본어를 배웠다.
하비에르 신부가 각 선교지 입국 전, 혹은 입국 후 로마 예수회 본원에 보낸 서신들을 보면 선 교지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대단히 상세하고 정확하며 전문적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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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서한집』, 제6신 (1826년 말~1827년 초, 바타비아), 83~84쪽.
64) 『서한집』, 제21신 (1832년 11월 18일, 마카오), 183~184쪽.
65) 『여행기』,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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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기에르 주교 :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마침내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교가 자신의 조선대목구장 임명을 알게 된 것은 10개월이 지난 후인 1832년 7월 25일 태국 선교사 뒤브와 신부의 서한을 통해서였다. 주교는 즉시 조선을 향해 페낭을 출발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 입국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파리 본부에 쓰던 1829년 5월 19일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5월 29일에 주교는 이미 마카오에 있는 중국통 프랑스 라자로회 라미오 신부에게 12항에 달하는 조선 입국 방법을 묻는 서신을 보내고 있다.66)
또한 조선 천주교회 역사와 현황에 대해서도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1832년 12월 14일에 프랑스 리옹 『전교후원회연보』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조선 천주교회 약사」를 동봉하며 연보에 게재를 부탁하고 있는데 조선 교회의 역사를 전사(前史)인 일본과의 관련부터, 자생적 설립, 그간 있었던 박해와 순교자들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고 정확하게 서술하였다.67)
(2) 현지인 사제 양성 계획
* 하비에르 성인 :
하비에르 신부는 인도 고아 도착 후 곧 성 바오로(Saint-Paul) 신학대학장이 되었는데, 이미 전 부터 토착민 성직자 양성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는 대학과정에서 문법, 수사학, 고전 강의를, 초급 과정에서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간단한 간호를 몸소 가르쳤다.
일본 첫 선교지 가고시마에서 하비에르 신부의 교리해설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세례를 받은 무사 베르나르도는 학식이 깊으며 충실해서 하비에르는 그가 일본 교회의 초석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예수회에 가입시키고 후에 로마로 보내 신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또한 스오(周防)국에서는 겸손하고 신심 깊은 청년 마태오를 눈여겨보며 예수회 입회를 권유해 1552년 2월 고아 귀환 후 이 두 일본인 세례자 베르나르도와 마태오를 성 바오로 대학에 입학시켰다. 이후 포르투갈을 거쳐 로마 예수회로 보내 사제로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 브뤼기에르 주교 :
주교의 첫 임지 방콕에서 맡은 첫 번째 임무가 방콕의 시암 대목구 신학교 운영이었다. 처음 신학생 3명으로 시작했지만 22개월 뒤인 1829년 4월 1일에는 22명으로 늘었다. 또한 소신학교가 따로 없었기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신학교에 라틴어, 철학, 신학 반을 개설해 수업을 진행하였다.
초대 조선교구장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인 사제 양성은 간절한 염원이었다. 선교사 지원 전 프랑스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주교는 조선 교구 자립을 위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833년 4월 18일 복건성 복주에서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올린 청원문 제3항에는 이런 뜻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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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한집』, 제11신 (1829년 5월 29일, 방콕. 출처: 로마 라자로회 고문서고), 137~141쪽. 상세 내용은 본고 1장 2절 참조.
67) 『서한집』, 제24신 (1832년 12월 14일, 마카오), 「조선 천주교회 약사」 197~229쪽. 상세 내용은 본고 1장 3절 참조.
68) 『서한집』, 제26신 (1833년 4월 18일, 복건성 복주),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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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해나 다른 어떤 긴급한 이유가 있을 때, 조선 국경 밖에 신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는 저나 저의 동료 사제들이 모든 교회 직무와 모든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물론 다른 이들의 법적인 권리는 보장될 것입니다.”68)
1835년 8월 7일 서만자에서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선 국경 인근 요동에 신학교 건립을 주청하였다.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믿을 만한 본토인 성직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즉시 조선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모든 장소 가운데 요동이 더 적절하고 안전하게 보입니다. … 조선인 학생들을 마카오나 페낭에 보낸다면, 비용도 엄청날뿐더러 큰 위험에 직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말을 전혀 모르는 중국으로 들어오면 밀고의 위험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그 섬이 너무 뜨겁고 기후도 고르지 않아, 견디기 어려워 하다가 많은 중국인 학생들이 생을 마감하거나 겨우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건강만 지킨 슬픈 경험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69)
브뤼기에르 주교는 페낭신학교 교수 경험이 있는 중국 사천 대목구 선교사 앵베르(Laurent Imbert, 范世亨, 1796~1839)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선교사 중 누구보다 열정적 선교 의지를 가졌던 모방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영입하였다.
그 결과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후 조선에 입국한 첫 서양인 사제 모방 신부는 주교의 뜻을 받들어 곧바로 조선인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선발해 마카오로 유학 보내 사제로 양성하였다.
(3) 선교지 후임 사제의 지정 내지 양성
* 하비에르 성인 :
일본 스오 국 선교 중 분고의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초청을 받자 하비에르는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수사를 스오에 불러 사목을 잇게 한 후 분고로 향하였다.
중국 개교를 위해 일본을 떠나 1552년 2월 고아 도착 후 하비에르 신부는 곧 발타사 가고 (Baltasar Gago) 신부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후임 사제 지정이 어려울 경우에는 현지인 교리교사를 양성해 배속시켰다. 1542년 10월부터 1544년 12월까지 2년2개월 동안 하비에르 신부는 인도 코모린 곶 해안가 160㎞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마을에 40여 개 성당을 세우고 현지인을 교리교사로 양성해 임명하였다. 혹은 섬의 소수 신자 가운데 선별한 몇 사람에게 소공동체 책임을 맡도록 하여 사제의 공백을 메우게 하였다.
* 브뤼기에르 주교 :
서만자에서 자신이 사목할 교우들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갈 준비를 마무리하며 브뤼기에르 주
교는 조선 선교사를 희망하는 사천 대목구 소속 앵베르 신부를 교구장 서리나 자신의 부주교로 임명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835년 10월 2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와 신부에게 보낸 서 한에서 이 뜻을 명료히 밝히고 있다.
“남경에서 온 한 심부름꾼에 따르면 앵베르 신부가 조선 선교사로 뽑힌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정말 확실한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 늘 기분이 좋아집니다. 진정 그런
선교사가 저희와 함께 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면서 요동 지역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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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서한집』, 제47신 (1835년 8월 7일, 서만자),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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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 저희에게 그를 교구장 서리나 부주교로 삼을 수 있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 지역의 교우들을 돌보고 심기일전 시킬 것이며, 달단인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교지에 마침내 신학교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만이 홀로 조선 신학교를 괜찮은 규모로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 게다가 저는 조선 선교지를 모든 점에서 사천 선교지 수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이를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앵베르 신부뿐입니다.”70)
이어 10월 6일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에게 보내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서한에서도 이를 청원하고 있다.
“교황 성하께서 제 요청에 신뢰를 주시는 한, 앵베르 신부가 온다는 것은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가 오면 요동에 배치되어 교우들을 보살필 것이고, 타타르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일할 것이며 신학교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선교 지역의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보좌 주교로 임명하고 주교품을 받는 게 바람직하기까지 합니다.”71)
(4) 멀리까지 기획하는 선교
* 하비에르 성인 :
하비에르 신부는 본래 인도 포르투갈령 식민지 선교사로 왔으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 에서 선교하고, 일본에 개교하였다. 중국과 일본이 같은 중화문명권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에 밀접한 상호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영역을 넓혀 이 지역 개교를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 그는 1548년 1월 20일 코친에서 로욜라 총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들 선교지를 위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교도의 마을을 가기 위해, 성덕이 뛰어난 예수회원을 보내주십시오. 그 예수회원은 몰루카 제도라든지, 지나(중국)든지, 아니면 일본이든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할
필요가 있는 어디든지(…). 지나나 일본에 대해 또 그 외의 사람들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이 편지 안에 넣어 보내기 때문에 이것을 읽는다면 어느 정도의 사람이 필요할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72)
* 브뤼기에르 주교 :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 1829년 5월 19일자 서신에서 브뤼기
에르 주교는 요동지방과 일본 그리고 홋카이도까지의 선교 가능성을 개진하고 있다.
“… 북경 교회가 열심하고 불쌍한 조선 신입 교우들을 버리지 않고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자, 교황님께서는 우리 회에 그들의 어머니와 의지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시니, 그들의 운명은 말하자면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포교성성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저 교회가 살 것이고, 어쩌면 거기서부터 타타르의 넓은 지역에 신앙이 번져 나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조선이 일본과 이웃해 있고, 이 두 나라 사이에 행해지는 교류라든지 풍속과 성격이 같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조선 교우들이 불운한 일본 사람들과 홋카이도 기타 지방 사람들의 의지가 되고 새로운 사도가 될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73)
특히 요동은 중국 대륙을 종단한 선교사가 조선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이었기 때문에 북경교구에서 분리해 조선대목구장 관리 아래 두도록 요청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청원은 절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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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서한집』, 제51신 (1835년 10월 2일, 서만자), 352쪽.
71) 『서한집』, 제52신 (1835년 10월 6일, 서만자), 353~358쪽.
72)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60, 281-282쪽; 최영균, 앞의 논문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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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동지방의 재치권을 다시금 열심히 청합니다. … 저는 중국어로 봉천부(奉天府, 지금의
심양)라고 하는 곳이 그에 속한 모든 주현과 함께 저희에게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74)
1835년 10월 1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이 서신에 이어 이튿날 10월 2일에는 파리외 방전교회 총장 랑글르와 신부에게도 같은 청원 편지를 보내고 있다.
“요동의 봉천부라고 부르는 도시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주십사고 요구하십시오. 조선에 이웃해 있 는 이 지방은 모든 부속 지역과 함께 저희 사정에 꼭 맞을 뿐더러 저희 계획의 온전한 성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베이징 주교가 공석으로 있으니 이런 요구를 할 절호의 상황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75)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청원은 이미 1835년 7월 27일 서만자에서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76)과 8월 7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77)에 요동지역을 조선 대리감목의 재치권에 맡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요 근거를 들어 상세히 설명하며 간곡히 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위에 1835년 10월 5일로 끝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마지막 당부도 “요동 지방 일부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넘기는 결정을 서둘러 내리도록 교황 성하께 촉구해 주십시오.”이다.78) 결국 이 같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멀리까지를 헤아리는 혜안과 노력으로 파리외방전교회가
1838년 신설된 만주 요동교구를 맡음으로써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5) 외교인에게 베푸는 선교
* 하비에르 성인 :
인도 선교를 위해 1540년 6월 말 리스본에 도착한 하비에르 신부는 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기다리며 이듬해 1541년 봄 4월 7일 리스본을 떠날 때까지 사회적 신분이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만민을 위해 설교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영신수련을 가르쳤다. 또한 이단죄목으로 종교재판을 받은 수감자들의 회두를 맡았는데, 감옥에서 하비에르와의 영적 대화를 통해 회심한 23명이 사형을 면하였다.
1542년 10월부터 1544년 12월까지 2년2개월 동안 하비에르 신부는 코모린 곶 해안가 160㎞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마을에 40여 개 성당을 세웠다. 코모린 곶 서쪽 연안 트라방코르 지역에서는 1544년 11월에서 12월 한 달 동안 무려 1만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1549년 8월 15일부터 1년 동안 하비에르 신부는 가고시마 야지로의 집에 머물며 교리해설서
『공교요리(公敎要理)』를 써서 야지로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인들에게 읽어주고 인도에서
지참한 성화를 보여주며 전교해 1년 동안 1백~1백50여 명 신자를 얻었다.
1552년 중국 상천도에 도착해서는 작은 성당을 세우고 열병으로 앓아누웠을 때에도 미사를 드 렸다. 그 위에 고해성사와 환자 방문,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 등 외교인을 위해 많은 영적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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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한집』, 제10신 (1829년 5월 19일, 방콕), 135~136쪽. 상세 내용은 본고 1장 2절 참조.
74) 『서한집』, 제50신 (1835년 10월 1일, 서만자), 346쪽.
75) 『서한집』, 제51신 (1835년 10월 2일, 서만자), 351쪽.
76) 『서한집』, 제45신 (1835년 7월 27일, 서만자), 314쪽.
77) 『서한집』, 제47신 (1835년 8월 7일, 서만자), 323~338쪽.
78) 『여행기』,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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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기에르 주교 :
마카오 대표부의 바루델(J. Baroudel) 신부에게 보낸 1828년 1월 29일자 서한에 보면 브뤼기에 르 신부는 방콕 도착 이래 죽을 위험에 처한 외교인 자녀들 1,6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6) 선교를 위한 기록 자료 남기기
하비에르 성인과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의 자취를 저술, 서한, 보고서 등 여러 형태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당장의 선교용도의 재료이거나, 후임 선교사를 위한 정보제공 목적이었을 것이다.
* 하비에르 성인 :
①「Doctirna Christina」(그리스도교 교리); 1542년 고아에서 저술한 포르투갈어 간략 가톨릭 교
리서. 기도와 신경, 계명을 설명. 곧 타밀어와 말레이어로 번역되고 훗날 일본어로도 번역.
②「타밀어 라틴어 기도문」과 「타밀어 믿을 교리 요점」; 1542년 인도 코모린 곶에서 발간한 「Doctirna Christina」 번역서. 기도문은 성호경, 삼위일체 교리, 신경, 십계명, 주님의 기도, 성모송, 성모찬송가, 참회기도 순이었다.
③「Instructio pro Catechistis Iesu」(예수회 교리교사들을 위한 교육); 1545년 말라카에서 간행
된 라틴어 서적.
④「Dichiarazione del Simbolo della Fede」(신앙의 신조 해설); 1546년 몰루카제도 테 르나트 섬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총괄적으로 다룬 포르투갈어 저서. 12장으로 구성해 각 장마다 사도 신경 구절 하나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 구절을 신앙인의 삶에 적용한 일종의 신심 개요서.
⑤「기도와 영혼 구제의 자세」, 「이교도 개종을 위한 기도문」; 1548년 7~8월 인도 고아에서 저술.
⑥「공교요리(公敎要理)」; 1549. 8~1550. 8월 사이 가고시마에서 저술한 교리해설서. 야지로와 함께 일본어로 번역.
* 브뤼기에르 주교 :
①『여행기』; 1832년 8월 4일 페낭에서 싱가포르로 출항한 때부터 서만자에서 마가자로 떠날 채비를 하던 1835년 10월 5일까지 손수 일기체로 적은 선교 여정 체험담.
②『서한집』; 1825년 9월 8일부터 1835년 10월 6일 사이에 쓴 편지 모음.
이상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하비에르 성인의 선교 영성을 살피며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은” 두 개 밀알은 진실로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짚을 것 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성 하비에르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상세히 알며 그를 닮기 위해 노력 했다는 점이다.
“…(전략)…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교회의 관심사와 관련된 일들에 너무 신중하다 보면 심약함이 많아질 우려가 있습니다. 언제나 뱀의 교활함과 비둘기의 단순함을 겸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화염으로 타죽을 지경에 놓인 것을 발견한 아버지라면 아들을 구하려다가 자기가 처하게 될 위험들을 이모저모 따져보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겠습니까? 만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께서 포르투갈 사람들의 지나치게 소심한 조언들에 귀를 기울이셨다면 결단코 일본에 들어가지 못하셨을 것이며 아마도 교회의 역사 기록 속에서 한때 유명했던 그 섬나라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 그대로였을 것입니다.”79)
또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장상들에게 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그 중요한 1829년 5월 19일 서한에도 하비에르 성인을 소환해 설득하려 하고있다.
“4.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여기에 넘을 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어, 그 라에 뚫고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것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바다를 통해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은, 서양인이 조선과 조금도 무역을 하지 않기 때문인지, 조선 연안으로 무역을 하러 가는 중국인들의 성실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지, 실천에 옮길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 저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이런 생각 때문에 중국 해적선을 타지 않았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80)
“주님의 이 넓은 포도밭에 일하러 오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노예가 되고 싶다.”고 성 하비에르 성인가 1542년 9월 20일 로마 예수회 형제들에게 쓴 편지에서의 고백처럼, 두 밀알은 스스로의 선교 소명을 극진한 선교 영성으로 완수한 참 선교사제라 하겠다.
맺음말
미지의 땅 조선에 선교의 등불을 밝혔던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는 오로지 조선을 향한 선교 의지로 점철되고 선교 영성으로 가득 차 있다.
긴 세월에 걸친 조선 신자들의 절절한 사제 영입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박해 때문에 피로 얼룩진 조선에 들어와 선교하려 나서는 사제가 없었을 때, “제가 가겠습니다.” 하며 조선 선교를 자원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신앙의 참 증거자이다. 또한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면서 조선 여정의 고난과 장애를 소명으로 여기며 오직 그리스도께 의지해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극복했던 주교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무혈 순교자이기 도하다.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 집과 여행기를 번역한 정양모 신부는 순교도 힘들지만 때로는 순직인 무혈 순교가 더 힘들며, 순교도 장하지만 때로는 순직이 더더욱 장하기도 한 법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에 비견해 “사도 바오로도 병약한 몸으로 지중해 주변에서 20여 년간(45년~64년경) 선교하며 어지간히 고생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브뤼기에르 주교와 애제자 왕 요셉이 겪은 고난보다는 덜했던 것같다”81)고 피력하였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이 같은 뜨거운 선교 열정과 희생의 선교 영성이 밀알이 되어 지금의 한국 가톨릭교회를 이루었으니 우리는 교회의 가장 큰 은인인 주교를 현양하며 그 희생 정신을 되새 기고 체현해야 하겠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복시성을 이루려는 참 뜻일 것이다.브뤼기에르 주교가 본받아 선교와 영성을 실현한 대선배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619년 시복, 이어 1622년 3월 12일 선종 70년 만에 시성되었다.
비록 300여년 시차를 두었음에도 참으로 닮은꼴 선교 사제 하비에르 성인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과 선교 행적과 선교 영성을 짚어보며 우리의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시성을 소망하는 원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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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AMEP: Vol. 888, f. 147; 조현범, 앞의 발표문, 39쪽 재인용.
80) 『서한집』, 제10신 (1829년 5월 19일, 방콕), 130~132쪽.
81) 『여행기』,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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