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5일(수) 욥기 27:1-12 찬송 423장
1.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11.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개역 개정)
빌닷의 3차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을 끝으로 욥과 세 친구간의
개별적인 논쟁이 기록된 4-26장을 마무리짓는 앞장에 이어
27장부터는 세 친구들의 변론 전체에 대한 욥의 결론적인 답변이 소개된다.
즉 본장에서부터 31장까지는 욥이 세 친구와의 변론을 끝내면서
자신의 주장과 심정을 총괄적으로 보여 주는 독백 부분으로서
특히 점진적으로 성숙되어가는 욥의 신앙 성숙의 과정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 중에서 오늘 말씀은 자신의 의에 대해 진술하는 욥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는 자신을 정죄하는 세 친구들을 향해 자신의 무죄함을 증거하며
항변했던 이전의 답변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이전에 자신의 무죄함을 증거하던 욥은 다분히 자기 의(self-rightousness)에
대한 고집과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부당함에 대한 불평섞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신앙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6:24-30, 10:1-22)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단순히 자기 의를 고집하며 고난의 부당함을
불평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의와 순전함을 지키며
인내하겠다는 신앙적 의지를 표출시키고 있다.
즉 여기에서 욥은 먼저 결코 자신의 의와 순전함을 놓지 않겠다는
그의 신앙적 의지를 맹세로써 확고히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1-6절)
악인들에 대한 강력한 저주를 통해 불의한 적대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해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강한 확신을 표출시킨다.(7-12절)
그리고 이러한 적대자들에 대한 저주를 통해
자신의 무죄함과 경건함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한편 이렇듯 의를 지키고 불의를 미워하는 욥의 신앙적 의지는
여전히 범죄의 유혹이 넘치고 불의하고 모순된 상황이 팽배한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 역시 소유해야 할 바이다.
즉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불의한 핍박과
어려움과 유혹이 닥칠지라도 끝내 하나님의 의를 지키며
불의에 대한 철저한 경계심을 가지고 신앙을 온전히 지켜 나가야 한다.
또한 불의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의해 겪게 될
종국적 비참함에 대한 확신 역시 현세의 불의한 현실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성도들이 기억할 바이다.
즉 선을 행하나 그 결실이 없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들이
형통해지는 듯한 불의함으로 인해 실망과 좌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공의 실현에 대한 참된 소망과 더불어
이는 결국 악을 이기는 원동력이 된다는
담대함을 갖는 성숙한 신앙의 용장(勇將)이 되어야 한다.
7절)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욥이 말하는 ‘원수’란 불특정 대상으로서의 악인이 아니라
그를 악하다고 비난하는 그의 친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자신이 고난 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친구들에 대하여 욥은 서운함과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형식을 빌어 친구들을 향해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욥은 친구들의 일방적인 비난과 모함, 정죄에도 불구하고 잘 참아왔다.
과연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거듭된 논쟁 과정에서
극심한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 고통을 당한 그는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마침내 친구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놓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친구들을 향해 저주하는 욥의 태도는
그가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비난과 모함을 생각한다면
과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합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잘 참아왔던 것처럼 끝까지 참으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해야 옳았다.
욥의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이 ‘그래도 인내해야 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상투적이고 욥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그의 친구들이 범했던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욥이 친구들을 향해 저주한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욥의 태도의 잘잘못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지나친 논쟁과 변론은
어리석은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은 거듭하여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논쟁을 통하여 그들이 얻은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
고난 당하는 욥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이러한 논쟁이 지닌 의의라면
인간은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 전에
절대적으로 순복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는 것뿐이다.
사실 욥기의 저자가 욥과 친구들의 지루한 논쟁을
본서의 핵심 내용으로 길게 기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교훈을 독자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비록 우리에게는 유익한 교훈이 된다 해도
논쟁의 당사자들인 욥과 친구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의 지나친 논쟁은 오히려 그들의 감정만 상하게 하고 대립하게 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절친하였던 그들 사이에 저주의 말이 오가게 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듯이 지나친 논쟁과 변론은
유익보다는 해를 불러오는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나친 논쟁과 변론을 피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딤후2:23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권면이 시사하는 것처럼 사람의 논쟁과 변론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주제라 할지라도 결국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
물론 서로 다른 생각들을 대화를 통해 나누고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여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필요하다
문제는 대화가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쪽으로 흘러가 버릴 때이다.
이러한 경우 대화는 논쟁이 되고 결국 아무런 결론이 없는 무익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경우에는 더 이상의 대화를 중단하는 것이 옳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지나친 논쟁을 삼가야 한다.
그것이 어리석음을 피하는 일이다.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익한 논쟁과 변론을 그쳐야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논쟁하고
다투기를 즐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온유하며 관용함으로 지체들을 품어주고
주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지키는 일이며
우리가 모든 지체들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딛3:9)