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게 등불 하나
신근식
자식을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갓난아이의 작은 손가락 하나, 잠든 얼굴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으로도 세상 전부를 얻은 듯했다. 아이가 처음 웃었을 때는 그 웃음 하나가 집 안의 햇살이었고, 처음 걸음마를 떼었을 때는 마치 온 세상이 함께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때의 부모에게 자식은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었다. 미래였고 희망이었으며, 살아온 세월의 의미였다.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을 아이는 걸어가기를 바랐다. 나보다 더 넓은 세상 보고, 나보다 더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랑에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사랑이 간섭이 되고, 기대가 지나치면 사랑이 부담이 된다. 부모는 자식 위해 무엇인가 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해준 만큼 자식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본다. 우리 가족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난 나는,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할머니께 들으며 자랐다. 부모는 맏이에 대한 정성이 유독 애틋했고 기대 또한 컸다. ‘맏이가 잘되어야 동생들도 덩달아 잘된다’는 생각에 깊이 박혀 있던 까닭이다. 그러나 공부도, 행동도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그때부터 아버지의 나무람이 시작되었다. 왠지 아버지가 두려웠다. 칭찬이나 격려 대신 꾸중이 먼저 돌아왔고, 당신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그 묵직한 꾸중 뒤에는 자식이 늘 불안하고 걱정스러워, 그저 잘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한 아버지의 타들어 가는 마음이 숨어 있었음을.
젊은 날의 나 역시 내 부모가 그랬듯,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공부도 잘하고, 좋은 직장도 얻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랐다. 돌아보면 그것이 모두 자식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가 받으며 아파했던 그 기대의 무게를 자식에게 그대로 얹어두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부모인 나의 욕심도 적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부모라면 한 번쯤 마음속으로 품어보았을 말이다. 그러나 그 말에는 사랑과 함께 서운함도 들어 있다. 내가 베푼 만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희생한 만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식이 나의 기대와 다르게 살아갈 때면 섭섭했고, 내가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들었던 것처럼 내 자식에게도 격려보다 꾸중을 먼저 건네고 말았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자식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잘했을 때 “잘했다”고 말해주고, 힘들어할 때 “괜찮다”고 안아주며, 실패했을 때 “다시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 그 단순한 말을 부모는 왜 그렇게 아끼며 살았을까. 자식에게 필요한 칭찬은 반드시 큰 성취를 두고 하는 말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수록, 불안한 마음에 자꾸 가르치려만 한다. 하지만 자식이 성장할수록 부모의 말은 점점 작아져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손을 잡아주어야 하지만, 자라면 손을 놓아주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하면 등대가 떠오른다. 등대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대신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 항구로 가라고 명령하지도 않으며, 배의 키를 잡지도 않는다. 다만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빛을 보낸다. 부모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대신 결정해 줄 수도 없다. 실패하지 않게 해줄 수도 없다. 다만 자식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돌아볼 수 있도록 한 줄기 빛을 남겨주는 것.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디지털 문화가 발달하여 가족 대화방을 만든다. 가족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방을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한다. 그러나 대화방에 있어도 그 대화 속에 선뜻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 부모와 자식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순간이다. 부모는 안부를 묻고 싶어 몇 마디 건네지만, 자식에게는 바쁜 일상 속 하나의 알림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답이 늦거나 짧은 대답만 돌아오면 ‘내가 귀찮은 존재인가’ 싶어 섭섭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자식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가족 대화방에 답이 늦어도, 전화가 뜸해도, 부모의 안부를 묻는 일이 줄어들어도 서운한 마음을 조금 내려놓는다. 자식에게도 자기만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품을 떠나 자기 삶의 중심을 세워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조금 덜 찾는 것은, 어쩌면 자식이 잘 자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자식에게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인가 보다, 내가 어떤 부모로 살아왔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된다. 과거 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자식에게 정직하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정직했는지, 남을 배려하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생각해 본다. 자식은 부모의 말보다 부모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부모가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지를 자식은 말없이 보며 자란다. 그래서 부모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은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다.
밤이 깊어지면 등대의 불빛은 더 선명해진다. 배는 그 빛을 향해 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 빛을 등지고 더 먼 바다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등대는 배를 붙잡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빛을 보낼 뿐이다. 부모도 그래야 할 것이다. 자식의 앞길을 대신 걸어주지 않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 그늘을 만들지도 않으며, 너무 멀리 물러나 외면하지도 않는 것. 필요할 때 가만히 손을 내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 그리고 자식이 자신의 하늘을 찾아 멀리 날아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지켜보는 것.
지금 자식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늦고 넘어져도 네가 선택한 길을 당당히 걸어가라. 네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가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네가 어디에 있든,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와 쉴 곳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 말 한마디가 자식의 긴 인생에 작은 등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모의 사랑은 결국 ‘지켜보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붙잡고 있을 때보다 놓아주었을 때, 가르칠 때보다 믿어줄 때, 말할 때보다 침묵할 때 더 깊어지는 사랑. 자식에게 남겨줄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완벽한 부모의 기억이 아닐 것이다. “나는 사랑받았고, 믿음을 받았으며, 내 삶을 당당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다.” 자식의 마음에 그런 기억 하나를 깊이 남길 수 있다면, 부모로서의 삶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어둠이 깊을수록 등대의 불빛은 멀리 간다. 부모의 마음도 그랫으면 좋겠다. 자식의 앞길을 대신 밝혀주는 과한 빛이 아니라, 자식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멀리서 오래 비추는 빛.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며, 가장 따뜻한 등불일 것이다.
(20260829)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한비수필학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